두뇌와 사고
괴델, 에셔, 바흐 : Douglas Hofstadter 저서, 박여성 옮김, 까치, 1999 (원서 : Godel, Escher, Bach : an Ethernal Golden Braid, Harper-Collins Pub, 1979), Page 436~472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고 했으며, 사고라는 주제에 대한 기괴한 변형들을 생각한 것은 비로소 컴퓨터가 출현한 다음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램들의 “사고행위” 는 마치 인간의 전진동작처럼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나선형 용수철 같이 행동하도록 만들어졌다. 손으로 짠 사고형식들 ? 또는 사고형식에 근접 ? 이기는 하지만 낯선 그 프로그램들은 인간적인 사고의 고유성, 약점과 강점, 변덕 및 변동 등에 대한 무엇인가를 갑자기 깨닫게 해주었다. 그 결과 우리는 지난 20 년 동안 사고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한편 두뇌 과학자들은 두뇌의 크고 작은 하드웨어들에 대한 사실들을 알아내었다. 아직까지는 그 접근이 두뇌가 개념을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대해서 그리 많은 규명을 할 수는 없었지만, 사고의 조작에 토대가 되는 생물학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일정한 개념을 제공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두 장에서 살아 있는 동물 두뇌의 실험으로부터 배운 사실들, 컴퓨터 지능을 가지는 시도들로부터 얻어진 몇몇 통찰 그리고 인지심리학자들이 행한 인간의 사고과정의 연구를 통한 사실들을 하나의 공통 분모로 통합하고자 한다. 그 단계가 바로 “전주곡” 과 “개미 푸가” 에서 이미 설정되었다. 이제 이 생각을 좀 깊이 다루어보고자 한다.
사고는 현실을 두뇌의 하드웨어로 표상한다는 것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앞의 장들에서는, 우리는 그 상징체계를 통하여 수학적 현실의 영역들을 표상하는 형식체계들을 만들어보았다. 그러면 그런 형식체계를 두뇌가 관념들을 조작하는 방식에 대한 모델로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가?우리는 pq ? 체계와 다른 복잡한 체계들에서, - 좀 한정된 뜻으로 말하는 ? 의미가 활자형 기호들을 수와 연산 및 관계들로 사상하고, 활자형 기호의 연쇄체를 명제로 사상하는 것 사이의 동형관계로부터 귀결되는 방식을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두뇌는 어떤 활자형 기호도 가지지는 않지만, 그것보다 더 나은 무엇을 가진다 : 즉 정보를 저장하고 운송하며 다른 능동적인 요소들로부터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능동적인 요소들을 가진다. 말하자면 우리는 수동적인 활자형 기호 대신에, 능동적인 기호를 가지는 것이다. 종이 위에 쓰인 기호들은 정태적인 실체이며 그 규칙들이 우리의 머리 안에서 존재하는 반면에, 두뇌에서는 규칙들이 기호들 자체와 뒤섞여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찰한 모든 형식체계들의 엄격한 속성으로부터 기호들과 현실의 사물들 사이의 동형관계가 마치 꼭두각시 인형과 그것을 조종하는 손 사이에 매달려 있는 끈과 같이, 경직된 곧이 곧대로의 복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TNT 에서는 “50” 이라는 개념이 여러 가지 다른 기호로 표현될 수 있다 : 예를 들면,
((SSSSSSSOㆍSSSSSSSO) + (SOㆍSO))
((SSSSSOㆍSSSSSO) + (SSSSSOㆍSSSSSO))
이 두 연쇄체가 동일한 수를 나타낸다는 사실이 처음부터 명확하지는 않다. 우리는 각 표현을 독자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 그러면 정리 위의 어느 일정한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 “이하 ? 이게 바로 그 수로군!”정신 속에서 우리는 한 인간에 대하여 상이하게 묘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폴란드에 있는 나의 친구에게 얼마 전에 보낸 그 책을 쓴 사람.
오늘 저녁 이 카페에서 나와 내 친구에게 말을 걸었던 그 낯선 사람.
이 두 묘사가 동일한 사람을 설명한다는 사실이 처음부터 명확하지는 않다. 우리는 정신 속에서 별 연관성 없이 이 두 방법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날 저녁 어느 때인가 한 번은 그 둘이 동일한 사람임을 알게 해주는 대화 주제를 보게 될 것이다. “아하 ? 자네가 바로 그 사람이군!”한 사람에 대한 모든 묘사가 다 이름을 저장하는 그 사람에 대한 핵심 기호에 연관될 필요는 없다. 묘사들은 자체 내에서 생성되어 조작될 수 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묘사함으로써 그런 사람을 창출할 수도 있다. 이 두 개의 묘사들이 하나의 동일한 실체를 표상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 두 개의 묘사를 서로 융합시킬 수도 있다. 그 둘이 두 개의 사물을 표상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둘로 쪼갤 수도 있다. 이 “묘사의 연산” 이 바로 모든 사고의 핵심이다. 그것은 내포적이라고 불리지 외연적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즉 그것은 묘사들이 기존의 특정한 대상에 근거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다” 는 것을 의미한다. 사고의 내포성은 사고의 유연성과 관계 있다. 그 유연성 덕분에 우리는 가상세계를 상상하거나 다양한 묘사들을 융합하고 하나의 묘사를 여러 부분으로 분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차를 빌려간 여자 친구가 그 차를 타고 가다가 비에 젖은 산악도로에서 미끄러져서 덤불에 충돌한 다음 추락해서 거의 죽을 뻔했다고 전화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그녀가 더 자세한 내용을 말할수록 눈앞에 일련의 생생한 그림들을 떠올릴 것이고, 결국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의 눈으로” 볼 것이다. 그러자 그녀가 당신에게 이 모든 것이 만우절 거짓말이었고 자동차도 완전히 정상이라고 말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더라도 앞에서 말한 이야기와 그때 떠오른 그림들은 전혀 생생함을 잃지 않으며 매우 오래 기억될 것이다. 나중에 언젠가 당신은 ?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경험했을 때 해소될 첫인상의 강렬함 때문에 ? 심지어 당신의 여자 친구를 형편없는 운전기사로 기억할 것이다. 공상과 사실은 우리의 정신 속에서 매우 밀접하게 교차된다. 따라서 결코 실제의 사건이나 사물에 연루될 필요가 없는 복잡한 묘사의 생산과 조작을 바로 사고가 야기하는 것이다. 사고에서는 바로 이 세계에 대한 유연하고도 내포적인 표상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면 두뇌와 같은 생리적 체계가 그런 체계를 어떻게 지탱할 수 있을까?

그림 65 뉴런 [출전 : D. 우드리지, 「두뇌의 기전 (The machinery of the Brain)」, New York, McGraw-Hill, 1963 년, 6 쪽]
두뇌 안의 가장 중요한 세포들은 뉴런 (그림 65) 이라고 불리는 약 1,000 억 개에 이르는 신경세포들이다 (놀랍게도 신경교 세포 [glial cell] 의 수는 그 열 배나 되지만 뉴런에 비해서 덜 중요하다고 가정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모든 뉴런은 일련의 시냅스 (synapse, “입력 경로”) 와 하나의 축삭 돌기 (axon, “출력 경로”) 를 가진다. 이때 입력과 출력은 전류, 즉 운동상태의 이온이다. 뉴런의 입력경로와 출력경로 사이에, “결정” 이 내려지는 세포체가 자리잡는다. 뉴런에 대해서 1 초당 1,000 번이나 내려지는 결정은 “발포 또는 비발포” 이다. 말하자면 결국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뉴런들의 입구에 도달하고 그래서 동일한 종류의 결정을 내리도록 야기하는 이온들을 악손의 축을 따라서 방출하는 것이다. 그 결정은 매우 간단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입력의 합이 일정한 임계치를 넘어서면, 예스 (yes) 이고 그렇지 않으면 노 (no) 이다. 이 때 일정한 입력들은 다른 곳으로부터 오는 양이온의 입력들을 억제할 수 있는 음이온 입력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정신의 가장 낮은 층위를 지배하는 것은 더하기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을 변용하자면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더한다 (Cogito, ergo am).”결정을 내리는 이 방법이 매우 간단하게 들리지만,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사정이 하나 있다 : 하나의 뉴런은 20 만 개까지의 상이한 입력경로를 가질 수 있다. 즉 뉴런이 다음 번에 취할 행동을 결정하는 데 20 만 개까지의 상이한 피가수가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이온들의 자극이 악손의 끝까지 전달된다. 그러나 그 이온들이 끝에 도달하기 전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분지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유일한 출력 자극만이 분지하는 악손을 따라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분할된다. 그래서 끝에 도달하면 “하나의 자극” 은 “여러 개의 자극” 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따라가는 악손의 가지들의 길이나 저항이 제각기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시점 또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유일한 자극으로서 세포체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뉴런이 발포되면 다시 자극받을 때까지는 회복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통상적으로는 수천 분의 1 초 정도면 충분하므로, 뉴런은 초당 천 번까지 발포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두뇌 속에 있는 “개미들” 을 기술했다. 그러면 “팀들”, “신호들” 은 어떻게 되나? 또 “기호들” 은?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관찰을 했다 : 그 입력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뉴런은 아주 원초적인 방식으로만 ? 즉 발포 또는 비발포로만 ? 반응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적은 양의 정보이다. 물론 더 많은 정보량의 전달과 처리를 위해서는 더 많은 뉴런들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층위의 개념들을 가공할 수 있는 많은 수의 뉴런들로 복합된 비교적 큰 구조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각각의 개념마다 고정된 일정한 그룹의 뉴런이 있으리라는 주장은 전적으로 틀린 것이다.

그림 66 왼쪽에서 본 인간의 뇌. 시각 영역이 머리의 뒤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출전 : 스티븐 로즈, 「감각적 두뇌」, New York, Vintage, 1966 년, 50 쪽].
뇌는 해부학적으로 대뇌, 소뇌, 시상하부 등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림 66 참조). 대퇴 (cerebrum) 는 인간의 뇌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좌반구와 우반구로 나뉜다. 각 반구의 외피 및 밀리미터는 대뇌피질 (cerebral cortex) 의 층으로 덮혀 있다. 해부학적으로 볼 때, 바로 이 대뇌피질의 양이 인간의 두뇌와 지능이 떨어지는 다른 동물의 뇌를 구별하는 변별특징이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그러한 거시적인 층위의 하부기관들과 그들의 정신적이거나 물리적인 활동들 사이에는 유치한 수준의 상응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두뇌의 하부기관에 대한 세부설명은 하지 않겠다. 예를 들면, 언어는 우선적으로 양쪽 반구의 어느 한쪽, 즉 일반적으로는 좌반구에서 처리된다고 알려졌다. 한편 소뇌 (cerebellum) 는 운동기전을 제어하기 위하여 자극을 근육으로 보내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 상이한 영역들이 어떻게 그들의 기능을 발휘하는지는 아직도 대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제 아주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사고가 두뇌에서 수행된다면 ? 그렇다면 두 개의 뇌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나의 두뇌는 여러분의 두뇌와 어떻게 다른가? 여러분은 나나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두뇌 속에 동일한 해부학적 분할영역을 가진다. 두뇌들의 이러한 동일성은 어디까지인가? 신경의 층위까지? 사고의 아주 낮은 층위에 있는 동물들, 예를 들면 지렁이를 보기로 말하자면 그렇다. 아래의 인용은 지능을 갖춘 외계의 존재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주제를 다룬 학술회의에서 신경 생리학자인 데이비드 허블이 말한 내용이다 :
벌레류의 동물의 신경세포의 수는 대략 수천 개 정도이다. 이때 아주 흥미있는 사실은 한 특정한 지렁이의 특정한 개별적인 세포를 규명하고 동일한 종의 다른 지렁이의 상응하는 동일한 세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렁이들은 동형태의 두뇌들을 가진다! 따라서 “오직 하나의 지렁이만 존재한다” 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고의 위계질서가 높아지고 뉴런의 수가 증가할수록 개체의 두뇌들이 그런식으로 1 : 1 로 사상될 수 있는 가능성은 급속도로 줄어든다. 그것은 단 한 병의 인간만 존재하지는 않다는 의심을 두둔한다! 사실 인간의 수많은 다양한 뇌 사이에는, 하나의 뉴런보다는 크고 두뇌의 중요한 기관들보다는 작은 정도의, 물질적으로 상당한 유사성이 검색된다. 이로부터 개별적인 개체들 사이의 정신적인 차이들이 두뇌 속에 생리학적으로 어떻게 표상되었는가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자기 자신의 뉴런의 상호 결합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일정한 사물과 자신이 가지는 일정한 관점들, 특정한 희망사항들, 걱정, 선호 취향 또는 거부 등을 위한 코드화로 간주될 수 있는 다양한 구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인 경험들이 두뇌에 할당될 수 있다면, 지식이나 정신적인 삶의 다른 측면들이 두뇌 속의 특정한 장소나 물리적인 하위체계로 환원될 수 있을까? 이것이 이 장과 다음 장에서 자주 다루게 될 핵심문제가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하여 신경학자인 칼 래슐리는 1920 년경부터 수 년 동안 행한 실험에서, 미로를 돌아다니는 쥐가 두뇌의 어디에 지식을 저장하는지 알아내려고 하였다. 스티븐 로즈는 그의 책 「깨어 있는 두뇌 (The Conscious Brain)」에서 래슐리의 시도와 난점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래슐리는 대뇌피질 내부에서 기억장소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하여 그는 일단 쥐에게 미로를 돌아다니는 연습을 시켰다. 그리고는 대뇌피질의 여러 영역을 제거했다. 그리고 쥐가 회복되면 다시 데리고 와서 미로를 찾는 능력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테스트했다. 놀랍게도 미로를 기억하는 능력에 상응하는 특정한 영역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쨌든 대뇌피질이 제거된 모든 쥐들은 일종의 손상을 느꼈고, 그 정도는 대략 제거된 대뇌피질이 제거된 모든 쥐들은 일종의 손상을 느꼈고, 그 정도는 대략 제거된 대뇌피질의 양에 비례했다. 대뇌피질의 제거는 동물의 운동 및 감각 능력에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쥐들은 절뚝거리거나 뛰어오르고 뒹굴거나 비틀거리는 등의 장애를 유발했지만, 그래도 좌우간 미로를 찾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기억에 관한 한, 대뇌피질은 어느 곳이나 동일한 잠재력을 가지는 것으로 보였다. 즉 모든 영역들이 동일하게 가능한 용도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래슐리는 1950 년 그의 마지막 논문 “기억흔적을 찾아서 (In Search of the Engram)” 에서 기억이란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기묘하게도 래슐리의 마지막 논문이 발표된 시기와 거의 동시인 1940 년대 말, 캐나다에서는 이와 대립하는 시각이 제기되었다. 신경외과 의사인 와일더 펜필드는 뇌속의 여러 부위에 전극을 삽입해서 약한 전류를 흘려보낸 다음, 전극이 접속된 부분의 뉴런 (들) 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뇌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반응을 점검했다. 이 자극들은 다른 뉴런들로부터 오는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펜필드는 일정한 뉴런들의 자극이 분명히 환자의 특정한 심상이나 감각을 창출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촉발된 인상들은 잉잉거리는 소리, 색에 대한 이상한 체험에서부터 정의할 수 없는 공포,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는 ? 예를 들면 유년시절의 생일잔치와 같은 ? 이전의 생애에 대한 일련의 사건에 대한 회상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다. 근본적으로는 단 하나의 뉴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제 펜필드의 결론은 래슐리의 결론과는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왜냐하면 펜필드의 발견은 아마도 국지적인 영역들이 특정한 기억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가? 하나의 가능한 설명은 기억이 국소적으로 더욱이 대뇌피질의 더욱더 많은 장소에 분산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진화의 과정에서 싸움으로 인한 두뇌손상을 대비하거나 신경생리학자들의 실험에 따라서 전개된 전략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설명은 기억이란 두뇌 전체에 분포된 동적인 과정들로부터 재구성될 수 있지만, 그 격발은 개별적인 국소적인 지점들로부터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장거리 통화가 어느 회선으로 이루어지는지 예측할 수 없는 오늘날의 전화망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장거리 전화의 경우 회선의 선택은 통화가 일어나는 그 시점에서만 선택되며, 전국의 전화 상황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전화망의 어느 한 지역에 국지적인 손상이 있더라도 통화두절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손상된 지역에서만 우회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전화 호출은 잠재적으로 공간 확정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모든 통화 호출은 두 개의 특정한 점을 연결한다 ? 그런 의미에서라면 모든 통화 호출에는 공간이 확정될 수 있다.
두뇌 처리과정의 위치할당에 대한 가장 흥미있고 중요한 업적들 중의 몇 가지가 지난 15 년간 하버드 대학의 데이비드 허블과 토르스텐 위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고양이의 두뇌에 있는 시지각 경로를 사상해내었다. 그들은 망막에 있는 뉴런들로부터 시작해서, 뇌의 뒷부분으로의 연결을 추적하고 측면슬상 결절체 (lateral geniculate) 라는 “릴레이 정거장” 을 거쳐서 두뇌의 맨 뒤에 있는 시각 피질에 이르기까지 연구했다. 일단 래슐리의 결과에 비추어볼 때, 잘 정의된 신경경로들이 전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뉴런의 속성이 그 경로를 따라서 상이한 단계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망막 뉴런들은 일단 대조 센서 [감지장치] 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뉴런은 대조를 통하여 작동한다. 모든 망막 뉴런은 통상적으로 일정한 “순항속도” 로 자극을 발포한다. 망막의 일부분이 빛에 노출되는 강도에 따라서 더 빨리 또는 더 늦게 아니면 전혀 발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망막에 빛이 덜 비추어졌다는 전제하에서만 그렇게 될 뿐이다. 따라서 “구심 뉴런” 과 “원심 뉴런” 이라는 두 종류의 뉴런이 있다. 구심 뉴런은 민감하게 반응하며, 가운데는 밝고 변두리는 어두운 망막의 작은 원형 부분 안에서 있을 때 그 발포속도가 증가하는 뉴런들이다. 원심 뉴런은 가운데는 어둡고 바깥의 고리부분은 밝은 것으로서 매우 빨리 발포하는 뉴런이다. 구심 뉴런의 패턴이 원심 뉴런에 드러나면, 그 뉴런은 발포속도를 낮춘다 (그 역도 가능하다). 동일한 강도의 조명을 비추면 두 종류의 뉴런에는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두 뉴런의 발포속도는 순항속도로 유지된다.
신호들은 망막으로부터 시신경을 거쳐서 두뇌 가운데의 어디엔가 있는 측면슬상 결절체로 간다. 망막의 특정한 영역에 떨어지는 특정한 자극에 의해서만 발포되는 슬상결절체 뉴런들이 있다는 점에서, 그곳에서는 망막의 표면과의 직접적인 사상관계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슬상결절체는 실망스럽다. 그것은 “릴레이 정거장” 에 불과하지 그 이상의 “처리장치” 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슬상결절체 안에서 대조감각이 높아진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말이다). 망막 위의 영상은, 망의 형태로된 뉴런들이 이차원적 표면으로 정렬되는 것이 아니라 삼차원 입체의 형태로 정렬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곧장 슬상결절체의 뉴런들의 발포표본으로 코드화된다. 따라서 이차원들이 삼차원으로 사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는 변하지 않는다 : 즉 동형관계는 보존된다. 여기에 아마 우리가 아직 잘 모르는, 표상의 차원성의 변화에 관한 심오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시지각 과정에 대한 해명되지 않은 단계들이 아직도 많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여기서 일정한 정도까지는 적어도 하나의 단계라도 해명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신호들은 측면슬상 결절체로부터 시각피질로 진행된다. 여기서 새로운 유형의 처리가 이루어진다. 시각피질의 세포들은 세 범주로 나뉜다 : 단순, 복잡 그리고 초복잡 범주로 나뉜다. 단순 세포들은 마치 망막세포 또는 슬상결절체의 세포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망막 속의 특정한 영역에 있는 대조적인 환경을 통하여 밝거나 어두운 점 모양의 물체에 반응한다. 이와 달리 복잡 세포들은 일반적으로 수백개 이상의 다른 세포들로부터 입력을 수용하며, 특정한 각도로 망막에 연결된 (그림 67) 밝은 또는 어두운 막대들을 발견한다. 초복잡 세포들은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다시 그림 67 참조) 모서리, 막대 또는 심지어 “혀” 에도 반응한다 (다시 그림 67 참조). 마지막에 보기를 든 세포들은 너무나도 특수화되어 있어서 종종 “더 높은 층위의 초복잡 세포” 라고 불린다.

그림 67
일정한 표본 뉴런에 의하여 패턴에 보이는 반응들.
(a) 모서리를 인지하는
이 뉴런은 수직 모서리 방향에서, 왼쪽으로는 밝은 것을, 오른쪽으로는 어두운
것을 찾는다. 첫번째 블록은 한 모서리의 정향이 이 뉴런에 어떻게 적절한지를
보여준 어두운 것을 찾는다. 첫번째 블록은 한 모서리의 정향이 이 뉴런에 어떻게
적절한지를 보여준다. 두번째 블록은 영역 안에서의 모서리의 위치가 이 특정한
뉴런과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b) 하나의 초복잡 세포는 아래로
향하는 혀가 오직 영역의 가운데 있을 경우에만, 어떻게 더 선택적으로 반응하는지를
보여준다.
(c) 무작위로 부과되는 여러 자극에 대한 가설적인 “할머니 세포”
의 반응들. “문어세포” 라면 이 동일한 자극에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증가하는 복잡한 자극을 통하여 격발될 수 있는 시각피질 속의 세포를 발견한 결과, 사람들은 사물이 제각기 “세포 하나마다 개념 하나씩” 이라는 방식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궁금했다. 예를 들면 오직 할머니가 영상표면에 나타날 경우에만 발포하는 그런 “할머니 세포” 가 있다고 해보자. 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최고도의 초복잡” 세포는 진짜로 그렇게 의도된 보기는 아니다. 그러나 실은 그것을 대체할 어떤 합당한 대안이 있을지 별 뾰족한 수도 없다. 하나의 가능성은 비교적 큰 신경망들이 충분히 복잡한 시각적 자극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흥분되는 것이다. 물론 이 비교적 크고 여러 개의 뉴런들로 구성되어 있는 단위들의 발포는 왠지 많은 초복잡 세포들로부터 유래하는 신호들의 통합으로부터 온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바로 우리가 “신호” 로부터 “기호” 가 창발되는 그 지점에 다가서는 순간에 그 흔적은 사라진다. 이것이야말로 감질나는 미완성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잠시 후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일단 그중 몇 가지만 설명해보기로 한다.
앞에서 나는 이미, 해부학적으로 큰 규모로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두뇌들 사이에 거시적인 동형관계가 있음을 언급했고, 지렁이의 두뇌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뉴런들의 층위에서의 미시적인 동형관계도 언급했다. 고양이, 원숭이 그리고 인간의 시각 처리기관들 사이에도 ? 아주 작고 거칠며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 동형관계가 있다는 것은 여간 흥미있는 사실이 아니다. 그 동형관계는 다음과 같다 : 첫째, 이 세 종은 제각기 시각 처리가 이루어지는 그들의 두뇌의 뒷부분에 대뇌피질의 “특수” 영역인 시각피질 (visual cortex) 이라는 영역을 가진다. 둘째, 그 모든 시각피질은 영역 17, 18 과 19 라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것들은 이 세 종의 임의의 정상적인 개체의 두뇌에 자리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보편적이다. 각 소영역의 내부를 더 관찰해보면, 시각피질의 “원주형” 조직에 이르게 된다. 피질의 표면과 수직으로 그리고 내뇌 안쪽으로 방사형으로 뻗은 시신경들은 “원주형” 으로 정렬된다. 말하자면 거의 모든 연결이 방사형 및 원주형으로 진행되지, 원주들 사이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원주는 망막의 작은 특정한 영역에 사상된다. 원주의 수효는 그 어떤 개체에서도 동일하지 않다 ; 즉 “동일한 원주” 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셋째, 원주의 내부에는 통상 단순 뉴런들이 존재하는 층위들이 있고 복잡 뉴런들이 존재하는 또 다른 층위들이 있다 (이때 단순 뉴런과 복잡 뉴런들은 주로 영역 17 에 있는 반면에, 초복잡 뉴런들은 통상 영역 18 과 19 에 존재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마 이 층위에는 더 이상의 동형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아래쪽으로 개별적인 뉴런 층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별적인 고양이, 원숭이 그리고 인간은 전적으로 ? 지문이나 서명과 같은 ? 유일무이한 패턴을 가진다.
고양이와 원숭이 두뇌의 시각 처리 사이의 차이를 말하는 것보다는 덜 중요하지만, 아마 두드러진 차이는 바로 더 높은 층위의 복합된 신호를 통합하기 위하여 두 눈의 정보가 어떤 단계에서 통합되는가에 달려 있다. 두 눈의 정보통합에 있어 원숭이는 고양이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데, 그것은 양 눈의 그때그때의 신호를 스스로 처리하기까지 시간이 더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종이 지능의 위계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높을수록 시각체계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도 더 복잡해질 거라고 익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최종적으로 신호들은 그들이 궁극적인 “상표” 를 획득하기 훨씬 전에 처리되어야 한다. 그것은 언젠가는 가지게 될 시각적인 차이를 지각하는 능력을 분명히 가지고 태어난 송아지의 시각능력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극명하게 입증되었다. 송아지는 그 능력에 있어서 인간이나 개보다는 떨어지지만 다른 가축에 비해서는 앞선다. 아마도 전체 시각체계는 이미 출생 이전에 “고정배선되어서”, 두뇌피질에서는 처리할 것이 비교적 적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두뇌피질에 상당히 종속되어 있는 인간의 시각체계는 성숙되려면 몇 년이나 걸린다.
두뇌 조직에 대하여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의아한 것은 거시적인 척도의 하드웨어와 높은 층위의 소프트웨어 사이의 직접적인 조응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시각피질은 거시적인 척도의 하드웨어 조각이지만 전적으로 소프트웨어 ? 즉 시각 정보의 처리 ? 를 위해서 동원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정보처리는 훨씬 더 낮은 층위에서 실행된다. 대상들의 인식에 관한 한 시각피질에는 어떤 것도 자리잡고 있지 않다. 이것은 복잡 세포와 초복잡 세포들의 출력이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형태, 공간, 그림, 얼굴 등의 의식된 의식으로 변환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낮은 층위의 뉴런들의 많은 반응들의 “누두작용” 에 대한 증거를 점점 덜 높은 층위에서 탐색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앞에서 말한 그 유명한 할머니 세포나 일종의 다회선 신경망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두뇌의 개략적인 해부학적 영역 분할에서보다는 차라리 미시적 분석에서 찾아지리라는 것이다.
할머니 세포에 대한 대안으로는, 예를 들면 “누두망 [깔대기 모양의 통그물]” 의 뾰족한 끝에 자리잡아서, 할머니가 보이면 모조리 발포하는 몇십 개의 뉴런들의 고정된 집합을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각각의 인식 가능한 상이한 대상에 대해서 그것만을 위한 고유의 신경망과 이 망에 집중될 “누두작용의 과정” 이 있을 것이다. 고정된 방식 대신에 다양한 방식으로 흥분될 수 있는 신경망을 포함해서, 유사한 신경회선을 따라 존재하는 더 복잡한 대안들이 존재한다. 바로 그런 신경망이 우리 두뇌 속에 있는 “기호들” 이다.
하지만 그런 누두작용이 필요한가? 아마 우리가 고찰하는 대상은 시각피질에 있는 대상의 “서명”, 즉 단순, 복잡 그리고 초복잡 세포들의 집단적인 반응을 통하여 함축적으로 확인된다. 아마 두뇌는 특정한 형태에 대한 여타의 식별장치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야기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장면을 본다고 가정하자. 그 장면은 자신의 서명을 우리의 시각피질에 등재한다 ? 하지만 그 서명으로부터 장면에 대한 언어적인 묘사에 어떻게 도달하는가? 예를 들면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인 에두아르 뷔야르의 그림들은 제대로 보려면 몇 초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나면 갑자기 인간의 형태가 눈에 확 들어온다. 추측컨대 서명은 그 첫 순간에 시각피질에 새겨지지만, 그림은 비로소 몇 초 뒤에야 이해된다. 이것은 실은 일반적인 현상에 대한 하나의 보기에 불과하다. 식별의 순간에 정신 속에 무엇인가 “결정이 형성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광선이 망막을 때리는 순간이 아니라, 우리의 지능의 일부분이 망막의 신호에 반응할 기회를 가지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결정화라는 비유는 통계역학에서 유도된 것으로서, 용매 안에서 확산되고 성장하며 여기저기에 연관되는 영역들을 창출하는 억겁의 미시적이고 정합성이 없는 활동들의 아름다운 덩어리를 의도한다. 결국 사소한 일들의 억겁의 덩어리는 아래에서 위로 자신의 매질의 구조를 철저하게 바꾼다. 그 결과 무관한 요소들의 혼돈의 집합으로부터 거대하고 정합적인 완벽한 연계구조가 생성된다. 우리가 초기의 신경활동들을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많은 무관한 발포의 최종산물을 뉴런들의 잘 정의된 거대한 “모듈들” 의 발포로 본다면, “결정화” 라는 낱말은 지극히 적절한 것이다.
누두작용에 대한 또 다른 논거는 ? 예를 들면 웃거나 화를 내는 할머니, 모자를 쓰고 있거나 그렇지 않은 할머니, 화창한 정원 또는 어두침침한 기차역, 멀리서 보건 가까이서 관찰하건, 앞이건 옆이건 등과 같이 ? 어디에서 보건 간에 그 할머니를 동일한 대상으로 지각하게 해주는 무수한 장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 모든 장면들은 시각피질에 판이한 서명들을 남긴다. 이제 이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안녕하세요, 할머니!” 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 시각적인 서명을 수용한 후에 그리고 낱말이 발화되기 전의 ? 어느 일정한 시점에서 누두작용이 시작됨에 틀림없다. 이제 우리는 이 누두작용이 할머니에 대한 우리의 지각의 일부가 아니라, 그저 언어화의 속성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그 과정을 구획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화하지 않고도 그것이 할머니라는 정보를 “내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각피질 전체에 있는 모든 정보들이 대부분 폐기될 수 있다면, 그 모든 정보를 다루는 것은 아주 난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늘을 얼마나 드리울 것이며 할머니의 블라우스에 단추가 몇 개 달렸는가 따위의 일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두작용을 인정하지 않는 이론의 또 다른 난점은, 예를 들면 에셔의 그림 “볼록과 오목” (그림 23) 에서처럼, 단 하나의 서명을 달리 해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지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단순히 텔레비전 화면 위의 점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응축된 영상 (덩어리) 들을 인식하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말하자면 거대한 점 모양의 “서명” 이 시각피질에 형성되면 지각이 일어난다는 주장은 웃기는 소리이다. 따라서 그 최종결과가 이 장면에 있는 개념 (즉 응축영상) 과 연관된 뉴런들의 일정한 모듈들이 격발되는 누두작용이 존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모든 개념에 대하여, 격발 될 수 있는 매우 잘 정의된 모듈 ? 즉 아주 적은 무리의 뉴런들로 구성된 모듈로서 이전에 설명된 종류의 “신경 복합체” ? 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이론의 문제는 ? 적어도 초보적으로 이해했다면 ? 두뇌 안의 어디엔가 그런 모듈들을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생각하려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며, 래슐리의 실험과 같은 몇몇 증거들은 자리매김 가설에 반박하고 있다. 물론 그 가설의 여부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기상조이다. 아마도 모든 모듈의 많은 복제가 두뇌 안에 산재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듈들이 물리적으로 중첨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효과들은 뉴런들을 “꾸러미” 로 분할하려는 것을 무산시키는 경향이 있다. 아마 가끔씩 팬케이크처럼 생긴 아주 얇은 복합체들이 서로 교차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서로를 마주보며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코브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거미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고픈 배를 움켜 쥐고 벌레를 찾아 날아다니는 제비들의 비행과 같은 이상한 형태의 신호가 움직이는 회로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심지어는 모듈들은 하드웨어라기보다는 소프트웨어가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이 가설적인 신경 복합체와 관련하여 생각되어야 할 많은 질문들이 있다. 예를 들면 :그것들은 예를 들면 간뇌나 시상하부와 같은 두뇌의 아래쪽 영역들에 펼쳐져 있는가, 등?개별적인 뉴런 하나는 하나 이상의 그런 복합체에 소속할 수 있는가?하나의 개별적인 뉴런이 얼마나 많은 그런 복합체에 소속하는가?얼마나 많은 뉴런들이 그런 복합체에 서로 중첩되는가?이 복합체들은 누구에게서나 다 같은가?상이한 사람들의 두뇌 안의 상응하는 장소에 상응하는 복합체들이 존재하는가?그것이 그 누구의 두뇌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중첩되는가?철학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 모듈 ? 예를 들면 할머니 모듈 ? 의 존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식이라는 현상에 대하여 어떤 통찰을 가져다 주는가? 아니면 두뇌는 뉴런들과 신경교로 이루어졌다는 지식이 그러듯이, 의식의 본질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채로 이해하기까지는 갈 길이 먼 것 같다. 결정적인 단계는 동일한 상태끼리, 즉 동일한 두뇌의 바로 더 낮은 층위 ? 뉴런과 뉴런 ? 의 층위의 기술에서부터 높은 층위 ? 모듈과 모듈 - 로의 기술로의 전진이다. 아니면, “개미 푸가” 의 암시적인 용어로 되돌아가자면 우리는 두뇌의 상태의 기술을 신호 층위에서 기호 층위로 옮기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우리는 이 가설적인 신경 복합체, 신경 모듈, 뉴런 꾸러미, 신경망, 멀티뉴런 단위 ? 그것을 자그마한 팬케이크, 고무래, 방울뱀, 눈송이, 잔물결이 이는 호수 등 무엇으로 부르건 ? 들을 다 기호라고 부르고자 한다. 기호의 입장에서 두뇌상태를 기술하는 것이 대화 편에서 풍자되었다. 그러한 기술은 어떤 모습일가? 어떤 종류의 개념들이 실제로 합리적으로 “기호화” 될 수 있을까? 기호들은 서로 어떤 상관관계를 가질까? 그리고 이 모든 그림은 인간의 의식에 어떠한 통찰을 제공할 것인가?우선, 기호들은 잠자고 있거나 깨어 (활성화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겠다. 활성적인 기호는 격발된 적이 있는 체계이다. 즉 뉴런들의 한계수가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의해서 발포된 적이 있는 그런 체계이다. 기호는 다양한 상이한 방식으로 격발될 수 있기 때문에, 깨어 있을 경우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 이것은 기호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가변적인 단위라는 것을 확증한다. 따라서 두뇌의 상태를 “기호 A, B, ㆍㆍㆍ N 은 모두 활성적이다” 라는 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추가적으로 모든 활성적인 기호에 대하여 내적인 기능작동의 몇 가지 측면들을 규정하는 일련의 매개변수들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기호가 활성화되면 여지없이 발포하는 일정한 핵 뉴런들이 모든 기호에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흥미있는 질문이다. 만약에 그러한 뉴런의 “핵” 집합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호의 “불변 핵”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면 폭포를 생각한다고 말할 때마다 의심의 여지없이, 상황에 따라서 다른 방식이기는 하나 분명히 작동되는, 확정되어 있는 신경상의 처리과정이 반복된다고 말할 수 있다. 꼭 그래야만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제 기호가 “깨어 있으면” 무엇을 하는가? 낮은 층위의 기술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 뉴런의 대부분은 발포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한다. 높은 층위의 기술은 뉴런들에 대한 모든 언급을 배제하고 오르지 기호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렇다면 잠자고 있는 기호와 달리 기호를 활성화하는 높은 층위의 기술은 “다른 기호의 잠을 깨우거나 격발시키는 메시지나 신호를 보내는 것” 일 것이다. 물론 이 메시지들은 뉴런의 신경자극의 전류형태로 운송되지만 그런 표현방식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낮은 층위의 기술을 표상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더 높은 층위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다른 말로 하자면 : 마치 시계의 작동이 양자역학의 법칙들에 대해서는 봉쇄되어 있고, 세포생물학이 쿼크의 법칙에 대해서는 봉쇄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의 사고과정이 신경상의 사건들에 대해서 봉쇄되어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더 높은 층위에서 조망할 때의 장점은 무엇인가? “183 번에서 612 번까지의 뉴런들이 뉴런 75 번을 자극해서 발포하게 했다” 고 말하는 것보다, “기호 A 와 B 가 C 를 격발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어째서 더 나은가? 이 질문은 이미 “개미 푸가” 편에서 답변되었다 : 그것은 뉴런이 사물을 상징화한 것이 아니라 기호가 사물을 상징화하기 때문이다. 기호들은 개념을 하드웨어로 실현한 것이다. 다른 뉴런을 격발하는 뉴런의 한 무리는 외부세계의 어떤 사건과도 조응하지 않는 반면에, 다른 기호를 통한 한 기호의 격발은 실재세계 ? 또는 적어도 가상세계 ? 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관련된다. 기호들은 각기 그들이 이리저리 보낼 수 있는 메시지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그들의 격발 패턴들은 우리의 세계에서 또는 우리의 세계와 비슷한 곳에서 일어나는 거시적인 규모의 사건들과 흡사하다. 근본적으로는, 의미는 pq ? 체계처럼 동형관계로부터 생긴다. 동형관계는 오로지 여기에서만 무한히 더 복잡해지고 정교하며 명랑하고 변덕스러우며 내포적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뉴런들 자체가 기호들의 역할을 넘겨 받는 것을 배제하려면, 기호들이 복잡한 메시지들을 이렇게 저렇게 통과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 충분할 것을 가지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의 신호를 때로는 이쪽으로 때로는 저쪽으로 선별적으로 유도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단적으로 말해서 뉴런은 실재세계의 사물처럼 행동하기 위하여 기호가 가져야 하는 선별적인 격발능력은 전혀 없다. 그의 책 「곤충 사회 (The Insect Societies)」에서 E. O. 윌슨은 개미 군락 내부에서 메시지들이 어떻게 증식되는지에 대해서 유사한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
[매스 커뮤니케이션] 은 한 개별적인 개체가 다른 개별적인 개체에게 전해줄 수 없는 정보에 대한 그룹들간의 전달과정으로 정의된다.
즉 두뇌를 개미 군락으로 보는 것은 쓸 만한 추정이다! 다음 질문 ? 너무나도 중요한데 ? 은 두뇌 속에서 개별적인 기호에 의해서 표상된 개념들의 본질과 “규모” 에 관한 것이다. 기호의 본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 일반적인 개념인 “폭포” 에 대한 기호가 있는가? 아니면 다양한 특정한 폭포들에 대한 다양한 기호들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두 가지 대안이 다 시현 가능한가? 기호의 “규모” 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 이야기 전체에 대한 기호가 있는가? 선율에 대한 기호는 있는가? 아니면 농담에 대한 것은”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낱말들이 길이에 상응하는 개념들에 대해서만 기호가 존재할 것이며, 구문이나 문장 같은 규모가 좀더 큰 형성체들이 다양한 기호들을 동시에 또는 연속적으로 활성화함으로써 표상될 수 있을 것 같다.
기호에 의해서 표상된 개념들의 규모라는 문제를 살펴보자. 문장으로 표현된 대부분의 생각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더 이상 분석하지 않는 기본적인, 거의 원자수준의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대략 낱말 정도의 크기인데, 때로는 좀 길기도 하고 때로는 좀 짧기도 하다. 예를 들면 우리의 표제어인 “폭포”, 고유명사인 “나이애가라 폭포”, 영어의 과거형 어미 “-ed”, 동사 “방해하다”, 그리고 좀더 긴 관용구들은 거의 원자 층위의 수준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 예를 들면 영화속의 플롯, 도시의 분위기, 의식의 본질 따위의 ? 더 복잡한 개념의 초상화를 그릴 때 필요한 전형적인 기본적인 선 긋기들이다. 그런 종류의 복잡한 관념들은 한 획으로 그려낼 수 없다. 언어의 선 긋기들은 또한 사고의 선 긋기들이며, 따라서 기호들은 대개 이 정도 크기의 개념들을 표상한다고 능히 가정할 수 있겠다. 따라서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기호란, 그것에 대해서 한 낱말 또는 고정된 표현을 가지는 또는 그것으로 인해 어떤 고유명사를 연상케 하는 무엇이다. 연애와 같은 문제에서처럼, 두뇌 안에 있는 비교적 복잡한 관념의 표상은 다양한 기호들이 다른 기호들에 의해서 활성화되는 매우 복잡한 연속체일 것이다.
사고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구별이 있다 : 즉 범주들과 개체들 또는 부류들과 사례들 사이의 구별이다 (종종 “유형 [types]” 과 “실현체 [token]” 로 불리기도 한다). 언뜻 보기에 임의의 기호는 그 본성상 한 부류에 대한 기호이거나 또는 한 사례에 대한 기호인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사실 대부분의 기호들은 그들이 활성화되는 맥락에 따라 이 두 가지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의 목록을 보라 :
(1) 출판물
(2) 신문
(3) 동아일보
(4) 동아일보 5 월 18 일자
(5) 동아일보 5 월 18 일자 내가 산 것
(6) (며칠 후에 난로가에서 불쏘시개로 타고 있는 그 신문이 아니라)내가 가장 먼저 손에 쥔 것이 바로 5 월 18 일자였던 동아일보의 일부
여기에서, (2) 에서 (5) 까지는 모두 두 가지 역할을 한다. 따라서 (4) 는 (3) 이라는 일반적인 부류의 사례이고, (5) 는 (4) 의 사례이다. (6) 은 한 부류의 좀 특별한 종류의 사례인 현전 (Manifestation) 이다. 농가에 있는 암소들이 자신들에게 건초를 먹이는 즐거운 농부의 모든 현전에 토대가 되는 불변의 개체를 지각하는지를 생각해보면 흥미있다.
앞에 놓인 목록을 일반성의 위계구조처럼 보인다 ? 즉 위에는 매우 광범위하게 파악된 개념적인 범주가 자리잡고, 아래에는 공간과 시간 속에 자리매김된 사소한 개별 사물이 있다. 그러나 하나의 “부류” 가 늘 어마어마하게 광범위하며 추상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편협한 생각이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가 원형 원리 (prototype principle) 라고 불릴 수 있는 독특한 원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
가장 구체적인 사건은 사건들의 부류의 일반적인 표본으로 이용될 수 있다.
특정한 사건들이 어떻게든 나중에 그것들과 어느 정도 같아지는 다른 사건들에 대한 모델로 사용될 수 있을 정도로 기억에 강하게 각인되는 생생함을 가진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안다. 그래서 모든 특정한 사건에는 유사한 사건들의 전체 부류에 대한 싹이 숨어 잇는 것이다. 구체적인 것 속에 일반성이 존재한다는 그 생각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이제 당연히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 두뇌 안의 기호들은 부류를 표상하는가 아니면 사례들을 표상하는가? 부류만을 표상하는 일정한 기호들이 있는가 또는 사례들만을 표상하는 기호들이 있는가? 아니면 개별적인 기호는 자기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되었는가에 따라서 제각기 부류기호 또는 사례기호로서 쓰일 수 있는가? 뒤의 이론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한 기호의 “용이한” 활성화가 한 부류를 표상할 수 있으며, 더 심층적인 또는 더 복잡한 활성화는 신경의 더 세분된 내적인 발포 패턴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사례를 표상할 것이다. 그러나 좀더 관찰해보면, 이것은 미친 짓이다 : 그것은 예를 들면, 우리가 “출판물” 에 대한 기호의 활성화를 통하여, 충분히 복잡한 방식으로 나의 난로에서 불타고 있는 어던 구체적인 신문을 표상하는 매우 복잡한 기호를 얻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쇄물의 모든 쪽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현전은 아마 “출판물” 에 대한 유일한 기호를 활성화하는 어떤 방식에 의하여 내적으로 표상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출판물” 이라는 단 하나의 기호에 할당하기에는 너무 큰 부하인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사례기호들이 부류기호들과 더불어 존재할 수 있으며, 전자가 그저 간단히 이 후자의 활성화 방식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사례기호들은 종종 사례들이 소속하는 부류들로부터 그들 속성의 상당 부분을 물려받는다. 내가 여러분에게 어떤 영화를 보러 갔다고 얘기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특정한 영화에 대한 신선하고 새로운 사례기호를 “각인” 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추가적인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 새로운 사례기호는 대부분 여러분이 “영화” 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기존의 부류기호에 의존할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여러분은, 예를 들면 영화가 한 시간 또는 세 시간짜리라거나, 동네 극장에서 상영되었다거나 또는 일정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한다는 따위의, 그 영화에 대한 상당한 양의 선입관에 의존할 것이다. 이것들은 다른 기호들 (즉 잠재적인 격발관계들) 에 대한 기대된 연결로서의 부류상징 속에 구축된다. 그래서 표준해석 (default options) 이라고 불린다. 모든 새로 각인된 임의의 사례기호에서는 이 표준해석을 쉽게 변경할 수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행해지지 않으면 부류기호로부터 상속받은 사례기호로 머문다. 그것들이 제대로 다루어질 때까지, 그것들은 우리가 “고정관념 (stereotype)” 이나 부류기호에 의해서 제공되는 합당한 추측을 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위한 잠정적인 토대 ? 예를 들면 내가 보러 갔던 영화 ? 를 제공한다.
신선하고 간단한 사례로는 마치 자기 고유의 경험이 없는 아이를 들 수 있다 ? 그 아이는 전적으로 부모의 경험이나 견해를 신뢰하며 그것을 따를 뿐이다. 그러나 세계의 다른 부분과 상호작용을 해 가면서, 그 아이는 점차 자기 고유의 경험을 축적해서 어쩔 수 없이 부모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다. 결국 그 아이는 다 자란 성인이 된다. 이처럼 새로운 사례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점차로 자신의 부모 부류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며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인 부류 또는 원형이 된다.
그러한 분리과정을 시각적으로 생각해보자 : 예를 들면 박찬호를 전혀 모르는 남자가 일요일 오후에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어떤” 메이저리그 야구 팀 사이의 중계방송을 본다고 해보자 [요새는 미국 프로야구를 한국에서도 자주 시청할 수 있다]. 일단 당신은 각 팀 선수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하일성 해설위원이 “박찬호 선수, 이 시점에서 보크를 범하고 마는군요” 라고 말할 때에야, 당신은 비로소 어떤 선수가 반칙을 했거나 그래서 상대편 타자가 출루하게 되었다는 따위의 일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보크를 범하다” 라는 기호의 조율된 활성화의 방식과 더불어 “야구선수 [투수]” 라는 부류기호가 활성화된 경우이다. 그러나 그런 다음에 박찬호가 더 중요한 역할 [예를 들면 삼진] 을 하면, 박찬호에 대한 당신 고유의 새로운 사레기호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이때 몇 개의 다른 경기 모습 속에서 박찬호가 거론되는 방식에 따라서 그의 이름은 구심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기호는, 어린아이들에게서처럼, “야구선수” 에 대한 부류기호에 좌우된다. 박찬호에 대한 그들의 이미지는 대부분 “야구선수” 기호 안에 포함된 것으로서의 야구선수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해서 제공된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얻을수록, 그 “박찬호” 기호는 더욱더 독자적이 되며 자신의 부모의 부류기호의 동시적인 활성화에는 점점 덜 의존하게 된다. 그것은 박찬호가 며칠 동안 좋은 투구를 보여주면 몇 분 안에 일어날 수도 있다. 또한 그의 팀 동료들 [예를 들면 라울 몬데시, 에릭 케로스 등] 도 그 부류기호의 활성화에 의해서 더욱더 표상될 수 있다. 결국 ? 당신이 며칠 후에 스포츠 신문을 읽는다면 ? 박찬호라는 아기 기호의 탯줄은 끊어져서 이제 독자적인 기호가 제 발로 서게 된다. 여러분은 이제 박찬호의 고향 [공주] 이나, 그의 출신대학 [한양대학교], 전공 등에 대해 알게 된다. 또한 여러분은 그의 얼굴도 알게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박찬호는 더 이상 단순한 야구선수가 아니라, 우연히 야구선수도 겸하게 된 한 인간으로 보이게 된다. 부모 부류기호 [야구선수] 는 가만히 있는 반면에 “박찬호” 는 활성화될 수 있는 사례기호이다.
박찬호 기호는 처음에는 지구 주위를 도는 거대하고 육중한 인공위성처럼 모체 기호 주위를 도는 위성이었다. 그리고는 다른 기호들보다 더 중요해지는 중간단계가 나타났다. 물론 그것들은 마치 지구와 달처럼, 서로의 주위를 도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 새로운 기호는 완전히 독자적인 것이 된다. 이제 그것은 주위의 새로운 위성들의 기점 역할을 하는 부류기호로 쉽게 이용될 수 있고, 좀 덜 알려졌지만 박찬호와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호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 이 새로운 기호들이 독자적으로 될 때까지, 박찬호를 잠정적인 고정관념으로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호가 된다.
사례의 성장 및 부류로부터의 궁극적인 분리의 단계들은 해당하는 기호들이 연결된 방식을 통하여 서로 구별된다. 물론 어디에서 어떤 기호가 분리되고 다른 기호가 시작하는지를 결정하는 일이 매우 어려워질 때가 종종 있다. 한 기호는 다른 기호에 비해 얼마나 “활성적” 인가?” 어떤 기호가 다른 기호에 의해서 활성화될 수 있다면, 그것을 “자율적” 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조심스런 일이다. 우리는 앞에서 천문학 은유를 사용했는데, 이제 행성운동의 문제가 극도로 복잡하다는 사실이 흥미있다. 사실 몇 세기에 걸친 연구에도 불구하고 중력을 통하여 상호 작용하는 세 행성 (예를 들면 지구, 달 그리고 태양) 사이의 일반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 행성 (여기서는 태양) 이 다른 두 행성보다 현저히 무거울 경우에는 근사치의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두 개의 위성을 가지는 그 행성을 정지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끝으로 두 위성 사이의 상호 작용이 추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근사치적 해결은 그 체계를 태양과 한 “묶음” 인 지구 ? 달 체계로 나누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근사치적인 해결이기는 하지만, 그 체게를 아주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묶음은 어느 정도나 현실의 일부분이며, 인간이 우주에 부과한 정신적 산물이자 구조인가? 우리가 독자적인 것으로 지각한 묶음과 반 ? 독자적인 것으로 지각한 묶음 사이에서 도출된 경계영역의 “현실” 이라는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두뇌 속의 기호들과 연관시키면 무한한 난관을 만들게 된다.
그야말로 곤란한 질문은 복수라는 단순한 사안이다. 예를 들면, 찻잔 속의 개 세 마리를 어떻게 상상할까? 혹은 엘리베이터에 탄 여러 사람들은? “개” 에 대한 부류기호부터 시작해서 그로부터 세 개의 “복제” 를 얻어낼 수 있는가? 그것은 “개” 라는 부류기호를 판형으로 이용하는 가운데, 세 개의 새로운 사례기호를 만드는가? 아니면 우리는 “셋” 과 “개” 라는 기호를 결합하여 활성화하는가? 상상되는 장면을 어느 정도 세분해보면, 이 두 이론은 다 지탱하기 어려워진다. 예를 들면 우리는 언젠가 한 번 보았던 모든 코, 콧수염 또는 소금 알갱이 등에 대한 분리된 사례기호를 가지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런 수많은 대상들을 부여된 부류 기호들에 맡겨보자. 그래서 우리가 콧수염을 기른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 세심히 검토하지 않으면, 새로운 사례기호를 각인하지 않고도 간단히 그 “콧수염” 부류기호를 활성화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개체들을 구별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상이한 사람들에게 분배된 유일한 부류기호 (예를 들면 “인물”) 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다. 분명히 개별적인 사람마다 때에 따라 각각의 사례기호들이 따로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이 마술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즉 상이한 (개체 고유의) 활성화 양상들 사이에서 유일한 부류기호가 이리저리 움직임으로써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면 웃기는 일이다.
그러나 그 극단들 사이에는, 다양한 종류의 중간 단계의 경우들에 대한 여지가 있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두뇌 속에서는 부류와 사례 사이의 차이를 창출하고 그렇게 해서 다양한 등급의 구체성을 가지는 기호들 및 기호의 조직을 허용하는 방법론의 위계질서가 있을 것이다. 기호의 개별 활성화와 공동 활성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방식이 다양한 구체성의 등급에 대한 정신적인 이미지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 :
(1) 유일한 부류기호의 활성화의 상이한 양상 및 심도 ;
(2) 어떤 협동적인 방식을 통한 다양한 부류기호들의 동시적인 활성화 ;
(3) 유일한 사례기호의 활성화 ;
(4) 상이한 부류기호들의 활성화와 연계된 유일한 사례기호의 활성화 ;
(5) 통제된 방식을 통한 상이한 기호부류들과 상이한 사례기호들의 동시적인 활성화.
이것은 우리를 다시 다음과 같은 문제로 인도한다 : “기호는 언제 두뇌의 식별 가능한 하위체계인가?” 예를 들면 두번째 보기 ? 어떤 통제된 방식을 통한 다양한 부류기호들의 동시적인 활성화 ? 를 보라. 그것은 “피아노 소나타” 가 적절한 개념 (“피아노” 와 “소나타” 에 대한 기호들은 적어도 두 개의 활성화된 기호이다) 일 경우에는 쉽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호쌍이 종종 충분히 연계되어 활성화되면, 우리는 이 둘을 적절한 방식으로 같이 활성화시키면 마치 단일체처럼 행동할 정도로 그 둘 사이의 연결이 충분히 강력하다고 가정해도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둘 또는 그 이상의 기호들은 적절한 조건 아래에서는 하나로 행동할 수 있다. 즉 그것은 두뇌 속의 기호의 수효를 열거하는 문제가 언뜻 보기보다는 훨씬 난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는 연관이 없던 두 개의 기호를 동시에 제어하여 활성화시키는 조건들이 종종 나타날 수 있다. 그 조건들이 마치 어쩔 수 없는 단일체를 만드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서로 잘 어울리면, 두 개의 낡은 기호들의 밀접한 교호작용을 통해서 새로운 단일기호가 형성된다. 이런 일이 생길 경우에, 그 새로운 기호는 “이미 늘 있어왔지만 결코 활성화된 적이 없었다” 고 말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 아니면 “창출 되었다” 라고 말해야 할까?그것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좀더 구체적인 보기로 “게 카논” 대화를 보도록 하자. 이 대화의 인벤션 부분에서는, 기존의 두 기호 ? “음악의 게 카논” 에 대한 기호 그리고 “언어적인 대화” 에 대한 기호 ? 가 동시에 활성화되어서 어떤 식으로든 교호작용이 이루어져야 했다. 이것이 일단 이루어졌다면, 그 나머지는 불식으로든 교호작용이 이루어져야 했다. 이것이 일단 이루어졌다면, 그 나머지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 즉 하나의 새로운 기호 ? 부류기호 ? 가 이 둘 사이의 교호작용으로부터 생겼고, 그때부터 독자적으로 활성화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늘 나의 두뇌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기호였는가? 그렇다면, 이제 그것은 심지어는 활성화되지 않았던 것이라 하더라도 그 성분기호를 가졌었던 모든 인간의 두뇌 속에 잠자고 있는 기호였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우리가 그 기호들을 누군가의 두뇌 속에 열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모든 잠자고 있는 기호들 ? 모든 알려진 기호들의 활성화 방식의 모든 가능한 치환과 결합들 ? 을 열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가 잠들었을 때 우리의 두뇌가 공상하는 소프트웨어 피조물이나 그 주인이 잠들더라도 깨어나는 관념들의 야릇한 혼합 등을 포함할 수도 있다. 이러한 “잠재적인 기호들” 의 존재는, 그것이 우리가 두뇌를 잘 정의된 활성상태에 있는 기호들의 잘 정의된 수집으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호층위에서 두뇌의 상태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각 두뇌에 존재하는 거대하고 꾸준히 증가하는 기호의 레퍼토리를 보면서, 우리는 결국 두뇌가 포화상태, 즉 더 이상 새로운 기호를 위한 공간이 없는 지점에까지 오지 않았나 의심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아마도 기호들이 결코 서로 중첩되지 않으며, 승강기에 탄 사람이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할 정도로 뉴런이 이중 기능을 하지 않는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다 : “조심하라구 : 이 두뇌의 정원은 최대 350,275 개의 기호를 저장할 수 있어!”그러나 이것은 두뇌기능의 기호 모델의 필연적인 특징은 아니다. 사실 기호들은 중첩되고 완전히 뒤엉켜 있기 때문에, 모든 뉴런은 유일한 기호의 구성성분이 아니라, 아마도 수백 개의 기호의 기능적인 일부분이다. 이것은 사태를 좀 복잡하게 만든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개별적인 뉴런이 모든 유일한 기호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기호들은 결코 공간상으로 자리매김될 수 없다. 모든 기호는 전체 두뇌와 동일시된다. 이것은 래슐리가 쥐의 대뇌피질을 제거한 실험과 동일한 결론인 동시에, 두뇌가 물리적으로 상이한 하위체계들로 분할된다고 보는 우리의 원래 착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앞서 기호를 “개념들의 하드웨어 실현” 으로 규정한 것은 기껏해야 지나친 단순화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모든 기호가 실제로 모든 다른 기호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뉴런들로 구성되었다면, 상이한 기호들을 언급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한 특정한 기호의 활성화를 위한 서명은 어떻게 되는가 ? 즉 기호 A 와 B 의 활성화는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이론이 수포로 돌아가지는 않을까? 비록 기호들의 총체적인 중첩은 없더라도, 기호들이 중첩될수록 우리의 이론은 유지하기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중첩되는 기호들을 재현하는 하나의 가능한 방법에 대해서는 그림 68 을 참조하라.)

그림 68 이 그림에서는 뉴런을 한 평면에 분포된 점들로서 표상한다. 두 개의 서로 중첩되는 뉴런 경로들은 상이한 회색 농도로 재현되었다. 그래서 두 개의 서로 무관한 “신경사격” 은 마치 연못 표면의 작은 소용돌이 (그림 52) 처럼 이 두 궤도를 동시에 이리저리 헤집고 다닌다. 그것은 공동의 뉴런을 가지며 심지어는 동시에 활성화될 수 있는 두 개의 “활성적인 기호” 의 개념을 보여준다 [출전 : 존 C. 에클스, 「현실세계에 대하여 (Facing Reality)], (New York, Springer Verlag, 1970 년, 21 쪽)].
심지어 기호들이 물리적으로 전반적으로 중복된다고 하더라도, 기호에 토대를 두는 이론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 하나 있다. 여러 다양한 유형의 크고 작은 파도를 만드는 연못의 수면을 관찰해보라. 하드웨어, 즉 물 그 자체는 이 모든 경우에 다 동일하지만, 그것은 상이한 흥분 양상을 가진다. 동일한 하드웨어로부터 나오는 그런 상이한 소프트웨어 자극은 서로 구별될 수 있다. 이러한 유추를 통하여 모든 상이한 기호들이 물리적으로 상이한 기호들로의 그 어떤 의미 있는 영역분할도 허용하지 않는 단일형의 신경상의 매체를 통해서 확산되는 다양한 종류의 “파장” 이라고 강변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기호의 활성화를 다른 기호의 활성화와 구별하고자 한다면, 발포하는 뉴런들의 자리매김뿐만 아니라, 그 뉴런들의 정확한 발포시점에 대한 세부사항까지도 규명하는 과정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즉 어떤 뉴런이 다른 뉴런에 선행하고 또 어느 정도나 그러한가를 의미한다. 특정한 뉴런들은 1 초에 몇 번이나 발포하는가? 아마 그런 식으로 상이한 기호들이 동일한 뉴런 집합 속에 존재할 텐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경상의 상이한 발포 패턴을 가지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상이한 기호들을 가지는 이론과 그들의 흥분의 방식을 통하여 구별되는 중첩되는 기호들을 토대로 한 이론과의 차이는, 전자의 것은 개념을 하드웨어로 실현한 반면에, 후자의 것은 부분적으로는 하드웨어를, 부분적으로는 개념의 소프트웨어를 실현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두뇌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사고과정의 실타래를 푸는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남는다. 첫번째는 낮은 층위의 뉴런발포의 소통이 어떻게 기호 활성화라는 높은 층위로 상승하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다른 문제는 높은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기호 활성화의 소통에 대해서 설명하는, 즉 낮은 층위의 신경상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 후자의 문제가 가능하다면 ? 그런데 그것은 현재 인공지능에 대하여 동원되는 모든 연구의 토대이다 ? 두뇌와는 다른 유형의 하드웨어로 된 지능이 실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능은 자신이 자리잡는 장소인 하드웨어로부터 “상승될 수 있는” 속성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능은 소프트웨어 속성일 것이다. 이것은 의식과 지능이라는 현상들이 대부분의 다른 복잡한 자연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실은 동일한 의미로 높은 층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 현상들은 낮은 층위들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상승하여” 높은 층위의 고유의 법칙들을 가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뉴런의 모든 하드웨어 (또는 시뮬레이션된 뉴런들) 없이 기호를 격발하는 패턴을 실현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지능이란 두뇌에 속박된 현상인 동시에, 다양한 층위의 법칙들의 위계질서 덕분에 존재하는, 파헤치기 아주 어려운 현상임을 암시한다.
여기에서 개미 한 마리의 두뇌에 있는 약 10 만 개의 뉴런 정도로는 개미집의 구조에 대한 정보를 분명히 제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거대하고 복잡한 건축물을 구축할 수 있는 개미 군락의 신비스런 집단행동의 법칙들의 위계질서로 돌아와보자. 그 개미집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정보는 “어디” 에 자리잡고 있는가? 예를 들어 그림 69 의 활 모양을 기술하는 정보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숙고해보자. 그 정보는 군락 전체 카스트 분포, 나이 분포 그리고 아마 대부분 개미 몸체의 물리적 속성 자체의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 즉 개미들 사이의 상호 작용은 두뇌 안에 저장된 정보에서와 같이, 다리 여섯 개를 가진다는 속성, 크기 등에 의해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적인 개미 군락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림 69 마크로테르메스 벨리코수스 종의 불개미는 활 모양의 집을 짓는다. 이때 각 기둥은 흙과 분비물로 된 작은 공들로 건축된다. 왼쪽의 바깥에서 보면, 일개미가 분비물 덩어리를 어떻게 놓는지 볼 수 있다. 작은 덩어리들을 턱에 물고 다니는 다른 개미들은 이제 점점 더 커지는 기둥의 끝부분에 매달려 있다. 하나의 기둥이 일정한 높이에 도달하면 개미들은, 아마도 냄새에 의해서 유도되는 것 같은데, 상대편 기둥을 향하여 기둥의 방향을 일정한 각도로 튼다. 이런 식으로 완성된 활 모양의 집이 그림의 안 쪽에 있다 [그림 : 튜리드 흴더블러, 출전 : E. O. 윌슨, 「곤충 사회」(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년), 230 쪽].
한 기호가 다른 모든 기호들로부터 고립된 채로 활성화되는 것이 가능한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세상만물이 늘 다른 대상들의 맥락 속에 존재하듯이, 기호들도 늘 다른 기호들과의 조합과 결부되어 있다. 그렇다고 기호들이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좀 단순한 유추를 적용하자면, 한 종의 내부에서는 늘 숫놈과 암놈이 같이 탄생한다. 그들의 역할은 서로 완전히 얽혀있다. 그렇더라도 숫놈이 암놈과 구별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각각은 마치 인드라의 그물에 얽혀 있는 진주들처럼 서로를 반영한다. 제 5 장에서 설명한 함수 F(n) 와 M(n) 의 재귀순환 결합은 이 두 함수가 각각 고유의 특징을 가지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함수 F 와 M 의 결합은 서로 호출하는 RTN 의 쌍 속에 반영될 수 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ATN 의 전체 회로망으로 도약할 수 있다 ? 그것은 상호작용을 하는 재귀적인 처리절차들의 모순질서이다. 여기에서는 그 어떤 ATN 도 고립되어서 활성화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서로 맞물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성화는 전적으로 변별적이며, 다른 모든 ATN 의 활성화와는 혼동될 수 없다. 즉 두뇌를 하나의 ATN ? 군락으로 보는 것은 괘 쓸만한 생각이다!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기호들은 서로 여러 겹으로 얽혀 있으며, 서로 그물을 짜는 것이다. 이것은 신경망, 신경망 더하기 자극의 방식 또는 전혀 다른 방식이건간에, 그것에 대한 확인을 포함한다. 어쨌든 기호들이 현실의 일부분이라면, 아마도 기호들이 두뇌 속에서 확인되더라도, 그것들 각각이 고립된 채로 활성화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호가 고립되어서 활성화될 수 없다고 해서 기호의 분리된 정체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실은 그 정반대이다 : 한 기호의 정체성은 바로 자신이 다른 기호들 (잠재적인 격발 연계선을 통하여) 과 결합되는 방식에 좌우된다. 기호들이 서로 잠재적으로 격발하는데 동원된 기호가 각각 실제 우주에 대한 두뇌의 작동 모델을 제시하는 동시에, 그 우주를 감안하는 대체 우주에 대한 모델도 설명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현실 세계 바로 그 안에 있는 개체들의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다).
부류로부터 사례를 그리고 사례들로부터 부류를 만드는 우리의 능력은 지능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사고와 다른 동물들의 사고과정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이다. 물론 내가 언젠가 다른 종에 속했고 그 종이 느끼는 것을 직접 체험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면 그 어떤 다른 종도 우리와 같이 일반적인 개념들이나 가설적인 세계를 만들지 못한다. 즉 우리가 미래에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라는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주는, 존재하는 세계 그 자체의 변형을 만들지 못한다. 예를 들면 그 유명한 “벌의 언어” 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다른 벌들에게 꿀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일벌들이 정보를 함유하는 일벌들의 춤이다. 아마 모든 벌에서는 그런 춤으로 활성화되지는 일련의 초보적인 기호들이 숨겨져 있는 반면에, 벌 한 마리가 기호들의 확장가능한 어휘를 가진다고 믿을 수는 없다. 벌과 다른 곤충들은 일반화를 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 같지 않다. 즉 거의 우리의 수준과 동일하게 사례들로부터 새로운 부류기호들을 전개시킬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딘 울드리지는 그의 책 「기계 인간 (Mecharnical Man)」에서 고독한 말벌에 대한 고전적인 실험을 보고하고 있는데, 그것을 인용해보자 :
산란기가 오면, 스펙스 말벌 [이하 말벌] 은 산란하기 위해서 집을 짓는다. 그리고는 벌침을 쏘아서 죽지 않을 정도로 마비된 귀뚜라미 한 마리를 잡아온다. 그리고 귀뚜라미를 벌집 안에 밀어넣고는 그 옆에 알을 낳는다. 그리고는 벌집의 뚜껑을 닫고 어디론가 날아가서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얼마 안 가서 알에서 태어난 애벌레들은 벌집 안의 저온 덕분에 상하지 않고 보존된 그 귀뚜라미를 먹게 된다. 인간의 오성에 비추어보면 그와 같이 세심하게 조직되고 목적지향적인 행동은 자세히 따져보면 분명히 논리와 예지력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말벌은 마비된 귀뚜라미를 벌집으로 가지고 가서 문턱에 걸쳐 놓고, 뒤로 물러서서 혹시 그 귀뚜라미의 마취가 풀려서 도망가지 않는지 검토한 다음에야 귀뚜라미를 벌집 속으로 완전히 밀어넣는다. 말벌이 검토하는 동안에 귀뚜라미가 몇 센티미터 움직이면, 말벌은 벌집을 떠나려다 말고 귀뚜라미를 다시 벌집 안으로 밀어넣는 것이 아니라 다시 문턱에 걸쳐 놓는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는지 다시 점검한다. 만약에 말벌이 벌집 안에 있는 동안에 그 귀뚜라미가 다시 몇 센티미터 움직이면, 말벌은 다시 한번 더 귀뚜라미를 문턱에 걸쳐 놓고 마지막으로 점검한다. 말벌은 귀뚜라미를 곧장 벌집 안으로 밀어넣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절차를 무려 40 번이나 동일하게 반복하는 수도 있다.
이것은 완전히 고정배선된 행동처럼 보인다. 이제 말벌의 두뇌 속에는 서로를 격발하는 초보적인 기호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양한 사례들을 아직은 형성되지 않는 부류의 사례들로 간주하고 부류기호를 만드는 인간의 능력에 준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내가 만약에 이런 일을 했다면, 저 가상의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같은 질문을 던질 능력도 없다. 이러한 사고과정은 사례들을 만드는 능력을 요구하며, 마치 사례들이 ? 비록 그 상황이 존재하지 않거나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 어떤 실제의 현실의 상황에 있는 대상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호들인 것처럼 조작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친구에게 빌려준 자동차에 대한 만우절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면서 전화를 거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을 스쳐지나가는 이미지를 생각해보자. 일단 도로, 자동차, 자동차에 탄 사람을 표상하는 기호들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제 “도로” 라는 개념은 매우 일반적인 개념인데, 그것은 여러분이 잠자고 있는 기억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꺼낼 수 있는 다양한 재고품목들을 가지는 개념일 것이다. “도로” 는 사례라기 보다는 하나의 부류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여러분들은 점점 구체화되어 가는 사례기호들을 매우 신속하게 활성화한다. 예를 들면 도로가 젖었다는 말을 들었을 경우, 비록 여러분이 그 도로가 사고가 발생했던 실제의 도로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더라도, 그것은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기호가 전적으로 그 이야기와 잘 맞아떨어지느냐 ? 즉 그 이야기가 격발할 수 있는 기호들이 적절한 종류의 것인가 ? 의 여부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우리는 이 도로에 대한 여러 정황들을 추가한다. 예를 들면 자동차가 충돌했을 법한 높은 둑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제 우리가 “둑” 에 대한 우리의 기호를 활성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차라리 “도로” 에 대한 우리의 기호에 몇 개의 매개변수를 적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둘 다이다. 즉 “도로” 를 표상하는 신경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발포될 수 있고, 그러면 우리는 실제로 발포되어야 할 하위신경망을 선택한다. 동시에 우리는 “둑” 에 대한 기호를 활성화하는데, 이것은 그 과정의 뉴런들은 몇몇 뉴런에 대한 신호들을 “도로” 신호로 보낼 수도 있고 그 역도 가능하기 때문에, “도로” 에 대한 매개변수의 선택과정에서 도구로 이용된다 (이것이 좀 혼란스럽다면, 그 이유는 내가 이 기술층위들을 엄격히 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나는 기호들의 이미지는 물론 기호들을 형성하는 뉴런들의 이미지도 설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때 동사, 전치사 등이 낱말들도 명사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들 또한 교호적으로 메시지들을 보내는 기호들을 활성화한다. 동사와 명사 기호의 격발 패턴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물리적으로 좀 다르게 조직되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명사류는 어느 정도 명확하게 자리매김된 기호들을 가질 수 있는 반면에, 동사나 전치사는 두뇌피질의 전 영역에 분포되어 있어서 임의의 다른 모든 가능성을 가지는 “촉수들” 이 달린 기호들을 가질 수 있다.
그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알게 된다. 교회에 있는 놋쇠 조형물의 탁본을 뜨듯이, 우리는 부류들로부터 사례들을 “추출하는” 능력 덕분에 그 상황을 표상할 수 있으며, 현실세계에 충실하게 머물러야 할 필연성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켰다. 기호가 다른 기호들을 위한 판형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정신의 일정한 독립성을 부여할 것이다 : 이제 우리는 우리가 부여하고 있는 인공 우주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풍요로움을 만드는 부류기호 자체는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기호들은 통상 종종 일어날 수 없는 상황들을 표상하는 기호들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나타날 듯이 보이는 사건들에 못지 않은 중요성을 가진다. 예를 들면 뜨거워서 줄줄 녹아내리는 시계나 계란을 낳는 튜바 등을 들 수 잇다. 일어날 수 있는 것과 일어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는 아주 모호하다. 우리가 어떤 가상의 사건을 상상한다면, 우리는 일정한 기호를 활성화 상태로 보낸다 ; 즉 그것들이 얼마나 잘 상호 작용하는가에 따라서 (즉 우리의 사고과정을 지속시키는 노력에 반영될 텐데) 우리는 그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 거나 “일어날 수 없다” 고 말한다. 따라서 “가능하다” 는 표현과 “가능하지 않다” 는 표현은 방금 말했다시피 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물론 실제로 사람들은 무엇이 일어날 수 있고 무엇은 그렇지 않은 사건인가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견해가 일치한다. 이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상당한 양의 정신적인 구조들을 반영하지만, 우리가 즐기려는 가상 세계의 선택에 있어서 주관적인 측면이 나타나는 한계영역이 존재한다. 일어날 수 있는, 또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 가상적인 사건들의 종류를 세심하게 연구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사고할 때 사용하는 기호의 격발 패턴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기여할 것이다.
그 이야기가 완전히 끝났으면, 우리는 어떤 장면에 대한 그야말로 정교한 정신 모델을 가질텐데, 이 모델에서는 모든 대상들이 물리법칙을 따른다. 이것은 물리법칙들 자체가 기호의 격발 패턴 속에 함축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물리법칙” 은 “물리학자들이 표방하는 물리학의 법칙” 은 아니다. 그것은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 할 직관적인 응축된 법칙들을 말한다.
이때 기묘한 일면은 바로 물리법칙에 위배되는 사건들의 정신적인 연속체를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 두 대가 정면으로 마주 보고 달려오다가 서로 관통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도록 해라. 뭐,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때 직관적인 물리법칙들은 가상의 물리법칙들에 의해서 유린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력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런 이미지 연속이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지 그리고 도대체 어떤 시각적 이미지인지 ? 이 모든 것들은 베일에 가리워진 신비인 동시에 접근할 수 없는 지식의 영역이다.
따라서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무생물들이 행위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 인간과 사회 등과 같은 ? 달리 말하자면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 “응축된” 법칙들을 우리의 두뇌 속에 가진다. 그러한 실체들의 모든 내적인 표상들은 응축된 모델의 필연적인 속성을 가진다 : 결정론은 단순성을 위해서 희생된다. 결국 현실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추상적인 행동 공간의 특정한 영역으로 귀착되는 개연성만을 추측할 수 있다. 말하자면 물리학적 정확성으로 예측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인공지능에서는 절차적 (procedural) 지식과 정언적 (declarative) 지식을 구별한다. 어떤 지식이 있을 때, 그것을 프로그래머뿐만 아니라 프로그램도 “판독할” 수 있게 만든, 예를 들면 사전이나 연감에 실린 것처럼 저장되어 있는 지식을 정언적이라고 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국소적으로 코드화되어서 분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서 절차적 지식은, 사건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서만 코드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프로그래머는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 “나는 여기 이 절차들 때문에, 그 프로그램이 영어 문장을 쓸 줄 ‘안다’ 고 생각하지만, 그 프로그램 자체는 자신이 그 문장들을 어떻게 썼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의식을 가질 수 없다.” 예를 들면 그 프로그램의 어휘는 “영어”, “문장” 또는 “쓰다” 중의 어느 것도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절차적 지식은 통상 조각으로 분산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호출하거나 “고정” 시킬 수 없다. 이로부터 바로 그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방식은 어떤 국소적인 세부사항을 가지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른 말로 하자면, 순수한 절차적 지식이란 부수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토박이말 문법의 강력한 절차적인 표상과 더불어, 조금 약한 정언적 표상을 가진다. 이 둘은 서로 곧잘 갈등을 일으켜서, 토박이말의 화자는 그 자신은 결코 말하지 않을, 그러나 언젠가 학교에서 습득한 “정언적 지식” 과 일치하는 내용을 외국인에게 가르칠 경우가 있다. 이전에 언급되었던 물리학이나 다른 학문들의 직관적이고도 응축된 법칙들은 대부분 절차적인 영역에 속한다. 반면에 낙지가 여덟 개의 빨판 다리를 가진다는 지식은 주로 정언적인 지식에 속한다. 정언적 지식과 절차적 지식의 양극단의 사이에는 완충지대가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선율을 호출하는지 생각해보라. 선율은 음표 하나하나씩 두뇌에 저장되는가? 외과의사가 당신의 뇌에서 손상을 입은 신경섬유를 적출해서 펴놓으면 ? 마치 카셋트 테이프처럼 ? 그 위에 나란히 저장된 음표들이 확인되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선율들은 정언적으로 저장된 것이다. 아니면 하나의 선율의 호출 중의 몇몇은 조성 관계를 표상하고, 또 다른 몇 개는 정서적 특징을 가지며, 그리고 또 다른 것들은 리듬의 개별 사항 등을 표상하는 많은 기호들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매개되는 것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선율은 절차적으로 저장된 것이다. 아마 선율이 저장되고 호출되는 방식에서는 실은 이 두 가지 양극단의 방식이 적절하게 조화되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기억으로부터 선율을 호출할 때 조를 기억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산토끼 토끼야” 를 다장조로 부르기도 하고 라장조로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절대적인 조성보다는 오히려 조를 이루는 음들의 관계들이 저장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조성들 사이의 관계가 어째서 전적으로 정언적으로 저장될 수 없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일정한 선율은 기억하기 매우 어려운 반면에, 아주 쉽게 기억되는 선율들도 있다. 연속적인 음표들이 저장되는 경우라면, 그 어떤 선율도 쉽게 저장될 수 있다. 일정한 선율은 배우기가 용이하지만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은, 두뇌가 선율을 들을 때 활성화되는 익숙한 패턴에 대한 일정한 목록을 가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 선율을 “거꾸로 연주해도” 이 패턴들은 동일한 순서로 활성화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정언적으로 저장된 음들의 간단한 선형적인 연속이나 조성들 사이의 관계 보다는, 교호적으로 격발하는 기호들의 개념으로 되돌아온다.
두뇌는 지식이 정언적으로 저장되었는가의 여부를 어떻게 아는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묻는다고 해보자 : “부산 광역시의 인구는 얼마나 되는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왠지 한 400 만쯤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 “치, 어떻게 모든 사람을 셀 수 있겠어?” 또 다른 질문을 보도록 하자 : “당신의 거실에는 의자가 몇 개나 있는가?” 그러나 여기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정신적인 연감에서 그것을 찾아내서 대답하기보다는, 방으로 직접 가서 의자를 세거나 방을 머리에 떠올린 다음 기억하는 의자의 수를 세게 된다. 이 질문들은 모두 “몇 개나 있지?” 라는 동일한 유형의 질문에 해당하지만, 첫번째 질문에는 정언적 지식을 동원해서 대답하게 되고, 두번째 질문의 대답에는 절차적 지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식을 분류하는 지식을 어떻게 운용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보기이다. 그런데 바로 이 메타 지식의 무엇인가는 절차적으로 저장되었을 것이며, 그래서 절차적이라는 것이 전혀 의식되지 않고도 쓰인다.
의식의 속성 중에서 가장 놀랄 만하고 기술하기 가장 어려운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시각 이미지 처리이다. 우리는 거실에 대한 시각 이미지를 어떻게 창출하는가? 물이 졸졸 흐르는 산골짜기의 시냇물의 이미지는? 또는 감귤은? 더욱더 신비스런 경우로, 우리에게 사고를 인도하고 그것에 힘과 색채와 깊이를 부여하는 이미지들을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산출하는가? 그것과 관련되는 지식이 어떤 창고로부터 운송되어 나오는가? 우리가 해야 할 것을 거의 알려주지 않고도 둘 또는 세 개의 이미지를 복합하는 마술은 무엇인가? 우리는 정신적인 이미지 처리에 대한 통찰을 거의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이 지식은 그야말로 가장 절차적인 지식이다.
아마도 이미지 처리과정은 신체 운동기관의 활동을 억압하는 우리의 능력에 기인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 우리가 제주도 감귤을 상상하면, 우리의 대뇌피질에는 손으로 집어내어서 냄새를 맡고 검사할 수 있는 일정한 수의 명령들이 활성화될 것이다. 물론 감귤이 실제로 눈 앞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명령들은 실행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명령들은 소뇌나 두뇌의 하부기관에 이르는 통신로를 따라가며, 어느 결정적인 지점에서 명령의 실제적인 실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신 속의 “수도꼭지” 가 막힐 때까지 계속 보내질 수 있다. 그것이 이 “수도꼭지” 로부터 얼마나 떨어졌는가에 따라서, 이미지들은 현실처럼 생생하거나 좀 덜 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 분노는 종종 아주 생생한 이미지를 야기하여 어떤 대상을 취하거나 내팽개치게 한다. 물론 실제로 그런 짓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실제 거의 그렇게 한다고 느낀다. 아마 수도꼭지가 바로 “마지막 순간” 에 신경자극을 붙잡았나보다.
접근 가능한 지식과 그렇지 못한 차이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다른 방법이 있다. 산길을 오르다가 미끄러져버린 자동차의 광경을 어떻게 시각화할지 생각해보라. 물론 우리는 산이 자동차보다 훨씬 더 크다고 상상할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언젠가 오래 전에 “자동차는 산만큼 크지는 않다” 는 것을 때때로 배웠고 이 명제를 외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상상했을 때 여러분은 이 사실을 호출해서 여러분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이용했는가? 후자의 견해가 훨씬 그럴 듯하다. 자동차가 산보다 작다는 지식은 외어서 얻은 지식이 아니라, 연역을 통해서 생성될 수 있는 지식이다. 따라서 당신의 두뇌 속의 특정한 개별 기호속에 저장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예를 들면 “비교하다”, “크기”, “자동차”, “산” 및 아마 그밖의 것들에 대한 많은 기호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생성될 수 있다. 이것은 그 지식이 명시적이 아니라 함축적으로 저장되었고, 어떤 장소가 할당된 국소적인 “정보 꾸러미” 속에 저장된 것이 아니라 분산되어서 저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상들의 상대적인 크기로서의 그런 간단한 사실들은 단순히 호출된다기보다는 조합되어야 한다. 따라서 언어적으로 접근 가능한 지식의 경우조차도, 말해질 수 있는 상대로 매개되는 복합적인 접근 불가능한 과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기호” 라고 불리는 속성에 대한 연구를 다른 장에서 계속할 것이다. 인공지능을 다루는 제 18 장과 제 19 장에서는 활성적인 기호를 프로그램에 사용하는 몇 가지 가능한 방법을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는 기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토대로 한 두뇌활동 모델을 몇 가지 다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