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버트 위너 : 사이버네틱스의 세계

과학혁명의 지배자들 : Ernst Peter Fischer 저서, 이민수 옮김, 양문출판사 (742-2565), 2002 (원서 : Leonardo, Heisenberg & Co : Piper Verlag GmbH, 2000), Page 181~192

 

심각한 건망증의 소유자

새로운 과학 사이버네틱스

제 2 차 세계대전과 사이버네틱스

학제간 연구의 중요성을 간파하다

지식인과 자연과학자

 

노버트 위너 (Nobert Wiener, 1894 ~ 1964) 는 천재였다. 그는 열다섯 살에 입학해 열아홉 살이 되기도 전에 형식논리학에서 대수학의 상이한 형식을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소년 시절 위너는 자신의 전공인 수학 외에도 생물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이런 학문적인 노력 역시 열매를 맺었다. 이런 사실이 그가 어려운 주제를 다루었고, 어린 나이에 박사모를 썼다는 사실보다 더 인상적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사에 열심이었던 위너는 자신의 연구에만 일방적으로 매달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을 매혹시킨 학문들을 연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유명한 사이버네틱스 (cybernetics) 를 실현시켰다. 사이버네틱스는 제 2 차 세계대전 후 과학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 분야가 조용해졌지만 말이다.

활기 넘치는 20 대 과학자 위너는 비록 A 부터 Z 까지는 아닐지라도 A 부터 U 까지의 단어를 포괄하는 백과사전을 별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손쉽게 쓸 정도로 박학했다. 예를 들어 대수학 (algebra) 과 미학 (aesthetics) 에서 시작하여 통각 (apperception) 과 의미 (meaning), 형이상학 (metaphysics) 과 영혼 (soul), 무한성 (unlimitedness) 과 보편성 (universality) 등에 대하여 다루는 백과사전 말이다.

그 외에도 이 조숙한 젊은이는 여러 언어를 배웠는데, 그중에는 독일어가 있었다. 1914 년 위너가 괴팅겐에 왔을 때 독일어는 그가 학문적 영역을 확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특히 힐베르트의 강의를 듣고 그의 기본 원리에 대해 더 많이 배우도록 만들었다. 위너는 1920 년대에 정기적으로 1 년에 한번 독일을 방문했다. 당시 독일은 이론물리학의 중심지였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수학구조가 발전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너 자신이 그런 수학구조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위너가 가장 선호한 체류지는 늘 괴팅겐이었고, 그곳에서 막스 보른과 함께 일했다 (그들의 첫 만남은 재미있었다. 탄탄한 장학금을 받는 미국인 위너가 점심에 학교 식당에서 소시지가 하나씩 들어간 빵 두 개를 샀지만, 어찌 된 일인지 두 장의 소시지를 넣은 빵 한 개를 먹고 있는 보른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심각한 건망증의 소유자

위너가 유럽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당시 그는 벌써 보스턴 근교에 있는 전설적인 MIT 의 교수로서 인생을 바칠 자리를 찾았다. 사실 전세계 엘리트 대학의 대명사인 MIT 는 위너의 연구로 더욱 유명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너는 이곳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전세계 곳곳에 있는 유수의 대학에서 그에게 객원교수직을 제의했다. 그는 그중 중국, 멕시코, 인도, 소련의 제의를 받아들였으며, 세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일을 즐겼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가 미국이 아닌 외국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은 논리적으로 타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너는 1964 년 3 월 18 일 스톡홀름에서 눈을 감았다.

위너의 세계 여정은 1894 년 11 월 26 일 미주리에 있는 컬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 태생인 아버지 레오는 이곳에서 슬라브어 교수로서 첫 직장을 잡았고, 그때 위너가 태어났다. 40 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천재였던 아버지 레오는 위너가 태어난 후 뉴잉글랜드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레오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자신이 교육시켰다.

아버지의 천재성은 아들에게 고스란히 유전되었다. 위너는 세 살 무렵 이미 읽고 쓸 수 있었고, 열 살에는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치렀다. 레오는 이런 사실을 러셀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조숙한 발전의 결과나 비범한 재능의 결과가 아니라, 불필요하게 방향을 전환하는 일없이 집에서 이루어진 세심한 교육의 결과' 라고 썼다.

실제로 레오의 교육 방식은 매우 독특했다. 그는 열 살배기 아들에게 6 개월 동안 글을 읽지도 쓰지도 말라고 요구했다. 그 기간 동안 교육은 오직 입으로만 이루어졌고, 위너는 모든 것을 암기해야만 했다. 사실 이런 특별한 방식은 전적으로 교육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의사의 충고대로 아들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위너는 시력을 더 잃지 않기 위해 수술을 받았고, 시력을 유지하고자 도수 높은 안경을 계속 써야 했다).

레오는 그의 일상을 가족과 함께 그토록 정확하게 계획했지만, 막상 아들 노버트는 대학이라는 울타리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거의 몰랐다. 위너는 아버지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일에 있어서 지독하게 서툴렀다. 그는 산만한 교수의 전형적인 유형인 듯했다. 게다가 그의 건망증은 수많은 일화를 낳았다. 그중 MIT 교수 시절의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자.

어느 날 위너는 연구소를 나와 점심을 먹으러 가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절친한 수학자를 만났고, 두 사람은 거리에 서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몇 분 동안 대화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 위너는 친구에게 물었다. 자기가 어느 방향에서 왔는지 기억하고 있느냐고 말이다. 친구는 카페테리아 방향을 가리키며 그쪽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위너는 "그렇다면 내가 뭔가를 벌써 먹었겠군." 하며 주저없이 연구소 방향으로 다시 돌아갔다.

두 번째 일화. 어느 해 위너의 가족은 이사하고자 했다. 그의 아내와 두 딸이 모든 일을 맡았고, 위너가 한 일은 옛 집의 열쇠를 돌려주고 새 열쇠를 받는 것이었다. 아내는 열쇠를 새 집의 주소를 적은 쪽지와 함께 그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위너는 저녁에 습관적으로 예전에 살던 집으로 가서는 새 집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물론 쪽지를 읽으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위너는 헛된 노력을 거듭한 후 거리를 방황했다. 날이 서서히 어두워지자 그는 완전히 절망했다. 그때 길거리에서 두 명의 아이를 만나 그는 조심스럽게 위너 교수의 가족이 어디에 사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두 아이는 "물론이지요, 아버지." 라고 대답하고는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

새로운 과학 사이버네틱스

그는 일상의 단순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 했지만, 차원 높은 수학은 마치 유희하듯 가볍게 다루었다. 특히 우연적인 과정에서 등장하는 확률의 문제가 그의 과학적인 상상력을 증폭시켰으며, 연구의 능률을 극대화시켰다. 위너는 확률 부분에서 수많은 독창적 기여를 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너는 주어져 있는 구조나 부여받은 신호 지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우연적 상황인가 아니면 중요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에 집중했다. 이런 차이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위너는 제자 섀넌과 공동으로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대를 알린 한 가지 개념을 소개했다. 그것은 '정보' 와 '정보 시대' 라는 개념이다. 섀넌과 위너의 목표는 전자 스위치 회로에서 통신으로 전달된 '정보' 를 측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1942 년, 그들은 이 정보처리의 단위를 'binary digit' 의 약어인 'bit' 로 확정한다.

위너는 정보와 통신을 중요시했다. 1948 년 뉴욕에서 출판된 그의 주저 《사이버네틱스》는 새로운 과학의 기초를 다졌으며, 그 제목은 새로운 과학의 명칭으로 수용되었다. 사이버네틱스에서 주용한 개념이 무엇인지는 이 책의 부제 '동물과 기계에서 제어와 통신' 에 잘 나타나 있다. 사이버네틱스 학자들은 체계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는 제어의 관점으로 세계를 관찰한다. 그리고 사이버네틱스는 기계 및 인간을 위해 중요한 두 가지 기본 단위인 '시간' 과 '정보' 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제공하고자 한다. 위너는 특히 사이버네틱스의 도움으로 피드백 시킨 정보이론을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 정보이론은 체계를 가장 바람직한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제어한 수학의 모든 공식이 이런 방법에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최초에 사이버네틱스의 기본 이념은 '거의 공통점을 찾지 못한 전문분야 간의 상호연구' 라는 생각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것은 1940 년대의 시류에 대체로 들어맞는 것 같다. 1940 년 독일 기술자인 헤르만 슈미트는 공학 및 생리학의 기본 문제인 '제어 기술' 을 발전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헤르만 헤세는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의 서문에서 다음 시대의 예술사와 과학사에 시선을 던졌다.

음악의 가치를 분석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음악적 과정을 물리학적이며 수학적 공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후 언어학도 이 방법으로 연구를 시작하여 물리학이 자연현상을 측량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언어에 나타난 현상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건축기술 방면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수학과 관계를 맺고 있는 조형미술이 연구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과정에서 얻은 추상적 공식 사이에서 언제나 새로운 관계와 규범, 일치된 현상을 발견했다.

제 2 차 세계대전과 사이버네틱스

헤세는 "목표된 발전은 정신적인 도덕과 정직이라는 공동의 원칙을 요구하고, 학과와 범주의 혼합을 더 이상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했다. 분명한 점은 이와 고나련하여 위너가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사이버네틱스에서 여러 과학의 만남을 장려했고, 이 일을 체계적으로 추진시켰다.

이미 오래전에 절판된 《사이버네틱스》에 시선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놀랍게도 몇 쪽에 걸친 방대한 수학 공식과 만나게 될 것이다. 위너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수학적 기호가 적합한 언어로 적용될 수 있는 대상들과 관계해야만 한다. 이때 수학적 기호는 대상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 길 게 바꿔 쓴 수학적 기호는 이미 형식언어를 잘 알고 있고, 그걸 기반으로 이렇게 기호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너의 말 속에서 우리는 갈릴레이가 수학적 형식언어만이 자연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강조했을 때, 그가 전적으로 옳았다는 확신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편 위너는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과학이 삶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줄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 같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수학의 엄격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로부터 도망 다니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제 2 차 세계대전은 위너의 사이버네틱스가 좀더 구체적인 형식으로 드러난 시기였다.

1940 년 8 월, 영국 주변의 전선에서 독일 공군이 우위를 점해 가자 연합군은 이들의 공격에 대응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MIT 에서 일하고 있던 위너는 연합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전쟁 연구에 돌입했다. 우선 그는 비행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당시 상대 전투기나 폭격기를 겨냥한 방어용 미사일이 목표물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20 초 정도였다. 하지만 이때 목표물 도달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위너는 2 년 동안 야심적인 '대공 조준 산정기 (anti-aircraft predictor)' 를 설계했지만, 그 기능은 결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군사적 상용에 실패한 이 기계는 비 전투적으로 이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사이버네틱스 연구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일단 기본 문제점을 좀더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적군 비행기의 궤도를 계산하는 것이었다. 적군의 전투기는 온갖 비행술로 비행 궤도의 계산을 방해했을 것이다. 위너는 이런 상대를 두고 '마니교적 악마' 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때 상대의 태도는 우연과 불규칙성이 아니라, 책략과 술수로 특징지어진다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는 선악의 급진적인 이원주의를 설교했고, 어둠의 제후가 빛의 신을 이길 것을 기대했다).

위너는 이런 마니교적 악마에 대안을 '아우구스티누스적 악마' 라고 불렀고, 오랫동안 이 주제에 몰두했다. 그리고 조종과 조종장치, 예측 가능성과 조정 가능성이 관건인 학문을 창시한 위너에게 '무질서' 는 평생의 원수가 되었다. 인생의 말년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위너는 그를 수십 년 동안 흔들었던 중요한 문제를 분명하게 밝혔다.

우주의 질서와 유기적 조직을 발견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쉬지 않고 연구한다. 그들은 불구대천의 원수, 즉 무질서에 맞서 싸운다. 이런 악마는 마니교적일까 아니면 아우구스티누스적일까? 다시 말해 질서에 반대하는 적대 세력인가? 혹은 질서의 부재 자체인가?

학제간 연구의 중요성을 간파하다

앞선 단락의 마지막 인용문을 읽다보면, 마치 사이버네틱스가 방향이 잡힌 질서를 천사로 변화시킬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위너는 일을 그렇게 단순하게 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사이버네틱스가 '위험한 심해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진보라는 이념의 해도의 도움으로 우리의 진로를 추적하는 것' 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을 '살과 피로 이루어진 기계' 로 간주하고 올바른 질문을 했을 경우에만 사회적인 결정을 위탁할 수 있는 '금속 기계' 와 대립시키는 정도까지 사이버네틱스 개념을 발전시킨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인간의 태도와 인간의 정신적인 능력을 인공지능적인 자기 제어의 역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너에게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많은 과학자들은 이런 프로그램을 실제 받아들였다.

여하튼 '프로그램' 이 관건이었다. 21 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 단어는 대체될 수 있는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생각나게 한다. 오늘날 이 개념은 일반적으로 명확하게 다가오지만, 위너는 1950 년대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당시 독자들에게 이 개념을 상세하고 분명하게 설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천공 테이프나 마그넷 테이프를 통해 제어장치에 들어온 정보를 조합하기 위해 기계의 작업 과정을 결정하는 데이터들' 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수학자가 기계를 그렇게 자세히 연구했는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근거를 들자면, 위너는 어린 시절부터 역학기계를 가지고 놀았고, 다른 아이들이 그의 생각과 지시에 따라 각 부분을 나사로 연결했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그는 훗일 육체적인 작업을 대신 할 기계뿐 아니라, 정신적인 과제를 풀 수 있는 기계임을 확신했다. 위너는 전자식 데이터 처리와 컴퓨터의 광범위한 도입에 대해 '두 번째 산업혁명' 이란 표현을 썼다. 그는 "문명은 우리가 깊이 생각할 필요없이 실행할 수 있는 주요 연산을 통해 진보한다." 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앞서 밝힌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이유 외에 과학적인 설명도 가능하다. 그것은 '학제' 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학제간 연구는 사람들의 관심을 주목시킨 천재 위너의 다양한 관심의 결과일 것이다.

1933 년, 위너는 멕시코의 생리학자 아르투르 로센블루트를 알 게 되었을 때, 과학은 학제간 연구를 추진할 때에만 미래가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또한 그는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이념에 철학을 포함시켰다. 왜냐하면 그는 과학의 진보가 철학의 도움으로 올바른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로센블루트는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헝가리계 출신이고, 파리에서 공부했으며, 하버드에서 첫 연구를 시작했다. 위너는 그의 도움으로 생물체가 생리학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배웠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몇몇 사람들을 더 규합해 신호 전달, 통신, 소리, 정보, 피드백, 정보의 암호화, 기계의 자동제어, 목적론 등을 주요 주제로한 학제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의식적으로 '목적론적 사회' 라고 명명했고, 생물학, 심리학, 생리학, 철학, 수학 등에 대해 논의했다. 이제 후일 '사이버네틱스 사이클 (cybernetical cycle)' 로 불린 그들의 모임이 이룬 성과를 소개하겠다.

처음에 이들은 전달된 신호가 분리될 수 있는 '소리' 와 '정보' 라는 두 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시간열의 미래 값을 예측할 수 있는 필터를 만들었을 분 아니라 오늘날은 일상어인 '입력 (input)' 과 '출력 (output)' 의 개념을 만들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두뇌의 연산을 계산기계의 연산과 비교하기 위해서 공동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추구된 과제 중 몇 가지만 열거했을 뿐이지만, 이런 짧은 목록이 들끓는 몇 년 동안 현대 사고의 방향과 기술의 방향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실제 모든 이념이 성공적으로 실천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이버네틱스 사이클의 위대한 업적은 문제가 끔찍하게 복잡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을지라도 종종 참된 문제를 찾아냈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면 감각기관에 손상을 입은 사람을 위해 적당한 인공 보장구를 만드는 어려움을 말할 수 있다. 위너는 일찍이 감각기관을 대신할 인공 보장구가 적합한 물리적인 신호를 느끼는 능력 외에 대상의 원형을 지각하는 문제도 해결되었을 때에만 기능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를 위해서는 그가 말한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

크기, 위치, 방향에 상관없이 정사각형을 정사각형으로 지각하는 역학은 무엇인가.

그 외에도 위너는 누구보다도 먼저 인공 보장구가 인간과의 상호 피드백 (feedback) 으로 작동해야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지식인과 자연과학자

분명히 모순적이지만, 한편으로 위너는 장애인을 도울 수 있는 기계에 대해 숙고했고, 다른 한편 적을 죽일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다. 사이버네틱스는 두 가지를 가능하게 했다. 위너는 이것을 《사이버네틱스》서문에 명백하게 밝혔다.

우리는 새로운 과학, 즉 선과 악이 모두 가능한 기술적 발전을 내재한 과학의 도입에 기여했다. 우리는 그런 기술적인 발전을 주위에 존재하는 세계로 계속 전달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벨젠 (독일 첼레의 북서쪽에 위치한 벨젠 마을 근처에 나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가 죽었다 - 옮긴이) 과 히로시마이다. 우리는 결코 이런 새로운 기술적 발전을 막을 수 없다. 진보는 이 시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책임감이라고는 없는, 돈으로 움직이는 기술자의 손에 진보를 맡기지 않도록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중이 현재 연구의 방향과 상황을 이해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1947 년, 위너는 이 글을 '거의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않은 채' 써내려갔다. 1950 년, 그는 왜 자신이 희망을 가질 수 없었는지를 사이버네틱스와 사회의 관계를 분석한 《인간의 인간적 유용성 Human Use of Human Beings》에서 소개했다. 또한 그는 《지식인과 과학자 Intellectual and Scientist》에서 10 년 후 두 개의 문화로 분리되어 대립하게 될 사회적 양상에 대해 예견했다. 이들 영역 사이에 결핍되어 있는 균형을 위너는 이렇게 말했다.

소통은 사회의 모르타르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소통의 통로를 방해받지 않고 유지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던 사회가 대부분 문화의 존속과 붕괴에 관련되어 있음을 보아왔다. 불행하게도 소통의 사제들은 서로 다른 원칙을 위하여 투쟁하고, 다른 가르침을 가진 교단과 종파로 나뉘어져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두 교단 중 하나는 지식인과 정신과학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과학자들이다.

나는 자연과학과 기계시대에 대한 지식인들의 적대적인 입장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대적인 태도는 긍정적인 것이고 건설적인 것이다. 그리고 기계시대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에서 적극적이고, 사려 깊은 반작용을 필요로 한다. 오히려 나는 기계시대에 관심을 거의 두지 않는 태도 때문에 지식인들을 비난한다. 그들은 자연과학과 새로운 기술의 핵심을 자세하게 알 필요가 있으며, 기계시대에 직면해 좀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 그들의 태도는 증오에 차 있지만, 그런 적대적인 태도가 무언가 행동하도록 자극할 정도는 아니다. 그들에게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현재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어떤 의식적인 태도보다도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별로 변한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