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뇌는, 컴퓨터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가?
- 괴델과 펜로스 -
인간지능의 수수께끼 : James Trefil 지음, 마도경 옮김, 현대미디어 (323-4483), 1999 (원서 : Are We Unique ? : A Scientist Explores the Complexity of the Human Brain, John Wiley & Sons, 1997), Page 257~280
엔지니어, 물리학자, 수학자가 길을 가다가 불길에 휩싸여 있는 건물을 보았다. 불길은 겉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고 소방대장이 그들에게 다가와 도움을 청했다.
엔지니어는 곧 빌딩의 설계도를 보자고 한 다음, 소방대장에게 특별명령을 내렸다. "이 창문에 분당 엄청난 물을 쏟아붓고 지붕에도 엄청난 물을 쏟아 부으세요. 그러면 불길은 곧 꺼질 겁니다." 소방대장은 그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물리학자는 일주일 후 『진화작업에 관한 일반법칙』이라고 쓴 작은 책자를 들고 소방본부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 책자를 소방대장에게 건네주면서 이것을 대원들의 훈련과 작업에 도입하라고 권했다. 소방대장은 감사하다고 말했다.
수학자는 6 개월 후 두툼한 종이뭉치를 들고 소방본부를 불쑥 찾았다. 그는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날리며 소방대장의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면서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드디어 성공했소!" "무엇을요?" 소방대장이 물었다. "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디어 증명해냈소!" - 무명의 한 대학원생 -
만일 누가 컴퓨터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두뇌에게는 가능한 일을 꼽아보라고 하면 나는 아마 감정과 느낌 등을 떠올릴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통 "창의적" 또는 "예술적" 이라는 말로 언급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내가 결코 생각해보고 싶지 않은 분야는 이른바 "수학의 기초" 라는 분야이다. 이 분야는 지식세계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엄격한 문제를 다루는 분야이다. 하지만 캠브리지 대학의 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두뇌가 컴퓨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증거를 발견하게 될 곳은 결국 이 분야이다. 그의 『황제의 새로운 정신과 정신의 그림자들 : The Emperor's New Mind and Shadows of the Mind』은 의식을 둘러싼 논쟁 속에 전혀 새로운 요소를 주입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이 PART 에서 그 요소에 대해 자세히 다룰 것이다.
그러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비록 생애의 대부분을 이론 물리학에 파묻혀 살아왔지만 사실 이 PART 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수학적 논증은 싫어한다. 내가 아는 다른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처럼 나 역시 직관적으로, 구상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며 직관적으로 옳다고 느껴지는 것은 정석에 입각한 논증기법을 사용하여 증명 (또는 반증) 하기를 좋아한다. 나에게는 형식에 얽매인 수학적 방법을 쓴다는 것이 꽉 막힌 도로를 운전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불가피하다면 할 수 없지만 분명히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나는 이런 사실을 정확히 언제 깨달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나도 이론 물리학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 다른 사람들처럼 학부시절에는 물리학과 수학을 복수로 전공했었다. 스탠포드 대학원에 진학할 때도 계속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에 수학과정에 등록했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면 오늘날 수학계의 현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수학자들이 계산에
필요한 도구들을 개발하는 데 헌신했던 시절이 있었다. 대수학, 평면 기하학, 미적분
등이 모두 그런 노력의 결실이며 19 세기에 개발된 더욱 난해한 계산기법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작업을 수행했던 수학자들은 근대과학의 발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고급수학 교재 속에는 그들의 이름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런데 20 세기에 접어들면서
수학자들이 근대과학과 관계도 없고 추상적 세계에 불과한 형식적인 논리 시스템
속으로 빠져들면서 이런 거룩한 동반자 관계는 사라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간혹
물리학자들이 그 세계에서 이론을 빌어오는 경우 (예컨대 근대 통일장 이론 따위)
도 있기는 하지만 두 학문 사이에 격의 없이 흐르고 있었던 옛날식의 우정은 사라져
버렸다. 물론, 새파란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이런 사정을 전혀 알 턱이 없었다. 따라서
나는 강의 중에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도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
강의 첫날,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어떤 공식의 해답을 증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충전된 물체의 근처에서 일어나는 전기장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알려진
공식이었다. 그 공식은 내가 (다른 물리학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 여러 번
풀었던 공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에 조금 놀랐다.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당한 수의 여성들이 과학계에 몸담기 전에 우리가 신물나게 들었던 조크, 이른바
"남자들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으로 시작되는 우스갯소리를 소개했다.
"사람들은
어떤 충전된 물체의 근처에 또 전하를 둔다면 한 가지 속도로, 한 방향으로만 움직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이 (전기장) 공식에는 분명히 어떤 해답이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말을 할 때에는 웃느라고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후에 나는 학계 일부에서는
이런 종류의 조크가 최고수준의 유머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당시 그의
말에서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강의가 계속되면서 나는, 교수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같은 "증명" 이라는 말을
물리학자와 수학자가 상당히 다른 의미로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에게 있어 충전된
물체가 움직인다는 개념은 거기에 전기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명이다. 내가 어떤
물체를 낙하했을 때 그것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거기에 하나의 중력장이 존재한다는
증명인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수학자에게 증명이란 어떤 기본적이고
자명한 이치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결론을 향해 논리적인 단계를 한번에 하나씩 밟아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당신도 고등학교 기하시간 때 이같은 증명을 배웠던 기억이 날
것이다. 내가 방금 언급한 강의에서 그 교수는, 자신이 나름대로 해석하고 정의내린
증명을 개발하는 데 무려 10 주를 소비했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지금 이런 종류의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나는 또한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응용가치가 없는 일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같은 학기에 앵글로 - 색슨의 연대기를 원문으로 읽는답시고 친구와 함께 고대 영어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쓸데없는 짓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에게 있어 형식적인 수학논증은 빨리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싶은, 그런 어려운 일 중 하나라는 것뿐이다.
당신도 같은 생각일지 모른다. 게다가 이같은 수학논증은 경우에 따라서 상당히 전문적인 측면을 수반하기도 한다. 이른바 괴델 (체코슬로바키아 태생의 미국 수학자, 논리학자 - 옮긴이) 의 정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해 우회로를 마련해두었다. 시시콜콜한 내용을 갖고 씨름하고 싶지 않은 독자들은 다음 PART 의 박스 기사를 건너뛰어도 된다. 그래도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밖의 사람들은 안전 벨트를 조이고 긴장해주기를 바란다.
1900 년, 프로이센 태생의 위대한 수학자인 데이비드 힐버트는 한 수학자 회의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열린 이 모임의 성격에 맞추어 수학계에서 아직 해답을 얻지 못한 23 가지 문제들을 열거했다.
이들 문제 중 일부는 상당히 전문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13 번 문제는 어떤 함수로는 7 차대수 공식을 풀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가 하면 일부문제, 예컨대 논리적인 공리의 기초에 물리학을 접목시킨 6 번 문제 같은 것은 다소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내가 "모호하다." 고 표현한 것은 이런 시도가 물리학 같은 실험과학에서 지니는 의미를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는 새로운 측정수단이 개발되고 수행되면 한때 진실이고 명백했던 것도 바뀔 수 있다. 하지만 힐버트는 이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물리학은 물리학자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어려운 학문" 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힐버트가 제기한 문제
중에는 그 후에 풀린 것들도 있고 풀리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가 제시한 목록에서
2 번 문제는 결과적으로 수학의 세계를 완전히 뒤바꾼 중요한 것이었다. 힐버트는
산수에 적용되는 공리들이 자신의 표현대로 "조리가 정연한지 (상호모순이 없는지)"
를 알고 싶어했다. 그 후 이런 일은 수학 시스템에 의해 도출된 어떤 주장 (답) 이
참 또는 그릇인지를 가릴 수 있는 "단계적인 해결책 혹은 방식" (수학자들은
"앨거리즘" 을 이렇게 표현한다.) 을 찾는 작업으로 정의되었다. 그런
방식을 탐구하는 일은 곧 "힐버트 계획" 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이
개념을 좀더 쉽게 파악하기 위해 당신이 고등학교 시절에 받았던 기하학 수업을 회상해보라.
당신은 그때 배웠던 평면 기하학이 참으로 간주되는 11 개의 공리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것에 동일한 값을 가진 것들은 서로 동일하다는
공리 따위) 당신은 이런 방식으로, 예를 들어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180 도"
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푸는 방식도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옛날
우리에게 이 문제를 푸는 방식을 가르쳐주었던 호크 선생님이 생생히 기억난다. 힐버트의
문제는 평면 기하학보다 훨씬 복잡한 방식으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돼
있다.
만일 1 세기 전, 엄숙한 회의장에 모인 그 수학자들에게 힐버트의 문제에 대한 답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면 그들은 압도적으로 "그렇다." 고 대답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수학적 주장은 참 아니면 그릇, 둘 중에 하나라는 명제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태는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20 세기 지식사에서 가장 놀랄 만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간과되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일반적인 지식인 사회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문제들의 징후가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영국의 철학자 버트랜드 러슬이 1902 년 패러덕스를 주제로 한 책을 출간한 후였다. 이 패러덕스에는 그 후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 패러덕스를 묘사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다.
당신은 서재에 가서
그곳에 있는 모든 책들을 훑어보고 있다. 어떤 책들에는 제목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책들도 있을 것이다. 제목과 별 연관성이 없는 책들의 목록을
뽑은 다음, 그것을 묶어 또 한 권의 책을 만든다. 제목은 『본문 속에 제목이 나오지
않는 도서목록』쯤으로 붙이면 될 것이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는 힘들겠군?)
자,
이제 문제가 주어진다. 당신은 이 제목을 새로 만든 책의 본문 속에 수록해야 하는가?
글쎄, 당신이 만일 그 제목을 새책의 본문 속에 넣는다면 당신은 본문 속에 제목이
들어가 있는 책을 한 권 가진 셈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의 핵심주제는, 제목이
언급돼 있지 않은 책만 목록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그러나 당신이 『본문 속에 제목이 나오지 않는 도서목록』라는 제목을 새로운 책의
본문 속에 넣지 않는다면 그 책은 자체의 제목을 담지 않은 셈이 된다. 따라서 이것은
새로운 책에 담긴 리스트 속에 추가해야 한다. 당신이 어떻게 하든 이것은 불가능하다.
패러덕스란 바로 이런 것이다.
1905 년 프랑스의 수학자인 줄스 리처드는 비슷한 종류의 패러덕스집을 출간했다. 이 책은 대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지금은 "리처드의 패러덕스" 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리처드와 러슬의 패러덕스는 모두 정상적인 논리규칙에는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금세기 초만 해도 리처드와 러슬의 패러덕스는 수학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힐버트 계획이 완성되면 이런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무시해 버리고 싶어한다고 느낀다.
1931 년, 비쩍 마르고 안경을 쓴 빈 출신의 청년 쿠르트 괴델이 「수학의 원리와 시스템 중에서 공식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명제들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수학의 원리』는 러슬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함께 저술한 수학논리에 관한 책의 제목이다.) 이 논문은 수학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월간 수학 및 물리학 논문집」에 15 쪽에 걸쳐 빽빽한 글씨로 발표한 이 논문에서 그는, 힐버트 계획은 불가능하며 수학적 방식에 상호모순이 없으려면 적어도 증명이나 반증 중의 어느 하나가 가능한 주장을 하나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요즘 우리는 이 주장을 흔히 괴델 주장이라고 부른다.
괴델의 주장에 대한 내용은 뒷장에 상세히 나와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기 위해 상세한 내용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 괴델의 논문에서 "범퍼 스티커" 식의 결론을 이끌어내자면 아무리 복잡한 수학 시스템도 불완전하든지 모순이 있든지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완전하다." 라는 말은 모든 주장들이 증명 또는 반증될 수는 없다는 뜻이며, "모순이 있다." 라는 말은 한가지 수학적 주장을 동시에 증명하고 반증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괴델의 어떤 수학 시스템에 모순이 없으려면 그 시스템 내에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주장이 적어도 하나는 담겨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내 주장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증명할 수 없는 그 주장이 바로 참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괴델의 정리에 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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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의 논문 중에서 첫 (그리고 가장 전문적이고 난해한) 부분은, 기존의 수학 시스템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명제에 어떤 숫자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할애돼 있다. 당신은 모든 진술들을 그냥 죽 적고 그것에 숫자를 붙여 세는 것이 왜 불가능하다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정말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과 내가 절대 진정한 수학자가 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당신은 하나의 진술에 두 개의 숫자가 부여되는 상황에 바지지 않고 그 진술들을 순서대로 적어내려갈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어쨌든 이같이 숫자를 부여하는 작업은 대단히 중요하다. 리처드의 패러덕스는 결국 숫자의 의미에 관한, 미묘하지만 본질적인 착각에 의해 초래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10 + 2 = 12" 라는 진술에서 "10" 의 의미와 "이것은 10 번 명제이다." 라는 진술에서 "10" 의 의미 사이에서 일어나는 혼동에 의해 좌우된다. (보라, 정말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가?) 괴델은 "이 진술은 증명할 수 없다." 는 진술, 즉 자체의 증명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진술을 분석했다. 이 진술은 기술적인 이유로 다음과 같은 말로 바뀌었다. "몇 번, 몇 번 하는 식으로 숫자가 부여된 진술은 증명할 수 없다." 이 내용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진술은 증명할 수 없다." 는 진술을 "진술 A" 로 이름붙여보자. 괴델은 논문의 결론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증명했다.
이제 다 끝났으므로 한두 개의 핵심 포인트를 지적하고자 한다. 괴델의 작업은 이른바 "건설적인" 증명이 아니다. 우리가 진술 A 라고 불렀던 것을 제외하면 그는 당신에게 증명할 수 없는 진술을 찾아내는 방법도 일러주지 않는다. 수학의 세계에는 모든 사람들이 참이라고 여기지만 아무도 증명하지 못한 가설들과 추측이 아주 많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진술들과 씨름하는 수학자들은, 이것들이 영원히 결코 증명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마음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형태의 진술사례는 이른바 "골드바하의 추측정리 (Goldbach Conjecture : 2 보다 큰 모든 짝수는 2 개의 소수의 합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 아직 증명되지 않은 정리 - 옮긴이)" 이다. 이것은, 모든 짝수는 2 개의 소수의 합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소수란 자신과 1 로만 나눌 수 있는 숫자를 말한다. 예를 들어, 3 과 17 은 모두 소수이다. 골드바하의 추측정리의 실제적인 예는 "3 + 17 = 20" 이라는 진술이다. 이제까지 이런 식으로 기술할 수 없는 짝수 (20 같은) 를 발견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발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던 사람도 없었다. 이것은 이 추측 정리가 괴델식 진술이기 때문일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두 번째 중요한 점은 괴델의 정리가 특정한 형태의 공리 시스템에 내포돼 있는, 독특한 성질에 관한 진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평론가들이 그런 것처럼 이것을 이성의 종말 또는 일종의 우주적 인식의 필요성에 대한 허튼소리에의 유혹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
1960 년대에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인 쟌 루커스가 처음 제기하고, 앞에서 소개한 로저 펜로즈의 저서에 의해 증폭되면서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괴델의 정리는 여기에서 핵심적인 주제로 등장했다.
우리는, 펜로즈가 실제로 두 가지 주장을 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중의 하나는 여기에 소개돼 있으며 다른 하나는 뒷부분에서 펜로즈의 추측이라는 소제목으로 논의할 것이다. 이 두 가지 테마가 같은 책 속에 서로 얽혀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두 주장은 서로의 진실에 영향을 주지 않고도 그릇된 진술이 될 수 있다.
괴델의 정리는 우리에게 수학적 진술 중에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인간은 어떤 진술을 보고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기본전제로 삼고 있다.
컴퓨터가 어떤 진술이 참인지 틀렸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본적인 공리에 바탕을 둔 논리적이고 단계적인 사고를 수행하는 방법, 즉 앨거리즘을 단계적으로 적용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괴델 정리의 핵심은, 수학에는 이런 작업이 불가능한 명제, 즉 기본적인 공리에 바탕을 둔 논리적인 사고로 주장해봐도 그것이 참인지 오류인지가 가릴 수 없는 진술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두뇌는 참인지 오류인지를 가릴 수 있지만 앨거리즘을 수행하는 튜링 기계의 경우에는 반드시 가릴 수 없는 진술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두뇌가 컴퓨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은 분명해진다. 우리가 PART 10 에서 "기능적 차이에 근거를 둔 주장" 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사실, 펜로즈는 이 주장을 주로 이른바 "강력한 AI (인공지능)" 이론을 논박하는 방편으로 사용했다. 이 이론은, 두뇌는 하나의 튜링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디지털 컴퓨터이고 정신은 하나의 프로그램 혹은 컴퓨터 운용에 적용되는 앨거리즘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강력한 AI 이론은, 두뇌는 할 수 있지만 튜링 기계는 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하면 분명히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루커스 - 펜로즈의 주장은 인간의 지능과 의식에 관한 기계적이고 컴퓨터에 미친 견해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이런 견해에 대한 반박은 지체 없이 구체화되었다. 실제로 펜로즈는 자신의 논문을 공격한, 무려 20 여 건에 이르는 반론에 대해 자신의 저서 『마음의 그림자 : Shadows of the Mind』를 통해 상세하게 반박했다.
그의 논문에 대한 대부분의 반론은 인간이 어떻게 어떤 문제를 증명할 수 없는지를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를 들어, 순전히 형식논리로만 따지면 우리가 괴델의 이론이 참 또는 오류라고 판단할 때 사실논리 체제의 바깥으로 나가 그것을 뒤돌아보고 있는 셈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이런 사고행위를 "초 수학적 논리 (수나 함수 같은 수학적 개념의 자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이론 - 옮긴이)" 라고 부른다. 여기서 컴퓨터는 왜 이와 똑같은 일을 할 수 없을까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이런 종류의 반론은 문제의 핵심을 비껴나가고 있는 것 같다. 본질적으로 두뇌가 괴델의 이론이 참인지 오류인지를 판단하는 방식은 컴퓨터에 의해 사용되는 것보다 훨씬 큰 논리체계에 담겨 있는 앨거리즘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루커스 - 펜로즈 주장의 핵심은, 당신은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당신은, 두뇌가 앨거리즘에 바탕을 두고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또 다른 반론은, 두뇌는 괴델의 이론이 참인지 오류인지를 모르지만 단지 추측할 뿐이라는 개념과 관련돼 있다. 당신은 물론 추측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으므로 둘 사이의 차이점은 곧 사라진다. 논쟁은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이런 반론은 좀더 미묘하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도 이 문제가 장구하고 고상한 철학적 전통을 가진 문제라는 것에 동의하리라고 확신한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펜로즈는, 컴퓨터가 실제로 어떤 진술이 참인지 오류인지를 추측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이 정답을 말하기 전에는 그 추측이 정확한지를 알 수 없다고 지적한다. 물론 이때 우리는, 인간은 또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라는 최초의 문제로 되돌아가게 된다. 논쟁은 다시 시작된다.
가까운 장래에 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해 합의를 할 수 있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 문제는 지각행위와 관련된 두뇌의 기능을 규명할 수 있어야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감안하면 루커스 - 펜로즈의 주장은 정확히 처음의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이것은 인간의 두뇌는 수행할 수 있지만 디지털 컴퓨터는 수행할 수 없는 일 (이 경우에는 괴델의 이론이 참인지 오류인지를 판별하는 일) 이 하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두뇌는 디지털 컴퓨터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괴델의 이론 "전체" 가 진실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상황에 적용되는 논리가 이렇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어떤 논리 시스템에서든 그런 이론을 증명하는 사례 한 가지만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두뇌는,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증명으로서 충분하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미묘한 점을 지적해야겠다. 나는 지금까지 설명해오면서 "컴퓨터" "튜링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같은 단어들을 동의어처럼 사용해왔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앞에서 '튜링 기계는 확정된 지시문, 혹은 프로그램에 따라 테이프에 담긴 정보를 한 번에 1 비트씩 바꾸는 가상의 기계' 라고 설명했었다.)
이런 기계 (컴퓨터) 는 논리적인 단계, 혹은 앨거리즘을 따라 어떤 주장들을 증명할 것이다. 따라서 다른 논리 시스템과 똑같은 한계를 지닐 것이 분명하다. 루커스 - 펜로즈의 주장의 핵심은, 튜링 기계는 그런 논리도구만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괴델의 이론이 참인지 오류인지를 판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 - 튜링적인 컴퓨터를 상상해볼 수도 있다. 예컨대, 돌발적인 소음, 혹은 우주에서 오는 광선이나 기타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이따금씩 당신의 컴퓨터를 뒤흔들고 그 속에 담긴 프로그램을 바꿀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컴퓨터가 수행하는 작업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루커스 - 펜로즈의 주장은 이런 경우에도 반드시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두뇌가 분자의 바다 속에 존재하는 화학적 시스템이고 분자들은 신체의 다른 부위에서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감안하라. 또 이런 분자들이 두뇌의 기능을 바꿀 수 있으며 실제로 바꾼다는 사실을 감안하라. 그러면 두뇌를 하나의 비 - 튜링적인 기계로 보는 개념에는, 일리가 있다. 그런 기계는 물론 루커스 - 펜로즈의 주장에 지배받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나중에 다시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루커스 - 펜로즈의 주장이 진정으로 두뇌와 표준 컴퓨터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를 건드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논리적인 정연함이라는 이점을 갖고 있지만 나에게는, 우리가 흔히 인간의 독특성을 논할 때 생각하는 핵심 포인트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 내가 겼었던 경험을 한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옛날 내가 아내에게 구애하던 시절에 일어났던 일이다. 우리는 시카고의 한 레스토랑에 갔다. 나는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면서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 동안 배워왔던 어떤 물리학적인 또는 수학적인 지식보다 확실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때 내 머리 속에 흐른 정확한 생각은 '안돼, 이러면 안 되는데.'였다.)
AI 추종자들도 바로 이런 식으로 튜링 기계를 움직이는 앨거리즘이 어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을 확신시키려면 엄청나게 고생해야 할 것이다.
두뇌는, 컴퓨터가 아니라는 이론 (이것은 적어도 일부 사람들을 만족시켰다.) 을 확립한 펜로즈는 실제로 둘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 이유까지 제시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우리는 현재의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는 두뇌를 이해할 수 없으며 아마 양자역학의 기본원리와 관계된 새로운 학문을 개발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것을 펜로즈의 추측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펜로즈 추측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 전에 두어 가지 핵심적인 사항을 짚어보겠다.
첫째, 펜로즈의 추측과 루커스 - 펜로즈의 주장은 같은 책 안에 뒤죽박죽 섞여 있지만 이 둘은 서로 연관성이 없다. 다른 말로하면 펜로즈의 추측이 오류이면서 동시에 두뇌는 여전히 컴퓨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둘째, 펜로즈의 추측은 이론 물리학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은 두 가지 커다란 문제 - 한편으로는 양자역학과 세계와의 관계, 또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장 이론 - 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이 두 가지 문제 중 어느 것도 상세히 설명할 만한 공간이 없다. 하지만 두 가지 주제를 다룬 책은, 내가 쓴 것을 포함하여 아주 많다.
물리학자가 평범한 크기의 물체에 관해 논할 때는 흔히 뉴턴의 고전역학을 인용한다. 당구공의 충돌을 연구해보면 우리는 뉴턴 식 세계의 모습을 상당히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뉴턴의 역학은 사물들을 힘, 질량, 속도의 관점에서 설명하며 앞으로 일어날 현상에 대해 정확히 측정하고 예측할 수 있다.게다가 뉴턴의 세계에서는 피측정물을 변화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물체의 현상 - 예를 들면 위치 등 - 을 측정할 수 있다. 은하수에서부터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자욱한 방 안의 연기입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리적인 현상을 뉴턴의 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원자에 관해 토론하려는 물리학자는 이와는 철저하게 다른 분야, 즉 양자역학을 이용한다. 양자역학이 뉴턴의 역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측정하는 행위가 피측정물의 형태를 바꾼다는 것에 있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어떤 사물의 위치를 측정하는 행위는 터널 속을 달리는 차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서 그 안으로 다른 차를 들여보내 두 차가 충돌하는 소리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이런 식으로 측정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터널 속의 차가 측정 이후에도 이전과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자의 세계와 우리의 일상 세계와의 사이에는 이런 기본적인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양자역학에서 전자와 같은 물체는 "파동함수" 라고 불리는 질량의 관점에서 설명되며 사용되는 어휘도 확실성보다는 개연성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전자에서 커다란 입자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양자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펜로즈의 핵심주장은, 두뇌의 활동원리는 순수한 뉴턴의 역학과 순수한 양자역학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단계에 해당하는 과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펜로즈의 추측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두뇌의
기능에 대한 진정한 규명은 어떤 식으로든 이 중간영역의 물리학 (아직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과 연결돼 있다.
두 번째 부분에는 이러한 연결이 형성돼 있는 방식에
관한 추측이 포함돼 있다. 그는, 우리가 완전한 통일장 이론 - 과학자들은 이것을
TOE 이론 (Theory of Everything :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 이라 부른다
- 덕분에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뉴턴 역학의 세계에서 양자역학의 세계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물리학자들이 자연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힘을
이해했듯이 중력의 힘을 성공적으로 규명한다면 그 결실로서 얻는 이론은 당연히
두 세계의 간극을 이어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펜로즈의 추측의 세
번째 부분에서 그는 세포의 특정구조, 즉 미소관 (세포의 원형질에서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관 - 옮긴이) 이 새로운 과학의 효과가 스스로 마무리할 곳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통일장 이론에서 세포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일거에 설명하는 획기적인
주장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런 계획에 대해 약간의 회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이것은, 내가 한 가지 문제 (양자역학) 에 대한 해결책이 또 다른 문제 (의식) 도 해결할 것이라고 믿기에는 자연의 옹고집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펜로즈의 추측은 명확히 진술되어 있으며 검증할 수도 있다. 지금 이론의 "목" 이 실험대 위에 확실히 올라 있으니 우리는 그냥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두고 보면 된다.
그러나 잠시 펜로즈의 추측이 철저하게 정당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가정해보자. 두뇌는 실제로 컴퓨터가 아니다. 그 이유는 두뇌가 고전역학, 양자역학, 그리고 통일장 이론이 결합된 새로운 과학의 법칙에 따라 활동하기 때문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우리는 인간의 독특성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일단 통일장 이론이 밝혀졌다고 가정하고 우리가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사이의 간극 속으로 자신만만하게 전진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잠시 생각해보자. 펜로즈가 옳다면 우리는 분자 및 세포의 차원에서 두뇌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두뇌를 기존의 자연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하나의 기계로 간주할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단지 그 기계는 디지털 컴퓨터가 아닐 뿐이다. 아마도 다른 무엇, 아직 상상력에 의해 그려지지 않는 무엇, 우리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여전히 자연의 법칙에 따라 활동하는 그 무엇이 될 것이다. 또 그 다음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사물의 작동원리를 발견하면 반드시 똑똑한 공학자가 나타나 그 지식을 이용하여 돈을 벌 수 있는 어떤 제품을 발명하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일단 우리가 펜로즈의 신과학이라는 관점에서 두뇌를 이해하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 신과학의 법칙에 따라 작동되는 새로운 종류의 기계 - 당신이 원한다면 "변형 컴퓨터" 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 를 발명할 것이다. 디지털 컴퓨터가 양자역학의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처럼 이 변형 컴퓨터는 변형 - 과학의 법칙에 따라 작동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현재의 위치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안고 있는 한편, 반대쪽으로도 여전히 인간 - 기계의 경계선을 찾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튜링 머신과 접해 있는 경계선이 아니라 변형 - 컴퓨터와 인간이 구분되는 경계선에 대해 골몰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그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새로운 과학에 대한 연구가 완성될 때까지 수십 년의 유예기간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