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문제

 

인간지능의 수수께끼 : James Trefil 지음, 마도경 옮김, 현대미디어 (323-4483), 1999 (원서 : Are We Unique ? : A Scientist Explores the Complexity of the Human Brain, John Wiley & Sons, 1997), Page 281~300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부정론자들

신비주의자들

유물론자들

유물론의 수용, 인간의 독특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인가?

 

우리는 드디어 핵심 이슈에 도달했다. 만일 두뇌가 진정으로 물리적인 시스템이라면 우리는 그와 똑같거나 그보다 나은 기계를 만들 수 있을까?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인간처럼 기능이 있는, 혹은 의식할 수 있는, 혹은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우선 이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에 대해 한마디하고자 한다. 우리가 PART 3 에서 동물의 지능에 대해 논의하면서 "지능" 이라는 용어를 적당히 구어식으로 사용하고 동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 것에만 집중하자는 데 동의했었다. 우리는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
"X 라는 동물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이것이다. 그 행동으로 봐서 X 가 지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당신이 판단하라."
나는 "의식" 이라는 문제를 논의하는 데도 똑같은 방식을 사용할 것을 제의한다. 나는 능력을 설명하는 데 몰두할 것이며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이든 그 일은 당신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이것이, 내가 아는 한 어휘의 늪에 빠져 일을 그르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PART 6 에서 소개한 "신경학적 프로그램" 이라는 개념을 당신에게 상기시키는 것으로 의식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것은 일종의 가상 프로그램으로서 여기에는 할리데이빗슨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할머니를 보는 것에서부터 산수문제를 푸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체험이 일일이 특정한 뉴런과 기능적으로 상호 연결돼 있다.

신경학적 프로그램이 완성됐고 당신은 "시야 가운데서 지금 그 부분의 청색을 볼 때는 1,472,999,321 번 뉴런이 신경신호를 발사하고 있다. 동시에..." 라고 쓰여 있는 (컴퓨터용 데이터베이스일 가능성이 더 크다.) 책을 손에 쥐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당신이 모든 정신적 경험, 아니면 적어도 그 중 대다수에 관해 이와 비슷한 설명문이 실려 있는 목록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의식의 문제는 매우 간단한 형태로 진술할 수 있다.

신경신호를 발사하는 뉴런의 활동, 청색을 보는 나의 경험 (아니면 다른 경험이라도 상관없다.) 과 청색을 보는 나의 의식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내가 청색을 볼 때, 혹은 할리데이빗슨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할머니를 볼 때 나는 신경신호를 발사하는 뉴런의 활동을 의식하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그런 특정한 영상 이미지에 대한 경험은 뉴런의 신경신호 발사활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 같다.
우리는 두뇌와 같이 철저하게 물리적 - 화학적인 시스템을 정신경험과 같은 비물리적인 현상과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을까? 다른 말로 하면 뉴런이 1,472,999,321 번 신경신호를 발사한 것과 청색을 보는 나의 "경험"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말이 나온 김에 나는, 우리가 이 문제에 답하는 방식은 기계와 동물의 의식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PART 10 에서 중국 방을 논의할 때 보았듯이 기계가 마치 의식을 가진 것처럼 기능을 발휘하더라도 그것이 기계에게 의식이 있음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기계가 어떻게 활동해야 "의식이 있다." 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침팬지에게 "의식이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바닷가재는 어떤가? 말미잘은? 우리가 이 문제에 관하여 어느 정도의 이해에 도달하고 그것을 인간두뇌에 적용하기 전까지는 기계 혹은 다른 동물들의 의식이라는 문제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모든 철학도들은, 데카르트가 남긴 이 유명한 말을 알 것이다. 당신은 이 말이, 데카르트가 이 세상에서 부인할 수 없는 것을 탐색한 결과임을 알 것이다. 그는 사고의 존재라는 견고한 기초를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체계를 구축했다.

토론의 목적을 위해 데카르트적 세계관의 핵심은, 한쪽에 육체적인 신체 (여기에는 두뇌도 포함된다.) 가 있고 반대쪽에는 비육체적인 정신이 있으며 이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있다는 관념이라고 하자. 이 이른바 정신-육체 이원론은 데카르트 이후 정신활동을 고찰하는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실제로 많은 철학자들은 세상에 대한 데카르트적 접근법에 대해 그동안 길고도 상세한 비평을 제기해왔다. 데카르트 철학의 뼈대에 담겨 있는 이같은 정신과 육체의 분리는 분명히 우리가 현재 두뇌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과는 그다지 들어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념이 인간의식이라는 문제에 유효하다는 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내 두뇌가 어떻게 기능을 발휘하든, 내 두뇌와 육체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든 한 가지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이유가 무엇이든, 어떤 과정을 거치든 나는 나의 두개골 속 어딘가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자아를 인식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의식에 관한 모든 이론이 극복해야 할 핵심적인 데이터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그 이론은 신경신호를 발사하는 뉴런의 집합체가 이 핵심적인 지각행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물론, 철학계에는 내가 방금 묘사한 경험을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증명될 수 없다는 이론이 있으며, 나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철학세계에는 유아론 (세상에는 자아만이 존재한다, 또는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학설 - 옮긴이) 이라는 학설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경험뿐이며 그밖의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불가능성을 극복하여 탄탄하고 논리적으로 증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일종의 말장난 - 대학교 2 년 생들의 자유토론이나 영국인 교수들의 논쟁에나 어울릴 뿐 현실생활에서는 그다지 신경쓸 필요가 없는 말장난 - 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두개골 속 어딘가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 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이 책을 팽개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신은, 내가 이런 관점에서 말하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사람들은 모두 비슷하고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에 기꺼이 동의한다면 우리는 논의를 계속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의식의 문제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 같은 시스템이 어떻게 자아에 대한 인식을 낳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귀착된다. 다른 말로 하면 물리적인 법칙 - 우리가 본질적으로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 에 따라 움직이는 물리적인 시스템이 어떻게 우리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경험, 즉 "자기인식" 이라는 경험을 낳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인간정신에 대한 현저한 견해차를 볼 수 있다.

이제까지 숱한 학자들이 인간의 의식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씨름해왔으며 실제로 그들이 내놓는 견해들을 보면 지극히 미묘한 차이가 있으면서도 매우 다양하다. 이런 모든 견해들을 몇 페이지의 지면에 요약하려는 시도는 매우 주제넘은 짓일 것이다. 대신, 나는 현대인의 지적 풍경화에 특히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견해들만 개략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부정론자들

일부 사상가들은 본질적으로 의식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으며 해결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들에게는 의식의 문제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들의 이론에는 일단 뉴런의 활동을 이해하면 더이상 설명할 것이 없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이들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학자는 아마 『의식의 설명 : Consciousness Explained』을 펴낸 철학자 대니얼 데니트일 것이다. 데니트는 인간의 의식에 특별한 측면, 이를 테면 두뇌에 관한 물리적인 지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낭만주의자로 치부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희한한 비유법을 사용하고 있다.

낭만적인 사랑 : 결혼한 상태에서의 사랑

 대

의식은 설명할 필요가 있다 : 의식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가 운이 좋아서 이 문장을 자기 부인에게 들키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데니트는 심리학, 특히 인지 심리학의 관점에서 인간두뇌의 활동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그는 예컨대 사람들이 빛의 색깔에 반응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관한 실험들을 장황하게 논의했으며 그 실험의 결과로부터 두뇌활동에 관한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스스로 "다단계 스케치" 실존론이라고 이름붙인 이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에 의하면 두뇌는 외부정보를 처리하면서 점진적으로 외부세계에 대한 개념을 더욱 상세히 형성한다. 이것은, 두뇌는 먼저 시야에 관하여 "신속하고 조잡한" 분석을 한 다음, 좀더 복잡한 분석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며, 마지막으로 최종적인 완전분석으로 작업을 완료한다는 이론이다. 데니트는 중간단계의 분석작업을 각각 "하나의 스케치" 라고 불렀으며 이 이론의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

나는 이 개념에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사실상 신경학적 프로그램이 완성되면 우리는 이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이 틀리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있을 수 있는 과학적 이론이다. 즉, 우리가 검증을 하여 참인지 오류인지를 밝히면 되는 이론인 것이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데니트가 의식의 문제에 접근할 때 나타난다.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약간 헷갈렸다. 중간쯤 읽었을 때 '이것 봐라? 이 친구는, 의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상당히 해괴한 견해로 보였기 때문에 나는 실제로 이 책을 일곱 번이나 읽었다. 그래도 나는 납득할 수 없었고 오히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데니트는 이런 느낌은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테지만 다른 학자들 (그 중 가장 저명한 학자는 「뉴욕 타임즈」의 서평 섹션에 북 리뷰를 기고한 존 시얼리를 꼽을 수 있다.) 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여하튼 의식의 문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일단 뉴런의 정체를 규명한다면 나머지 모든 것은 착각일 뿐이라는 주장은 물론 가능하다. 나는 이런 견해를 "부정에 바탕을 둔 주장" 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내가 이런 입장에 관련하여 느끼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과학자가 어떤 데이터에 접했을 때 그것을 가지고 이룰 수 있는 일은 많다. 당신은 그 데이터를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에 꿰맞추려고 할 수도 있다. 당신은 그 데이터가 부정확한 실험에서 도출된 것이기를, 그래서 나중에 수정되기를 바랄 수도 있다. 당신은 데이터를 무시하고 언젠가는 그것이 없어지기를 희망할 수도 있다. 그동안 많은 저명한 과학자들은 이 방식 가운데 하나를 취해왔다. 그러나 당신이 해서는 안 될 딱 한 가지 행동은 그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의 존재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사실은 내 머리 속의 어느 지점에서 이 세상을 관찰하는 "나" 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나의 두뇌활동과 뉴런의 신경신호 발사활동에 대해 얼마나 자세하게 장황하게 떠드느냐 하는 것은 관계없다. 당신이 의식의 문제를 풀어 나가려면 내가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물론, 의식의 존재를 부인하면 의식이라는 문제를 풀 수 없다.

내 경우, 데니트의 이론은 마치 트랜스미션의 기능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나서 이 세상에 자동차라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내가 "부정에 바탕을 둔 주장" 을 가장 빈번하게 접하는 곳은 신경과학자들과 토론하는 장소이다. 그들은 뉴런 활동에 관한 연구에는 그토록 몰두하면서도 의식에 관한 질문들이 제기되면 손을 한 번 휘젓고는 "아,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라고 말하면서 일축하기 일쑤이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의 일로 되돌아간다. 그들은 정확히 뉴런들이 하고 있는 일을 규명하는 데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어서 정작 그 다음에 제기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그러나 같은 철학자라도 철학적 마인드에 좀더 투철한 사람이라면 여기에 마땅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쯤은 인식할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뿐이다.

신비주의자들

그런가 하면 세상에는 의식의 문제는 풀 수 없는 문제라고 여기는 사람들, 즉 신비주의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의식의 존재" 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부정론자들" 과는 다르다. 그들은 단지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이 문제는 결코 규명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이 범주에 속하는 학자로는 샌터 크루즈에 위치한 캘리포니아 대학의 철학교수 데이비드 차머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정신 - 육체 이원론에 관한 논쟁은, 사람들이 끈질기게 뉴런 같은 물리적 시스템의 관점에서 의식의 문제를 규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난관에 봉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아마도 의식은 우주의 기본적인 (그러나 아직 규명되지 않은) 한 특성, 마치 전기나 질량처럼 물리이론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지만 그 자체는 결코 규명되지 않은 사물로 간주되기를 더 바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즉, 우주에 관한 어떤 물리 이론에도 측정은 되지만 규명되지 않은 특성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정통 고전역학에서 질량, 시간, 전기 따위의 양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을 측정하고 서로 비교하는 방식은 규정돼 있지만 이들 자체는 대단히 일반적이고 모호한 관점에서밖에 규정돼 있지 않다. 이들은 자연의 기본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우주의 모든 다른 특성들도 이것들의 관점에서 설명된다. 차머스의 견해는 의식도 이같은 특별한 개념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접근법에 대한 나의 두 번째 반론은 다소 주관적일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지금 "의식 게임" 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차머스의 방식은 미식축구 게임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게임을 몰수해버리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생각한다.

의식의 본질적인 불가해성에 관하여 이보다 더 난해한 주장을 편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러트거스 대학의 철학교수인 컬린 맥긴은 진화론적 주장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정신은 단지 이런 특정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의 기본적인 견해는 인간의 정신이 인간두뇌의 활동을 통제해야 할 진화상의 요인이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두뇌는, 우리가 바라는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을 정도까지 발달하지는 못했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문제는 이같은 견해를 19 세기에 양자역학에 대해, 또 18 세기에 전자기 이론에 대해, 또한 역사상 거의 모든 시기에 거의 모든 형태의 현상에 대해서도 제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당신은 이런 견해를 분자 유전학에도 쉽게 적용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우리는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 잘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인간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데도 잘 활용하고 있다. 왜 의식의 문제는 예외이어야 하는가?

그밖에 PART 7 에서 지적했듯이 두뇌는 일련의 단계 (나는 이것을 "진화적인 돌변" 이라고 칭했다.) 를 거쳐 현재의 상태로 진화했다. 이런 진화 시스템에서는, 특정기관이 특정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발달한 다음, 그것이 다시 다른 기능에도 적합한 것으로 드러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보다 고도의 정신기능을 수행하는 능력은 흔히 그것을 수행해야 할 필요성과는 무관하게 발달되어왔다. 예컨대 인간의 역사에서 우리의 생존이 음악을 작곡하거나 춤추는 능력에 좌우됐던 시기는 없었지만 우리는 이미 쉽게 그 두 가지 능력을 잘 발휘하고 있다.

끝으로 이보다 더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띤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인간의 정신을 다루는 데 있어 과학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우주에 커다란 "멈춤" 표지판, 즉 "여기까지만 허락함. 더이상 가면 안 됨." 라고 씌어 있는 표지판이 있는 줄로 알고 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를 비판하는 견해를 접할 때마다 언젠가는 이런 사람들이, 과학이 실제로 의식의 문제를 해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견딜 수 없는 나머지 과학적 방법의 한계를 추구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대답을 발견하고 자신들이 질색하는 결과에 직면하느니 차라리 대답을 모르는 편이 낫다는 식의 태도와 똑같다.

나는 이런 관점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문제에 대해 눈을 감는 태도로는 결코 해답을 얻을 수 없음을 지적하고 싶다. PART 1 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이런 학파에 대해 물리적인 우주에는 과학적 방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로 반박하겠다. 궁극적으로 이 점에 대한 나의 생각이 틀린 것으로 밝혀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런데서 지식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한때의 수수께끼들이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의 영역 아래로 들어오는 것을 많이 봐왔다. 따라서 의식이라는 전선에서 일어날 일을 추측하라는 것은 마치 경마장에서 두 번의 레이스에 한 번꼴로 우승한 말에 상금을 거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은 그 말이 이번 경주에서 우승할 것인지를 증명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말에 돈을 걸지 않는 것도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유물론자들

우리가 토론하는 목적을 위해 두뇌는, 우리가 아는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하나의 물리적인 시스템이며 모든 현상 (정신적인 현상도 포함하여) 은 궁극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유물론을 정의하고자 한다.

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스스로를 유물론자로 여기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 역시 스스로 이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프랜시스 크리크는 『놀라운 가설 : The Astonishing Hypothesis』에서 근대 과학자들이 인간두뇌에 관해 내놓은 것 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용의주도한 관점을 제시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놀라운 가설" 이란 다음과 같다.

당신의 기쁨과 슬픔, 당신의 추억과 야망, 개인적인 정체성과 자유의지에 대한 느낌은 사실 신경세포와 그것에 관련된 분자들의 대규모 조합이 작용한 결과에 불과하다. 루이스 캐럴의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를 의미한다. - 옮긴이) 에 나오는 앨리스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너는 한줌의 뉴런 덩어리일 뿐이야."

이 정도의 서론만 들으면 우리는, 크리크가 "두뇌는 컴퓨터요, 당신은 기계일 뿐이다" 학파에 소속된 완고한 유물론자라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자인 스티븐 와인버그의 설명에 따르면 크리크는 완고한 유물론자는 아니었다. 크리크는 실제로 장구하고 영예로운 영국의 전통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놀라운 가설"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영혼의 존재와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걱정했다.

나는 그의 생각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인간을 초기계적 존재로 보는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주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존재를 믿는 것 같지도 않은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게다가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두뇌는 물리적인 시스템" 이라는 표현에는 해석상 미묘한 차이가 많이 내포될 수 있다. 이런 주장 속에는, 인간은 결코 두뇌와 똑같은 기능을 가진 기계를 만들 수 없으리라는 견해가 쉽게 수용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유물론자라도 어떤 종류의 유물론자인지를 알아야 한다. 두뇌는 하나의 기계요, 우리의 의식은 단지 착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부류인가? 영혼 같은 비유형적인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부류인가? 두뇌는 일종의 컴퓨터요, 정신은 일종의 앨거리즘이라고 믿는 부류인가? 이런 여러 입장 (이외에도 많이 있다.) 들도 모두 유물론의 범주 속에 들어갈 수 있다.

유물론의 수용, 인간의 독특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인가?

나는 인간만이 지닌 유일하고 독특한 특성이 아직 남아 있는가,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특성은 그 동안 우리가 새롭게 발견한 동물들의 능력과 새롭게 터득한 컴퓨터 제작능력의 협공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 책을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동물의 정신능력과 인간의 정신능력 사이에 보다 명확한 경계선을 그을 수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우리는 또 표준 디지털 컴퓨터가 수행할 수 없는 특정의 정신적인 능력이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PART 11 에서도 지적했듯이 미래에도 그것이 수용될 수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의 핵심주제에 도달하고 있다. 두뇌를 물리적인 시스템이라고 쳐보자. 그렇다면 이 말은 두뇌가 기계에 의해 복제될 수 있다는 결론을 의미하는가? 이런 두뇌의 복제에 바탕을 둔 연구 프로그램을 "유물론적 프로그램" 이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이것은 우리가 PART 6 에서 정의한 "신경학적 프로그램" 을 빗댄 말이다.

우리는 유물론적 프로그램이 진행될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상해볼 수 있다. 우선, 인공 뉴런을 만들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이 인공 뉴런들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화학 및 물리의 법칙에 따라 활동할 것이며 여기에는 두뇌에서 발견되는 전기적이고 화학적인 신호발사 활동이 모두 포함돼 있을 것이다. 이런 가상적인 인공 뉴런이 진짜 뉴런이 수행하는 모든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주장은 계속 이어진다. 만일 한 개의 인공 뉴런을 만들 수 있다면 100 억 개를 못 만들 이유가 없다. 만일 이 인공 뉴런들을 하나의 복잡한 망 속에 얽어맬 수 있다면 비록 그 재료가 실리컨이 됐든 무엇이 됐든 당신은 두뇌와 동등한 기계를 만들었노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주장을 1 조 혹은 100 조 개의 뉴런을 가진 기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두뇌보다 훨씬 고도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계 (컴퓨터) 로까지 확장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일 것이다.

만일 당신이 실제로 그와 같은 기계와 맞부딪친다면 그것에는 지능이 없다, 또는 의식이 없다고 우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상관없이 그럴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것이 바로 유물론자들이 갖고 있는 궁극적인 꿈 (혹은 악몽) 이다.

여기에서 간단한 문제 하나를 제시하겠다. 두뇌가 물리적인 시스템으로 드러나면서 동시에 유물론적 프로그램을 실천할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까?

내가 지금까지 펼친 모든 주장, 내가 좇은 모든 논리는 하나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는 "그렇다." 가 정답일 것이라고 주장하겠다. 즉, 두뇌는 물리적인 시스템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위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한 시나리오는 결국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주장을 입증하려면 나는 먼저 내 자신이 의식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제시해야만 한다. 나는 일단 이 대답을 발견한 다음 두뇌에 관한 한 유물론자가 되면서, 그러나 여전히 기계가 결코 복제할 수 없는 인간만의 특성이 존재한다는 희망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려면 나는 두 가지 작업을 해야 할 것 같다.

첫째, 나는 새로운 종류의 과학, 즉 "복잡성의 과학" 에 대해 약간 설명해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종류의 과학에서는 다소 진부한 현상 "창발적인 특성" 의 한 예라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일단 이런 토대가 닦이면 두 종류의 주장을 제시하여 유물론적 프로그램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나의 결론을 뒷받침할 것이다. 그 중 한 가지는, 예전에는 이것만큼 탄탄한 이론으로 보였지만 오류로 드러난 역사적인 사례들을 약간 고찰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불가피한 것은 반드시 진실이어야 한다는 관념에 도전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나는 일단 이런 토대를 닦은 다음에 인간의 독특성을 담고 있는, 가능한 (그리고 바라건대 존중할 만한) 시나리오를 펼쳐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