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인지과학

 

바둑철학 : 박우석 (KAIST 인문사회과학부) 저, 동연출판사(3675-2122), 2002, Page 320~344

 

1. 전문용어 연구, 지식공학, 그리고 형식존재론

     1) 서론

     2) 존재론의 정의

     3) 최근 인공지능 연구에서 존재론이 부각된 까닭

     4) 전문용어 연구에 왜 존재론이 필요한가?

2. 전문용어 연구의 한 사례로서의 바둑용어 연구

3. 여기서 어떤 교훈 내지 지침을 얻어야 할까?

 

제 2 장 「승부처 1」에서의 논의는 주로 과학철학에서의 논의와 연관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미 상당한 회임 기간을 거친 생각들이 개진되었다. 그런데, 주지하듯, 컴퓨터 혁명과 그에 이은 인터넷 혁명, 인지과학 혁명, 그리고 지식 혁명은 정말 놀라운 속도로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리고 있다. 이 새로운 난세, 새로운 승부처에서 생존전략을 짜면서, 그리고 바둑에 대한 모든 생각을 고쳐 하면서 떠올린 것이 존재론적 인지과학의 이념이고 통합적 인지과학으로서의 '바둑학 연구' 라는 프로그램이다. 아래에서는 철학의 한 분야인 존재론이 어떻게 전문용어 연구를 위시한 지식공학에서의 작업들과 연계하여 수행될 수 있는지에 관한 반성을 시도함으로써 존재론적 인지과학의 편린을 소개하고, 그러한 반성의 결과 바둑용어 연구에 어떠한 새로운 전망이 열리게 되는지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1. 전문용어 연구, 지식공학, 그리고 형식존재론

1) 서론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에 의해 논의되어 온 존재론이 최근 인공지능 연구에 의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논리실증주의에 의해 학문의 세계로부터 축출될 위험에 처했던 기억이 새로운 마당에, 존재론 연구가 "오늘날 정부와 기업의 열광적인 지원 대상" 이라는 소식은 자못 놀라운 바 있다. 정말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가?

최근 인공지능 연구에서 존재론 (ontology) 이 각광받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식 공학, 지식 표상, 자연언어 처리, 정보 복구, 정보 통합, 지식 경영 등 다수의 인공지능 연구분야에서 존재론이 아주 인기 있는 연구 주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1990 년대 초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이런 현상은 최근 3 년 동안 거의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존재론을 주제로 한 국제 학술대회가 무수히 개최되고 있고, 유수 학술지들이 존재론을 특집호 주제로 다루고 있고, 다수의 대학에 존재론 연구센터가 세워지고 있으며, 존재론을 핵심 기술로 하는 기업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사태가 출현한 것인가? 이러한 사태 진전의 의미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이에 반응해야 하는가? 본 발표자는 위와 같은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제 컴퓨터의 지원에 의지하는 전문용어 연구에서의 존재론의 역할에 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이 주제에 관한 논의의 절실성은 컴퓨터의 지원에 의지하는 전문용어 연구가 인공지능 연구의 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연구가들의 존재론에 관한 고찰들에서 '존재론' 이 지니는 중의성 탓에 많은 경우에 존재론 연구와 전문용어 연구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중첩된다는 사실로 인해 그 심도를 더한다.

필자는 우선 최근 인공지능 연구에서 제시되어 온 존재론의 정의들을 간략하게 검토하려 한다. (제 2 항) 그러고 나서 그렇게 이해된 존재론이 다방면의 인공지능 연구에서 왜 필요하고, 또 왜 갈수록 그 중요성을 더 해 가는지를 묻고자 한다. (제 3 항) 1 연구의 강조점이 인식론적 문제들로부터 존재론적인 문제들로 옮겨 가는 추세를 보인다는 점과 기술의 혁신에 힘입어 최근 대형 지식 기반 체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점이 여기서 지적될 것이다. 다음에는 방대한 양의 지식 공유를 목표로 하는 지식 공학에서 잘 정립된 전문용어 체계가 핵심적이고, 그런 체계의 건설에서 존재론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예시하고자 한다. (제 4 항) 이를 위해 ONIONS (ONtological Integration Of Naive Sources) 프로젝트의 동기와 계획을 소개함으로써 명확한 존재론을 결여한 기존의 (특히 국내의) 대부분의 전문용어 연구들이 노출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존재론이 감당할 수 있는 역할들을 예시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현재 인공지능 연구와 철학에서의 존재론 연구에 관한 메타철학적 반성과, 과학과 철학 역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변으로 인도될 것이다. (제 5 항)

 

2) 존재론의 정의

무엇인가를 정의할 때 우리는 사물을 정의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말을 정의하는 것인가?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정의를 정의하고자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정의' 라는 단어를 정의하고자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 자체가 해묵은 미해결의 철학적 문제들이라고 생각된다.

주지하듯, 존재론은 철학자들에 의해 수천 년 동안 연구되어 온 분야인 까닭에 철학사를 통해 주어진 다양한 존재론의 정의를 망라하여 검토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존재론을 개발하거나 이용하는 이가 존재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못지않게 암묵적으로 어떤 체계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존재론 또한 지극히 중요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본능적으로 가능한 한 '존재론' 의 외연을 넓게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공계 학자들은 정의에 관한 철학적 반성은 흔히 결여하는 대신 논의의 시초에서 논의에 사용될 용어의 엄밀한 정의를 요구하는 (아마도) 건전한 관행에 익숙해져 있다. 실제로 최근 존재론을 강조하는 인공지능 연구가들은 철학사상의 존재론의 정의들과는 거의 독립적으로 그들의 필요와 관심에 따라 존재론을 정의해 왔다. 존재론의 정의의 결정판을 획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지라도, 존재론의 보다 명쾌한 정의를 추구하는 노력은 철학자들에게도 하나의 당위일 수 있으므로, 존재론의 몇 가지 정의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과리노 (Nicola Guarino) 와 지아레따 (P. Giaretta) 는 최근 '존재론' 이라는 단어가 지식 공학 연구 커뮤니티에서 대단히 빈번하게 사용되는 반면 그것의 의미가 다소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는 데 주목하고, 그 단어에 대해 가능한 상이한 해석들을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나누어 논의하였다.

여기서 1) 은 명백히 나머지 것들과 이질적이므로, 과리노 등은 우선 2) ~ 6) 에 대해 2) 와 3) 은 존재론을 개념적인 의미론적 대상으로 파악하는 반면, 5) ~ 7) 은 존재론을 특수한 통사론적 대상으로 파악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인공지능 연구자들의 커뮤니티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해 온 4) 의 경우, 통사론적 대상으로 분류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의 정확한 의미는 '상술' (명세화) 과 '개념화' 에 대한 이해에 의존한다는 데 주목한다. 특히 그는 4) 와 같은 해석이 개념화를 특정 사태를 기술하는 외연적 관계들의 집합으로 보는 점이 존재론을 다양한 사태들에 부과하는 일종의 개념적 격자 같은 것으로 여기는 우리의 통상적인 직관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편 과리노 등은 "존재로서의 존재의 모든 종과 존재로서의 존재에 속하는 속성들" 에 존재론이 관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iv, 1) 의 생각으로까지 소급되는 철학의 한 분야로서의 존재론은 "존재란 무엇인가?" 나 "모든 존재에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따위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의미의 존재론은 다양한 특별 존재론이나 국부적 존재론과 달리 일반적 존재론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러한 전통에 속하면서 최근의 인공지능 연구에서 관심을 갖는 존재론과도 밀접히 연관되는 정의가 형식 존재론을 존재의 모든 형상과 양태의 논리의 체계적이고 공리적인 전개로 보는 코키아렐라 (Cocchiarella) 의 형식 존재론의 정의이다.

과리노의 구별을 발판 삼아 존재론의 정의 문제를 더 논의하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중요한 작업이다. 실제로 반 헤익스트 외 (van Heijst, G. et al., 1997a) 에 대한 과리노 (1997) 의 비판과 반 헤익스트 외 (1997b) 의 응수로 이어지는 논쟁은 존재론의 정의 문제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전개된 바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그 문제를 천착하기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일이다. 위에서 밝혔듯이, 필자는 어느 분야의 내용을 논하기에 앞서 그 분야를 규정하려는 발상 자체에 회의적이다. 나아가서 위의 일곱 가지 존재론의 의미 중 어느것에 기반하든지 간에 철학과 인공지능 연구에서 존재론과 연관하여 수행된 기존의 모든 연구로부터 배울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과리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나온 다수의 인공지능 연구분야에서의 존재론 관련 논문들이 대부분 4) 의 의미를 존재론의 정의로 삼고서 출발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현명한 방책은 어떤 존재론의 정의가 최고의 것이라는 자의적 판정을 서두르거나 외관상의 유사성을 토대로 동화나 수렴을 서두르는 일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의 존재론 연구들이 심부에서 모종의 공통성을 지니리라는 낙관적 신념을 가지고 그 모두를 존재론 연구 안에 포함시키되, 과리노가 행한 구별을 늘 염두에 두면서 작업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취할 때, 예상외로 상황이 간단하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무엇보다 먼저 구별해야 하는 것은 존재론 연구와 그 결과로서의 특정 존재론적 체계일지 모른다. 그 구별을 할 경우, 과거에 철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느냐 아니면 인공지능 연구가들에 의해 수행되었느냐 하는 문제는 지엽적인 것이 되고, 주어진 존재론 연구들이 어떻게 비교되는가, 주어진 존재론적 체계들이 어떻게 비교되는가가 논의의 초점이 될 수 있다. 주목해 두고 싶은 점은 그루버의 정의, 즉 4) 의 의미의 존재론도 존재론 연구와 그 결과로서의 존재론적 체계 모두를 의마할 수 있는 중의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 점은 또 코키아렐라의 존재론 정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다음으로 구별해야 하는 것은 과리노에게서도 분명하고, 최근에 와서는 거의 일반화되었다고 여겨지는 일반적 존재론과 특수한 영역의 존재론이다. 과거에 철학자들이 일반적 존재론만 연구했다고 해서 그들의 성과가 특수한 영역의 존재론과 무관하리라는 결론은 따라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어떤 존재론적 체계가 존재론적 체계인 한에서 지켜야 하는 원리와 규칙 따위에 관한 성과가 과거 철학자들에 의해 얻어진 경우, 그것은 인공지능 연구가에 의해 연구되는 특정 영역의 존재론적 체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물론 특수 영역의 존재론적 체계에서 얻어진 성과에 의해 일반 존재론의 원리로 취급되었던 것이 뒤집어질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는다. 일반 존재론과 특수 영역의 존재론 사이의 관계를 이론과 응용의 관계로 파악하고 양자 사이의 활발한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기대하자는 아이디어이다.

 

3) 최근 인공지능 연구에서 존재론이 부각된 까닭

종래의 인공지능 연구에서 존재론은 비교적 무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최근 인공지능 연구에서 존재론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게 되었는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에 거의 육박하고 있다. 지식 공유의 필요성이 바로 그 근사치 답이다. 스투터 (R. Studer) 등 (1998) 이 자세한 논변 대신 짓궂은 수사를 동원하여 "존재론들이 그토록 인기를 끌 게 된 까닭은 주로 그것들이 약속해 준다는 데서 찾아진다" 고 한데서도 엿볼 수 있듯이 지식 공유의 필요성은 너무도 절실하고, 존재론이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또한 너무도 큰 것이다. 그러나 이 답이 결코 완벽한 답이라 할 수 없다는 점도 명백하다. 그것만으로는 지식 공유의 필요성이 왜 최근에 와서야 인공지능 연구에서 절실하게 느껴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공지능 연구의 역사를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참조하며 인공지능 연구에서 자생적으로 존재론에 대한 수요가 창출된 배경을 알아보아야 한다. 상당 부분 중첩되지만, 그 배경적 요인을 인공지능 연구에서 1) 인식론적 문제에서 존재론적 문제로, 2) 소규모 존재론에서 대규모 존재론으로 관심이 이행하는 추세가 관찰된다는 점으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표 1>  Chat-80 체계에 사용된 지리적 범주들

 

<표 2>  Cyc 에 사용된 최상위 범주들

 

 

4) 전문용어 연구에 왜 존재론이 필요한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지식 공학이 목표로 하는 지식의 공유와 재사용을 위해 전문용어 연구와 존재론은 거의 마찬가지 이유에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최기선 교수를 중심으로 1998 년 설립된 전문용어 언어공학 연구센터에서 펴낸 『전문용어연구 1』의 「발간사」와 최 교수의 논문 「전문용어와 센터의 역할」, 그리고 송영빈 박사의 논문 「전문용어학의 제문제」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송 박사는 전문용어의 폭발적인 증가, 전문용어의 음차어의 증가, 전문용어의 다국어적 중요성의 증가를 전문용어의 현재의 특징으로 들었는데, 이런 특징들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것들이 지식 공유와 재사용에 장애가 된다는 데 찾을 수 있다. 이제 문제는 전문용어 연구와 재사용에 장애가 된다는 데 찾을 수 있다. 이제 문제는 전문용어 연구와 존재론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으며,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어떻게 상호 협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컴퓨터에 지원을 의지하는 전문용어 연구를 인공지능 연구의 한 사례로 본다면, 위에서 논의한 내용, 즉 인공지능 연구에서 존재론이 필요한 까닭들이 바로 전문용어 연구에서 존재론이 필요한 까닭들이 된다. 예를 들어, 소와가 Cyc 가 거대한 지식 기반 체계의 최상위 범주들을 수정, 보완하는 일에 존재론적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한 점은 거의 그대로 전문용어 연구에 적용될 수 있다. 주어진 전문용어의 체계가 Cyc 처럼 모든 인간의 지식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특수 분야의 어휘들의 집합이라 해도 그 체계는 대부분의 경우 그 자체가 대규모 존재론적 체계라 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아주 특수한 영역의 전문용어의 체계로서 그것을 소규모 특수 영역의 존재론적 체계로 볼 경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전히 존재론적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은 위에서 이미 지적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요구되는 일은 진정 구체적인 전문용어 체계의 사례들을 놓고 그것들에서 존재론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필자의 목적에 특히 필요한 사례는 특정 전문 지식 분야 중 존재론적 연구가 별로 뒷받침되지 않은 전문용어 체계와 아주 상당한 정도로, 의식적으로 존재론적 연구의 지원을 받은 전문용어 체계가 모두 발견되는 영역이다.

사실상 존재론적 연구의 뒷받침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전문용어체계를 찾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 발표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아주 적절한 구체적 사례가 현존한다. 대한수학회사 1995 년에 펴낸 『수학용어집』이 그것이다. 이 책은 수록된 전문용어에 대한 여하한 기술이나 정의도 배제한 순수한 대역어 사전이다. 수록된 단어가 수학의 어느 세부분야에서 사용되는 것이라는 정보나 함께 수록된 다른 단어들과 어떤 관계에 있다는 정보 따위도 모두 배제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 반면 그런 경우를 제외한 모든 전문용어 체계는 어느 정도나마 존재론적 연구의 도움을 받은 전문용어 체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최근 컴퓨터의 지원을 받아 구축된 전문용어 체계들은 암묵적으로나마 상당한 정도로 존재론적 연구의 도움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전혀 다른 이유에서 그것들 중 "아주 상당한 정도로, 의식적으로" 존재론적 연구의 도움을 받은 적절한 사례를 찾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 경우도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해 줄 만한 사례가 현존한다. 소위 ONIONS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ONIONS 는 의학 전문용어의 대규모 공리화된 존재론 도서관 (large scale axiomatized ontology library) 개발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ONIONS 정도로 아주 상당한 정도로, 의식적으로 존재론적 연구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아니면, 편의상 이하의 논의에서 존재론의 도움을 별로 받지 않은 사례로 취급할 것이다.

이제 필자는 ONIONS 프로젝트를 수행한 연구가들이 존재론적 연구를 존재론적 연구의 도움을 별로 받지 않은 기존의 의학 전문용어 체계들의 문제점을 어디서 발견했고, 그 문제점들을 치유하기 위해 여하한 방식으로 존재론 연구의 도움을 받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5) 전망과 과제

우리는 이 글에서 최근 컴퓨터의 지원을 받는 전문용어 연구를 포함한 다방면의 인공지능 연구에서 존재론에 관한 관심이 급증하는 데 주목하여 왜 그러한 현상이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간략히 이해해 보고자 하였다. 특히 제 4 항에서는 강제미 등의 연구에 의존하여 존재론의 도움을 별로 받지 않은 전문용어 체계들이 어떠한 문제를 야기하며, 전문용어 연구에 존재론 연구가 어떤 방식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한 가지 계획의 개요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가 무엇이 얻어졌는가? 아무것도 단적으로 이상적인 전문용어 체계도 얻어지지 않았고, 그런 체계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 만큼 존재론적 연구도 무르익지 못했다.

그러나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현재 국내에서 수행되고 있는 컴퓨터의 지원에 의지하는 전문용어 연구를 포함하는 인공지능 연구는 최소한 해외에서 수행되고 있는 같은 유형의 연구들만큼은 존재론에 관한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예컨대 스탠포드대학 전산학과의 연구팀들 (KSL) 이 아주 효과적인 분업을 통해 존재론 연구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배워 전산학과 인공지능 연구분야 연구자들 상호 공조 체제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둘째, 앞서 지적한 대로 철학자로서 일반 존재론을 연구하는 이와 인공지능 연구가로서 특정 영역의 존재론을 연구하는 이는 상호간에 어떠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실험적 모색을 강력히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공조를 통해 철학자는 자신의 작업이 더 이상 박물관의 밀실에 유폐될 필요가 없다는 자각을 통해 현실에 발을 내딛게 될 것이고, 인공지능 연구가는 마법적 신기술을 창안해낼 상상력의 마르지 않는 샘을 얻을 것이다.

셋째, 일단 이런 관점을 세우고 나면 과거에도 특수 영역의 존재론이라 볼 만한 사례들이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생물학에서의 동식물 분류체계가 대표적인 것일 터이다. 비교적 근래에 와서 개발된 도서관의 도서분류체계도 한 예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과학사를 참조하며 학문 분류체계들도 같은 시각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런 연상의 흐름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개별과학을 특수 영역의 존재론 체계들로 볼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이런 방향으로 시선이 쏠리고, 성패에 무관하게 학제간 연구가 진지하게 추구되어 간다면, 어쩌면 개별과학 간의 대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대화, 그리고 과학과 철학의 대화도 더 이상 구호에만 그치지 않게 될지 모르겠다.

과대포장의 의혹이 짙으므로, 정리해서 다시 한번 말한다면, 진정한 철학적 작업으로서의 존재론 연구는 더 이상 개인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 21세기의 과학기술기반과 문화대역폭을 늘리기 위한 기반조성이란 한국과학기술원 전문용어 언어공학센터 (KORTERM) 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분들의 도움과 격려, 지원만이 필수적이고, 그 점은 자명하다는 최기선 교수의 주장은 가감 없이 존재론에도 적용되는 듯하다.

 

2. 전문용어 연구의 한 사례로서의 바둑용어 연구

앞에서 우리는 오늘날 세계가 얼마나 복잡다단한 양상을 보이며 초스피드의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지를 전문용어 연구라는 시각에서 가늠해 보았다. 컴퓨터의 발명과 그로 인해 성취된 인터넷이라는 요물이 그것을 창조한 인간에게 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가공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우리를 두렵게 한다. 인간 지식의 경계가 근대 과학혁명으로 인해 무한히 확장되었다는 것 못지 않게 오늘날 인터넷 혁명으로 인한 방대한 양의 지식과 정보의 공유 및 유포는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공포감을 심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를 우리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러한 흐름을 이해하고 거기에 발맞추어 신속하게 적절한 행마를 서두르지 않는다면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위기 또는 절호의 상황에서 우리는 전문용어 연구가 인간의 다양한 삶의 영역 하나 하나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각각을 모두 포괄하는 총체적 지식의 체계도 그 연구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용암의 분출처럼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를 잠재력을 지닌 채 초읽기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최근 컴퓨터에 의해 비롯된 지식, 정보 혁명의 회오리 속에서 전문용어 연구가 그토록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면, 이제 우리는 종래 바두계 내에서 바둑용어 정립과 정리에 관해 이야기하던 것보다 한층 뚜렷하고 강한 동기를 부여받은 셈이 된다. 우선 최근 컴퓨터 바둑을 통해 바둑이 동양 삼국의 전유물에서 지구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로 초고속으로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은 최소한 한ㆍ중ㆍ일 삼국의 바둑용어와 영어로 된 바둑용어를 동시에 비교할 수 있게 해 주는 바둑용어 사전의 구축이 절실하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또 우리는 서양의 컴퓨터바둑 연구가들이 컴퓨터바둑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에서 종래 엄밀한 정의없이 사용되어 오던 바둑의 개념과 정의들을 인공 형식언어 내에서 엄격히 규정할 필요를 느끼고 그러한 어느 정도 수행해 오고 있다는 사실에 무심할 수 없다. 이 점은 현재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시간의 테스트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인 다양한 바둑 규칙의 정비와 통일 문제와 직접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에 관해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운 문제들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전문용어 연구라는 분야 자체가 아직은 체계가 잡히지 않은 신생 학문 분야라는 점, 그리고 국내에서 전문용어 연구는 특히 거의 미개척의 분야라는 점이 앞 절에서 필자가 국내 전문용어 연구에서 극히 미약한 존재론 연구의 활성화를 촉구함으로써 철학과 전산학 등 인지과학 제분야의 공조를 꿈꾸게 된 계기였다는 점에 주목해 주시기 바란다. 국내에서의 전문용어 연구는 현재 한국과학기술원 전산학과 최기선 교수의 전문용어 언어공학연구센터가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인터넷 홈페이지 'http://www.kaist.ac.kr' 를 방문하시어 해당 항목을 계속 클릭하다 보면 어렵지 않게 전문용어 언어공학연구센터 홈페이지를 방문하실 수 있고, 여기서 제공되는 여러 가지 서비스 중 각종 분야의 전문용어 사전 데이터 베이스를 이용하실 수 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그 데이터 베이스에 수록된 각종 분야의 전문용어 사전의 실태를 둘러보시고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바둑용어 사전의 수준과 견주어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어떤 척도에 의해 비교하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예컨대 다양한 자연언어들 간의 상호 이해에 필수적인 대역어 사전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면, 바둑용어 사전이 한 수 아래다. 그러나 그 데이터 베이스에 담긴 전문용어 사전은 단어에 대한 정의나 설명이 대단히 부실하다는 점에서 바둑용어 사전에 미치지 못한다.

 

3. 여기서 어떤 교훈 내지 지침을 얻어야 할까?

우선 전문용어 언어공학 연구센터 전문용어 사전 데이터 베이스에 바둑용어사전도 편입하는 사업을 추진함 직하다. 이 사업은 바둑학이 어엿한 학문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하는 데 정비례하여 손쉽게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바둑 동호인의 다양한 구성 분포를 감안할 때, 적절한 추진 기관의 선정과 예산 확보 등은 결코 어려운 일이라 볼 수 없다. 바둑용어 사전이 데이터 베이스에 편입되고, 최소한 한ㆍ중ㆍ일ㆍ영 4 개 국어 대역어 사전 구실을 하도록 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다음으로 전문용어 연구, 특히 전산화된 정보 처리 연구의 관점에서 바둑용어 사전의 내용을 다양하게 재편성하는 실험을 해야 한다. 서양 컴퓨터바둑 연구자들이 수행해 온 소수의 핵심적 바둑용어에 대한 엄밀한 정의 작업에서부터 출발해서 가능한 한 바둑용어 사전의 수록 어휘들을 유사한 정도의 엄밀성을 획득하도록 잘 짜여진 존재론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이 이 실험의 주요 내용이 될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사업에 바둑에 관련한 모든 이들, 특히 각종 바둑학 관련 학자들의 결집된 역량이 필요하리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전문용어학 연구의 실세라고 할 최기선 교수 등 전산학자, 이기용 교수 등 언어학자, 채완 교수 등 바둑용어에 전문적 관심을 지닌 국어학자, 김태수 교수, 최석두 교수 등 정보문헌학자, 이상하 박사 등 형식 존재론 전문가인 철학자, 논리학자, 김동수 교수 등 조합수학을 전공한 수학자, 김영상 교수 등 컴퓨터공학자, 바둑용어 사전의 주인공 김인만 선생, 그리고 정수현 교수를 위시한 명지대 바둑학과의 맨파워를 동원하여 팀을 구성한다면, 일단 최소한의 연구진을 구성하는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