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역 논리와 비연역 논리
논리와 사고 : 소흥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9, page 341 ~ 349.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논리는 삼단 논법을 기본으로 하는 연역 논리의 모형화 이론이다. 일상 언어로 표현되는 삼단 논법의 명제들을 표준화함으로써 명제의 논리적 의미를 명확하게 해 주고, 정당한 추리와 부당한 추리의 형식을 쉽고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
수학적 논리라고 하는 기호 논리는 체계화되고 형식화된 연역 논리이다. 수학적 계산처럼 논리적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 연역 논리이다. 이처럼 연역적 추리가 수학적 계산과 같은 계산적 처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기계에 의한 논리적 계산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논리적 계산기로 발전한 오늘의 컴퓨터는 거의 무한한 응용 가능성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보편적 기계 (the universal machine)' 가 되었다. 연역 논리적 추리의 힘과 가능성을 보여 주기에 충분한 컴퓨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연역 논리적 계산을 가능하게 한 체계화와 형식화에는 몇 가지 중요한 조건이 전제되어 있다.
수학적 계산을 위해서는 모든 대상이 수학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수학적 언어로 표현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수량화 또는 계량화되어야 한다. 예컨대, 행복이나 슬픔에 대한 수학적 계산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행복의 정도나 슬픔의 정도를 수치로 표현하는 '조작' 을 해야 한다. 행복의 정도를 개념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확한 수량화를 통해서 숫자적으로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논리적 계산을 위해서는 모든 언어적 표현이 논리적 언어, 즉 진리값을 갖는 명제로 표현되어야 한다. 참이냐 거짓이냐를 결정할 수 없는 성질의 문장도 논리적 계산의 언어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참 또는 거짓의 값이 부여되어야 한다.
또한, 수학적 계산에서의 더하기나 곱하기의 작업이 정확하게 정의되어야 하듯이 논리적 계산에서도 조건 관계나 선접 관계 등이 정확하게 정의되어야 한다. 이처럼 기호 논리의 체계화와 형식화에서 결정된 조건 관계의 특이함은 이미 설명된 바 있지만, 기호 논리적 계산을 적용하는 과정에서는 흔히 그것의 의미를 간과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p 이면, q 이다" 라는 명제의 진리값은 p 와 q 의 진리값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p 가 참이면서, q 가 거짓인 경우에 한해서만 "p 이면, q 이다" 라는 조건 명제가 거짓이 되게 규정한 것이다. 따라서 p 가 거짓인 경우는 q 의 진리값에 상관없이 위의 조건 명제는 거짓이 될 수 없으며, 거짓이 아닌 것은 참의 값을 매기게 된다는 것이다.
"눈이 오면, 스키장에 가겠다" 는 조건부 약속에 대해 눈이 오는데도 스키장에 가지 않으면 그 약속을 어긴 거짓말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눈이 오지 않는 경우에도 그 조건부 약속에 대한 진리값을 매기게 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것은 일상적인 약속 조건의 의미와는 다른 논리적 체계화를 위해 만들어진 특이한 의미의 조건 관계이다. '진리 함수적' 또는 '진리 기능적' 조건 관계라고 하는데, 기호 논리의 체계화가 외연적 논리 (extensional logic) 로서 체계화된 점을 고려하면 '외연적 조건 관계' 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이러한 외연적 조건 관계의 특이성 때문에 나타난 역설이 소위 '까마귀 역설' 또는 '헴펠 역설 (the Hempel Paradox)' 이다. 이는 보편 명제로 표현되는 일반적 사실의 확인 사례에 관련된 역설을 의미하는데, 보편 명제를 기호화하면서 외연적 조건 관계로 표현함으로써 생기는 문제이다.
"모든 까마귀는 검다" 라는 명제의 기호화는 (x) (Rx → Bx) 가 된다. 이 경우 (Ra, Ba) 는 입증 사례가 되고, (Rb, ~Bb) 는 반증 사례가 된다. 그런데 위의 명제는 (x) (~Rx ∨ Bx) 와 논리적으로 같은 값의 명제이므로, 확인 사례도 서로 같아야 한다. 이 경우 (~Rc, Bc) 도 입증 사례가 되고, (~Rd, ~Bd) 도 입증 사례가 된다. 물론 (Ra, Ba) 도 입증 사례이다. 문제는 ~Rc 와 ~Rd, 즉 까마귀가 아닌 어떤 것의 색깔이 "모든 까마귀는 검다" 는 명제의 입증 사례가 될 수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x) (Rx → Bx) 라는 기호화에서 이미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Rx → Bx) 는 Rx 값이 거짓인 경우 Bx 의 진리값에 상관없이 참의 값을 갖도록 외연적 조건 관계를 정의해 두었기 때문이다.
왜 이것이 역설적인가? 까마귀에 대한 명제를 확인한다고 하면서 까마귀가 아닌 것을 입증 사례로 들 수 있다는 것이 역설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역설이 생길 수 있느냐는 분명하다. 외연적 조건 관계의 정의가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경우에도 진리값을 매기게 하고, 더욱 이 참의 값을 매기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까마귀는 검다" 라고 하는 일상 언어의 명제에서는 '까마귀' 라는 주어가 대상 영역을 까마귀인 것으로 제한하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으므로 까마귀가 아닌 것은 논의의 대상에 개입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일상 언어의 내포적 의미가 외연적 논리에서는 무시되었기 때문에 역설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서양 철학의 인식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가 어떻게 이런 명제를 생각하게 되었을까는 그의 인식론적 문제 제기를 위한 사유 실험의 과정을 따라가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한 명제를 찾기 위한 의심을 계속하다가 "나는 의심하고 있다" 라는 명제를 생각하게 했던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 즉 데카르트 자신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존재 긍정의 명제를 별 문제 의식 없이 도출해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한 이 명제의 논리적 의미를 따져 보면, '그러므로' 가 어떤 의미로 연결관계를 맺어 주는지 명확하지 않다.
만일, '그러므로' 가 삼단 논법의 전제와 결론을 연결시켜 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생가하는 것은 모두 존재한다" 라는 전제가 필요한데, 데카르트가 이런 전제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받아 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명제는 여러 가지 철학적 문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컴퓨터의 등장이 제기하게 된 문제로서는 "컴퓨터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컴퓨터는 존재한다" 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컴퓨터가 과연 생각한다고 할 수 있느냐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데카르트가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변화와 발전의 시간을 필요로 했었는데, 컴퓨터의 발전 역사에서도 데카르트처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인식할 컴퓨터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인식 능력은 어떠하기에 데카르트의 생각 같은 것이 나올 수 있었으며, 우리의 일상 언어가 표현해 주는 '그러므로' 의 연결적 의미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것은 진리값의 관계로서만 결정될 수 있는 외연 논리적 관계에 제한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상 언어는 외연적이면서 내포적이다. 다양한 내포적 의미를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법의 추론을 가능하게 해 준다.
데카르트는 인식론적 사유 실험에서 얻은 "나는 생각한다" 라는 결과에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존재론적 명제로 추론해 갔다. 어떤 의미의 '그러므로' 가 데카르트의 마음 속에서 이런 추론을 하게 했을까? '그러므로' 가 데카르트의 마음 속에서 이런 추론을 하게 했을까? '그러므로' 의 의미를 그 색깔을 조금씩 다르게 해 주는 다양한 우리말의 개념들로 표현해 본 아래 예문들에서 볼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은 이들 모두가 데카르트의 '그러므로' 를 대신할 수 있는 연결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기에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즉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함으로써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로 인하여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런 연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런 연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렇듯이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런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처럼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런 뜻에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했을 때,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의식하게 되었음을 표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존재 의식은 이미 "나는 생각한다" 라는 인식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러므로' 라는 연결사를 사용함으로써 일종의 추론 관계를 드러내고자 했을까? "나는 존재한다" 라는 존재 긍정이 왜 필요했을까? 인식이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인식론이 존재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그러니까 결국은 하느님의 존재를 바탕으로 해주기 위함이었을까? 그러니까 결국은 하느님의 존재를 바탕으로 해서만 인식론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의식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존재 증명을 위해서 자기 인식에 수반되는 자기 존재를 긍정하기로 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자기 인식, 자기 존재, 그리고 하느님의 존재에 관련된 추론은 연역적 추론만이 아닐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예문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러므로' 의 다양한 해석은 그것이 연역 논리적 추론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사유 실험의 과정은 "나는 생각한다" 에서 "나는 존재한다" 로 추론하게 했다고 하지만, 논리적 재구성에서는 오히려 "나는 존재한다"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생각한다" 를 자기 존재의 이유로 설정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존재의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도 존재의 이유는 연역 논리적 이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존재의 이유는 변증법적일 수도 있다. 유비 논리적일 수도 있다. 체험적이라는 뜻에서 귀납적일 수도 있다. 우리가 존재의 이유를 말할 때는 데카르트의 '그러므로' 처럼 온갖 색깔의 온갖 의미의 추론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일상 언어로 표현되는 이유는 그 모든 의미를 내포하면서 다양한 해석과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자연과학에서 고전적 역학이 된 뉴턴 역학은 수학적 연역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로 우리의 세계를 인식하게 한 점에서, 그 영향력을 지금까지도 미치고 있다. 자연과학 분야 내에서는 이미 고전 역학의 한계를 넘어선지 오래되지만, 수학적 연역에 대한 선호와 집착이 고전역학적 세계관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같다. 이것은 곧 연역 논리에 대한 집착을 말하며, 연역 논리만이 '논리' 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도 연관되어 있다.
또한, 서구의 종교와 철학에서는 '전지 전능한 하느님' 이라는 개념이 연역 논리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즉, 하느님의 전지전능은 모든 현상을 예상하여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연역 논리적 추리를 통해 가능한 일이며, 우리의 세계가 연역 논리적 추리를 통해 가능한 일이며, 우리의 세계가 연역 논리적으로 예측 가능한 질서의 세계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외적 사실을 허용하지 않는 보편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세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전지 전능을 연역 논리적 능력으로 제한할 수 있을까? 이러한 하느님의 전지 전능에 부합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세계를 철저하게 보편적인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로 봐도 되는 것일까? 연역 논리적으로만 판단하고 예측하는 이러한 하느님은 전제 군주와 같은 독재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법률이나 율법의 지배를 강요하는 율법주의나 법치주의의 군주나 다름없다.
현대 과학은 여전히 고전 역학적 법칙이 적용되는 세계를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고 의식하는 일상의 세계는 대체로 그와 같은 법칙적 세계이다. 연역 논리적 사유가 유효한 세계이다. 하지만, 그런 일상의 세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미 비연역적 사유를 적용해 오고 있다. 자연과학은 뒤늦게 그러한 비연역적 일상 세계를 과학적 탐구의 대상 영역으로 포함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전지 전능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연역 논리적 예측으로는 미리 내다볼 수 없는 미래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전지 전능이 어떻게 가능할까?
열린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전지 전능은 열린 논리를 적용하는 판단 능력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체계화나 형식화될 수 없는 논리, 즉 비연역 논리를 말한다. 그것은 또한 비연역 논리의 유형도 제한될 수 없음을 말한다. 논리의 제한과 특정 논리의 잘못된 선택이 우리의 세계에 대한 사유를 잘못되게 할 수 있음을 말한다. 논리가 진리를 가로막을 수 있음을 말한다. 논리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말하지만 잘못 선택된 논리는 잘못된 안내 표지판과 같다는 것이다.
열린 논리는 열린 사유를 요구한다. 우리의 열린 논리가 전지 전능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엄연한 사실이 미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불완전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비연역 논리라고 하는 열린 논리가 어느 수준에까지 발전하고 확장되면 열린 논리를 통한 하느님의 전지 전능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예컨대, 우리의 일상 언어로는 '기적' 이라고 하고 '신비' 라고 하는 현상도 어떤 종류의 열린 논리로써 설명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것일까? 예측 가능한 것일 수 있을까? 일상 언어조차도 더 이상의 설명적 표현을 거부하는 이런 현상에 대한 열린 논리를 지금의 단계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우리 인간의 인식 능력이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해야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것이 열린 세계에 대한 열린 논리이며 열린 사유라는 인식을 하면서 몇 가지 기본적인 비연역 논리의 유형을 제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