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납 논리

 

논리와 사고 : 소흥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9, page 350 ~ 362.

 

1. 통계적 귀납                  

2. 분포적 귀납                  

3. 분열적 귀납

 

1. 통계적 귀납

데카르트는 이성주의자 (rationalist) 이다. 인간의 인식 능력에서 이성의 힘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논리적 추리를 할 수 있으며,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와 "나는 존재한다" 를 '그러므로' 로 연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성의 힘이다. 논리적 관계로 연결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그러므로' 라는 말로 연결시켰을 것이다. 아마 그 연결 관계는 일종의 연역 논리적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데카르트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논리적 또는 연역적 관계가 될 수 있는지를 따져보지 않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해버린 것 같다. 말하자면 '직관적' 판단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은 이성의 힘을 믿는 직관적 판단이다.

우리는 합리적인 논쟁을 하다가도 직관적으로 어떤 주장을 반대할 때가 있다. 이유를 물으면 밝히지도 못하면서 직관적으로 반대 의사를 갖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나중에 그 반대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수반되기도 한다. 주관적 반응이지만 합리적 근거가 가능한 직관이라는 뜻이다. 수학적 계산에서도 직관적으로 답을 얻은 후에 계산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논리학을 배우기 전에도, 또는 논리학이 개발되기 전에도 인간은 논리적 판단을 해왔다. 아마 그런 때의 논리적 판단은 상당한 부분 '직관적' 판단이었을 것이다. 논리학의 발단은 그런 직관적 판단을 확인해 주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며, 잘못된 판단, 즉 오류를 예방하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인간의 이성이 그런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인간의 인식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성주의이다.

흄 (David Hume) 같은 경험주의자는 인간의 인식에서 경험적 근거를 이성의 힘보다 중요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같은 종류의 사건이 반복되면서 그 때마다 같은 종류의 결과를 가져온다면, 우리는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로 두 종류의 사건들을 연결시키게 된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로 두 종류의 사건들을 연결시키게 된다. 하지만 경험주의자인 흄에 의하면 그러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우리의 마음이 '습관적' 으로 믿는 것이지, 그것에 관한 경험적 근거가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경험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개별 사건들뿐이다. 아무리 반복해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관계일지라도 그것이 인과적 관계라든지 필연적 관계라는 것을 보여 주는 그런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는 우리의 마음이 습관적으로 맺어 주는 것이며, 습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경험적 근거가 없는 오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침마다 모이를 주는 주인을 믿고 반가워하던 닭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자기 목을 비틀어 죽이는 주인을 보게 된다든지, 단골집이라고 늘 찾아다니던 식당의 주인이 어느 날 갑자기 변해서 대접을 다르게 하는 씁쓸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은 경험주의자들이 말하는 습관적 믿음의 오류를 생각하게 한다. 귀납 논리란 그런 것이 아닌가?

여기서 '통계적 귀납 (statistical induction)' 이라고 한 것은 단순한 통계적 사실과 그런 통계적 사실에 근거한 귀납적 추리를 구별하기 위함이다. 뿐만 아니라 귀납적 추리는 또한 경험주의자들의 말처럼 반복적인 경험에서 습관적으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질서나 연결 관계에 이르고자 하는 사유 방법이며 사유 능력이라는 것이다.

통계적 사실은 상관 관계가 높거나 낮은 것을 수치로 나타낸다. 상관 관계가 아주 높은 통계 결과일 때,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상관 관계 또는 우연한 상관 관계가 아닌 어떤 필연적 관계를 드러낼 수 있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는 속담이 경고해 주듯 높은 상관 관계의 통계 숫자이지만 우연한 관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통계적 관찰 결과에 근거하여 어떤 숨은 관계를 짐작하는 귀납적 추리는 항상 우연을 필연으로 기대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오류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통계적 귀납이 필요한 것은 경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그와 같은 개별 사건들의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경험적 인식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초기에는 인간의 조상들도 모든 경험적 사실을 통계적 의미, 즉 단순한 상관 관계로만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의 축적과 그것이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인식하게 되면서 필연적 관계와 우연적 관계를 구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통계적 귀납이 과학적 탐구에서 가설을 설정하는 논리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으므로 특별한 설명이 필요없게 되었다. 이처럼 과학적 가설을 세울 수 있게 하는 귀납 논리이므로 그것을 '발견의 논리' 라고도 한다. 물론 그렇게 세운 가설이 검증을 통해서 자연 법칙으로 받아들여질 때, '법칙의 발견' 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가설이 법칙으로 인정되는 검증을 거친 후에야 '발견' 을 말할 수 있다고 하면, 귀납 논리를 '발견의 논리' 라고 하는 뜻에는 가설 검증의 과정에도 귀납 논리가 적용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가설은 법칙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그 법칙의 지배를 받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가정적으로 함축한다. 그러니까 그 가설에 해당하는 법칙이 있다면 그 법칙 때문에 원인과 결과라는 필연적 관계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원인 사건을 만들어서 과연 그것에 맞는 결과 사건이 일어나는지를 실험해 볼 수 있다. 가설 검증의 실험을 해 볼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실험 결과, 만일 원인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결과 사건이 따라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예측한 인과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며, 관련된 지배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가설이 반증되었음을 말한다.

가설이 함축하는 이와 관계는 보편적이면서 필연적인 관계이므로, 단 한 가지 실험적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타나더라도 그 가설은 반증된다. 연역 논리적으로 반증된다.

그 반면, 인과 관계를 찾는 실험들이 성공적이면 가설에 대한 지지 사례들이 되지만, 이 때는 그 가설의 입증을 연역 논리적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 지지 사례가 쌓여 가면서 통계 숫자에 의한 지지, 즉 귀납적 지지가 가능할 뿐이다. 그러한 귀납적 지지는 언제나 반증 사례가 발생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역적 필연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검증이다. 법칙을 발견하는 노니는 가설을 설정하는데나, 그 가설을 검증하는데나 귀납 논리적 지지가 가능할 뿐이다.

통계적 귀납은 이처럼 법칙의 발견을 가능하게 하고, 법칙의 발견은 우리의 경험 세계가 인과적 질서의 세계임을 전제한다. 원인이 없이 일어나는 사건은 없다는 것이 인과적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통계적 귀납을 적용하는 우리의 사유가 그 때마다 특정한 인과적 질서를 발견하고 확인하는 사유가 되기를 희망한다. 경험주의자들이 염려하듯 우리는 습관적으로 우리의 통계적 귀납이 특정 인과적 질서의 확인이 될 것을 희망한다. 예컨대, 단골집에 대한 통계적 귀납은 단골집 주인의 성품이나 경영 철학 등이 원인이 되어 그 때마다 좋은 대접을 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습관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하고자 하며, 우리의 믿음을 합리화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습관성과 성향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 온갖 광고 문안에서 접하게 되는 통계 숫자이다. 통계적 귀납에 의한 믿음을 유도하자는 것이다. 믿어야 할 원인과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자는 것이다. 과학적 검증의 방법은 이러한 습관적 귀납의 오류를 최소화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2. 분포적 귀납

자연은 우리에게 보편적이고 반복되는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선별적으로 드문드문 나타나는 현상으로 경험하게 하기도 한다. 매일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젊은 연인들의 열정적 사랑이 있는가 하면, 가끔 생각이 나는, 그러면서도 끊을 수 없는 인연의 사람이 있는 것과도 같다. 자연 현상에는 공간적으로 보편적인 것과 시간적으로 반복적인 것이 있고,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포적인 것이 있다.

천재는 한 군에 한 명씩 태어난다고 하는 말이 있다. 인구 단위로 분포되어 태어난다는 뜻이다. 어느 집단 사회에든 음악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고, 미술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다. 또 사람마다 자기의 재능 한 가지씩은 타고난다는 말도 있다. 다양한 재능을 자연은 분포적으로 배분해 주면서 개인들에게도 공평하게 해 주고, 집단 사회들에게도 공평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포적 사건들 또는 분포적 속성들은 그것이 표현되고 나타나는 방법이 분포적이긴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역시 어떤 숨은 질서일 것이다. 보편적 인과 관계가 아니면서도 어떤 원인 작용을 하는 연결 관계일 것이다.

'분포적 귀납 (distributive induction)' 이라고 한 것은 분포적 현상의 원인이 되는 숨은 연결 관계를 찾아 내는 능력을 지칭하기 위함이다. 드문드문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개별 사건으로 경험할 때는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지나버릴 수 있다. 예컨대, 신혼 부부가 사랑싸움도 가끔 하면서 남들처럼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부인이 이혼할 것을 제안해 온다면 뜻밖에 충격적인 제안을 받은 남편은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된다. 부인이 이혼을 생각하게 될 만한 일들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가를 돌이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드문드문 있었던 일들을 엮어서 그 하나하나가 단순하고 우연한 일들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는 것이다. 분포적 귀납으로 추리를 해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숨은 원인의 결과가 징조로 나타날 때 우리는 분포적 귀납으로 그 숨은 원인을 찾게 된다. 그런 징조에 민감한 사람은 그것을 경험할 때마다 분포적 귀납으로 추리를 한다. 그 때마다 어떤 숨은 연결 관계를 찾아 내고자 한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일, 예기치 않은 일, 또는 기적처럼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그것을 예상하고, 기대하고, 파악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지혜의 사람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분포적 귀납의 능력인 '지혜' 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추리가 되면 '미신' 이 되어 버리므로 문제가 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분포적 귀납의 오류를 쉽게 범하지 않는 특수 능력의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도가 사상에서는 자연에 대한 수용적 마음으로써 그런 지혜에 이를 수 있다는 제안을 한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든 그것은 자연적인 연결 관계, 자연적인 접속 관계, 또는 자연적인 '정보망' 이 있음으로써 일어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자연스러운 연결 관계를 이해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우리 마음대로 미리 그것을 해석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를 버리고 수용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도가적인 수용주의를 받아들이게 되면 아마 어떠한 예상 밖의 일에 대해서든 분포적 귀납의 사유로 설명을 하고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설명과 이해에 익숙해지면서 분포적 귀납의 사유는 점차로 예기치 않은 일을 예상할 수 있게 하는 지혜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닐까.

불교 사상은 분포적 귀납을 특수한 사유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모든 것은 상호 작용하는 연결 관계로 일어난다는 의미의 불교적 개념은 '연기적' 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연기적 질서' 에서 일어난다는 뜻이다. 보편적이고 반복적인 인과적 현상도 연기적 질서에서 나오고, 분포적이고 예외적인 현상도 연기적 질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칙화할 수 있는 인과적 질서는 연기적 질서의 한 부분이다. 연기적 질서는 인과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분포적 현상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일반성의 질서이다. 따라서 분포적 귀납은 그러한 연기적 질서를 발견하기 위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불교 사상은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그러한 연기적 질서를 발견할 수 있는 특수 능력에 이를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곧 수행의 길이다. 불교적 수행의 길은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몸과 마음으로 하는 인식론적 실천이며 사유 실험이다. 존재하는 세계의 연기적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존재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실천적 사유 실험이다. 마음으로만 하는 사유 실험이 아니라 몸과 함께 하는 사유 실험이다.

존재의 부담은 먼저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없는 조건으로 이해된다. 개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소립자나 원자의 상태일지라도 중력장에 부담을 준다. 온갖 역학적인 상호 작용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런 중력장에 부담을 주면서 또한 '온 생명' 에 부담을 준다. 생명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특수 조건에 의존해서만 개체의 생명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면서 문화적 존재이다. 온갖 인연의 고리에 의존해서 존재하고 있으며, 온갖 문화적 조건에 의존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존재의 부담, 즉 우리의 존재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서의 부담은 또한 그런 조건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의식하게 하는 부담을 수반한다. 의존적 부담이 의무적 부담을 수반한다는 뜻이다.

의존적 부담이든 의무적 부담이든 존재의 부담은 존재 세계의 연기적 질서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불교적 수행의 과정은 그런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존재의 부담을 우주적인 연기적 질서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런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해탈을 지향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연기적 질서에 조율됨으로써 모든 것이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되는 그런 체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 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연기적 질서에 조율된 몸과 마음으로 인식할 수 있으므로 사유 능력으로 말하자면 분포적 귀납이 자유자재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 선사들의 선문답을 가능하게 하고 의미있게 하는 논리는 이러한 분포적 귀납의 논리일 수 있다. 한 가지 표현이나 몇 가지 경험적 사실만으로도 그것이 뜻하는 연기적 질서를 파악할 수 있는 사유 능력이 선문답의 대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3. 분열적 귀납

개별 사건들의 경험으로부터 일반적 질서의 발견에로 나아가게 하는 귀납 논리에는 또 한 가지 유형이 있다. 인과적 질서도 아니고 연기적 질서도 아닌 심미적 질서를 발견하게 하는 '분열적 귀납 (fractal induction)' 이 있다. 조각조각으로 분열된 것들을 배열함으로써 다양한 모양의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내는 '프랙탈 아트 (fractal art)' 의 방법을 귀납 논리로 유형화한 것이다.

음악적 창작과 감상의 능력도 이와 같은 분열적 귀납의 적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개별 사건들의 경험만 있고 전체를 연결하여 파악하는 경험은 없다고 한다면, 음악의 곡을 이해하고 그 아름다움을 감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그것이 마음의 습관적 작용 때문이라고만 한다면, 그런 습관성이 어떻게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 감상이 가능한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감상의 능력은 보편성이 있는 우리 마음의 능력이며, 창작되는 아름다움이나 감상되는 아름다움은 일반성 차원에 존재하는 일종의 질서를 표현하고 체험하는 것이어야 한다. 플라톤이 그런 아름다움을 '이데아' 와 '형상' 의 세계에 존재하는 '초월적' 이고 '일반적' 이고 '원형적' 인 것으로 가정한 것은 우리의 심미적 체험으로 나타나는 것의 근원이 되는 심미적 질서가 있어야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심미적 체험의 보편성을 설명할 수가 없다.

분열적 귀납은 보편적인 사유 능력이기 때문에 조각조각으로 나눠진 부분들의 반복적인 배열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창작하고, 발견하고, 감상할 수 있게 한다. 예컨대, 조각보의 아름다움과 그것이 만들어지는 방법은 분열적 귀납의 방법이다. 자수나 자개 공예의 아름다움도 분열적 귀납이 적용된 작품의 가치이다. 돌담을 분열적 귀납의 방법으로 쌓아서 문화 유적의 부분으로 보존된 것도 있다.

분열적 귀납은 자연의 역사가 창출해 낸 온갖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게 한다. 천체의 아름다움, 산천의 아름다움, 생물의 아름다움 등은 모두 분열적 귀납이 적용되어 창출된 것이다.

천체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우주의 역사는 '대폭발' 로 시작했다. 모든 것을 소립자 세계로부터 시작하게 하는 분열화의 현상이었다. 소립자들이 모여서 원자를 낳고, 원자들이 모여서 분자를 낳고, 분자들이 모여서 세포를 낳고, 세포가 분열하여 더 많은 세포들이 되면서 생명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세포가 되지 않은 분자들은 무생물의 물체들을 만들어서 대자연의 물질적 요소가 되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산천의 아름다움과 생명체의 아름다움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요소들이, 부분들이 모여서 전체적 구조와 기능이 질서를 이루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현미경을 통해서 세포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분자의 아름다움과 원자의 아름다움까지 확대하여 볼 수 있다. 부분들이 모여서 하나의 전체 구조를 형성할 때는 그것이 어떤 차원의 존재이든 그 차원 특유의 아름다움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이런 아름다움이 어떻게 창출되는 것일까? 심미적 질서라는 것이 있어서 그 질서에 따라 개체적인 아름다움이 표현되는 것일까? 이러한 심미적 질서는 플라톤이 가정한 '이데아' 와 '형상' 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일까? 하기야 인과적 질서나 연기적 질서에 대해서도 그런 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물어보면 플라톤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그러한 일반성의 질서를 가정하면서 우리의 사유 능력이 그것의 구체적 실현을 발견하고, 감상하고, 창작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분열적 귀납이라고 한 이 사유 능력조차도 자연이 아름다움을 창출해 내는 역사적 과정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의 사유 능력은 그것이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 속에서 표현된 것뿐이라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창출해 내는 우주의 역사를 분열적 귀납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또 한 가지 사실은 우리의 우주가 대폭발 이후 또 한 번의 큰 폭발을 하게 되었으며, 그 두 번째 폭발을 통해서 비로소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천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한 번의 분열화가 필요했다는 것이며, 그것은 새로운 차원들의 새로운 구성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천체며, 산천이며, 생물들을 창출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창출을 위한 두 차례의 대폭발이었다고 할 것인가? 우리 인간은 분열적 귀납으로 예술을 창작할 수 있으므로, 분열화는 창작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에서 보는 창출의 역사에 대해서도 '의도적' 이라고 할 수 있는가? 분열적 귀납으로 자연의 창출적 역사를 설명하면서도 자연의 '의도' 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다. 스피노자 역시 '창조주 하느님' 을 부정하면서 그 대신 '능산적 자연 (能産的 自然)' 을 말했지만, 자연의 '능산성' 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유대교 - 기독교의 경전인 '창세기' 의 창조 이야기에는 하느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창조된 천지 만물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더라!" 라고 하고 있다. 창조된 천지 만물을 보고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주의 역사로 창출의 과정이라고 하지만, 아름다움을 창출하기 위한 우주의 역사로 할 것인지, 아니면 우주의 역사 자체는 다른 원인이나 원리로 설명하고 아름다움은 결과적으로 창출되는 것이라고 할 것인지는 문제로 남는다.

분열적 귀납을 발견의 논리로만 생각한다면 부분들의 반복을 경험함으로써 전체의 아름다움을 결과적으로 체험하게 된다고 해도 좋겠다. 그러나 분열적 귀납은 발견과 감상의 체험적 논리만이 아니라, 그런 감상을 위한 창작의 논리도 될 수 있으므로 '의도' 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의도의 문제를 개입시키지 않고 우주의 역사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의 하나가 엔트로피 (entropy) 증가의 과정으로 보자는 것이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무질서화의 과정을 말한다고 하며, 이것은 분열화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분열적 귀납은 분열화를 필요로 하되 그것은 조각조각들, 부분부분들이 결합하여 상위 차원의 구조물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와 같은 부분에서 전체로의 이행은 각 차원마다 특유의 인과적 질서, 연기적 질서 그리고 심미적 질서를 드러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가 분열화로 인한 엔트로피의 증가 현상은 우주 역사의 과정을 말해 주지만 그러한 역사의 과정이 가져오는 결과는 언제나 더 높은 상위 차원에서 새로운 질서를 실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생각해 보자. 완전한 질서인 공 (空) 의 세계에서 왜 무질서한 색 (色) 의 세계가 출현한 것일까? 색의 세계는 분열화라는 무질서로 시작되기 때문에 연기적 질서가 실현될 수 있으며, 또 나아가서 심미적 질서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연기적 질서와 심미적 질서의 실현을 위해서 공의 세계에서 색의 세계로의 분열화 또는 무질서화가 필요했다고 할 것인가?

인간의 사유 능력과 사유 방식으로서의 분열적 귀납이 보여 주는 또 하나의 문제 영역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서 창출되는 아름다움의 특성에 관한 것이다. 가령, 분자 구조의 아름다움과 세포 구조의 아름다움은 별개의 것이다. 하위 차원의 아름다움이 상위 차원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상위 차원의 아름다움은 새롭게 창발된 (emergent)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자연에서 창출되는 어떤 아름다움은 부분의 형상과 전체의 형상 간에 일종의 정합적 관계를 갖게 함으로써 새로운 아름다움이 되게 하는 것이다. 부분의 차원과 전체의 차원 간에 실현된 정합성이므로 '중층적 정합 (hierarchical consilience)' 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키가 크면서 몸이 가는 사람은 손가락이나 다른 신체 부위도 길고 가늘다. 작은 나뭇가지들의 모양은 전체 나무의 모양과 비슷하다. 분열적 귀납의 방법으로 창출된 아름다움에는 이처럼 정합적 (consilient) 인 아름다움도 있고, 그런 정합성과는 무관한 창발적 (emergent) 인 아름다움도 있다.

폴록 (Jackson Pollock) 의 그림은 물감을 아무렇게나 뿌려서 무질서하게 그린 것 같으면서도 부분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분열적 지수 (fractal dimension)' 라는 기준에 따라 분석하고 측정한 결과, 정합적 아름다움이 표현된 창작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 반면 원숭이나 기계를 이용해서 폴록의 흉내를 내게 한 그림에서는 그런 정합적 아름다움의 질서를 측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부분과 전체의 정합 관계와는 무관하면서도 분열적 귀납의 방법에 의한 아름다운 그림이 창작될 수 있다.

조형적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중층적 정합에 의한 아름다움과 단순한 창발적 아름다움을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조형 예술이든 음악 예술이든 분열적 귀납이라는 공통된 논리에 근거하여 그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가령, 영상 음악은 영상적 아름다움을 시공간적으로 전개해 가면서 그것에 맞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그러한 영상 음악의 영상적 전개와 음악의 흐름이 서로 맞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영상과 음악 사이의 이러한 부조화가 어떻게 가능할까? 어떤 점에서 영상과 음악이 일치하거나 조화롭기를 기대하기 때문일까?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분열적 귀납에 의한 아름다움의 유형이 일치해야 한다는 조건에 어긋났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음악은 중층적 정합성으로 표현되는 아름다움인데 영상은 전혀 그런 정합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전개된다면 영상과 음악 사이에 부조화를 느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분열적 귀납을 귀납 논리의 유형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발견의 논리이면서 창작의 논리이며 감상의 논리가 될 수 있으므로 지금가지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논리적 접근이 새롭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