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로서의 마음 : 기계 기능주의
심리철학 : 김재권 지음, 하종호. 김선희 옮김, 철학과현실사 (579-5908), 1997 (원서 : Philosophy of Mind, Westview Press, 1996), Page 131~180
1967 년에 힐러리 퍼트남은 "심리적 술어들" 이라는 제목의 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다지 길지 않은 이 논문은 다음의 놀라운 세 가지 일을 수행함으로써 심리 철학의 논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첫째, 그것은 곧바로 마음에 대한 지배적인 이론이었던 유형 물리주의 (type physicalism), 특히 마음-두뇌 동일론 (mind-brain identity theory) 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둘째, 그것은 마음의 본성에 관한 고도로 영향력있는 - 상당히 탁월한 - 입장으로 자리잡아 온 기능주의를 탄생시켰다. 셋째, 그것은 심적 속성들 및 특수 과학들의 다른 "상위-차원" 속성들에 관한 견해로서 인정받은 비환원주의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최선의 지위를 가진 현대 과학이 심성에 관한 유일하게 적합한 견해로 판단하고 진척시켰던 마음-두뇌 유형 물리주의는 기대와는 달리 단명하였고, 1970 년대의 기간 동안 대부분 철학자들은 환원적 물리주의를 심리학에 대한 견해로서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특수 과학들에 대한 입장으로서도 포기하였다.
이 모든 일들은 심적 속성들의 다수 실현 가능성 (the multiple realizability of mental properties) 이라는 한 가지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는 그것이 마음-두뇌 동일론에 대한 논맥으로, 보다 일반적으로는 유형 물리주의의 난점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이미 논의하였다 (3장). 다수 실현 가능성 논증을 심신 동일론에 대한 여러 다른 반박들과 분리하여 다루는 이유는, 그것이 심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개념적 기초를 마련함으로써 심리학, 더욱 일반적으로는 인지 과학들의 지위에 관해 통용되고 있는 사고들을 구체화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들 중 대다수는 이제 천사들을, 상상컨대 충만한 정신적 생기를 지니고 있는 순수히 영적인 불멸의 존재들을 믿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 사고에 의하면, 천사들은 지식과 믿음들을 가진 전적으로 비물질적인 존재들로서, 그들은 정서와 욕구들을 경험할 수 있으며 또한 행위들을 수행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기술들에 들어맞는 존재들이 있다고 할 만한 어떤 증거도 없을 뿐이다. 하지만 비록 유니콘이나 도깨비들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그 관념들을 갖는 것이 완전히 정합적이듯이, 천사와 같은 존재에 대한 관념은 완전히 정합적인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유니콘과 같이,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총각이나 네 개의 변을 갖는 삼각형과는 달리, 천사들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전혀 없는 것 같다. 만일 믿음, 욕구, 정서들을 갖는 천사라는 관념이 일관적인 관념이라면, 이 사실은 심리적 상태들이 순수히 비물리적이고 전적으로 비물질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그 무엇도 심성의 관념 자체에는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선험적인 개념적 사실의 문제로서, 심적 속성이 비물리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형이상학적 논제에 개입할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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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실현 원리] 만일 어떤 것 x 가 시점 t 에 어떤 심적 속성 M 을 갖는다면 (혹은 심적 상태 M 에 있다면), 그 경우 x 는 물질적인 것이고 - x 는 t 에 x 안의 M 을 실현하는 물리적 속성 P 를 동시에 갖는다는 사실에 의하여 - x 는 t 에 M 을 갖는다. |
이 원리가 물리주의를 특징짓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유익하다. 그것은 심적 특성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하나의 물리적 체계 - 예를 들어, 생물학적 유기체 - 여야만 한다는 것을 말한다. 비록 심성의 관념은 비물리적 실체들이 심적 특성을 갖는 것을 허용한다고 할지라도, 이 원리에 따르면, 세계는 오직 물리적 체계들만이 심적 속성들을 실현하도록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 아마도 물리적 체계들만이 시공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원리는 모든 심적 속성들이 물리적 기초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점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마음들은, 만일 그것들이 존재한다면, 물리적으로 구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심적 속성들의 다수 실현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에 주목하라. 심적 속성 M 은 - 예를 들어, 아픔 - 인간의 경우 C-신경의 진동이 그것을 실현하지만, 다른 종들 (즉, 문어나 파충류) 의 경우 아픔을 실현하는 생리적 메커니즘이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아마 탄소나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생물학적 체계들이 있을지 모르며 -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는 어떤 자연 법칙들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 또한 공상 과학에 나오는 로봇들처럼 믿음과 욕구, 심지어는 감각들도 가질 수 있는 전자체계들이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심적 개념들에 대한 다음의 흥미로운 특징들을 지적하는 것 같다. 심적 개념들은, 주어진 한 체계 안에서 그것들을 실현하는 실제의 물리적/생물학적 메커니즘이나 구조들에 대한 어떤 제약 조건도 포함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심리적 개념들은 인공물의 개념들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엔진" 의 개념은 그것을 실현하는 실제의 물리적 메커니즘에 관해서는 - 그것이 가솔린을 사용하는지 혹은 전기를 사용하는지 혹은 증기를 사용하는지, 그리고 만일 그것이 가솔린 엔진이라면 그것이 피스톤 엔진인지 회전식 엔진인지, 그것이 얼마나 많은 실린더를 갖는지, 그것이 기화기를 사용하는지 연료 분사기를 사용하는지 …… 등등에 관해서는 -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하나의 물리적 장치가 어떤 명시된 역할, 즉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를 기계적 힘이나 운동으로 변환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한 그것은 엔진으로 간주된다. 엔진의 개념은 한 역할을 기술함으로써 규정되는 것이지,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기술함으로써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고통의 역할은 무엇으로 기술되는가? 한 유기체가 생존과 적응의 기회를 갖기 위하여 "적절한" 상황에서 - 예를 들어, 한 유기체가 조직에 상처를 받았을 때 -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은 아마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선천적으로 고통의 감각 능력을 결여한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거의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 남기 어렵다. 그들의 환경으로부터 주어진 위험들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동물종들은 "조직-손상 감지기" 라고 할 수 있는 고통 메커니즘을 발전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다른 환경 조건에 직면해서 서로 독립적으로 진화해 온 다른 종들은 이 목적을 위해 다른 메커니즘을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 설득력있다. "조직-손상 감지기" 를 발전시키는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진화론적 답변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때 우리는 고통을 "조직-손상 감지기" 의 역할 기술에 의해 명시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마음의 작용을 계산기의 기능과 유추하여 생각하는 것은 대중적인 잡지에서나 철학과 인지 과학 같은 전문 분야에서나 모두 평범한 일이 되었다. 우리는 곧 마음과 컴퓨터의 유추를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심성에 대한 계산주의적 견해 역시, 심적 상태들이 다양하게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보여 준다. 우리는 어떠한 계산적 과정도 물리적으로 매우 다양한 계산 기계들 안에서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수많은 종류의 전자 디지털 컴퓨터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에게 친숙해진 반도체 기계들로부터 과거의 진공관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또한 바퀴와 기어로 된 컴퓨터를 만들 수도 있고 (Charles Babbage 의 "분석 엔진" 과 같이),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의 가격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수압으로 작동되는 파이프와 밸브의 체계들로 구성된 컴퓨터를 만들 수도 있다. 물리적으로 다양한 이 모든 컴퓨터들이 "동일한 계산" 을 수행할 수 있다. 즉 어떤 미분 방정식을 풀 수 있다. 만일 마음이 컴퓨터와 같고, 심적 과정들이 기본적으로 계산 과정들이라면, 우리는 마음과 심적 과정들이 물리적으로 실행되는 방법에 관하여 어떤 중요한 제약도 기대해선 안된다. 마치 대단히 다양한 물리적 장치들이 동일한 계산적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듯이, 대단히 다양한 생물학적 혹은 물리적 구조들이 동일한 심리적 과정들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이것이 마음에 대한 기능주의적 이해의 출발점이 되는 사고 방식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어떤 철학자들에 의하면, 물리적/생물학적 속성들과의 관계에서 심리적 속성들이 갖는 추상성 내지 형식성을 지시한다. 즉 심리적 종류는 유기체들의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세부 사항으로부터 추상되며, 그리하여 물리 화학적 관점에서 전혀 다른 상태들이 동일한 심리적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또한 생물학적 물리적으로는 전혀 다른 유기체와 체계들이 동일한 심리적 규칙들을 예화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심리적 종류들은 그것들의 질료적 구성이나 메커니즘들에 관련된다기보다는 사건과 과정들의 형식적 패턴이나 구조들에 관련되는 듯하다. 역으로 동일한 물리적 구조가, 보다 넓은 체계 안에서 그것이 인과적으로 구현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심리적 능력과 기능들을 실현할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동일한 컴퓨터 칩이 한 컴퓨터의 여러 하위 체계들 안에서 다른 계산적 기능을 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결국, 대부분의 뉴런들은 상당히 유사한 동시에 광범위하게 상호 교환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의 심적 유형에 관한 물리적으로 다양한 모든 사례들을 함꼐 묶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고통들 - 인간의 고통들, 개의 고통들, 문어의 고통들, 화성인의 아픔들 - 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들을 고통이라는 단일한 심리적 종류로 분류하도록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즉 심성 종류들의 개별화 원리는 무엇인가?
우선 이 물음에 대하여 유형 물리주의자와 행동주의자가 어떻게 답변하는지 살펴보자. 두뇌-상태 유형 물리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모든 고통들을 고통의 사례로 만들어 주는 공통적 성질은, 어떤 신경 생리적 속성, 즉 C-신경 섬유 진동의 예화 (혹은 그런 상태) 이다. 즉 유형 물리주의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심적 종류는 하나의 물리적 종류이다 (마음-두뇌 동일론자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신경 생물학적 종류이다). 행동주의자는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지 추측이 가능하다. 모든 고통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것은 어떤 행동적 속성이다 - 혹은 달리 말하면, 어떤 시간에 두 유기체가 고통의 전형적인 행동 패턴 (예컨대, 신체를 피하거나 움츠러드는 등) 을 나타내거나 나타내려는 성향이 있을 경우에만 그 둘은 그 시간에 고통 상태에 있다. 그렇다면, 행동주의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심적 유형/종류는 하나의 행동적 종류/유형이다.
만일 당신이 심적 상태의 다수 실현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이 두 가지 답변들을 거부하고 "기능주의자" 의 개념을 선택할 것이다. 기능주의에 의하면, 심적 종류는 기능적 종류 혹은 인과적-기능적 종류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기능" 이라는 것은 어떤 인과적 역할을 실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직-손상 감지기로서의 고통으로 되돌아가 보자. 조직-손상 감지기의 개념은 일종의 기능적 개념, 다음과 같이 역할 기술에 의해 명시된 개념이다. 즉 임의의 어떤 장치가 한 유기체 안에서 조직 손상이 일어난 것을 신빙성있게 감지할 수 있을 경우에만, 그 장치는 그 유기체를 위한 조직-손상 감지기이다. 우리는 기능적 개념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것을 하나의 책상으로 만드는 것, 기화기로 만드는 것, 혹은 온도계로 만드는 것은 어떤 세부적인 물리 화학적 구조나 메커니즘이 아니라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그것들의 능력이다. 이 개념들은 구조적 청사진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행될 기능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규정된다. 일상적 담화나 과학들에서 사용되는 많은 개념들은 이런 의미에서 기능적 개념들이다. 심지어 많은 생물학적 개념들 (예를 들어, 유전자, 심장) 조차도 본질적으로 기능적 요소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고통의 예로 돌아가 보자. 한 유기체가 자신의 조직 손상을 감지하는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는 경우에만 - 정확히 그 메커니즘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와 무관하게 - 그 유기체는 고통 상태에 있을 능력을 갖는다. 조직-손상 감지기가 작동하기 위해서, 그 메커니즘은 조직-손상에 대해 인과적으로 반응해야만 한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조직-손상의 모든 사례들은 이 메커니즘을 작동시켜야 하며 그 이외의 어떤 사례도 그것을 작동시켜선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정상적인 상황에서 조직을 손상시키는 외부적 원인으로부터 손상받은 유기체의 일부나 전부를 공간적으로 분리시키는 행동을 일으키도록 연관되어 있는 다른 메커니즘들도 작동시켜야 한다 (즉 그것은 상처를 피하는 행동 등) 사이의 인과적 매개자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기능주의자는 다음의 주장이 모든 심적 종류들에 대한 일반적인 진리라고 말할 것이다. 즉 심적 종류들은 인과적-기능적 종류들이다. 그리고 한 심적 유형/종류의 모든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속성은, 그것들이 그 심적 유형에 고유한 어떤 인과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암스트롱이 말했듯이, 심적 상태의 개념은 어떤 감각 입력들에 의해 야기되는 성향과 어떤 행동 출력들을 야기하는 성향을 가진 내적 상태의 개념이다.
기능주의와 행동주의 둘 다 감각 입력과 행동 출력 - 혹은 "자극" 과 "반응" - 이 심성 개념의 중심적 요소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기능주의는 대략적으로 심성에 대한 행동주의적 접근에 속하며, 좀더 일반적이고 세련된 형태의 행동주의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기능주의와 행동주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는데, 그것들 중 다음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차이이다.
첫째, 한편 기능주의는 심적 상태를 인과력을 갖는 한 유기체의 실제적인 내적 (internal) 상태로 간주한다. 즉 한 유기체가 고통 상태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전형적으로 조직 손상에 의해 야기되며 또한 전형적으로 움츠리고 신음하고 피하는 행동들을 야기하는 내적 상태 (예를 들어, 인간의 신경 생물학적 상태) 에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행동주의는 현실적 혹은 가능적인 행동들을 가지고 심적 상태들을 신분 확인함에 있어서 심적 상태들과 관계하는 내적 상태들에 대한 언급을 삼가한다. 그래서 행동주의자에게 있어서, 고통 상태에 있다는 것은 움츠리고 신음하거나 움츠리고 신음하려는 성향을 갖는 것이지만, 움츠림과 신음소리를 야기하는 내적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기능주의는 그러한 내적 상태를 갖는다).
비록 행동주의와 기능주의가 모두 심적 상태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행동적 성향들" 을 지칭할지라도, "성향"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그들은 매우 다를 수 있다. 기능주의자들은 성향에 대하여 "실재론자" 의 접근을 취하는 반면에 행동주의자는 "도구주의자" 의 노선을 따른다. 이 문제에 관하여 실재론과 도구주의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기 위하여, 각자의 관점에서 수용성 (즉 물에서 녹는 성향) 이 어떻게 분석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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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주의자의 분석] <x 는 물에서 녹을 수 있다 (즉 물에 녹는 성향을 갖는다)> 는 <만일 x 를 물에 담그면, x 는 녹는다> 로 정의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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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자의 분석] <x 는 물에서 녹을 수 있다> 는 <x 는, 그것을 물에 담갔을 때 x 를 녹도록 야기하는, 어떤 내적 상태 S 에 있다> 로 정의된다. |
그러므로 도구주의에 따르면, 각설탕의 수용성이란 바로 어떤 조건적 (만일 ~ 이면, ~ 일 것이다) 문장이 주장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견해에 의하면, 수용성은 각설탕의 "조건적" 혹은 "가정적" 속성으로 - 즉 물에 담긴다면 녹는 속성으로 - 판명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실재론은 수용성을 각설탕의 정언적/범주적인 (비록 그것이 미시 구조적으로 명시되지 않을지라도) 내적 상태로 간주하며, 여기서 그 내적 상태는 각설탕을 물에 넣었을 때 그것을 녹도록 만드는 인과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한다 (또 다른 탐구들은 그 상태가 어떤 분자 구조를 갖는지를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다). 두 분석들 중 어느 것도, 수용성을 갖기 위해 각설탕을 물에 담그거나 혹은 실제로 녹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차이에 주목할 수 있다. 만일 x 는 물에서 녹고 y 는 물에서 녹지 않는다면, 그러한 차이에 대하여, 실재론자는 그것들이 미시 구조에서 다르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인과적 설명을 제공할 것이다. 도구주의자들의 경우에는, 그 차이가 단지 주어진 사실 (brute fact) 일 뿐이다. 즉 단지 "물에 담그면, 그것은 녹을 것이다" 라는 조건문이 x 에 대해서는 참이지만, y 에 대해서는 참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 차이는 x 와 y 사이의 어떤 더 이상의 차이에도 근거하지 않는다.
심적 상태들을 행동적 성향이라고 말함에 있어서, 기능주의자는 심적 상태를 (정상적인 상황에서 어떤 명시적인 입력 조건들하에서 어떤 특정한 유형의 행동을 야기하는) 인간이나 다른 유기체들의 실제적인 내적 상태로 간주한다. 반면에 행동주의자는 심적 상태를 단지 입력-출력 혹은 자극-반응의 상관 관계로 간주한다. 많은 행동주의자들 (특히 방법론적 행동주의자들) 은, 심적 상태들을 행동의 "내적 원인들" 로 간주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동기 부여될 수 없으며 또한 철학적으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기능주의와 행동주의 사이의 두번째 중요한 차이는, 전자에게 실질적으로 중대한 힘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심적 상태를 규정하는 "입력" 과 "출력" 이라는 말이 해석되는 방식에 있다. 행동주의자에게 있어서, 입력과 출력은 모두 관찰 가능한 물리적 자극 조건들과 관찰 가능한 행동적 반응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기능주의자는 주어진 심적 상태를 규정함에 있어서 그 이외의 다른 심적 상태들을 지칭하는 것을 포함한다. 한 심적 상태의 전형적인 원인과 결과들이 다른 심적 상태들을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은 심적 상태에 대한 기능주의적 개념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하여 가벼운 핀에 찔림이 고통을 야기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정상적으로 방심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일에 깊이 주의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가벼운 찔림과 더불어, 이런 심적 상태들이 고통을 야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한다. 더욱이 고통은 보통 당신에게 불안감을 일으키고 따라서 그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야기하는데, 이것들은 그 자체로 심적 상태들이다.
방금 살펴본 두 가지 지적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만일 당신이 심적 상태들을 심리적 주체들의 실제적인 내적 상태들로 간주한다면, 당신은 그것들을 실제의 인과적 힘 (즉 다른 심적 상태나 사건들을 야기하고 또한 그것들에 의해 야기되는 힘) 을 갖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심적 상태들을 다른 심적 상태들의 원인이나 결과들로 보는 것을 배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런 방식으로 심적 특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기능주의자들은 심적 실재론 (mental realism) 을 지지한다. 그것은, 심적 상태들이 세계의 현상들의 인과적 구조 안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심적 상태들이 진정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행동주의자에게도, 심적 상태들은 실재하는 것이지만 오직 행동이나 행동적 성향들로서만 실재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행동을 넘어서는 심적인 것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능주의자에게 있어서, 심적 상태들은 행동의 내적 원인들이며 그것들은 행동 이상의 것이다.
여러 지점들에서 외부 세계에 닻을 내린 복잡한 인과적 그물을 형성하면서, 주어진 한 심적 상태의 원인과 결과들 중에 다른 심적 사건들을 포함시키는 것은 심적 상태에 대한 기능주의의 일반적 개념에 속하는 것이다. 심리적 주체와 외부 세계가 상호 관계하는 접촉 지점들에서, 입력을 받아들이고 출력을 내보낸다. 그리고 주어진 심적 유형의 정체성은, 그것이 고통과 같은 감각이건 혹은 비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건 혹은 햄 샌드위치에 대한 욕구이건간에, 오직 그것이 인과적 그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만 의존한다. 다시 말하여, 하나의 심적 사건을 어떤 심적 사건의 종류로 만드는 것은, 그 사건이 다른 심적-사건 유형들 및 입력/출력 조건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이다. 이들 다른 심적-사건 유형들은 각기 다른 심적 사건들과 입력/출력들 사이의 인과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정체성을 갖기 때문에, 각 심적 유형의 정체성은 궁극적으로 전체 체계 - 그것의 내적 구조와, 그것이 입력과 출력을 통하여 외부 세계와 인과적으로 연결되는 방식 - 에 의존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능주의는 우리에게 심성에 대한 총체적 (holistic) 개념 이해를 제공한다.
이런 총체적 접근은 기능주의로 하여금 행동주의의 중요한 반박들 중의 하나를 피하도록 해준다. 그것은 앞에서 우리가 보았던 난점으로서, 욕구란 적절한 믿음과 결합할 때에만 관찰 가능한 행동을 산출하며, 마찬가지로 하나의 믿음은 그것에 대응하는 욕구가 나타날 때에만 적절한 행동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를 먹으려는 욕구를 가진 어떤 사람은 그녀 앞에 놓인 것이 사과라는 것을 믿을 때에만 자기 앞에 있는 사과를 먹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그것은 나무로 된 가짜 사과라고 생각했다면, 그녀는 그것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비가 올 것이라고 믿는 어떤 사람은 그가 비에 젖지 않으려는 욕구를 가질 때에만 우산을 가지고 나갈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믿음을 지칭함이 없이 욕구를 정의하거나 혹은 욕구를 지칭함이 없이 믿음을 정의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기능주의자는 이것이 심적 상태들의 총체적 특성을 지적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욕구란 적절한 믿음과 함께 어떤 행동-출력을 야기하는 내적 상태의 종류라는 것이야말로 바로 욕구의 본질적 특징이다. 믿음이나 다른 심적 상태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정의들을 순환적으로 만들지 않는가? 만일 욕구의 개념이 믿음을 지칭함이 없이 정의될 수 없고, 또한 믿음의 개념이 욕구를 지칭함이 없이 설명될 수 없다면, 어떻게 두 개념들이 이해될 수 있는가? 우리는 기능주의의 총체적 접근이 이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아래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기능주의는 원래 퍼트남이 "튜링 기계" 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구성했던 이론이다. 튜링 기계란 영국의 수학자이며 논리학자인 튜링 (Alan M. Turing) 이 추상적으로 고안한 계산 기계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비록 인과적-기능적 역할에 의해 기능주의를 설명하는 것이 이제는 관계가 되었지만, 튜링 기계 형태의 기능주의를 검토함으로써 기능주의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마음의 작용들이 컴퓨터의 작동들에 의해 가장 잘 이해된다는 생각, 소위 마음에 관한 계산주의적 관점 (혹은 요약하면, 계산주의) 을 탐구하기 위해 필요한 배경을 우리에게 제공해 줄 것이다.
하나의 튜링 기계는 다음의 구성 요소들을 갖는다.


각 네모칸에는 오직 하나의 기호만이 나타난다 (빈 칸도 기호들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그 기계의 일반적인 작동은 다음과 같다.
A.
각 시점에 기계는 하나의 내적 상태,
에 있으며, 그것이 헤드는 그 테이프의 한 칸을 읽고 있다.
B. 주어진 시점 t 에 기계가 하는 일은, 시점 t 에 그것의 내적 상태와 그것의 헤드가 읽고 있는 기호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
C. 기계의 내적 상태와 읽혀진 기호에 의존하여, 기계는 다음 세 가지 일들을 수행한다.
1. 기계의 헤드는 그 기호를 알파벳의 다른 기호로 (동일한 기호도 가능) 대치한다 (달리 말해서, 헤드는 읽혀진 기호를 지우고 새로운 기호를 쓴다. 이때 지운 것과 동일한 기호를 쓸 수도 있다).
2. 기계의 헤드는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한 칸씩 움직인다 (혹은 계산이 완료되면 멈춘다).
3. 그 기계는 새로운 내적 상태로 들어간다.
단일 기호 표기법 (the
unary notation) 으로 양의 정수를 더하는 튜링 기계를 생각해 보자 (이 표기법에서
숫자 n 은, 연속적으로 [동일한 기호의] 타자를 n 번 치는 것으로 나타나며 매번
칠 때마다 한 칸을 차지한다). 그 기계에서 2 와 3 을 더하는 문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다음의 그림을 살펴보자. 그 기계의 헤드가
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첫번째 수를 읽고 있다.

(기호 # 는 그 문제의 경계들을 표시한다.) 다음 그림과 같이 우리는 계산이 끝났을 때, 그 테이프 위에 다섯 번 연속하여 1 의 타자를 친 후 멈추는 그런 방법으로 이 튜링 기계를 "프로그램"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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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계가 이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한 가지 단순한 방법은, 그 기계 (혹은 헤드) 가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 기호를 찾아서 그것을 1 의 타자로 대치하고, 다시 계속 이동하다가 맨 오른쪽의 타자 1 을 발견하면 그것을 지우고 (즉 그것을 기호 # 로 대치하고) 나서 멈추는 것이다. 다음의 단순한 "기계표 (machine table)" 는 우리의 덧셈 과정을 정의해 주는 지침들의 완전한 집합이다 (그것을 TM1 이라고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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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를 읽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맨 왼쪽의 세로줄에는 수직으로 기재된 기계 알파벳 기호들이 있다.
맨 윗줄에는 기계의 내적 상태들이 기재되어 있다. 내부의 항목들은 각기 하나의
지침이다. 그것은 맨 왼쪽 열에 있는 기호를 읽는 동시에 그것의 맨윗줄에 기재된
내적 상태에 있을 때, 무엇을 할 것인지를 기계에게 지시한다. 예를 들어,
와 1 이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
는, 그 기계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만일 네가 내적 상태
에서 기호 1 을 읽고 있다면, 1 을 1 로 대치하고 (즉, 그것을 그대로 두고)
오른쪽으로 한 칸 움직여서 (R) 내적 상태
로 가라 (즉, 동일한 상태에 머무르라)." 곧바로 다음 항목,
은 기계에게 "만일 네가
상태에서 기호 + 를 읽고 있다면, + 를 1 로 대치하고 오른쪽으로 한 칸 움직여서
상태
로 가라" 라고 지시한다. 맨 아래 항목,
에 나타난 L 은 "왼쪽으로 한 칸 이동하라" 를 의미한다. 또한 오른쪽
열의 항목,
는 "만일 네가
상태에서 1 을 읽고 있다면, 1 을 # 로 대치하고 정지하라" 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튜링 기계가 2 + 3 의 덧셈을 계산하기 위하여 따라야 할 정확한
일련의 단계들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독자들은 스스로 그 과정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라).
튜링 기계의 기계표는 기계의 작용 과정들을 완전하게 남김없이 명세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튜링 기계를 그것의 기계표와 동일시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기계표란 지침들의 집합일 뿐이므로, 이것은 하나의 튜링 기계가 그러한 지침들의 집합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튜링 기계의 "내적
상태들" 이란 어떤 종류의 것들인가? 우리는 이 일반적인 물음을 나중에 다룰
것이지만, 우리의 기계 TM1 을 가지고, 특정한 기계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직관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즉
는 + 와 # 를 찾고 있는 상태이다 - 그것은, TM1 이 그 상태에
있을 때, 1 들을 만나면 무시하면서 오직 + 와 # 를 찾아서 계속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그런 상태이다. 더욱이 만일 그 기계가
상태에서 + 를 발견한다면, 동일한 상태에 머무르는 한편, 그것을 1 로 대치하고
오른쪽으로 계속 이동한다. 그것이 # 를 읽는 경우 (그리하여 주어진 문제의 맨 오른쪽
경계를 인지할 경우), 그것은 왼쪽으로 한칸 되돌아서 새로운 상태
, 즉 "1 위에다 # 를 인쇄하고 나서 멈추는" 상태로 들어간다. 기계
TM1 이 이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이 발견하는 임의의 기호 1 을 # 로 대치하고
멈추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각 상태는 기계로 하여금 읽혀진 기호에 의존하여 구체적인
일들을 수행하도록 한다.
우리는 동일한 작업을 더욱 빠르고 보다 단순하게 수행할 수 있는 또 다른 튜링 기계를 고안할 수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단일 기호 체계의 수를 더하기 위하여 반드시 기계가 주어진 문제의 가장 오른쪽 가장자리를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최초의 1 을 지우고, 그 다음 + 기호에다 1 을 대치하는 일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다른 계산기, 즉 TM2 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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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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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즉시 단일 기호법으로 뺄셈을 수행하는 세번째 튜링 기계, TM3 를 만들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뺄셈 문제가 그 기계에게 주어졌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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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b |
1 |
1 |
1 |
1 |
- |
1 |
1 |
b |
# |
# |
(b 는 문제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그 기계가 최초의 1 을 읽고
상태에서 출발할 경우, 우리는 n-m 을 계산하는 기계표를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1. 그 기계는 n 의 첫번째 1 을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빼는 수, m 을 찾을 때까지 계속 오른쪽으로 같다 (그것이 m 을 찾았다는 것을 어떻게 인지하는가?) 그 다음 이 수의 첫번재 1 을 지우고 (그것을 # 로 대치하고), 왼쪽으로 가서 n 의 마지막 1 을 지운다 (다시 그것을 # 로 대치한다).
2. 그 기계는 다시 오른쪽으로 가서 위의 과정을 반복하고, m 안에 있는 모든 1 들이 다 없어질 때까지 계속하여 반복한다 (어떻게 그 기계는 이 일을 완료했다는 것을 "아는가"?). 그 다음 기계가 마이너스 기호 - 를 찾을 때까지 오른쪽으로 이동하게 하여, - 를 지우고 (즉 # 를 대치하고) 나서 멈춘다. (만일 당신이 정돈된 출력 테이프를 원한다면, 당신은 멈추기 전에 b 들을 지우도록 할 수 있다.)
3. 만일 기계가 두번째 집합의 1 들을 다 없애기 전에 첫번째 집합의 1 들이 다 없어졌다면 (이것은 m 이 n 보다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어진 문제가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것임을 의미하기 위해, 우리는 기계로 하여금 어떤 기호 (말하자면, '?' 와 같은 기호) 를 인쇄하도록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n = m 의 경우를 위해서도 대비하여야 한다.
독자들은 위의 과정들을 실행하는 기계표를 써보도록 하라.
우리는 또한 주어진 일련의 1 들을 그 오른쪽에 (혹은 왼쪽에) 복사하는 "복사 기계 (transcription machine)", TM4 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만일 TM4 가 다음과 같이 표시된 테이프를 가지고 그 계산을 시작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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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
1 |
1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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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테이프 위에 다음과 같이 기호들을 배열하고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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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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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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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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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 기계의 관심은 그것이 곱셈 기계, TM5 을 구성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기본적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즉 우리는 n 개의 일련의 1 들을 m 번 복사함으로써, n × m 을 얻을 수 있다 (즉, m 번을 세면서 n 을 반복적으로 복사하는 것이다).
자연수에 대한 어떤 산술 작용도 (예를 들어, 제곱셈이나 계승수를 취하는 것 등) 덧셈과 곱셈에 정의될 수 있으므로, 어떤 산술적 계산이든지 가능한 튜링 기계가 있다는 것이 귀결된다. 사실상 임의의 컴퓨터에 의해 수행될 수 있는 어떤 계산이든지 튜링 기계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 즉 계산될 수 있음과 튜링 기계에 의해 계산될 수 있음은 동일한 개념들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우리는 두 개의 분리된 테이프 - 하나는 입력을 위한 것 (계산될 문제가 나타나는 곳) 이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 계산과 마지막 출력을 위한 것 - 와 두 개의 분리된 헤드 - 하나는 읽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쓰기 위한 것 - 를 가진 튜링 기계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것의 스캐너 ("감각 기관") 를 통하여 "감각적 자극들" (입력 테이프에서 그것이 읽는 기호들) 을 수용하고, 반응으로 구체적인 행동들 (프린터 헤드에 의해 출력 테이프 위에 씌어진 기호들) 을 방출하는 튜링 기계를 생각하도록 도와준다. 두 개의 분리된 테이프를 가진 기계, 혹은 유한한 수의 테이프들을 가진 기계에 의해 수행될 수 있는 어떤 계산이든지 하나의 테이프를 가진 기계에 의해서도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므로 더 많은 수의 테이프들을 늘이는 것은 튜링 기계의 계산 능력을 강화시키거나 튜링 기계의 개념을 실질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지 않는다.
튜링은 또한 "보편적 기계 (universal machine)" 를 만드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그 기계는 어떤 특정한 기능/함수의 계산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계산하고자 하는 기능/함수에 대한 기계표와 (그것의 함수값을 구하기 위한) 특정한 초기 값들 ("논증들") 을 실을 수 있는 일반-목적 컴퓨터와 같은 것이다. 이 기계의 입력 테이프 위에, 당신은 다음 두 가지를 명시할 수 있다. 하나는 보편적 기계가 읽을 수 있는 어떤 표준적 표기법으로 기재된, 구하고자 하는 함수에 대한 기계표이다. 다른 하나는 그 함수가 계산되어야 할 값들이다. 보편적 기계는 이러한 함수에 대한 기계표를 읽고, 계산이 끝날 때까지 필요한 지침들을 실현하도록 프로그램된 것이다.
튜링 기계의 개념은
확률적 자동 기계의 개념을 낳는 것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 상기하다시피, 튜링 기계의
각 지침은 결정론적인 것이다. 즉 내적 상태와 읽혀진 기호가 주어지면, 바로 그
다음의 작동이 전체적으로 그리고 유일한 방식으로 결정된다. 확률적 자동 기계의
지침은 다음의 형태를 가질 것이다. 즉 내적 상태
와 읽혀진 (scanned) 기호 b 가 주어지면,
1.
의 확률로
를 인쇄하거나,
의 확률로
을 인쇄하거나, …… 혹은
의 확률을 가지고
을 인쇄하라 (여기서 이 확률들의 총합은 1 이 된다).
2.
의 확률로 R 을 움직이거나,
의 확률로 L 을 움직여라 (여기서 이 확률들의 총합은 1 이 된다).
3.
의 확률로 내적 상태
로 들어가거나,
의 확률로
로 들어가거나, …… 혹은
의 확률로
으로 들어가라 (여기서도 그 확률들의 합은 1 이 된다).
그러므로 확률적 자동 기계의 작용들은 비결정적이다. 즉 그 기계의 현재 내적 상태와 그것이 읽고 있는 기호는 그 기계가 해야 할 일을 유일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기계는 제멋대로 혹은 자의적으로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 기계의 출력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기술하는 고정적이고 안정된 확률들이 존재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실제의 심리적 주체의 행동을 기술할 어떤 기계를 생각한다면, 비록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확률적 기계의 행동을 모방하는 결정론적 기계를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확률적 기계가 결정론적 기계보다 더욱 현실적인 것이다.
공학 수업을 받는 학생들에게 과제물로 우리의 단순한 계산기, TM1 에 대한 기계표를 제시한다고 가정해 보자. 각 학생들은 그 기계표에 명시된 계산을 수행할 실제의 물리적 장치를 만든다고 하자. 각 학생들은 그 기계표에 명시된 계산을 수행할 실제의 물리적 장치를 만든다고 하자. 그러므로 우리가 학생들에게 만들도록 요구하는 것은, TM1 의 "물리적 실현들", 즉 TM1 의 기계표에 따라 작동하는 실제의 계산 기계들이다. 수없이 이질적이며 다양한 기계들이 만들어지리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실제로 앞서 기술하였던 튜링 기계와 비슷하며 또한 그것처럼 작용할 것이다. 즉 그것들은 네모칸으로 나누어진 종이 테이프와, 기호들을 읽고 지우고 인쇄할 수 있는 실제의 물리적 "헤드" 를 가질 것이다. 어떤 것들은 아마 자석 테이프들을 사용하며, 전기적으로 읽고 쓰고 지우는 헤드들을 가질 것이다. 어떤 기계들은 아무런 "테이프" 나 "헤드" 도 갖지 않으며, 그 대신 컴퓨터 디스크나 혹은 컴퓨터 CPU (중앙 처리 장치) 의 기억 공간을 사용할 것이다. 유머 감각 (그리고 많은 시간과 다른 자원들) 을 가진 재치있는 학생은 전선과 스위치 대신에 파이프와 밸브를 가진 수력으로 작동되는 장치를 만들려고 시도할는지 모른다. 그 가능성들은 끝이 없다.
그러나 튜링 기계의 물리적 실현이라는 개념은 정확히 무엇인가? 한 물리적 장치를 주어진 튜링 기계의 실현 (realization) 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그 기계의 알파벳의 기호들은 구체적인 물리적 구현체들로 주어져야 한다. 그것들은 종이 위에 있는 잉크 자국이나, 플라스틱 테이프 위의 자력을 띤 철 입자의 패턴들이나, 혹은 다른 무엇으로든지 구현될 수 있다. 그것들이 무엇이건, "스캐닝" 하고 있는 물리적 장치는 상당한 정도의 신뢰 가능성을 가지고 그 기호들을 "읽을 수" - 즉 그것들에 차별적으로 반응할 수 -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 기호들의 물리적 속성들이 그 스캐너의 물리적 장치에 대하여 제약을 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제약들은 보통 유일하게 하나의 장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대단히 많은 물리적 장치들이, 물리적으로 구현된 기호들을 읽기 위한 스캐너로서 작용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이와 동일한 생각들은 기계의 프린터와 출력에도 적용된다. 기계가 그것의 출력 테이프 위에 인쇄하는 기호들은 (우리는 두 개의 분리된 테이프를 가진 기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물리적 형태를 취해야 하며, 프린터는 그 기호들을 요구하는 대로 출력하도록 고안되어야 한다. 물론 프린터 (인쇄기) 는 문자 그대로 어떤 것을 "인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인쇄기의 작용은 전적으로 전기적인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인쇄기는 음성으로 출력을 산출할 수도 있고, 또는 출력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그리고 나서 그것을 미래의 계산 목적을 위해 저장하는) 음극선 모니터일 수도 있다.
그러면 기계의 "내적
상태들" 은 어떠한가? 그것들은 어떻게 물리적으로 실현되는가? TM1 이라는
기계표에 있는 다음의 구체적인 지침을 고려해 보자. 만일 그 기계가 상태
에 있으면서 + 를 읽고 있다면, + 를 1 로 대치하고 오른쪽으로 한칸 이동하고
상태로 들어가라.
와
을 각기
와
을 실현하는 물리적 상태들이라고 가정하자. 그때
와
은 다음 조건을 만족해야만 한다. <+ 의 물리적 스캐닝과 함께 물리 상태
의 발생> 은, 다음 세 가지 물리적 사건들을 물리적으로 야기해야만 한다.
즉 (1) + 의 물리적 구현체를 1 의 물리적 구현체로 대치하는 것, (2) 물리적 테이프
(혹은 헤드) 의 적절한 물리적 이동, (3) 그 기계 안에 상태
의 발생. 일반적으로, 그 경우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기계표에서 언급된
다양한 추상적 매개 변수들 (즉 기호들, 내적 상태들, 헤드의 이동들) 사이의 기능적
혹은 계산적 관계들을 이들 변수들의 물리적 구현체들 사이의 적절한 인과적 관계들로
대치하는 것이다.
그때 논리적 관점에서
보면, 내적 상태들은 다른 변수들과의 관계에 의해 오직 "암묵적으로만 정의"
된다. 즉
는 다음과 같은 관계들에 놓인 상태이다. 만일 그 기계가 그 상태 (
) 에 있고 기호
를 읽고 있다면, 그 기계는
를
로 대치하고 R 로 (즉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상태
로 들어가며, 또한 만일 그 기계가
을 읽고 있다면, 그것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 등등. 그리하여
는, 알파벳 기호들을 <
, R (또는 L),
> 형태의 3 항 관계로 배치하는 기능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물리적 관점에서
보면,
를 실현하는
는 물리적으로 실현된 기호들과 세 항목의 물리적 실현자들 - 혹은 마찬가지로,
다른 물리적 자극들 (즉 읽혀진 기호들) 에 반응함에 있어서 적절한 물리적 출력
(즉 세 항목) 을 산출하려는 성향 - 사이의 인과적 매개체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q 들을 실현하는 p 들의 본래적인 물리적 성질들은, 그것들이 올바른 인과적/관계적
속성들을 갖는 한,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들의 본래적 속성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혹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상의 본래적 속성들은
오직 그것들을 갖는 대상이나 상태들의 인과력에 영향을 미치는 범위 내에서만 중요하다.
이 상태들이 올바른 인과적 관계들을 맺음으로써 그들에게 부과된 인과적 역할을
수행하는 한, 그것들은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이든 상관이 없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공학적 능력이 있다면, 기계의 기능 작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도 특정한 기계 상태들을
실현하는 수많은 물리적 상태들이 상호 교환될 수 있도록 기계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도 그럴듯하다.
그렇다면 심적 상태를 어떤 인과적 역할을 담당하는 상태로서 이해하는 기능주의의 관점과 물리적 상태가 튜링 기계의 내적 상태를 실현한다는 아이디어 사이에는 명백한 수렴이 있다고 보여진다. 기능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하나의 주어진 심적 상태를 그 종류의 심적 상태로 만드는 것은 바로 감각적 입력과 행동적 출력 및 다른 심적 상태들에 대한 그것의 인과적 역할이듯이, 마찬가지로 어떤 물리적 상태를 주어진 기계 상태의 실현으로 만드는 것은 입력과 출력 및 다른 기계 상태들을 실현하는 물리적 상태들에 대한 그것의 인과적 역할이다. 이런 이유로, 기능주의자가 마음의 모델을 위해 튜링 기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S 를 물리적 체계라고 하자 (그것은 컴퓨터와 같은 전자적 기계 장치일 수도 있고, 생물학적 유기체나, 사업 조직, 혹은 그 밖의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의 입력과 출력들을 기술하기 위한 어떤 어휘를 채택했다고 하자. 즉 우리는 무엇을 주위 상황으로부터 받아들인 입력으로 간주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그것의 행동적 출력들로 간주할 것인지에 관한 명세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체계 S 가 주어진 입/출력 명세서에 관한 튜링 기계 M 을 실현할 그 경우에만, 튜링 기계 M 은 그 입/출력 명세서와 관련된 체계 S 의 기계 기술 (machine description) 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기계 기술임 (being a machine description of) 이라는 관계는 실현함이라는 관계의 역이 된다. 우리는 또한 기계 기술보다 약한 하나의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튜링 기계 M 이 S 의 입-출력 상관 관계들에 대한 올바른 기술을 제공할 그 경우에만, M 은 (다시, 주어진 입-출력 명세서에 관한) S 의 행동적 기술 (behavioral description) 이다. 그래서, S 에 관한 모든 기계 기술은 또한 행동적 기술이지만,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M 은 S 를 규정하는 입-출력 상관 관계들의 참 기술을 제공할 수 있으나, 그것의 기계 상태들은 S 안에서 실현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S 의 내적 작용들은 M 의 기계표가 제시한 기능적-계산적 관련성을 올바로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상 S 의 올바른 기계 기술을 제공하는, M 이 아닌, 또 다른 튜링 기계 M* 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입-출력을 가진 두 개의 물리적 체계들은 동일한 튜링 기계의 실현자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 귀결된다 (계산기 TM1 과 TM2 는 그런 상황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기계 기능주의자들은 마음을 일종의 튜링 기계 (혹은 확률적 자동 기계) 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물론 설명이 더 필요하겠지만,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는 앞서 이루어진 논의로부터 꽤 분명해졌다. 중심적인 아이디어는 다음이다. 어떤 것이 심성을 갖는다는 것 - 즉 심리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 - 은, 그것의 심적 상태들 (즉 심적 상태 유형들) 을 기계표의 내적 상태들과 동일시함으로써, 그것이 물리적으로 실현되는 적절히 복잡한 튜링 기계가 된다는 점이다. 이 생각을 설명하는 다른 방식은, 기계 기술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한 유기체의 기계 기술인 (적절한 복잡성을 지닌) 튜링 기계가 존재하고 그것의 심적-상태 유형들이 그 튜링 기계의 내적 상태들과 동일시될 경우에만, 한 유기체는 심적 특성을 갖는다. 이 모든 것들은 물론 적절하게 선택된 입력/출력/ 명세서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유기체가 어떤 튜링 기계 (혹은 기계들) 를 예화한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기 이전에, 무엇이 그 유기체의 입력과 출력들로 간주되는지를 알아야 하거나 결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 유기체의 심리학은 하나의 튜링 기계에 의해 표현된다는 생각, 즉 기계 기능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이 관점에 대하여 고려해 보자. 심리적 주체 S 의 가능한 모든 입력과 출력들의 완전한 명세서를 V 라고 하고, S 에게 실제로 그리고 가능한 모든 입-출력들의 상관 관계들을 C 라고 하자 (즉, C 는 V 안에 기재된 모든 입력과 출력들에 있어서, S 에게 어떤 입력들이 적용되고 어떤 출력이 산출되는지에 관한 완전한 명세서이다). S 를 위한 심리학을 구성함에 있어서, 우리는 S 안에 내적 상태들의 집합을 상정함으로써 C 에 관한 명료한 체계화를 제공하는 하나의 이론을 구성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이론은 S 에게 적용되는 어떠한 입력에 대해서도 S 가 어떤 출력을 산출할 것인지를 예측할 것이며, 또한 특정한 어떤 입력이 특정한 출력을 산출하는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우리가 그 체계의 내적 상태들을 언급하지 않는 한, 어떤 최소한의 복잡한 행동 체계에서도 이런 종류의 체계화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S 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입력이 항상 S 로 하여금 동일한 출력을 낳도록 자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입력에 의해 산출되는 실제의 출력은, 그때의 S 의 내적 상태에 의존할 것이라고 가정해야만 한다.
더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튜링 기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한가지 수정할 필요가 있다. 튜링 기계의 내적 상태들, 즉 q 들은 주어진 그 시간의 기계의 총체적 (total) 상태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물리적 실현자들인 p 들도 그때의 (실현되는 시간의) 그 기계의 물리적 실현자의 총체적인 물리적 상태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튜링 기계들이 우리에게 친숙한 심리학 이론들과 전혀 유사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이론들이 상정하는 상태들은 주어진 시간의 한 주체의 총체적 상태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술적인 (technical) 문제이며, 우리가 가정하는 어떤 것은 정교한 "내적 상태" 의 개념으로 개선될 수 있다. 그 경우에 우리는 충체적인 내적 상태란, 다른 총체적 상태들을 산출하기 위하여 다른 방식들로 결합하는, "부분적" 상태들로 구성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수정은 튜링 기계에 대한 원래의 개념에서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앞으로, 우리는 대부분의 맥락에서 이 수정된 내적 상태의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튜링 기계에 의해 주체 S 의 심리학을 표현하는 문제로 돌아가보자. 어떤 튜링 기계가 (혹은 기계들이) S 의 심리에 관한 기술로서 적합할 것인가? 분명히 어떤 적합한 튜링 기계도, 위에서 정의한 바에 따라, S 의 행동적 기술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즉, 그것은 S 의 입-출력간의 상관 관계들 (V 에 의해 명시된 것으로서) 에 관한 올바른 기술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S 의 입-출력 상관 관계들에 관한 올바른 표상을 제공하는 튜링 기계는 하나 이상 있음에 틀림없다 - 사실상 그런 튜링 기계는 무한히 많을 것이다.
이 기계들은 각기 우리의 실리적 주체 S 에 대한 올바른 행동적 기술을 갖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예측적 도구로서 동등하게 좋은 것이다. 비록 그것들 중 일부는 다루기가 더 용이하고 계산적 측면에서 더 효율적일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입력 조건들에 대하여 동일한 행동 출력을 예측할 것이다. 이것은 "행동적 기술" 의 개념으로부터 나오는 단순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다른 튜링 기계들이며, 그 차이들은 왜 중요한가?
행동적으로 동일한
튜링 기계들, 즉 M₁과 M₂가 어떻게 서로 다를 수 있는지는 명백하다. 그것들이
다른 튜링 기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들의 기계표가 다르다고 - 즉 튜링 기계들이
개별화되는 방식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일한 입력에 대하여, M₁과
M₂가 아마도 다른 계산 과정들을 통하여 동일한 출력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각의 기계는 내적 상태들의 집합을 갖는다. M₁의 내적 상태들의 집합을 <
> 이라고 하고, M₂의 그것을 <
> 이라고 하자. 또한 M₁은 우리의 심리적 주체 S 의 기계 기술이지만, M₂는
S 의 기계기술이 아니라고 가정하자. 다시 말하면, S 는 M₁의 물리적 실현이지만,
M₂의 물리적 실현은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M₁에서 표현된 계산적 관계들은
S 의 물리적 상태들간의 인과 관계들의 집합에 반영되는 반면에, M₂에서 표현된
계산적 관계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M₁의 내적 상태들 <
> 에 대응하여 S 안에 실제의 물리적 (아마도 신경 생물학적) 상태들 <
> 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Q 들은 서로간에 그리고 물리적 스캐너 (감각-기관들)
와 물리적 프린터 (전동 기계) 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들은 M₁에서 발생하는
모든 계산 과정들에 대응하여 그와 동형적인 인과적 과정들이 S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증하는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즉 S 는 M₁의 "인과적 동형체"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분명히, 비록 M₁과 M₂는 둘 다 S 의 관찰 가능한 입력과 출력 행동들에 관한 정확한 예측 이론들일지라도, M₁은 S 에게 "심리학적으로 실재" 하는 것이지만 M₂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S 는 그것의 상태들이 - M₁의 기계표에 의해 표상되는 계산 구조를 반영하는 - 인과적 체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물리적 구조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S 의 물리적/인과적 작용들은 M₁의 계산적 작용들의 동형적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M₁은 S 에 대한 "참인 심리학" 을 제공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설명적 이론, 즉 왜 S 는 주어진 입력 조건들 하에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일 경우, 이것은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입력 i 가 S 에게 주어졌을 때, S 는 내적 상태 p 에 있었기 때문에 행동적 출력 o 를 산출했다고 하자. 이것은, 그 호소된 상태 (즉 p) 가 어떤 의미에서 그 체계의 "실재 (real)" 상태일 경우에만, 하나의 설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상태 p 가 i 와 연접하여 o 를 야기하고, 그리고 p 가 실제로 S 의 상태가 아닌 한 이것이 야기될 수 없을 경우에만, 그것은 하나의 인과적 설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제 분명한 것은, p 가 S 에 의해 실현된 튜링 기계, 즉 M₁의 내적 상태일 경우에만 우리는 p 에게 실재성을 부여할 수 있으며, 만일 p 가 S 에 의해 실현되지 않은 튜링 기계, 즉 M₂의 내적 상태라면 그것에 실재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에는 - p 를 실현하는 동시에 그것의 인과력이 p 를 규정하는 기능적-계산적 관계들에 정확히 대응하는 - S 의 실제적인 물리 상태 (즉 P) 가 존재하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S 는 상태 q 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입력 i 를 수용할 때 o 를 산출한다" 는 것의 설명력은, o 와 i 의 물리적 구현체들 및 P 와 관련된 인과 관계들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철학적 논쟁은 부분적으로 그러나 결정적으로 당신이 받아들이는 과학 이론에 대한 형이상학에 의존한다. 만일 당신이 일반적으로 과학 이론들을 혹은 어떤 특정 영역에 대한 이론들을 단지 주어진 관찰들로부터 또 다른 관찰들을 추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예측적 도구들로 간주한다면, 당신은 그것의 이론적 가정물 (이론 물리학이 상정하는 관찰할 수 없는 소립자들이나 그것들의 기이한 속성들과 같은 것) 에 어떤 존재론적 의미도 부여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들을 단지 예측을 얻기 위한 계산적 보조 장치로 간주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과학적 이론에 대한 소위 "도구주의" 혹은 "반실재론" 이라고 불리운다. 그런 견해에 의하면, 이론적 원리들의 "진리성" 은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실정하는 실체와 속성들의 "실재성" 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일한 것은 그 이론의 "경험적 적합성" 이다 - 그 이론이 예측적 장치로서 얼마나 정확하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것의 적용 범위가 얼마나 포괄적인지 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심리학 이론에 대한 도구주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비록 심리적 주체의 행동 기술인 튜링 기계들 중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조작적 수월성과 경제적 효율성 때문에 더 선호될 수는 있을지라도, 한 심리적 주체의 행동 기술인 어떤 튜링 기계도 그 주체에 대한 심리학으로서 충분히 좋은 것이며, 그것의 적합한 행동 기술인 다른 튜링 기계만큼 정확히 좋은 것이다. 만일 이것이 심리학의 본성에 대한 당신의 견해라면, 행동적으로 적합한 많은 심리학들 중에서 어느것이 그 주체에 대해 "실제로 참인" 이론인가 하는 물음은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과학 이론에 대한, 혹은 심리학에 대한 "실재론" 의 관점을 채택한다면, 행동적으로 적합한 모든 기술들이 심리학적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재론자에게 있어서, 적합한 심리학이란 "심리학적 실재성" 을 갖는 것이이어야 한다. 즉 그것이 상정하는 내적 상태들은 입력과 출력 사이의 인과적 매개체 역할을 하면서 그 유기체 안에 실재하는 상태로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 유기체의 올바른 기계 기술인 튜링 기계만이 그 유기체에 대한 수용할 만한 심리학 이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단순하고 세련된 행동 기술이, 그 주체의 관찰 행동을 야기한 내적 과정들을 올바로 기술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심리 주체가 반드시 가장 세련된 이론이 (단순성과 우아함의 표준이 무엇이건간에) 명시하는 바를 따른다고 가정할 어떤 선험적인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도구주의 입장을 넘어서서 심리학적 실재성을 주장하고자 하는가? 여기에 두 가지 관련되는 이유들이 있다. (1) 이미 본 대로 만일 우리가 심리학 이론이 행동에 관한 설명들 (특히 인과적 설명들) 을 낳기를 기대한다면, 심리 상태들, 즉 심리학이 상정하는 심리적 주체의 내적 상태들은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현장 심리학자들의 태도인 것 같다. 즉 그들이 연구하는 주체들에게 내적 상태들, 능력들, 기능들, 메커니즘들 (예를 들어, 정보의 저장과 복구, 심상, 선호 체계 등) 을 귀속시키고, 행위의 인과적 설명을 구성함에 있어서 그것들을 지칭하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 공통적이고 거의 보편적인 관행이다. 그리고 (2) 우리는 올바른 심리학 이론이 상정하는 심리 상태, 능력, 기능들의 기초가 되는 실제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신경생리학에 대한 탐구는, 심리적 기능들과 메커니즘을 실행하는 생리적 메커니즘을 확인하는 데 인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 앞으로도 이 연구가 계속되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사실상 우리가 심리학 이론들에 대한 생리학적 토대를 기대하고 또한 그것을 주장해야 하는 것은, 바로 심리학적 이론화에 대한 우리의 실재론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 유기체에 대한 올바른 심리학은, 단지 그것에 대한 행동적으로 적합한 기술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기계 기술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심리적 이론에 대한 실재론의 표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만일 어떠한 유기체의심리학도 튜링 기계로서 표상될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심리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을 설명하거나 정의하기 위하여 튜링 기계가 표상할 수 있는 것을 이용하는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기계 기능주의가 제안하는 것은 바로 다음이다. 한 유기체나 체계가 심리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 - 즉 한 유기체가 심성을 갖는다는 것 - 은 그것이 적절한 하나의 튜링 기계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심성을 가진 어떤 것도 하나의 적절한 기계 기술을 갖는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기계 기능주의는, 그것이 적절한 종류의 기계 기술을 갖는다는 것이 그것의 심성을 구성한다는 보다 강한 주장을 한다. 다음은 심성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논제이다. 심성, 혹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적절한 튜링 기계를 실현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심성을 가진 피조물들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가 튜링 기계들이라는 사실이다. 기능주의는 어떤 구조적 복잡성을 지닌 두뇌를 갖는 것이 심성을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두뇌의 중요성은 정확히 그것이 하나의 튜링 기계라는 점에 놓여 있다. 우리의 심성을 구성하는 것은 우리 두뇌의 계산적 속성들이지, 그것의 생물학적 속성들이 아니다. 요약하면, 우리의 두뇌가 우리의 마음인 이유는, 그것이 컴퓨터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유기적인 생물학적 구조이기 때문이 아니다.
두 체계들, S1 과 S2 가 (동일한 시간이나 다른 시간들에) 동일한 심적 상태에 있다고 가정하자. 심적 유형/종류에 대한 기능주의의 개념에 의하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의 심적 종류는 ("적절한 종류" 의) 한 튜링 기계의 내적 상태로 가정된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하여 S1 과 S2 가 동일한 상태에 있기 위하여, S1 이 q 상태에 있고 S2 도 q 상태에 있는 어떤 튜링 기계 상태 q 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S1 과 S2 는 둘다 물리적 체계들이며, 그것들은 매우 다른 종류의 체계들일 수 있다 (다수 실현 가능성을 상기하라). 물리적 체계들로서 그것들은 물리적 상태들을 갖는다 (즉, 어떤 물리적 속성들을 예화한다). 그것들이 둘 다 시간 t 에 기계 상태 q 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즉 시간 t 에 S1 이 Q₁상태에 있고 S2 가 Q₂상태에 있으면서, Q₁이 S1 안의 q 를 실현하고, Q₂가 S2 안의 q 를 실현하는 그런 물리적 상태들 Q₁과 Q₂가 존재한다. 다수 실현 가능성은 Q₁과 Q₂가 물리적으로 그렇게 많은 것을 공유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는 생물학적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전자 상태일 수도 있다. 두 상태를 함께 묶어 주는 것은, 오직 각각의 체계 안에서 그것들은 동일한 내적 기계 상태를 실행한다는 사실뿐이다. 다시 말해서, 두 상태들은 그들의 각 체계 안에서 동일한 계산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동일한
내적 기계 상태 q" 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오직 주어진 기계표와의 관계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튜링 기계의 내적 상태들은 오직 주어진 기계표와 관련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사용했던 기계표의 배열 안에서, 내적 상태 q 는 전적으로
그 아래에 세로로 나열된 지침들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러나 이 지침들은 다른 내적
상태들, 말하자면,
등을 지칭하며, 그리고 이것들 아래 나오는 지침들을 살펴본다면 당신은 상태
q 를 다시금 지칭하게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이 상태들은 상호 의존적으로
정의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개의 기계표들을 가로질러 한 내적 상태의
동일성이나 차이성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한 튜링 기계의
내적 상태
와 다른 튜링 기계의 내적 상태
를 놓고,
가
와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두 개의 물리적
기계들이 동일한 튜링 기계의 실현자들이 아닌 한, 물리적으로 실현된 한 튜링 기계의
물리적 상태
에 대하여, 그것이 다른 물리적 기계의 물리 상태
가 실현한 것과 동일한 내적 기계 상태 q 를 실현한다거나 실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심적 유형에 대한 기계-기능주의의 관점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 같다. 임의의 두 주체들이 동일한 심적 상태에 있기 위하여, 그들은 동일한 튜링 기계를 실현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동일한 튜링 기계를 실현한다면, 그들의 전체 심리 체계는 동일해야 한다. 즉 기계 기능주의에 따르면, 두 주체들이 단 하나의 심리 상태를 공유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총체적 심리 체계는 동일해야 한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린다. 두 사람이 하나의 심적 상태 (즉, 눈은 하얗다라는 믿음) 를 공유하기 위해서 그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심리학적 규칙들의 총체적 집합이 정확히 동일해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 것 같다. 이 문제를 더 논의하기 전에, 우리는 또 다른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한 체계의 입력과 출력들이 어떻게 명시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두 체계 S1 과 S2 가 동일한 튜링 기계를 실현한다고 가정하자. 즉 동일한 튜링 기계가 각 체계의 올바른 기계 기술을 제공한다고 하자. 실현이란 특정한 입/출력 명세서에 관계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즉 한 체계가 주어진 튜링 기계를 실현하는지 여부를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이전에 우리는 무엇을 입력조건들로 간주하고 무엇을 그 체계의 행동 출력으로 간주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V1 과 V2 를 각기 동일한 기계 기술을 공유하고 있는 S1 과 S2 의 입/출력 명세서라고 하자. V1 과 V2 는, 동일한 기계표와 관계하고 있으므로, 동형적이어야 한다. 즉 V1 의 요소들은 V2 의 요소들과 기계표 안에서 그것들의 역할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일대일 상호 관련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론 우리의 튜링 기계가 심리적 체계로서 자격을 갖출 만큼 적절한 복잡성을 갖는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S1 은 실재하는 하나의 심리적 체게, 아마도 한 인간 ("래리" 라고 부르자) 이고, 반면에 S2 는 하나의 컴퓨터, 즉 하나의 전자 장치 ("맥스" 라고 하자) 라고 가정하자. 따라서 V2 에 의해 명시된 입력과 출력들은 보통 계산 기계에 적합한 입력과 출력들로서, 아마도 자판 위에 입력되는 일련의 기호들과 컴퓨터 모니터나 그것의 인쇄기에 출력되어 나오는 정도의 심리적 지위를 맥스에게 인정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심리적 주체와 그것을 모방하는 컴퓨터를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 혹은 적어도 실재하는 것과 그 실재하는 것에 대한 컴퓨터의 모방 (simulation) 사이에 어떤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제트 엔진의 작용이나 광견병의 전염을 그것들에 대한 컴퓨터의 모방과 혼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의 심리 작용에 대한 컴퓨터 모의를 수행할 때, 그러한 구분이 갑자기 사라진다고 믿기란 어렵다.
맥스와 래리를 비교할 때, 하나의 심리 체계로서 우리의 컴퓨터, 즉 맥스에 대해 분명히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것의 입력과 출력들이다. 즉 맥스의 입/출력 명세서는 래리의 것과 동형적인 한편, 그것은 심리학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부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 차이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지라도, 단순히 일련의 기호들로 이루어진 입력과 출력을 참인 심성을 가진 어떤 존재에게 적합한 것으로 간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련의 기호들을 돌려서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우리가 래리에게서 보는 완전한 행동들과 같지 않다. 맥스의 출력은 명백히 그것의 생존이나 지속적인 기능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또한 그것의 입력은 그 주변 상황들에 대한 정보를 맥스에게 제공하는 기능을 갖지 않는다. 그러한 결과로서, 그것의 출력들은 그것의 입력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소위 "목적론적 경향성" 을 결여한다. 이 모든 것들이, 맥스의 출력을 실제의 행동이나 행위 - 우리가 그것을 진정한 심리적 체계로 간주하기 위해 필요한 어떤 것 - 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간주하기 어렵게 만든다.
튜링 기계의 실현들로서 맥스와 래리는 대칭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우리가 심성의 측면에서 반대칭성을 보게 된다면, 이 점에서 입력과 출력의 본성이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우리의 고려들은, 튜링 기계를 실현하는 하나의 체계를 심리적 체계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입/출력 명세서가 심리학적으로 적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적합성이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것은 더 많은 탐구를 요구하는 흥미롭고 복잡한 문제이다. 어떤 경우든, 기계 기능주의자는 다음의 물음에 직면한다. 이러한 입력/출력의 적합성을 기능주의와 일관적인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행동주의에 관하여 논의했던 유사한 지적을 상기하라. 즉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심적 상태들을 행동주의적으로 정의함에 있어서 행동주의자들에게 언급이 허용되는 행동이란 "물리적 행동" 이어야 하며,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나 심적 요소를 가진 의도적 행위 (예를 들어, 빵을 삼, 친구에게 인사함, 빚을 갚음) 여서는 안 된다. 만일 자신의 계획이 행동을 통하여 심성을 얻는 것이라면, 당신의 행동 개념은 심성을 전제해서는 안된다.
위와 동일한 제약이 기계 기능주의자에게도 적용된다. 그녀의 계획은 튜링 기계들과 입력-출력 관계들에 의해 심성을 정의하는 것이다. 행동주의자에게는 허용되지 않지만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부가적인 도구는 튜링 기계의 개념이다. 그러나 그의 입력과 출력은 동일한 제약을 받는다 - 즉 그녀의 입력/출력은, 행동주의자의 입/출력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입력/출력이어야 한다. 만일 이 지적이 옳다면, 기계 기능주의자가 원리적으로 래리의 입/출력을 맥스의 입/출력으로부터 구분하고 그리하여 진정한 심리적 체계들을 그것들의 모방들로부터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우리는 래리의 입력들이 주어지면 그의 출력들은 목적론적으로 적합한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맥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지적하였다. 래리의 입/출력들은 그의 환경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기능과, 그의 생존과, 그의 필요와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론 - 목적성 혹은 목표 지향성 - 의 개념이, 선결문제의 요구없이, 심리학적으로 중립적인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아마도 어떤 생물학적/진화론적 접근이 시도될 수 있겠지만, 과연 그러한 생물-목적론적 (bioteleological) 시도가 성공할 것인지 여부는 여전히 열려 있는 물음으로 남아 있다. 아무튼 이것은 기계 기능주의가 부딪쳐야 할 하나의 도전이다.
이제 기계 기능주의는 두 개의 심리적 주체들이 총체적으로 동일한 심리 체계를 가질 경우에만 그들은 동일한 심리 상태에 잇을 수 있다는 결론에 개입하는지 하는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 보았듯이 그러한 함축은, <기계 기능주의에 따르면 동일한 심리 상태에 있다는 것은 동일한 내적 기계 상태에 있다는 것이고, 기계 상태의 동일성에 대한 언급은 동일한 튜링 기계와의 관계에서만 유의미하다> 는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것 같다. 아마도 더 심각한 문제는, 두 개의 심리적 주체들이 하나의 동일한 총체적 심리 체계를 갖지 않는 한, 그들은 동일한 심리 상태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일한 튜링 기계를 실현하는 두 주체들의 입/출력 명세서들이 다를 수 있다는 것과 심성들의 개별화는 입/출력 명세서들에 민감하게 의존한다 (우리는 곧 이 논지로 돌아올 것이다) 는 사실을 고려할 때, 위의 결론은 얼마간 약화될 수 있다. 입/출력 명세서를 기본 요소로 하는 동일한 튜링 기계의 예화들인 심리 체계들을 "동형적" 심리 체계들이라고 하자. 그때 우리는 다음의 결론에 도달한다. 기계 기능주의에 의하면, 두 심리적 주체들이 단 하나의 심리 상태라도 공유하려면, 그들의 총체적 심리 체계들은 서로 동형적이어야만 한다. 두뇌-상태 이론에 대한 퍼트남의 다음 논박을 상기하라. 그 이론은, 인간과 문어가 동일한 두뇌 상태를 공유하지 않는 한 (그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 그 둘이 동일한 고통 상태에 있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계 기능주의도 정확히 유사한 곤경으로 치닫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과 문어가 동일한 고통 상태에 있으려면, 그들은 동형적 심리 체계를 공유해야만 한다 - 아마 이것도 가능한 일이 아니다! 또한 두 인간들이 단일한 심리 상태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정확히 하나의 동일한 총체적 심리 체계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아마 동일한 입/출력 명세서가 모든 혹은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계 기능주의의 이러한 결론은 분명히 우리의 기대들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언뜻 보이는 것처럼, 상황은 기계 기능주의에게 그렇게 어두운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응답이 유효한 것 같기 때문이다. 즉 인간과 문어가 둘 다 고통 상태에 있기 위하여, 문어의 총체적 심리 체계가 인간의 총체적 심리 체계와 동연적이거나 혹은 동형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필요한 것은 둘에 대한 올바른 기계 기술인, 그리고 그 안에서 고통이 하나의 내적 기계 상태로 나타나는, 어떤 튜링 기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유하는 이 튜링 기계가 그 둘을 기술하는 최대로 상세한 튜링 기계들 (이런 기계들은 그들의 "총체적 심리 체계들" 을 나타낸다) 에 미치지 못하는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인간과 문어들이 고통을 포함하는 부분적 혹은 축소적 심리 영역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고통의 심리 영역이 총체적 심리 영역으로부터 그렇게 분리되거나 추상될 수 있는지 여부는, 특히 심적 상태에 관한 기능주의 관점의 맥락에서 고려해 볼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또 다른 난점이 잠재되어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과 문어가 튜링 기계를 실현한다는 것에 대한 모든 언급들은 어떤 입력/출력 명세서와 관계되어 있다. 이 사실은, 만일 인간과 문어들이 둘 다 고통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인간들이 고통을 느낄 때 그들의 입출력 조건들의 특징이 고통을 느끼는 문어들의 입출력 조건들의 특징과 동일하지는 않을지라도 적절한 정도로 유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출력의 측면을 고려해 보자. 문어는 고통을 느낄 때 움츠리며 신음을 하는가? 소리치거나 비명을 지르는가? 순수하게 물리적 관점에서 보아 문어의 피하는 동작은 미국의 중산층 중년 남성들의 피하는 행동과 얼마나 유사한가? 인간과 문어 및 고통을 가질 수 있는 다른 모든 유기체나 체계들에게 적합한, 고통 행동에 대한 추상적이고 충분한 비심리적 기술이 존재하는가?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계 기능주의는 기능주의자가 두뇌-상태 이론에 대하여 비판했던 것과 동일한 난점에 다시 처하게 되는 것 같다. 즉 문어와 인간은 동일한 고통 상태에 있을 수 없게 된다. 기껏해야 그들은 심리학적으로 서로 동형적인 상태에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입력/출력 명세서에 대하여 논의했던 "적합성/적절성"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고려해야 할 튜링 기계의 또 다른 "적합성" 조건이 있는가? 기계 기능주의자에게 있어서, 한 체계가 "적절하게 복잡한" 튜링 기계를 실현할 경우에만 그것은 심성을 갖는다는 것을 당신은 상기할 것이다. 이러한 단서가 필요한 이유는, 심성을 산출하기에는 분명히 충분치 못한 단순한 튜링 기계들 (우리가 예로 들었던 기계들을 생각해 보라) 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나 복잡해야 충분히 복잡한 것인가? 복잡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측정되는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복잡성이 심성을 갖기에 "적합한" 것인가? 이 물음들은 중요하지만 어려운 문제들이며, 기계 기능주의자가 이 물음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자세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계산 기계가 "생각" 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테스트에 관하여 튜링 자신이 제시한 구체적인 제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튜링 테스트" 인데, 우리는 이제 튜링의 제안을 살펴보기로 한다.
튜링의 제안은, 모든 면으로 볼 때 충분히 심리적인 평균 인간들과 비교하여 계산 기계들 (컴퓨터) 의 수행 능력을 관찰하는 "조작적 테스트 (operational test)" 를지지함으로써, 적합성에 대한 이상의 일반적인 이론적 문제들을 피해 가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만일 기계들이 어떤 수준의 지적인 과제들을 인간만큼 잘 수행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인간만큼 심리적인 ("지적인") 존재라고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과제들이란 무엇인가? 분명히, 그것들은 직관적으로 지능과 심성을 요구하는 그런 것들이어야 한다. 튜링은 이러한 능력들의 존재를 테스트하기 위하여, "모방 게임" 이라는 하나의 게임을 고안한다.
모방 게임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이 게임의 참여자는 질문자, 남자, 여자의 세 명이다. 질문자는 다른 두 명과 다른 방에 격리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는 질문자에게 "X" 와 "Y" 로만 알려져 있다. 질문자의 목표는 컴퓨터 터미널을 통하여 질문들을 함으로써 누가 여자이고 누가 남자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남자의 목표는 질문자가 잘못 확인하도록 오도하는 것이고, 반면에 여자의 역할은 질문자를 돕는 것이다. 물을 수 있는 질문들의 주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튜링의 제안대로, 이제 우리는 그 남자를 컴퓨터 기계로 대치한다고 가정하자. 이제 그 질문자의 목표는 어느것이 인간이고 어느것이 기계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기계는 질문자로 하여금 그 기계가 인간이라고 생각하게끔 그를 속이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 기계는 그 질문자로 하여금 잘못 추측하도록 속임에 있어서, 첫 번째 게임에서의 남자만큼 잘할 수 있는가? 튜링의 제안은, 만일 남자만큼 그 일을 잘한다면, 우리가 정상적으로 한 인간에게 부여하는 모든 지능을 그것에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 기계는 인간들이 소유하는 충분한 심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튜링의 생각의 요지는, 보다 단순한 테스트에 의해 포착될 수 있다. 즉 자판의 터미널을 통하여 질문을 함으로써 (혹은 대화를 하거나), 우리가 인간과 말하고 있는지 혹은 계산 기계 (컴퓨터) 와 말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는 데 성공하는 정도가 평균 이하일 정도로 우리를 일관적으로 속일 수 있는 컴퓨터가 있다면, 우리는 그 기계도 인간이 갖는 종류의 심적 특성을 갖는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체스-게임 컴퓨터들이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체스 게임에 한정된다. 평균적인 체스-게임 경기자들은 자신들이 인간과 경기하는지 컴퓨터와 경기하는지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튜링 테스트는 인간이 관심갖는 모든 가능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즉 음악, 시, 정치, 날씨, 요리만드는 법 등 아무런 제한 영역도 없다.
튜링 테스트는 지능과 심성에 관한 문제들을 기계의 외모 (튜링이 지적하듯이, 사고하는 자로서의 자격을 갖기 위해 미인 선발대회에서 뽑혀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의 구성과 구조에 대한 세부 사항들, 그것이 인간처럼 말하고 움직이는지 등에 대한 문제들로부터 분리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그 테스트는 광범위한 영역의 합리적, 지적 능력들과 기능들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테스트는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어떤 이는 그 테스트가 너무 강한 동시에 너무 협소하다고 지적하였다. 즉 어떤 것이 심성이나 지능을 갖기 위하여, 인간보다 더 영리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지나치게 강하다. 특히 언어의 소유가 심성을 갖기 위한 선결 조건이 되어선 안 된다 (말을 못하는 동물들을 생각해 보라). 인간의 지능은 그 자체로 상당히 넓은 범위를 포괄하고 있으며, 튜링 테스트가 요구하는 수행의 단계에 심성의 발단을 두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 같다. 또한 그 테스트는 기껏해야 인간적인 (humanlike) 심성의 현상, 즉 인간을 특징짓는 종류의 지능을 시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 협소한 것 같다. 심성을 가졌으나 - 컴퓨터가 인간 질문자를 속여서 자신을 인간으로 착각하도록 만들 수 있는지를 테스트하기 위해 고안된 - 튜링 테스트에는 실패하는 지능적인 피조물이나 기계들이 왜 있을 수 없는가? 더구나, 비록 그 테스트가 넓은 범위의 지적이고 인지적인 능력들에 대한 탁월한 테스트가 될 수는 있을지라도, 감각이나 지각과 같은 심적 상태들의 존재에 대한 테스트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어떤 것을 충분한 심리 체계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것을 실제 삶의 맥락 안에서 보아야 한다고 혹자는 주장할 것이다. 즉 우리는 그것이 환경에 대처하는 모습, 즉 그 체계가 주변 환경으로부터 감각 정보를 수용하고 그것에 반응하여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대답들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록 방금 지적된 이유들 때문에 튜링 테스트가 심성의 필요 조건으로 간주될 수는 없을지라도, 튜링 자신이 말했듯이, 적어도 그것은 우리에게 심성의 충분 조건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어떤 것이 그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우리들만큼 영리하며, 그리고 우리는 지능과 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도 동일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만이 공평하다 - 혹은 그렇다고 논의할 수 있다. 이런 추론은 다음의 논제를 전제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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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링의 논제] 만일 두 체계들이 입-출력에서 동일하다면, 그것들은 동일한 심리적 지위를 갖는다. 특히, 그중 하나가 심적 존재일 경우에만 다른 하나도 심적이다. |
우리가 이것을 "튜링 논제" 라고 부르는 것은, 튜링이 이 입장에 개입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왜 튜링이 이 논제에 개입하는가? 왜냐하면 튜링 테스트는 오직 입력과 출력들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즉 만일 두 개의 컴퓨터들이, 가능한 모든 입력들의 경우에 있어서, 동일한 입력에 대해 동일한 출력을 산출한다면 - 즉, 만일 그것들이 입출력에서 동일하다면 - 튜링 테스트에 의하면 그것들의 수행은 동일한 것이고, 그중 하나가 심성을 갖는 것으로 판단될 경우와 그 경우에만 나머지 다른 하나도 심성을 갖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일 두 개의 튜링 기계들이 어떤 체계의 (동일한 입/출력 명세서에 관련된) 올바른 행동 기술들이라면, 그것들은 동일한 정도의 "적합한" 조건을 만족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적합성" 이란 심성의 적합성을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와 같이 튜링의 논제가 함축하는 일반적인 철학적 입장은 기계-기능주의보다는 행동주의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기계 기능주의는 튜링의 논제를 부정하는 것과 일관적이기 때문이다. 즉 기계 기능주의는, 입-출력 동치나 행동적 동치가 동일한 정도의 심성을 인정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기계 기능주의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단지 동일한 튜링 기계를 실현하는 체계들은 동일한 정도의 심성을 유지한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튜링의 논제는 잘못된 것 같다. 즉 내적 과정의 역할은 심성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 각기 100 까지의 정수들에 대한 기초적 산술 연산을 수행하는 두 개의 기계들을 생각해 보라. n 과 m 이 100 이하의 정수들인 경우, 두 체계 모두 n + m, n × m, n - m, n ÷ m 과 같은 형태의 임의의 입력에 대하여 올바른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기계들 중 하나는 이 연산들을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방식에 따라 그 답을 계산하고 (즉 "생각하며 계산하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100 까지의 정수들에 대한 덧셈, 곱셈, 뺄셈, 나눗셈의 모든 가능한 문제들의 답들이 저장되어 있는 파일 (file) 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의 계산 작용이란 파일에서 주어진 문제의 답을 "찾아내는 것" 에 있다. 두 번째의 기계는 계산 기계라기보다는 실제로 파일 저장고와 더 유사하다. 그것은 정상적인 의미에서 "계산하는 것" 으로 기술될 만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느 기계도 가능한 심성 체계로 고려될 만큼 충분히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예는, 주어진 어떤 체계가 심성을 갖는지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서 입력-출력을 확신시켜 준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튜링 테스트와 같이 순수하게 행동주의적인 테스트는 심성의 기준으로서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튜링의 논제는 그릇된 것으로 보인다. 입-출력의 동일성은 우리에게 동등한 심적 특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튜링 테스트를 반드시 부당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에 의하면, 모방 게임의 본래적인 풍부함과 복잡성이 주어진다면 인간들을 일관적으로 속일 수 있는 어떤 계산 기계든지 - 사실상 경쟁의 후보가 되는 어떤 기계든지 - 의문의 여지없이 고도의 세련된 "지능적인"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이 기계가 초고속 검색 장치를 가진 거대한 파일 체계처럼 작용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서얼은,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고 "지능적이고" 세련된 것일지라도 어떤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계산 기계는 실험을 구성하였다. 중국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 (말하자면, 서얼자신) 이, 일련의 기호들을 그와 다른 기호들로 체계적으로 변형시키는 규칙들의 집합을 가지고 있는 어떤 방 ("중국어 방") 에 갇혀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 일련의 기호들은 사실은 중국어 표현들이고, 변형 규칙들은 그 적용이 그것들의 의미가 아니라 오직 관련된 기호들의 형태들에만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순수하게 형식적이다. 서얼은 그에게 주어진 규칙들에 따라 (우리는 서얼이 규칙집 전부를 기억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일련의 중국어 문자들을 받을 때마다 신속히 작업을 하고 그 즉시 적절한 일련의 중국어 문자들을 내보낼 수 있을 정도로, 중국어 표현들을 조장하는데 매우 숙련되어 있다. 그 방 밖에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그 입력-출력 관계들은 마치 서얼 대신에 진정으로 중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그 방 안에 갇혀 있는 경우의 그것과 정확히 동일하다. 그러나 서얼은 전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며, 중국어 방안의 어디에도 중국어 이해가 진행되지 않는다. 그 방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오직 기호들의 형태나 "통사론" 에 기초해서 기호들을 조작하는 일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이해란 "의미론", 즉 그 기호들이 표상하거나 의미하는 바를 아는 것을 포함한다. 비록 서얼의 행동이 중국어의 화자의 경우와 입-출력에서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서얼은 중국어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서얼의 또 다른 전제는, 하나의 컴퓨터 안에서 진행되는 것은 중국어 방 안에서 진행되는 것과 정확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즉 기호들을 그 형태에 기초하여 규칙적으로 지배하는 조작이라는 것이다. 중국어 방 안에 중국어 이해가 없듯이, 컴퓨터 안에도 중국어 이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서얼의 논의가 도달하는 결론은, 심성은 규칙 지배적인 기호들의 통사론적 조작 이상의 것이며, 그리하여 튜링 테스트는 심성의 테스트로서 부당하다는 것이다.
서얼의 논증이 갖는 직관적인 호소력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것의 의미와 설명력을 평가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서얼의 예가 호소하는 것은, 그가 중국어 방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기술하는 방식에서 은연중에 만들어졌던 어떤 잘못된 전제에 기인할 수도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입-출력 동일성은 심리적 동일성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과, 중국어 방 (혹은 서얼) 이 중국어 사용자와 입-출력에서 동일하다는 사실이 중국어 방 (혹은 서얼이 진정으로 중국어를 이해하는 체계라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서얼과 동의할 수 있다. 이미 지적했듯이, 그 체계의 심성에 관한 문제를 고려할 경우 우리는 내적 과정들과 실행되는 프로그램의 종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 방 안에 갇힌 사람을 단지 "기호들을 조작하는 자" 로만 표현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일 수 있다. 수행되어야 할 복잡 미묘한 언어 과정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제시되었던 모든 프로그램을 훨씬 능가하는 극히 세련되고 고도로 복잡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기대해야 한다. 실제의 중국어를 배우기 이전에, 어떤 인간이 과연 중국어 방 안에서 서얼 자신이 수행한다고 상상하는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서얼은 다음과 같은 한 가지 답변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복잡 미묘한 프로그램을 만들라. 그러나 통사적 기호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은 의미를 낳지 않으며, 의미들없이는 심성은 가능하지 않다. 계산 과정이란 통사적 과정이다. 즉 컴퓨터에 1 과 0 들만이 되풀이하여 주어지는 한, 그 기호들이 무엇을 나타내든지 - 즉 한 봉지의 감자칩의 가격을 나타내건, 종업원들의 주소를 나타내건, 뉴잉글랜드의 주요 도시들의 온도를 나타내건 - 그것은 또 다른 0 과 1 들만을 산출하게 될 것이다. 비록 0 과 1 들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컴퓨터는 정확히 동일한 계산 과정을 통하여 작동할 것이다. 계산 과정들은 오직 기호들의 형태만 반응할 뿐이다. 즉 기호들의 의미나 그것들이 표상하는 것은 계산적으로 무관하다. 그러나 믿음과 욕구들과 같은 우리의 지향적 상태들은, 그것들이 어떤 것을 의미하거나 표상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하는 것들이다. 밖에 비가 오고 있다는 나의 믿음은 "밖에 비가 온다" 는 내용을 가지며, 이 내용을 가짐으로써 그 믿음은 내 주변의 구체적인 일기 조건을 표상하거나 표상하기 위한 목표를 갖는다. 이 믿음이 나로 하여금 우산을 가지고 나가도록 야기한다고 가정하자. 이러한 인과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 믿음과 욕구가 특정한 내용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믿음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가려는 욕구를 야기하지 않았으며, 날씨가 좋다는 믿음을 가졌다면 나로 하여금 우산을 가지고 나가려는 욕구를 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적 과정들은 표상적 내용이나 의미들에 의해 진행된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통사적으로-움직이는 계산 과정들일 수 없으며, 마음은 (그것이 아무리 복잡 미묘한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단지 프로그램을 돌리는 컴퓨터일 수 없다. 마음은 하나의 "의미론적 엔진 (semantic engine)" 인 반면에, 컴퓨터는 단지 "통사론적 엔진 (syntatic engine)" 일 뿐이다.
만일 이것이 중국어 방 사고 실험의 기초를 이루는 일반적 논의라면, 그것은 분명히 의미와 심적 인과성에 관한 정당하지만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심성에 관한 계산주의적 설명의 특정 문제와 독립하여, 심성에 관한 어떠한 유물론적 관점에 대해서도 제기되는 일반적 문제이다. 서얼 자신이 좋아하는 입장을 고려해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심성은 인간의 두뇌와 같은 복잡한 생물학적 체계들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관련되어 있는 신경 상태들이 세계에 대하여 무엇을 표상하든지 혹은 과연 어떤 것이라도 표상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동일한 신경 생리적 인과 과정들이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설득력있다. 신경 과정들은, 계산 과정들이 그렇듯이, 의미와 표상 내용들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분자와 세포들로부터 어떻게 의미와 이해가 발생할 수 있는지는, 일련의 0 과 1 들로부터 어떻게 의미와 이해가 발생할 수 있는지 하는 것만큼이나 미스터리이다. 이런 논쟁들의 일부는 심적 인과의 문제와 관련하여 더 논의될 것이다 (6장).
더 읽어 볼 만한 문헌들
기계 기능주의에 관한 입장으로는, 퍼트남의 "Psychological Predicates" ("The Nature of Mental States" 라는 제목으로 재수록되었다) 를 권유한다. 또한 그의 "Robots: Machines or Artificially Created Life?" 과 "The Mental Life of Some Machines" 를 참조하라. 둘 다 그의 Mind, Language, and Reality : Philosophical Papers, vol. 2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에 재수록되었다. Ned Block 의 "Introduction : What is Functionalism?" (in his Readings in Philosopy of Psychology, vol. 1, Cambridge :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은 기능주의의 일반적인 주제에 관한 명료하고 간결한 입문이다. 또한 A Companion to Philosophy of Mind (ed. Samuel Guttenplan, Oxford : Blackwell, 1994) 와 A Companion to Metaphysics (ed. Jaegwon Kim & Ernest Sosa, Oxford : Blackwell, 1995) 에 실린 "기능주의" 에 대한 그의 논의들도 그러하다.
기능주의에 관한 목적론적 접근으로는, William G. Lycan, Consciousness (Cambridge : MIT Press, 1987) 의 4 장을 참조하라. 심성에 관한 논의들과 관련하여 일반적인 생물학적/진화론적 고려들을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Ruth G.. Millikan, Language, Thought, and Other Biological Categories (Cambridge : MIT Press, 1984).
튜링 테스트 및 중국어 방 논증과 관련된 논의들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Alan M. Turing, "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 Mind 59 (1950) : 433-460; John R. Searle, "Minds, Brains, and Programs,"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3 (1980) : 417-457 ; Daniel C. Dennett, Consciousness Explained (Boston : Little, Brown, 1991), ch 14.
기계 기능주의 (그리고 기능주의 일반) 에 대한 비판으로는, Ned Block 의 "Troubles with Functionalism," (in his Readings in Philosopy of Psychology, vol. 1) 를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