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과정의 변증법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의 통일로서의 인식

지식의 수준-경험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분석과 종합의 통일

역사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 사고가 객체를 재생산하는 형식

변증법과 형식논리학

과학적 이론의 형성과 발전, 직관

지식의 실천적 실현

지식과 가치

 

인식은 무지에서 지식으로, A 라는 지식에서 B 라는 더 심오한 지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전면적이고 객관적이며 더욱 완전한 진리를 향한 운동으로서 존재한다. 이 과정은 서로 불가분한 연관을 가진 수많은 계기와 측면들로 구성된다. 인식론으로서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인식의 제 계기의 내용을 해명하며,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그것들의 상호작용과 역할을 확정한다.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의 통일로서의 인식 

철학은 이미 오래 전에 인식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 즉 감성적인 것(감각, 지각, 표상)과 이성적인 것(개념, 판단, 추론, 가설, 이론 등 다양한 형태의 사고)을 추출해 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꺼번에 제기했다. 지식의 발생과 발전에 있어서 이러한 요소들은 어떤 의의를 갖는가? 그것들은 서로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물론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많은 해답이 제시되어 왔다.

  감각론(sensationalism)의지지자들은 인식에 있어서의 감성적인 요인, 즉 감각과 지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오로지 감각을 통해서만 외부 세계와 연관을 맺을 수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고는 타당하다. 레닌은 "인식론의 첫 번째 전제는 의심할 바 없이 우리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 감각이라고 하는 데 있다"고 썼다. 그러나 인간의 감각과 지각의 본질, 그리고 인식에 있어서 그것들의 역할에 대한 이해는 다양할 수도 있다.

  감각은 지식의 원천이다. 그렇다면 감각 그 자체의 원천은 무엇인가?

  관념론적 감각론자들(버클리, 흄, 마하주의자들)은 감각과 지각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궁극적인 실재(reality)로 간주한다. 그들은 인식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거부하기도 하며, 감각과 지각의 원천에 대한 문제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게다가 관념론자들은 현실적 모순인 자본을 실재의 감각적 반영에 불과하다고 종종 주장한다.

  감각기관에 대한 생리학적 데이터를 일면적으로 해석하였던 19세기의 생리적 관념론은, 외부의 자극은 감각에 자극을 줄 뿐이지 결코 그 내용을 규정짓는 것은 아니랴고 주장한다. 감각의 내용은 각각의 감각기관에 특유한 '내적 에너지'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만약 문제가 이런 식으로 된다면, 감각은 사실상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되게 되며 그 내용은 주관적인 것-이는 기껏해야 외부 세계의 대상과 관련하여 상징과 상형(象形)의 역할만을 수행할 수 있다-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은 분명히 불가지론에 빠지게 된다.

  또 다른 극단에는 '소박한 실재론'(naive realism)이라 불리우는 관점이 있다. 그지지자들은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과 과정은 인간이 느끼고 인지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인간과 그의 신경계는 감각을 형성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각기간은 감각을 형성하는 데 확실히 영향을 끼친다. 감각은 객관적인 세계를 주관적으로 모사(模寫)하는 것이다. 레닌은 이렇게 쓰고 있다. "색채가 전적으로 망막에 의존하는 감각이라면(자연과학이 증명하고 있듯이) 광선은 망막에 부딪쳐 색채라는 감각을 넣는다. 이것은 우리들 외부에, 우리와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물질의 운동, 소위 일정한 파장과 일정한 속도로 가진 에테르파(빛·열·전자기의 방사현상의 가상적인 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망막에 작용해서 여러 가지 인간의 색채감각을 발생시키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유물론이다. 물질은 인간의 감각기관에 작용하여 감각을 만들어 낸다. 감각은 뇌, 신경, 망막 등 일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물질에 의존한다." 감각과 지각은 인간 지식의 원천이며 확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일정한 한계 내에서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외부 세계에 대한 표상을 제공한다. 외부 세계와 감각기관의 데이터는 자연적으로 일치하는데, 그것은 생물 진화의 결과이며 또 환경에 대한 적응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론적 지식을 검증할 경우 감성적인 확실성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현실을 감성적으로 반영하는 데이터는 지식의 원천이기는 해도 그 내용의 전부는 아니다. 존 로크(John Locke)가 선언한 감각론의 명제(원칙적으로 감각되지 않은 것은 이성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험론(경험을 뜻하는 그리스어 empeiria에서 나옴)이라 불리는 제한된 형이상학적인 견해를 표현하고 있다. 경험론의 관점에 의하면, 지식은 감각과 지각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으로서 결코 그것(감각과 지각)을 뛰어넘지 못한다. 경험론은 사고에 대해 인간의 감각과 지각의 총체인 경험자료를 총계하고 정리하는 역할만을 인정한다. 17세기와 18세기의 유물론 철학으로서의 경험론은, 실험적인 탐구를 장려하고 사변적인 스콜라적 지식의 일소를 요구한 점에서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그 후엔 경험론도 불가지론과 다양한 종류의 미신의 근원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경험론은 이론적인 사고를 경시하고 과학을 진부한 개념의 조작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엥겔스가 말한 대로 "가장 냉정한 경험주의자들이 가장 쓸모없는 미신과 근대 심령론에 빠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경험론은 신(新)실증주의나 논리 싫증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은 사고·일반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논리계산(논리적 증명, 기호의 연산(演算)의 형식에 있어서만 사고를 인정한다. 신실증주의자들은 감성적 데이터로 볼 수 있는 기초적인 제 요소(진술 및 용어)를 현대 과학에서 발견하고 추출해 내려 한다. 그들은 이 데이터들을 지식의 토대로 삼고, 발견하고 추출해 내려 한다. 그들은 이 데이터들을 지식의 토대로 삼고, 그 외의 모든 지식은 편의적 성격을 띠는(학자들 사이에서 합의된) 논리적인 추론의 규칙으로 귀착시켜 버린다. 과학이 발달해 온 가정 전체가 입증하는 바와 같이 지식을 경험의 데이터와 기호의 논리적 연산이라는 두 요소로 환원할 수는 없다. 지식을 복잡하고 종합적인 이성의 활동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론자들이 강성적 반영의 역할을 과장하는 반면에 합리론(이성론)이라 불리우는 다른 조류의 대표자들은 인식에 있어서 사고의 역할을 일면적으로 절대화한다. 경험론자들이 감각을 중시하는 데 반대하여 합리론자들(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은 초감각을 주장했다. 이들에 따르면, 경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고 감성적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사고'가 논리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산출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적 직관이라는 수단에 의해 이성이 감성적 데이터를 앞질러서 사물과 과정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직접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감성적 경험의 역할을 경시한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경험은 단지 사고에 자극을 줄 뿐이며 사색적인 추론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합리론자들(데카르트)은 이 개념들을 논리적으로 발전시켜 수학과 논리학의 기본 개념의 형태로 특수하게 '생득 지식'의 존재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합리론자들은 이 '생득적인' 관념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선언하면서, 그것으로부터 과학지식의 기초적인 내용을 추론하려 했다.

  칸트의 선험론(apriorism)은 다소 완화되고 희석된 형태의 합리론이다. 칸트에 따르면, 지식은 상호 독립된 두 개의 원천을 갖는다. (1) 지식의 내용을 이루는 감성적 데이터, (2) 선험적인(경험으로부터 독립된) 성격을 갖는 감성과 오성(悟性)의 형식이 그것이다.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의 종합의 결과로 지식이 발생한다고 하는 칸트의 사고는 옳지만 그에게 있어서 이들 두 요소는 상호 분리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감성적 지각은 '물자체'(物自體)가 감각기관-의식과는 독립된-에 미치는 작용과 관련되어 있으며, 반면에 인식의 이성적인 형식(범주)은 오성의 선험적인, 경험 이전의 능력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리하여 칸트는 범주(가장 일반적인 개념)를 인식의 형식으로 정확하게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범주가 실제로 객관적 세계의 진정한 연관성과 제 형태를 반영하고 있는 한에서만 범주가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사고의 형식은 개인의 구체적인 경험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그러나 이들 형식은 전체적으로 인류의 감성적·객관적 활동의 기초 위에서 발생하고 발전해 왔다. 칸트는 그것을 인간에게 있어서 생득적인 형식으로 간주했다는 데서 잘못은 범한 것이다.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경험의 데이터와 사고의 데이터 사이의 상호관계는 오로지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의 관점에서만 올바로 인식될 수 있다.

  인식은 현실에 대한 생생하고 감성적인 직관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감성적 경험(감각, 지각, 표상)은 인간을 외부 세계와 연결시키는 지식의 원천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개별적인 인식행위가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지식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유전되지는 않지만, 그것은 한 세대로부터 다른 세대로 전수된다. 이전 세대의 경험을 이론적으로 일반화한 지식의 형태들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개개인의 특수한 경험'과는 독립되어 있다.

  지식이 단지 감각기관에 의해서만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의 사고의 도움으로 감성적인 표상의 한계를 뛰어넘기도 한다. "장미는 붉다"와 같은 단순한 판단조차도 꽃과 색깔 등의 개념에 기초한 감각과 지각의 연관의 한 형식이다. 인간은 개념이 없이는 그의 감성적 경험을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감성적 직관과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은 항상 사고에 의해 지배된다. 그러나 '순수한' 사고와 같은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고 또한 구체적인 영상과 기호의 형태를 취하는 감성적 질료와 항상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생생한 감성적 직관은, 그것이 우리들을 물질의 세계(그 성질과 관계의 세계)와 연결시켜 주는 한에서만 직접적인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까지의 실천이나 지금까지 형성된 언어의 존재 등에 의해 규정된다. 어떠한 지식도 감각의 결과를 사전에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획득될 수 없다.

  따라서 지식은 현실에 대한 감성적 반영과 이성적 반영의 통일이다. 감성적인 표상과 심상이 없이는 인간은 어떠한 실재적 지식도 가질 수 없다. 예컨대 현대 과학의 많은 개념들은 고도로 추상적이지만, 감성적인 내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은 결국 인간의 경험에서 유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 지각되는 기호체계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식은 경험의 데이터를 이성적으로 가공하여 인류의 지적 발전의 과정과 결과에 쌓아가지 않고서는 획득될 수 없다. 

지식의 수준-경험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분석과 종합의 통일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은 모든 지식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인식과정에서 우리는 지식의 다양한 수준이나 질적으로 다른 단계를 구별할 수 있다. 이들 수준이나 단계는 그 객체 파악의 완전성·심도·전면성에 있어서, 지식의 기본적 내용에 도달하는 절차에 있어서, 그 표현형식에 있어서 각각 상이하다.

  먼저, 경험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의 지식 수준을 살펴보자.

  경험적인 것이란 주로 어느 정도의 이성적 가공을 거친, 즉 일정한 언어로 표현된 경험(관찰과 실험)으로부터 그 내용을 획득한 지식 수준이다. 이러한 지식의 수준에서 인식대상은 감성적 직관이 도달할 수 있는 사물의 성질과 관계의 측면으로부터 반영된다. 예컨대 현대 물리학에서 소립자들조차도 경험적으로 쉽게 인식될 수 있다. 안개상자나 강력한 가속기안에서 입자들의 궤적은 사진 등의 형태로 감성적으로 지각된다. 이 관찰가 측정의 결과는 일정한 언어로 기록된다. 관찰과 실험의 데이터는 인식의 출발점을 이루는 경험적 토대이다. 이 데이터들을 손에 넣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과학에서는 분업이 이루어져 일부 과학자들은 경험적 데이터를 얻는 데 전문적으로 종사하고 현상에 대한 실험적 연구방법이나 가공 절차 등의 연구에 열중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실험물리학, 실험생물학, 실험생리학, 실험심리학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전혀 우연이 아니다. 사회과학의 여러 부문에서도 실험은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이론적인 인식은 경험적인 인식과는 그 수준이 다르다. 이론적인 수준에서 객체는 그 연관과 법칙으로부터 반영되지만 이 연관과 법칙은 경험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사고를 통해서도 획득된다. 이론적인 지식의 과제는, 마르크스가 얘기한 바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운동을 내적인 현실의 운동으로 환원시키는 데"에 있다. 감성적인 것은 이론적 지식의 가운데에서 어떤 종류의 출발점으로, 또 사고가 도달한 결과를 표현하는 형식으로 가능하다.

  과학의 어떤 분야에서건, 감성적인 경험들을 훨씬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감각 데이터와 모순되는 이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모순은 변증법적이다. 그 모순은 이론적인 가설을 반박하지도 않을 뿐더러 경험 데이터가 잘못되었음을 지시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그리고 양자역학과 로바체프스키의 기하학 등을 살펴보라. 광속도가 불변이라고 하는 지식은 경험에 의해서 획득된 것이 아니다. 막스 플랑크가, 빚은 양자(quantum)로서 방출된다는 가설을 제시했을 때 거기에는 아무런 경험적인 확신도 없었다. 로바체프스키가 "어떤 직선위에 있지 않은 점을 통과하며, 주어진 직선과 동일한 평면상에 있으면서 그 직선과 교차되지 않는(평행하는) 직선은 적어도 2개가 존재한다"라는 수학 공리(公理)를 제시했을 때, 그는 이 명제를 어던 가시적인 공간을 염두에 두고 생각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 이 명제는 가시적인 공간의 표상과는 모순을 이룬다.

  인식의 경험적 수준과 이론적 수준은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먼저 이론 구조는 관찰과 실험을 통해 획득된 지식을 포함한 기존의 지식을 일반화하는 것에 기초해서 성립한다. 물론 이것은 모든 이론들이 직접 경험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론들은 기존의 개념과 이론들을 출발점으로 삼기도 한다. 예컨대 일반 상대성이론은 어떤 물리학적 실험이나 천문학적 관측에 그 기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특수 상대성이론과 로바체프스키·리만 기하학의 종합으로서 성립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개별적인 이론이 아니라, 이론적인 지식 전체를 논할 때에 그것은 물론 경험적 지식과 직접·간접으로 결부되어 있다.

  이론적 지식은 실험 데이터를 예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이론물리학은 반(反)입자의 존재를, 그것이 실험적으로 발견되기 훨씬 전에 예견했다. 그러나 이 경우 관찰과 실험에는 이론의 결과를 재생(확인)하는 역할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일 것이다. 과학자들이 우주선(cosmic rays)에서 양전자(陽電子)를 발견했을 때, 이것은 영국의 물리학자 폴 디락(paul Dirac),의 양자방정식(量子方程式)을 훌륭하게 실험으로 확증한 것이었다. 이 방정식은 두 개의 대립되는 전극, 즉 양전하와 음전하를 가진 두 전자의 존재를 결론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인 관찰은 또한 전자에 대칭되는 입자는 양전자가 아니라 양자라고 주장한 디락의 견해를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인식의 발전은 경험과 이론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전제로 한다. 경험과 이론 중 어느 한쪽만을 절대화하는 것은 과학의 발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학적 지식의 목적은 실험이 아니라 이론이다. 과학의 발달은 경험적 데이터의 양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생산해 낸, 잘 구성된 이론의 양과 질에 더 의존한다. 현대 과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양의 경험적 재료를 축적하고 있고, 이 재료를 일반화하고 계통화하여 더욱 진전시켜 가기 위한 기반으로 되는 새로운 기초이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지식의 수준은 그것이 획득되는 방식-경험적인 방법에 의해서인가 또는 이론적인 사고에 의해서인가-에 의해 규정될 뿐만 아니라(모든 연관과 매개에 관해서) 객체가 어떻게 반영되는가-총체적으로 반영되는가 또는 아주 중요한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한 측면만 반영되는가-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지식은 보통 구체적 지식과 추상적 지식으로 나뉘어진다.

  원칙적으로 지식은 구체적인 것, 즉 전체로서의 객체를 포괄하는 다면적인 지식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구체성 그 자체는 다양할 수도 있다. 인간의 감정적 경험에 있어서 대상은 많은 연관과 관계 가운데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인 지식은 오직 외적인 연관과 관계에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감성적 구체성은 그 내용이 한정적이며 대상을 깊은 연관 속으로 파악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전일성(全一性)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체성의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상 또는 대상군(對象群)을 처음에는 다른 제 측면을 사상하고 어떤 특정한 측면부터 바라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고는 추상을 통해 실재를 알아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추상은 사고를 통해 객관적인 대상을 파악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추상은 어떤 주어진 관계 속에서 대상의 본질을 명확히 한다. 이 경우, 어떤 특정한 성질이나 관계를 추출해내는 데 있어서 사고는 심지어 이 성질이나 관계들이 속해 있는 사물과 현상 자체를 사상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하양(whiteness)', '미(美)', '유전성', '전기전도율' 등과 같은 질에 도달한다. 그러한 종류의 추상은 논리학에서 추상적 대상으로 불려진다.

  추상의 과정에서 사고는 감성적으로 포착되는 대상의 일정한 성질과 관계를 추출해내고 분리시키는 데 머무르지 않고(만약 여기에 머무른다면 추상은 감성적인 구체성의 결함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경험적인 지식 속에 감추어져 있고 또 그것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연관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추상에 열중하는 것'은 대상을 보다 깊이 있게 해명해내는 하나의 수단이다.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사고는-만일 그 사고가 정확하기만 하다면-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진리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물질, 자연법칙이라는 추상과 가치라는 추상은, 간단히 말해서 모든 과학적인(정확하고 진지하며 의미있는) 추상은 자연을 보다 심도깊고, 정확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반영한다." 추상을 사물이나 과정의 본질을 파헤치는 주요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 현대 과학이 이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은 현대 물리학이 수학적 추상을 통해 현상의 객관적 본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추상이 전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가 대상으로부터 각각의 성질과 법칙을 추출해내는 수단이다. 추상이란 수단에 의해 대상은 사고 안에서 분석되고, 추상적인 규정으로 해명된다. 이 규정은 새로운 구체적 지식을 획득하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사고의 운동은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의 상승이라고 불리운다. 이러한 상승의 과정에서 사고는 대상을 총체적으로 재현한다. 이 과정은 최초로 헤겔에 의해 묘사되었다. 마르크스는 그것에 유물론적인 해석을 가해 『자본론』에서 부르보아 사회의 제 관계를 연구하는 데 적용했다. 헤겔은 객체 그 자체가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상승하는 과정에서 창조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객체가 사고 속에서 다양한 추상적 규정의 종합을 통해서, 그 전체적인 연관성 속에서 재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구체적인 것이 구체적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양한 제 규정의 총괄이고 따라서 다양한 제 측면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것은 현실의 출발점이자 직관과 표상의 출발점이기는 하여도 사고 속에서는 출발점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고 속에서 구체적인 것은 총괄의 과정으로서, 또 그 결과로서만 나타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감성적으로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인 것을 거쳐 사고 속에서 구체적인 것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운동은 이론적 인식의 발전법칙이다. 사고 속에서의 구체적인 것은 가장 심오하고 내용이 풍부한 지식이다. 예컨대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상품에 대한 추상적 규정으로부터 분석을 시작하여 자본주의적 제 관계의 총체적인 상(像)을 그려냈다.

  진리가 만약 구체적이지 않거나 발전해 가는 지식 전체가 아니라면, 또 그것이 객체의 새로운 측면이나 연관을 표현하고 종래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심화시키는 새로운 요소들에 의해 끊임없이 풍부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객관적일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대상을 전체적으로 반영하는 이론적 지식의 체계이다.

  감성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인 것을 경유하여 사고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운동은 신철의 기초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며 분석과 종합이라는 기능을 포함한다. 어떤 현상이나 대상에 대한 추상은 그것들이 성질, 관계, 부분, 발전단계 등으로 분해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편 사고에 있어서 구체적인 것의 창조는 종합에 의거하여, 즉 주어진 대상과 다른 대상들 모두에게 인정되는 다양한 성질과 관계의 통일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 예컨대, 현대 과학은 태양 에너지의 방출과 지구상에서의 열핵반응(熱核反應)을 하나의 원리로 귀착시키고 있다.

  다양한 현상이나 측면, 성질을 사고 속에서 이렇게 결합시키는 것 자체도 객관적 법칙에 따라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사고는, "의식의 제 요소 가운데, 즉 의식의 실재적 원형 가운데 그러한 통일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경우에 한하여 의식의 제 요소를 통일시킬 수 있다."

  인식은 분석이나 종합만으로는 실질적으로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다. 분석은 종합에 앞서지만, 분석 그 자체는 이미 행해진 종합의 결과를 기초로 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 분석과 종합의 연관은 유기적이며 또 내적으로 필연적인 연관인 것이다. 

역사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 사고가 객체를 재생산하는 형식 

사고 속에서 개체를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재생산한다는 것은 그것을 역사적으로, 발전의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식을 획득하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두 가지 방법이 추출되었다. 역사적인 방법과 논리적인 방법이 그것이다.

  역사적인 방법은 객체의 여러 가지 발전단게를 연대기적인 순서에 따라 역사적으로 나타난 구체적인 제 형태로 살펴보는 것을 수반한다. 예컨대 자본주의의 발전을 고찰해 보자. 역사적인 방법은 이 과정을 기술할 때, 유럽과 아메리카의 개별 국가들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생과 발전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경우 보편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 뿐만아니라 특수한 것과 개별적인 것, 우연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는 많은 세목이나 구체적인 형태를 포함할 것을 요구한다. 이 방법은 그것의 특수하고 개별적인 특징을 포함한 모든 다양성 속에서 역사적 과정을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피데 그 장점이 있다.

  그러나 대상의 역사를 밝혀내고 그 주요한 발전단계와 기본적인 역사적 연관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이 대상과 본질에 관한 이론적 개념이 필요하다. 또 다른 방법-논리적 방법-은 대상의 본질과 그 주요한 내용으로 이론적 형식으로, 추상(抽象)의 세계 속에 재현하는 것을 과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 연구는 대상의 가장 발전된 형태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된다.

  논리적 방법에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으며 역사적 방법에 비해 뛰어난 몇 가지 특색이 있다. 첫째, 그것은 객체를 그것의 가장 본질적인 연관속에서 반영한다. 둘째, 동시에 그것은 객체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역사가 시작디는 곳에서 동시에 사고도 시작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후의 진행은 추상적인, 이론적으로 일관된 형식으로 역사적 과정을 단순히 반영하는 영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은 비록 수정된 반영이지만, 각각의 요인이 충분히 성숙하고 고전적인 형태에 다다른 발전단계에서 그 요인들을 고찰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의 역사적 과정 그 자체가 부여해 주는 제 법치에 따라서 수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논리적 방법은 대상의 본질, 필연성, 법칙성과 발전의 역사를 동시에 이론적인 형태로 반영한다. 왜냐하면 선행하는 제 단계를 지양(止揚)한 형태로 포함하고 있는, 최고로 성숙한 형태로 대상을 재생산함으로써 대상의 역사에 있어서 주요하고 기본적인 단계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방법은 단지 하나의 개념을 다른 개념으로부터 사변적으로 연역해 내는 것만이 아니고 실재적인 객체의 반영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객체는 자신의 발전의 필연적인 요소로서만 반영되는 것이지 반드시 표면에 나타난 이 요인들의 시간적·감성적 연관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논리적 방법은 또 역사적 방법과 비교하여 연구의 두 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불가분하게 통일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요소란 주어진 대상의 구조에 관한 연구와 그 역사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논리적 연구방법을 분석의 기초로 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역사를 연대기에 따라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경제구조를 성숙한, 전형적인 형태로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레닌이 말하듯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그것을 요약하는 제 개념'을 동시에 제공한다. 이것은 어떤 개념을 분석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가치형태 변화의 논리적인 계기(단순한 형태, 전개된 형태, 일반적인 형태, 화폐 형태)는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가치형태의 교체(변화)를 반영한다.

  역사적 연구방법과 논리적 연구방법은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역사적인 방법과 논리적인 방법의 통일에 기초하여, 우리는 대상이 발전해온 역사나 현재의 구조에 대해서 전문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역사적 연구방법은 연구의 목적이 대상 자체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는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역사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의 통일이 기본 원칙으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대상의 역사를 그 모든 다양성 및 우연성을 포함하여 연구함으로써만 우리는 그 대상의 논리, 법칙, 그리고 기본적인 발전단계를 이해할 수 있다. 논리가 역사에 도입될 뿐만 아니라 거꾸로 역사적 연구가 몇 가지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여, 또는 그 결과로서 역사를 일반화하고 대상의 본질을 파악한 새로운 개념이 형성되기도 한다.

  사고 속에서 대상을 논리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은 일정한 형식으로 수행된다. 레닌은 인시과정의 변증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썼다. "안식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반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전체 그대로의 반영이 아니라 일련의 추상의 과정이며, 개념이나 법칙을…… 형성하고 정식화하는 과정이다. 실제로 여기서는 객관적으로 세 개의 구성 요소가 존재한다. (1) 즉 자연, (2) 인간의 인식=인간의 뇌(자연의 최고의 산물로서의 뇌), (3)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 자연이 반영되는 형식. 이 형식은 개념, 법칙, 범주 등이다……"

  사고의 형식은 일정한 사고의 구조이다. 역사적 발전 가운데 존재하는 대상인 객관적 실재는 이것을 매개로 하여 일관되고 상호연관된 추상(抽象)의 체계로 반영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추상이 서로 다른 것은 사람들이 취급하고 있는 자연 또는 사회의 대상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사고 속에서의 각각의 추상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고의 구조는 인간의 인식활동의 목적과 관련되어 형성되어 왔는데, 그 덕분에 각각의 대상이 전면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사고의 기본적인 논리적 형식으로는 보통 판단, 개념, 추론을 들 수 있다.

  논리학에서 다루는 판단이라는 말이 전통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수소는 화학원소이다" "상품은 가치를 갖는다"와 같이 어떤 것에 대하여 어떤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사고이다. 판단 속에서 인식하는 사고의 모든 특질이 드러난다. 사고의 과정은 우리가 대상의 어떤 개별적 징표나 성질을 포착할 때, 그리고 어떤 초보적인 추상이 이루어질 때 시작된다. 모든 지식은 그것이 실재적이라면 판단이나 판단체계의 형식을 갖는다. 심지어 감성적 직관의 결과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조차(그것을 합리적 형식으로 표현한다면) 판단이라는 형식을 얻게 된다. 예컨대, "이 집은 저 집보다 크다"와 같은 것이다.

  어떤 판단에서도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동일성과 차별성,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 등의 연관이 나타난다.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동일성이 그 자체 내체 차별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명제에도 표현되어 있다. 백합은 식물이다, 이 장미는 붉다와 같이 명제에 있어서 주어(主語)와 술어(述語)는 반드시 다르며, 주어나 술어 속에는 주어나 술어로 포섭되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자신과의 동일성은 다른 모든 것과의 차별성을 보완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인식은 검토 중인 대상에서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것, 즉 개념-이것은 인간의 사상이 객체 속으로 침잠하여 가는 오랜 과정의 성과이며, 얻어진 지식을 집중적으로 표현한다-을 추출해내는 데까지 논리적으로 나아간다. 레닌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의 개념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으며 상호 이행하고 상호 유동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생생한 생활을 반영하지 못한다. 개념에 대한 분석과 연구, '개념을 운용하는 기술'은 항상 개념의 운동과, 그들의 연관 및 상호이행에 대한 연구를 요구하는 것이다……"

  개념 운동의 변증법을 해명하는 것은 개념이 발전해 가는 법칙성을 구명하는 것이다. 개념의 발전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1) 이론적 오래된 개념이 구체화되고 더욱 높은 수준의 추상으로 고양된다. 특히 각각의 개별 과학에서 범주를 형성하는 기본적 개념들을 재파악하고, 정밀화하며, 풍부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과학에서의 혁명은 기초 개념의 기본적 변혁, 즉 낡은 개념의 내용 변화와 과학자의 사고구조와 방법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개념의 발생을 동반한다.

  어떤 개념도 그 정의(定義)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정의의 과정에서 개념은 보다 광범위한 다른 개념에 포섭되어 간다. 대상의 본질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본질은 항상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념을 정의함에 있어서 일반적인 것을 단순히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하여 정의는 항상 가까운 류(類) 개념, 즉 보다 일반적인 개념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 종의 특수성을 확인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항성(恒星)'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항성은 빛을 발하는 자연적인 천체(天體)이다."

  개념을 정의함에 있어서는 간결함과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정의의 가장 중요한 장점은 간결함이 아니고 대상을 전면적이고 심도있게 파악하는 데 있다. 변증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단지 현상의 법칙을 보는 것만이 아니고 현상의 변화, 하나의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의 이행의 법칙을, 발전의 본질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추론 없이는 개념이나 사고작용이 있을 수 없다. 지금까지 확인된 지식에 기초하여 추론을 함으로써, 감성적 경험을 거치지 않고도 새로운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추론은 어떤 판단(전제)으로부터 다른 판단(결과)을 연역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판단의 체계이다. 추론은 감성적인 경험이나 관찰 그리고 실험을 통해 직접적으로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어가는 이론적 사고의 능력을 표현한다. 만약 인간이 추론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없다면, 지구에서 다른 천체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없을 것이고, 항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결론은 전제로부터 나오지만 단순히 전제를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은 지식을 풍부하게 하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생산한다. 추론의 구조와 구성, 그 여러 가지 종류를 연구하는 것이 논리학이다.

  판단, 개념, 추론은 상호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변화되면 나머지도 또한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호의존은 사고의 과정에서 나타나고 사고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계기를 포함한다. (1) 대상의 성질에 대한 정의(판단). (2) 이전의 지식을 종합하고 이를 통해 과학적 개념을 형성한다. (3) 이전에 획득된 하나의 지식으로부터 다른 지식으로의 이행(추론).

  이들 모든 계기는 과학이론 가운데에 집약되어 있다. 과학이론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이지만, 제 현상의 총체를 묘사하고 설명하기에 충분하고 폭넓은 지식의 체계이다. 추론은 감성적인 경험이나 관찰 그리고 실험을 통해 직접적으로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어가는 이론적 사고의 능력을 표현한다. 만약 인간이 추론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없다면, 지구에서 다른 천체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없을 것이고, 항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을 것이며, 원자나 그것을 구성하는 소립자의 세계에 파고들어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론은 전제로부터 나오지만 단순히 전제를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은 지식을 풍부하게 하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생산한다. 추론의 구조와 구성, 그 여러 가지 종류를 연구하는 것이 논리학이다.

  판단, 개념, 추론은 상호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변화되면 나머지도 또한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호의존은 사고의 과정에서 나타나고 사고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계기를 포함한다. (1) 대상의 성질에 대한 정의(판단). (ㅈ) 이전의 지식을 종합하고 이를 통해 과학적 개념을 형성한다. (3) 이전에 획득된 하나의 지식으로부터 다른 지식으로의 이행(추론).

  이들 모든 계기는 과학이론 가운데에 집약되어 있다. 과학이론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이지만, 제 현상의 총체를 묘사하고 설명하기에 충분하고 폭넓은 지식의 체계이다. 판단은 이론의 원리와 진술을 형성하며, 개념은 이론의 용어를 형성한다. 그리고 다양한 추론은 연역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이론의 기능은 인식에 의해 얻어진 성과를 체계화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으로의 길을 열어주는 데에도 있다.

  과학이론은 그것에 반영되는 대상에 따라, 이론이 포착해 낸 현상의 범위을 따라 그리고 그 가운데서 사용된 논증의 방법에 따라 다양하다. 이론의 독특한 한 형식으로서 소위 메타이론(metatheory)-이론 그 자체에 관한 이론-이 있다.

  메타이론과 메타과학의 출현은 20세기 지식의 발전에 있어서 새롭고 특징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이론의 구조, 구성의 방식, 발전의 방향에 대한 관심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특징적인 것은 소위 통일이론의 창조과정, 즉 이론의 통합과정이다.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 이론이 다른 원리를 갖는 하나의 새로운 이론으로 결합되어 가는 것은 지식이 객관적 진리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다른 과학에 의해 창조된 이론조차 통합되고 있다. 메타이론의 구성이나 제 이론의 통일 및 통합 등과 관련된 문제의 해결은 논리학에 대한 연구를 더욱 강화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변증법과 형식논리학 

사고의 형식을 연구하는 것은 논리학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창시된 것으로 인정되는데, 그는 자신의 저작 중에서 후에 논리학의 문제로 불리워지게 된 문제들을 처음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했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프란시스 베이컨과 그 외 다른 사상가들이 논리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17~18세기가 되면, 철학 가운데에 전통적 또는 고전적인 형식논리학이 형성된다. 그것의 법칙은 동일율(同一律), 모순율(矛盾律), 배중율(排中律), 충족율(充足律)이다. 형식논리학은 사고의 형식을 존재 그 자체의 원리로 고찰했다.

  이후 형식논리학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논리적 분석방법의 적용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인식의 발전에 의해 제기되는 새로운 논중형식의 연구를 통해 더욱 발전했다. 수학적 기호가 논리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수학적 증명에 형식논리학을 이용한 것이 형식논리학 그 자체의 발전을 촉진했다. 이리하여 기호논리학 또는 수학적 논리학으로 알려진 형식논리학의 새로운 변종이 출현했다. 오늘날 형식논리학은 주로 인공적이고 형식화된 언어나 이들의 구문론(構文論)이나 의미론(意味論)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논리적 구문론은 내용과는 무관하게 언어 표현의 구성과 변형의 규칙을 형식의 측면에서만 정식화한다. 논리적 의미론은 언어체계의 각 요소에 대한 의미를 명백히 하기 위해 언어체계를 분석한다.

  이론적 지식에 대한 형식논리학적 분석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예컨대, 사이버네틱스는 인공적으로 형식화된 언어에 기초한 지식의 분석법 없이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기존 지식을 분석하고 이를 적절하게 재편성하며 가능한 한 엄밀하게 형식화된 체계로 표현함으로써 인간 사고의 몇몇 기능을 기계에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형식논리학에 의한 지식의 분석은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엄밀히 형식화된 이론의 구축에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은 몇 가지 요소와 고리를 발견해 내고 인간의 사고를 그것들의 탐구에 향하도록 만드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논리학의 발전은, 형식논리학을 독립된 과학으로 분리시켜, 독자적인 연구 대상과 연구 방법을 갖는 기호논리학으로 전화시키는 길만을 걸어 왔었던 것은 아니다. 객관적 진리로 이끄는 이론적 사고의 형식과 방법에 대한 연구는 철학의 틀 내에서도 역시 발전해 왔다. 유물론적 변증법은 이러한 발전의 연속선상에서, 인식이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변증법적 논리학으로서도 나타났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이전의 논리학 이론의 연속과 발전선상에서 발생했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형식논리학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과학적 지식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형식논리학의 진정한 위치를 확정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유물론적 변증법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를 향한 사고의 운동에 있어서 객관적 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발전법칙이 갖는 의의를 명백히 해 주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지식의 내용과 연구 대상의 합치에 관한 과학, 진리에 관한 과학이 되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형식논리학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사고 형식을 그 구조의 관점에서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표현되고 있는 구체적 내용에 관심을 갖는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사고의 형식을 경직되고 고립된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연관 속에서, 그 운동과 발전 가운데서 파악한다. 형식논리학이 주로 기성 이론들의 분석에 주의를 기울이는 반면, 변증법적 논리학은 새로운 지식으로의 이행의 논리적 원리를 밝혀내고, 이론의 형식과 발전을 연구한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변증법적 논리학의 기본적 요구를 정식화했다. "(1) 사고 속에서 대상을 전면적으로 파악한다. (2) 대상을 그 발전, '자기운동' 속에서 고찰한다. (3) 대상에 대한 완전한 '정의'에는……인간의 실천 전체가 포함되지 않으면 안된다. (4) 변증법적 논리학에서는……'추상적 진리하고 하는 것은 없으며, 진리는 항상 구체적이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이전의 논리학의 제 학설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토대위에 성립하였다. 그것은 형식논리학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 지식의 연구에 있어서 그 지위를 규정한다. 형식논리학은 사고의 구조를 인식하는 강력한 수단이고, 그것이 만들어낸 장치는 모든 과학에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모든 특수한 인식방법이 그러하듯이 형식논리학에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형식논리학을 보편적인 철학적 인식방법으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또 올바른 결과를 끌어내지 못한다. 

과학적 이론의 형성과 발전, 직관 

유물론적 변증법은 과학적 지식의 운동을 연구하여, 이 운동 가운데서 사고가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형식과 법칙, 기초개념과 원리를 도출해 낸다. 과학의 기초개념과 원리는 인간의 창조적 활동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창조란 무엇인가? 과학자의 창조적 활동은 어떤 특별한 법칙을 따르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어떤 논리에도 구속되지 않는 것인가? 물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창조활동은 논리에 따르지 않는 많은 요인에 의해 영향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창조는, 그 기초에 있어서는, 합리적인 인간 이성의 활동이고 따라서 논리적 분석의 대상으로 된다.

  과학 연구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문제'라는 개념은 보통 인식되어 있지 않은 어떤 것과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문제'는 인간에게 아직 인식되어 있지는 않으나 인식되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상당히 불완전한 이러한 정의에는 극히 중요한 요소-당위적인 요소, 연구에 대해 방향을 부여하는 것-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인식되어 있지 않은 것과 인식되어야 하는 것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인간은 많은 것에 대해 무지하지만 적어도 원리상으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아직 알고 있지 못하지만 발전의 일정단 단계에서 알 수 있는 것을 추출해 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문제'-역설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는 단지 인식되어지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인식되어지지 않은 것이 확인된 것을 말한다.

  문제는 인간의 실천적 활동의 필요로부터 새로운 지식에 대한 어떤 갈망의 형태로 나타난다. 과학은 특정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필요하고도 충분한 기초를 획득할 때까지 성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컨대 인공태양을 만들려는 인간의 대담한 꿈은 오늘날에야 비로소 과학의 문제, 즉 열핵반응제어(熱核反應制御)의 문제가 되었다.

  문제의 제기는, 그것이 비록 불완전한 것이라 해도 해결을 위한 어떤 예비적인 지식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고, 새로운 지식에 관한 현실의 요구, 현재의 조건 속에서 충족가능한 요구를 규정할 수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한 경로의 반 이상을 경과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사실이 필요하다. '사실'이란 용어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현상 그 자체(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사물, 과정)도, 각각의 특수성을 갖는 지식도 사실이라 불리운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되는 '사실'이다. 어떠한 지식이 사실적 지식이라 불리우는가? 우선 그것은 첫째로 감성적 직관에 기초하여, 즉 경험에 의하여 얻어진 지식이다. 이 경우에 이론은 오로지 경험적 자료의 기초 위에서만 구축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이론을 정립할 때 우리는 그 지식이 경험적으로 얻어졌건 사변적 추론에 의해 얻어졌건 확실한 지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또 수립된 명제를 집중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객관적 진리임을 확인하기 위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 확실한 지식이 '사실'이며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연구고 진행된다. 경험적인 과학적 관찰의 결과도, 그 확실성이 실천으로 확인된 법칙도 모두 현대과학의 '사실'이다. 지식의 확실성은 지식을 사실로 전화시키는 필요조건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고집센 존재이다. 연구자가 그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리고 그것이 연구에 알맞든 알맞지 않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의 나머지 모든 속성들-예컨대 불변성, 즉 사실을 한 요소로 포함하는 체계로부터의 어느 정도의 독립성-은 확실성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사실'은 객관적으로 진리임이 판명되기만 한다면 그것이 어떤 체계에 포함되어 있는가와는 상관없이 그 내용을 그대로 견지하게 된다. 가설이나 추측은 실천의 기준으로 남아있지 못하고 붕괴될지도 모르나 그 기초에 놓인 '사실'은 그대로 남아 하나의 지식체계로부터 다른 지식체계로 이행한다.

  사실의 집적은 과학 연구의 극히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 자체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현상이나 과정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지식체계이다. 이 체계는 추측, 가설 또는 확실한 과학적 이론 등의 여러 가지 수준으로 존재할 수 있다.

  추측은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으며 그 논리적·경헙적 기초도 명확하지 않은 최초의 가정(假定)이다. 예컨대 방사능의 자연붕괴에 관한 러더포드(Rutherford)와 소디(Soddy)의 최초의 발상은 단지 추측에 지나지 않았으나 계속된 연구로 과학적 가설의 추측으로까지 발전되었던 것이다.

  추측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왜 하나의 특정한 관념이 과학자들에게서 발생하는가? 매우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직관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야만 한다.

  종래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사고는 보통 이전의 지식으로부터 엄밀하게 논리적으로 추론된 결론을 통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며 경험적 데이터의 단순한 일반화에 의해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운동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비약을 통해 성립된다. 사고는 그 본성에 비추어 볼 때 실천활동과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러한 비약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실천활동은 감성적으로 주어진 것과 엄밀하게 논리적으로 위치지워진 것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고로 하여금 새로운 결론에 이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진보적인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마리오 분게는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수학자와 자연과학자가 동의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상상력이나 발명의 재질이 없이는, 가설을 생각해내고 계획을 입안하는 능력이 없이는 '기계적 조작' 이외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설의 설정, 공법(工法)의 발명, 실험의 고안(考案) 등은 창조적 과정이며, '기계적' 조작에 대립하는 직관적 행위의 명백한 사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직관이 아무것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으며 무(無)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직관은 객체에 관한 경험적·이론적 지식에 선행(先行)하는 수준에서 발생한다. 이 경우, 사고하는 사람의 능력과 경험, 그 사고의 구조가 매우 큰 의의를 갖고 있다. 따라서 직관은 생활 속의 다양하고 우연적인 사건의 작용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이들 우연적인 요인의 영향이나 직관의 돌연성은 흔히 일종의 '영감'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학적 발견의 역사는 천재적 직관을 낳은 우연적인 사건들에 관한 전설로 가득차 있다. '뉴우턴의 사과', '멘델레프의 꿈'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우연적인 사건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경우의 직관 뒤에 있는 인간 사고의 노력, 즉 인간이 제기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부단한 연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직관 속에는 인간의 이제까지 이룩한 사회적·개인적 지적 발전의 경험이 압축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직관에 관한 한 신비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직관의 직접성은 상대적인 것이다. 직관적으로 제시된 이론적 명제는 그 후 이론적 가공(加工)을 거치게 되며, 그 결과 원래의 추측은 근거없는 것으로 부정되던가, 또는 과학적인 근거를 갖는 가설의 형식을 획득하게 된다.

  추측에서 가설로의 이행은, 아인슈타인의 표현을 빌리면, '기적은 무엇인가 파악가능한 것으로' 전화시키는 논거의 발견을 포함하고 있다. 당연히 여기에서는 논리가 그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게 되며 논리 없는 직관은 사상누각에 불과하게 된다. 현재의 지식을 동원하여 추측을 가설로 전화시키는 것과 같은 새로운 사실의 탐구가 진행된다.엥겔스는 인식에 있어서 가설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특징짓고 있다. "어떤 새로운 사실이 관착되고, 그것과 같은 부류의 제 사실에 대한 이제까지의 설명 방식으로는 그 사실이 해명되지 않는 순간이 닥쳐온다. 이 순간부터 새로운 설명방식―당장은 제한된 수의 사실이나 관찰에만 근거한―이 필요하게 된다. 그후 얻어진 관찰 재료는 이들 가설을 순화하고 일부 가설을 부정하기도 하며, 다른 가설을 정정하기도 한다. 이리하여 마침내 법칙이 순수한 형태로 정립된다."

  가설은 가정에 기초한 지식이다. 가설의 입증과 논증은 새로운 사실에 대한 탐구, 실험의 실시, 그리고 이제까지의 인식의 성과에 대한 분석을 전제로 한다. 가끔 어떤 하나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가설이 세워지는데, 이들 가설은 다양한 방식으로 '검증'을 받게 된다. 비록 가장 타당하다(진리이다)고 생각되는 이론체계를 결정하는 보조수단에 불과하지만, 가설을 선택함에 있어 단순성과 경제성은 일정한 의의를 갖고 있다. 객관적 실재를 그 풍부한 상호연관 전체에 걸쳐 반영한다고 하는 과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사고는 가장 합리적이고 단순명료한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점에서는 그 가치가 대등하다고 인정되는 많은 가설이 있다면 보다 단순하고 명료하며 보다 경제적인 가설이 우선시된다. 그러나 경제성과 단순성은 대등한 가치를 가진 다양한 가설 가운데에서 적합한 가설을 선택해 내는 약간의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그것들이 결코 가설의 진리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다. 진리성(眞理性)의 유일한 기준은 오직 실천이다. 가설이 입증되고 논증되면 그것은 이론으로 전화된다.

  이론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지식의 발전과정에서 변화하는 상대적으로 완성된 지식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사실과 그것을 표현하는 개념이 이론에 첨가되어지고 원리가 정밀화됨으로써 이론은 변화된다. 그러나 기존 이론의 틀로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 노정될 때가 온다. 이론에 있어서 이러한 임계적(臨界的) 시점은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결정될 수 있다. 이러한 때가 오면, 기존 이론은 다른 이론이나 또는 더욱 정밀화된 원리를 가진 새로운 이론으로 이행하게 된다.

  새로운 이론과 낣은 이론 사이에는 복잡한 관계가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가 대응원리(對應原理)로 표현된다. 이 원리에 의하면, 새로운 이론은 종전의 이론이 새로운 이론의 일정한 한계적(限界的) 계기로 될 때 그 존재의 권리를 획득한다. 예컨대, 고전 물리학은 현대 물리학 이론의 한계적이고 특수한 경우이다. 동시에 이 원리는 지식의 계승성과 발전을 표현한다. 어떤 이론이 객관적 진리임이 확인된 경우, 이 이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는 없으며, 후속 이론은 단지 그 적용 범위를 제한하게 된다. 따라서 낡은 이론으로부터 새로운 이론으로의 이행의 규칙은 충분히 규정될 수가 있다. 기존 이론을 보다 넓은 새로운 일반적인 이론 속에 위치지우는 것은 기존 이론의 확실성을 더욱 명확히 해 주는 것이다. 

지식의 실천적 실현 

이미 지적했듯이, 지식은 인간의 실천활동에 기초하여 발생하고 발전하며 인간의 실천활동을 위해 봉사한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사물과 과정의 원형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은 결국 어떤 방법으로든 실천적으로 실현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지식은 최적의 형식을 획득하고 이데아(관념, 이념)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철학 문헌에서 '이데아'라고 하는 용어는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상을, 그 형식에 상관없이 모든 지식―개념, 판단, 이론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이 용어는 이것과는 다른 더욱 엄밀한 의미(이념)도 갖고 있다. 이데아는 고도의 객관성과 완전성 그리고 구체성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실천적 실현을 지향하는 사상이다.

  따라서 지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계기를 자체 내에 내포하는 이념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1) 객체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종합적인 지식, (2) 실천적 실현과 물질적 구현을 향한 지향, (3) 주체의 행동목적과 기획(企劃), 그리고 대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주체의 계획.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과학의 제 이념이고, 이러한 이념에 기초하여 생산의 개조, 그리고 심각한 사회적 변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주 공간 정부의 이념, 원자력을 국민경제에 이용하는 이념 등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이념을 물질적 수단(도구, 노동용구)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힘(의지, 정동(情動) 등)에 의해서도 실천적으로 실현한다. 레닌이 말했듯이, "……세계가 인간을 만족시키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행위를 통해 세계를 변혁하려고 결심한다." 이러한 인간의 결심은 인간이 지성과 사고를 통해 획득한 지식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지식은,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결합되어야만 한다. 이때 인간의 마음에는 이념에 따라 행동하려는 결의가 성숙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결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이념의 진리성, 이념에 따라 행동해야 할 필요성, 이념을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실재적 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확신이다.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은 지식에 기초한 자기 행동의 정당성에 관한 주체의 확신, 즉 자신의 자각적 신념을 배제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을 신념이나 습관으로 대용하는 것이나 광신에 반대하며, 종교의 기초가 되고 있는 맹복적인 교의신앙과 객관적 실재의 지식에 의거한 인간의 확신을 엄밀하게 구별한다. 실현하고자 하는 이념의 진리성을 믿지 않고 실천행동에 착수하는 인간에게는 성공에 필수불가결한 의지, 목적지향성, 그리고 정동적(情動的) 고양이 결여되게 된다. 인간이 영혼을 불사르지 않고서는, 모든 종류의 감정에 의해 인간의 이성이 자극을 받지 않고서는 어떠한 천재적인 아이디어도 생겨날 수 없으며 아무리 좋은 기획도 실현될 수 없다. 과학적 지식은 인간의 개인적 확신으로 되어야만 한다. 이 확신이 현실의 변혁을 지향하는 행동에의 결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념의 실천적 실현과정, 그리고 이념이 인간에 대립하는 객관적 세계로 전화하는 것을 철학에서는 대상화라고 부른다.

  대상화는 두 측면을 갖는다. (1) 사회적인 측면, 그리고 (2) 인식론적 측면이다. 대상화와 사회적 측면은, 예컨대 이후에 논의될 소외와 마찬가지로, 인간 노동에 의해 창조된 대상과 인간 그 자체 사이의 연관을 분명히 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인식론적 측면에서 대상화를 고찰하는 경우에는, 실천에서 얻어진 대상이 실현하고자 했던 이념에 조응하는가 어떤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이념이 현실로 구현되는 것에 의해 이념의 객관적 진리성의 문제는 해결되고 이론 가운데에 존재하는 허상과 착각이 제거된다. 이 과정은 실천에서 얻어진 대상과 이념 사이에 존재하는 일정한 부조응(不照應)을 밝혀낸다. 이러한 부조응은 이념의 불완전성, 즉 그것에 포함된 지식이나 그 실현방법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이념을 가장 완전한 객관적 실재로 구현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정신적 수단이나 조건의 결여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든가 둘 중 하나이다. 따라서 대상화는 연구의 한 주기를 총결산하고 새로운 주기를 연다.

  결국 실천에서 얻이전 대상은, 그것이 인간의 이성적(합리적) 목적과 일치하는가 어떤가 하는 관점에서 분석된다.

  이성적인 것, 즉 합리적인 것은 원래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간이 배제된 자연 가운데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적 발전의 산물이며, 인간의 노동과 인식의 산물이다. 존재하는 이성은 오직 하나 인간의 이성뿐이다. 인간은 노동 등 기타 실천행태를 매개로 하여 이성으로 하여금 주변 세계에 착용을 가하도록 만들고, 이성의 이념에 기초하여 인간화된 자연을 창출한다.

  객관적·역사적 과정으로서의 실천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이념 가운데 표현된 인간의 목적에 종속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을 창조함으로써 그 목적의 한계를 뛰어넘기 때문에 항상 합리적이면서도 동시에 비합리적이다.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 존재하는 비합리적 요소를 절대화하고, 합리적인 것에서 비합리적인 요소를 분리시켜 그것을 모든 발전의 지배적 경향으로 간주하는 비합리주의(irrationalism)와는 반대로, 변증법적 유물론은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인 것에 대립되면서도 종종 합리적인 것에 수반되는 요소로서 인정한다. 영원히 비합리적인 것은 없지만 일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는 비합리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예측되지 못한 활동의 결과로서의 비합리적인 것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실천에 의해 극복되어 간다.

  인간 활동의 계기인 인식 그 자체도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범주 속에서 평가될 수 있다. 지식은 그 본성상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목적과 욕구에 부합되는 이념을 창조하기 대문이며, 논리와 이성의 기존 형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동시에 지식은 이전에 만들어진 사고의 형식을 자주 뛰어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즉, 지식은 논리 그 자체가 변화함으로써, 논리 수단이 사고의 새로운 형식과 범주에 의해 풍부해짐으로써 스스로를 극복하는 그러한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비합리주의는 이러한 지식 가운데 현재 존재하는 이성의 형식으로는 아직 설명되지 않은 비합리적 잔존물들에 주의를 집중하고 그것을 진정한 본질로 간주함으로써 인식과정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낳는다.

  인식 발전의 주요한 경향으로서의 합리적인 것은 두 가지 형식으로 존재한다. 오성(悟性)과 이성이 그것이다. 오성적 활동이라고 하는 것은, 방법 자체와 그 방법의 한계, 가능성 등을 의식하지 않고 엄격히 제한된 도식이나 패턴에 따라 사고형식이나 추상을 조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성은 전체적인 것, 통일적인 것을 상호배제하는 제 대립물로 분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을 상호침투의 통일 속에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오성의 특징은 '알고리즘'(algorithm; 기수법, 연산법)―예컨대 그것은 여러 가지 계산과정의 실시에 관한 규칙이고 그 특징은 엄밀한 규정성이다. 계산과정의 각 단계가 다음 단계를 규정하고 과정 자체가 개개의 스텝으로 나뉘어지며 명령은 기호의 조합이란 형태로 주어진다―속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따라서 알고리즘에 의한 행동은 기계에 의해서도 수행될 수 있다. 오성의 활동은 이론적 사고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사고는 산만하고 모호해질 것이다. 오성은 이론을 형식화된 체계로 변화시키는 데 힘쓰며, 사고에 계통성과 엄밀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오성이 인간 사고의 특질은 아니다. 그 특질을 표현하는 것은 이성이다.

  오성과는 달리, 이성은 그 내용과 본성을 의식하면서 개념을 조작한다. 이성의 도움으로 현상이나 과정은 창조적·능동적으로, 목적지향적으로 반영된다. 이성은 개조활동의 도구, 즉 인간의 욕구와 본질에 합치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도구이다. 인간의 이성은 이미 형성된 지식체계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목적을 더욱 완전하게,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새로운 체계를 창조하려 한다. 오성의 특징이 분석인 반면, 이성의 특징은 종합이다. 종합은 가장 고도화된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다. 인간의 지식은 오성적 활동과 이성적 활동의 통일이며 그 수준에 따라 객관적 실재가 파악되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변경하는 길이 규정된다. 

지식과 가치 

이념은 문화―정신적 문화와 물질적 문화―속에서, 사물·예술작품·도덕규범 등의 가운데서 실천적으로 실현된다. 그러면 이념은 인간의 사회적 욕구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인간은 외적 세계의 대상에 대해 순수한 이론적 태도로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능동적으로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은 이들 사물에 하나의 특수한 명칭(유, 類)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러한 사물들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이 사물들을 '재화'라고 부르거나, 그 외 그들이 이러한 사물을 실천적으로 사용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사물이 그들에게 유용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어떤 명칭을 부여한다……"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외적 세계의 대상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부터 가치에 관한 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의 핵심은 인간이 창조한 물질적·정신적 문화의 대상과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자연현상을 '재화'나 '가치'라고 부를 것인가, 또는 어떤 다른 명칭으로 부를 것인가, 그것을 분류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징표에 따라 분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가치의 분성이나 주체 및 객체, 인식 등에 대한 관계의 문제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가치의 본성의 문제를 역사와자기 자신의 창조자로서의 인간과 그 활동적 본질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여 해결한다.

  자연의 대상과 정신적·물질적 문화라는 대상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인간의 목적에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대상은 가치가 있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간주할 필요가 있다. 대상의 이러한 능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들의 본성에서 나오는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특수성과 가능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만약 가치가 오직 대상 그 자체에만 의거하고 있다고 인정한다면 인간과 인간의 목적에 봉사하는 성질이 처음부터 대상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자연과 자연의 대상은 인간이 출현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한편, 대상이 자기 자신의 본성과는 관계없이 인간의 정신적·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만약 곡물이 어떤 필요한 물질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미 식품일 수가 없었을 것이며, 또 인간에게 필요한 '재화'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가치를 사회적·역사적 현상, 주체와 객체의 실천적 상호작용의 계기로 본다. 사회적인 세계는 물질적인 자연의 과정과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인간 노동의 산물은 자연의 계속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성립된 대상의 성질이며, 동시에 노동과 일상생활의 과정에 매개되어 '인간적 현실의 생활영역'이 된 자연적 대상의 성질이기도 하다.

  현대 부르조아 철학의 몇몇 조류는 대상이나 현상에 대한 가치론적 접근을, 그것들의 객관적·과학적 고찰과 대립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식이나 가치론적 접근 모두가 인간 활동의 한 측면이고 떨어질 수 없이 관련되어 있으면서 또 상호 침투하고 있다. 한편에서 지식의 결과 그 자체는 순수하게 인식론적인 특징(진리인가 아닌가, 본질적인가 비본질적인가, 개연적인가 확실한가 등)의 관점으로부터만이 아니라 본래의 가치론적 특징(그 지식이 사회에서 어떠한 효용과 실제적 용도를 갖는가, 인간의 어떠한 물질적·정신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가)의 관점으로부터도 평가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가치론적 견해는 객관적인 원천을 갖는다. 즉 사물이나 과정, 이들의 성질이나 법칙성에 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성질이나 법칙성에 근거하여, 주어진 대상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어떠한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의 대상에 대한 과학적 접근과 가치론적 접근은, 엄격히 정의된 목적 하에서만, 추상 가운데서만 분리될 수 있다. 전자의 접근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고 지식 그 자체, 즉 객관적 진리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데 힘쓴다. 여기에 비해, 후자의 접근은 대상과대상의 반영물을 모두 고려하면서 인간과의 관계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라는 입장에서 모든 것을 평가하려고 한다. 이러한 접근은 지식을 순수한 형태로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목적에 봉사하는 능력을 가진 물질적·정신적 문화 속에서의 지식의 구현에 관심을 갖는다. 가치론적 접근은 예컨대 도덕적 의식이나 예술적 의식 안에서는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며, 많은 점에서 객관적 세계에 대한 의식적 태도의 특수성을 표현한다.

  그와 동시에 객관적 활동과 정신적 활동을 포함하는 실재적인 인간활동속에는, 두 가지 접근(객관적·과학적 접근과 가치론적 접근)이 결합되어 있으며 어느 한쪽이 없이는 양자 모두 존재할 수 없다. 양자는 모두 하나의 원천―객관적 현실에 대한 인간의 실천적 태도―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