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인식의 본성
4. 현실에 대한 정신적인 점유(占有)로서의 지식·반영 원리
인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기본 형태는 어떠한가? 무지에서 지식으로, 하나의 인식에서 더 깊은 다른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떤 법칙에 의해 가능한가?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수단과 방법에 의해 오류를 극복하고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철학적 제 문제가 인식론(epistemology)에서 다루어진다.
인식론의 문제는 철학 자체의 발생과 더불어 생겨났다. 그리스 철학에서 데모크리토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학파, 회의론과 스토아 학파는 인식의 본성에 대한 분석의 기초를 세웠다. 근대에 들어와 베이컨, 데카르트, 로크,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칸트, 디드로, 엘베시우스, 헤겔, 포이에르바하, 게르쩬, 체르니쎄프스키 등의 사상가들이 그들의 뒤를 이어 이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인식의 문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간이 자연과 사회적 실재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획득할 수 없다는(또는 그것을 의심하는) 철학 이론이 성립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러한 학설들은 서로간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철학적(인식론적) 회의론, 또는 불가지론(Agnosticism)으로 특징지어진다.
철학적 회의론의 사상은 그리이스의 철학자들인 피로우(Pyrho), 카르네아데스(Carneades), 아에네시데무스(Aenesidemus) 등에 의해 주창되었다. 초기의 회의론자들은, 모든 문제에 대립되는 상호배타적인 의견들이 표현되기 때문에 진리란 원칙적으로 획득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감성적 지각이나 논리적 법칙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제공하지 못하며, 모든 지식은 단지 신념이나 의견에 불과하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근래에 들어와서 고대 회의론자들의 주장은 수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재생되고 발전되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모든 지식은 본질적으로 무지식(non-knowledge)이라고 주장한 18세기 스코틀란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다. "가장 완전한 자연적 철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들의 무지를 약간 더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가장 완전한 정신적인 또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그 분야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닫게 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이리하여 인간의 맹목과 위약함을 관찰하는 것이 모든 철학의 결과인 것이다." 흄은 지식이 아니라 신념과 습관을 실천활동의 기초로 할 것을 권장했다.
칸트주의는 불가지론의 또 다른 변종이다. 칸트는 인식과정과 그 각각의 계기인 감각, 오성, 이성을 상세히 분석했다. 이 분석은 인식론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인식론상의 고찰 방향과 일반적 결론은 잘못된 것이었다. 칸트는 복잡하고 모순된 인식의 세계를 밝혀내기는 했으나 그것을 실재적 세계의 사물로부터 분리시켜 버렸다. "사물 그 자체가 어떤 것인가를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사물의 현상, 즉 사물이 우리의 감관(感官)을 촉발함으로써 우리 내부에 불러일으키는 표상일 뿐이다"라고 칸트는 서술하고 있다.
인식이 경험과 감각에서 비롯된다는 칸트의 사고는 올바르다. 그러날 그는 경험을 인간과 '물자체'를 결합시킨 것으로서가 아니라 분리시켜 이해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는 선험적 지식, 즉 경험에 앞서 존재하고 경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감각과 오성의 제 형식이 의식의 내부에 존재한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지식은 경험에 의해서 주어진 것과 선험적인 형식들로 구성된다. 선험론(Apriorism)은 그를 어쩔 수 없이 불가지론으로 빠지게 했다.
불가지론은 19세기와 20세기의 철학에까지 이어졌다. 불가지론은 부르조아 철학의 여러 가지 조류, 특히 싫증주의와 마하주의 및 그와 유사한 실용주의 철학과 같은 싫증주의의 변종에 의해 수용되고 있다. 최근의 부르조아 철학은 불가지론의 전제들에 독창적인 기여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칸트와 흄의 사상을 단순히 재생하거나, 기껏해야 그들의 견해를 혼합하여 철학 분야의 최신의 성과물로서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을 뿐이다.
철학의 근본적 방향-유물론과 관념론-에 대하여 불가지론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모든 관념론 철학자들을 불가지론자라고 단언한다면 이는 아마 지나친 단순화일 것이다. 데카르트, 라이프니쯔, 헤겔 등은 불가지론자는 아니었다. 엥겔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헤겔은 "관념론의 입장에서 가능한 한" 불가지론은 반박했다. 그러나 불가지론에 대한 관념론자들의 비판은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고 그것에 양보하고 있으며 인식론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끊이없이 불가지론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반면에 모든 불가지론자가 단호하고 일관된 관념론의지지자는 아니다. 불가지론자는 종종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에서 타협적인 입장을 취하려 한다. 레닌은 이렇게 쓰고 있다. "유물론자에게 있어서 '사실로서 주어지고 있는' 것은 외적 세계이며, 우리의 감각은 이 외적 세계의 반영이다. 관념론자에게 있어서 '사실로서 주어지고 있는' 것은 감각이며 이때 외적 세계는 '감각의 복합'으로 간주된다. 불가지론자에게 있어서도 '직접적으로 주어지고 있는'것은 역시 감각이다. 그러나 불가지론자는 거기서부터 앞으로 더 나아가 유물론적으로 외적 세계의 실재성을 승인하지도 관념론적으로 세계를 우리의 감각이라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인식론상 입장에서 볼 때 불가지론은 인각의 감각, 지각, 개념의 내용을 객관적 실재로부터 분리시키기 때문에 철학의 근본문제의 제2측면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관념론이 된다. 그러나 불가지론자로 자처했던 사람들이 모두 실제로 불가지론자였던 것은 아니다. 19세기에 '불가지론'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영국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 같은 몇몇 자연철학자들은 스스로 불가지론자라고 자임하고 있었으나 본질적으로 불가지론의 철학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당시 부르조아 사회의 조건에서 자신의 자연과학적 유물론을 불가지론이라는 용어로 위장하고, 당시 과학의 인식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인식불능이라고 선언했다. 그들의 견해는 무엇보다도 신의 존재에 관한 종교적 신념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증법이나 형이상학에 대한 불가지론의 태도는 모순된 것이었다. 불가지론은 인간 인식의 변증법적 제 모순을 주관적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회의나 의심은 인식의 진전이나 교조주의의 극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의론은 고대 이후 어느 정도의 변증법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회의론자가 진리를 향한 지식의 운동과정의 풍부함, 복잡함, 모순성을 밝혀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불가지론은 지식의 유동성과 상대성을 절대화하고 있으며 그 회의는 부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불가지론자는 지식의 상대성과 그 모순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객관적 세계의 법칙성으로 나아가는 것을 거부한다. 객관적 변증법(사물의 운동)에서 주관적 변증법(지식의 운동)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지론의 기본적인 인식론적 원천이다.
불가지론은 그 발생 초기부터 정당한 비판을 받아왔다. 불가지론의 반대자들은 곧바로 그 발언이 모순된다는 것과 그 궁극적 결론의 어리석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중에는 명확한 논거보다는 정연한 기지(機知) 쪽이 이긴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식에 대한 불가지론적 사고방식은 인식과정의 복잡한 성격(모순성)의 반영으로서, 참된 지식의 기준을 정하는 데서 나타나는 어려움의 반영으로서 생겨난다. 그러나 불가지론은 또한 일정한 사회 계층의 상태와 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불가지론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잡한 인식론상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며 동시에 불가지론의 사회적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낡은 관조적(觀照的) 유물론이나 관념론적 변증법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것은 오직 유물론적 변증법의 기초 위에서만 해결까능하며,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이다.
레닌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적 기초를 그의 노작(勞作)『유물론과 경험비판론』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로 정식화했다.
"① 사물은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우리의 외부에 존재한다…….
② 현상과 사물 자체 사이에는 어떠한 원리적인 구별도 없으며 또한 있을 수도 없다. 단지 인식되어진 것과 아직 인식되지 않은 것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③ 다른 모든 분야의 과학과 마찬가지로 인식론에서도 우리는 문제를 변증법적으로 고찰해야만 한다. 즉, 우리의 인식을 이미 완성된 것, 변하지 않는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여 무지로부터 지식이 나타나는가, 어떻게 하여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지식이 보다 완전하고 보다 정확한 지식으로 되어 가는가를 연구해야만 한다."
인식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도움을 받아 근본적으로 변화되기에 이르렀다. ① 유물론적 변증법을 의식의 분야에까지 확장한 것, ② 실천을 지식의 진리성의 기초 및 기준으로서 인식론에 도입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유물론적 변증법은 외적 세계 및 인간 사고의 운동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과학이기 때문에 객관적 세계의 법칙과 사고의 법칙 사이의 분리와 단절에 종지부를 찍었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두 가지 계열의 법칙은 사실상 동일하나 나타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다르다. 즉, 인간의 두뇌는 그러한 법칙을 의식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자연과 현재까지의 인류 역사상 대부분에 있어서 의식되지 않은 상태로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의 주관적 변증법은 변증법에 본질적으로 내재해 있는 객관적 법칙들이 객관적 실재를 인식하는 과정의 반영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과정의 기초는 사회적 실천이다.
지식은 인간의 두뇌 속에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과정에서 획득된 것이며 인간의 실천활동의 결과이다. 인간이 새로운 지식을 획득해 가는 과정을 인식이라고 부른다.
인식의 본질, 법칙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 인식의 주체인가, 즉 누가 객관적 실재를 인식하는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언뜻 보면 아무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인식의 주체는 당연히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째로 철학사에 있어서는 인간이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상가가 있었고, 둘째로 현재는 인식이나 이론적 사고와 같은 인식형태는 인간만이 아니라 컴퓨터와 같은 장치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의견이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의 주체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인간이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의식이 인식의 주체라고 하는 관념론적 견해를 비판하고, 의식 그 자체는 인간의 술어(述語)이자 성질일 뿐이라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포이에르바하에게 있어서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있는 물리적·육체적 존재이며, 그 물질적 본성에 의해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인식에 관한 포이에르바하의 견해는 자연적 본질을 가진 구체적인 인간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단지 자연적 존재일 뿐이지 역사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사회적 존재는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포이에르바하는 현실에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는 인간에 도달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인간'에 머물렀으며 감각이라는 면에서도 겨우 '현실적인, 개체적인, 육감적인 인간'을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다."
인간은 어떻게 그 구체적·실재적 본질을 획득할 수 있는가? 인간은 감성을 표현하여 자연적 존재로서의 제 성질이 갖추고 있으나 자기의 두 번째 자연, 즉 사회적인 자연-문화, 문명-을 창조해 낸다. 인간은 단순히 자연의 대상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변화시키며 노동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창조한다. 인간은 자신의 동류(同類)에 대하여 일정한 관계를 갖는 사회적 존재로서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세계이며 국가이고 사회인 것이다." 사회를 떠나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인식의 주체도 없다.
그러나 독자는 당연히 이러한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즉,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전 인류나 사회 전체가 아니라 각각의 개인들이라고. 물론 사고하고 생산하는, 개체적인 특수성과 능력을 가진 개개의 인간이 없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개개의 인간은, 서로 일정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주어진 사회 조직의 단계에서 입수한 생산용구와 생산수단을 갖게 됨으로써 비로소 인식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인식과정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인간의 인식 능력의 구조, 즉 인식의 발전 수준에 의해 규정되며, 이러한 인식의 수준은 또한 현재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 객관적 관념론은 사회에 있어서 의식, 이성이 어느 한 명의 구체적 인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하면서도 이 특수성을 신비화하여 의식의 제 형태에 고정되어 있는 인간 활동의 전체적 결과를 받아들이고, 이것을 그 자신의 논리에 따라 운동하는 자립적인 본질로서 묘사하였다.
그러나 인식과정에는 주체뿐만 아니라 주체와 상호작용하는 객체도 또한 필요하다. 인식의 주체인 인간은 무엇이 그들의 인식과 실천의 대상으로 되는가에 따라서 판단될 수 있다. 예컨대 전자는 데모크리토스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뿐만 아니라 갈릴레오나 뉴우턴의 시대에도 실재로서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인식활동의 영역에 들어 있지는 않았다. 인간은 그것을 발견할 수도 없었으며 자신의 사고와 행동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었다. 사회의 발전 수준을 알아야만 비로소 자연의 어떠한 대상이 인간의 인간활동의 객체가 될 수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현재의 사회적 실천은 우리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공간이나 태양계의 다른 혹성들에 대한 탐사도 인간 활동의 영역으로 서서히 편입되고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인간은 계속해서 새로운 자연현상을 자신의 생활궤도에 끌어들이고 이를 인간 활동의 객체로 변화시켜 간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세계는 확대되고 심화되어 간다. 현실에 관한 포이에르바하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감성적 세계가 과거로부터 직접 주어진 어떤 영구불변한 존재가 아니라 산업과 사회상태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과실수와 마찬가지로 벚나무는 불과 몇 세기 전에 교역을 통해 우리가 사는 지역으로 이식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벚나무는 어떤 특정 시대의 특정 사회에서 이 행위 (교역)에 의해 비로서 포이에르바하에게 '감성적 확실성'으로 주어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인식의 대상(객체)은 인간에 의해 변형된 자연현상이다. 이러한 인식의 대상은 일정하게 인간의 실천적 활동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매개로 하여 문화가 만들어진다. 지식도 이 문화의 한 요소인 것이다.
인식의 필수적인 조건은 자연의 대상과 사회적 과정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것인데, 이 과정은 객관적인 실재에 대한 인간 자신의 행동에 근거하고 있다. 인식은 객관적인 현상에 대한 인간의 개입과 개조를 통해 발전한다. 인간 인식의 본질은 인식을 주체와 객체의 실천적 상호작용의 특수성으로부터 도출해 냄으로써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은 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의 물질적인 계(system)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행동한다. 인간의 의식과 의지는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 상호작용은 그 물질적 본성을 상실하게 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모든 수단과 자연적·인공적 수단을 통해 자연의 현상과 물질에 작용을 하고 그것들을 개조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 간다. 이러한 인간의 객관적인 물질적 활동을 실천이라고 한다.
실천이라는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철학전체에 있어 근본적인 것이다. 사회적 생산은 인간의 실천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형태이지만 실천을 생산의 영역에만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그렇게 한정할 경우 인간은 의·식·주 등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노동을 통해 충족하는 단순한 경제적인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인간의 의식은 순전히 기술적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실천은 인간 활동의 모든 객관적인 형태를 포함한다. 이것은 계급투쟁이나 예술, 과학의 발전과 같은 사회적인 현상을 위시해 인간의 물질적·정신적 문화가 창조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존재의 모든 측명을 포괄한다.
생산활동과 노동활동에 있어서, 인간은 자연에 대하여(자기와 자기 새끼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만을 얻으려 하는) 동물과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인간은 보편적인 존재이고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한다. 인간은 발생하고 발전해 가는 목표에 따라 사물을 자신의 척도와 규준에 맞게 창조한다.
모든 형태의 인간의 객관적 활동은 노동과 생산의 토대 위에 구축된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가 사물 과정, 객관적 실재의 법칙성에 대한 인식과 같은 형상을 낳는 것이다. 처음에 인식은 물질적인 생산으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생산에 합체(合體)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문명의 발전과정에서 사상(정신)의 생산은 사물의 생산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인식의 과정은 상대적으로 독립된 이론활동으로 전화되어 갔다. 결국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우리에게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대립과 모순을 만들어 냈다.
이론활동과 실천의 상호관계를 분석하면서 우리는 이론이 실천에 의존함과 동시에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식이 실천에 의존한다는 것은 인식의 사회적·역사적 성격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인식의 모든 측면은 사회와 연관되어 있고 사회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인식의 주체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며, 객체는 인식 활동이나 인간의 실천적 물질 활동으로 인해 나타난 자연의 대상이나 사회적 현상이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인 생물학적 전제를 받았다. 그것은 두뇌와 매우 발달된 신경계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적인 기관은 사회 발전의 과정에서 그 용도와 기능이 변화되어 왔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따라서 손은 노동의 기관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사회적 활동으로 인해 인간의 감각기관, 뇌, 손은 위대한 미술까들의 회화나 조각, 천재적인 음악가들의 작품, 문학, 과학, 철학의 걸작과 같은 기적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인식 발전의 원천이 인간의 객관적 활동, 사회적 욕망의 변화인 것은 인식이 사회적 본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변화가 인식의 목표, 인식의 객체를 규정하고 사람들을 자극하여 점점 더 깊은 수준의 이론적 파악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인식은 실천의 직접적인 요구를 어느 정도 앞질러 현상을 예견함으로써 생산이나 인간 생활의 다른 영역에 적극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예컨대 원자의 복합구조이론은 사회가 원자 에너지의 실천적 이용이라는 목표를 의식적으로 제기하기 전에 발생했다.
인식이 실천에 선행하는 것은, 한편에서는 사회적 실천의 발전에 힘입은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 자체의 특수한 법칙으로 인한 것이다. 이 경우 개인이나 인류가 스스로에게 제기한 실천적 과제와 인식과의 연관은 종종 복잡하고 간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예컨대 현대 수학 연구의 결과는 먼저 물리학이나 화학 등과 같은 다른 과학 분야에 이용되었고 나중에 비로소 생산기술과 공학에 이용되었다.
물론 이론활동이 실천으로부터 분리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이것은 인식을 실천으로의 출구를 갖지 못하는 자기폐쇄계(自己閉鎖系, a closedircuit system)로 전락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식에서 실천으로의 방향을 계통적으로 잡는다는 것은, 인식이 객관적인 것으로 되고 또 인식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사물과 과정의 본질로 점차 심화되어 가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다.
인식과정의 결과가 지식이다. 지식이라는 개념은 매우 복잡하고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다. 많은 인식론자들은 어떤 때는 지식의 한 측면을, 다른 때는 다른 측면을 끄집어 내어 그것이 지식의 본성의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묘사하려고 시도해 왔다. 이러한 일면성 때문에 지식의 본질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빠뜨리게 되었고, 그 결과 지식에 대한 관념에 결함이 생겼으며, 때로는 그 성격이 왜곡되기조차 했던 것이다.
지식에 대한 최초의 정의는 사회생활의 과정에 있어서 그 지위를 확립한 것이었다.
지식에 있어서 인간은 객체를 이론적으로 점유하고 그것을 관념적으로 개조한다. 지식은 그것밖에 존재하는 객체에 대해서는 관념적이다. 그것은 인식된 사물, 현장, 성질 그 자체가 아니고 현실을 점유하는 형식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이 사상, 목적, 희망 가운데서 사물이나 과정을 재현하고 심상(心像)이나 개념을 통해 그것들을 조작하는 능력이다.
지식은 관념적이기 때문에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사물 또는 그것의 물질적 복제(cooy)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대립하는 어떤 것으로서, 주체와 객체의 객관적인 상호작용의 계기 내지 측면으로서, 인간 활동의 형태로서 존재한다. 관념적인 것으로서의 지식은 신경계의 운동이나 인간이 만든 기호(단어, 기타 수학적 상징 등) 가운데 물질적인 것과 함께 짜넣어져 있다.
그 결과, 인간이 객체를 정신적으로 점유한 것의 표현인 관념이 형성되고, 현존하거나 또는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사물과 과정의 심상(心像, image)이 만들어진다.
관념의 총체로서의 지식의 특수성을 해명하려면, 그 관념의 내용, 관념과 객관적 실재와의 관계 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일반적인 형태로 정식화했다.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정신에 반영되어 사고의 형태로 변형된 물질적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과 객관적 실재 사이의 관계는 반영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된다. 이 개념은 이미 고대 철학에서 제기된 바 있다. 근대의 유물론자들은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여 이것을 발전시키고 풍부하게 만들었으나 어떤 경우는 반영의 과정을 기계론적으로 채색하기도 했다. 즉, 반영이라는 것은 인간에 대한 대상의 작용이며, 대상의 형태가 인간의 감각기관에 밀납처럼 각인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비록 반영이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에만 특유한 개념은 아니었지만, 반영의 개념은 마르크스주의 인식론 속에서 그 위치를 획득하고 재파악되었으며, 새로운 내용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러면 반영이라는 개념은 왜 필요한가? 지식의 내용과 원천이 어떻게, 또 어떠한 형태로 객관적 실재와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문제로 삼을 때, 지식이 객관적 실재의 사물, 성질, 법칙의 반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유물론의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인식론에 있어서 유물론은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의 존재와 그것을 인식하는 능력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반영이라고 하는 개념은 지식의 내용을 이루는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지식은 객체를 반영한다. 이것은 주체가 만들어 낸 사고활동의 형식이 궁극적으로는 주어진 객체의 본성, 성질, 법칙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지식의 내용은 객관적인 것이다.
관념론적 인식론은 반영의 개념을 회피하고 이것을 '조응'(Correspondenece)이라는 용어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지식을 객관적 실재의 심상(心像)으로서가 아니라 실재를 대용(代用)하는 기호, 상징으로서 간주하고 있다. 레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단호하게 항의했다. "기호나 상징은 가상적인 실재에 대해서도 똑같이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다 그러한 기호나 상징의 실례를 달 알고 있다." 신칸트주의자인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와 같은 관념론자들도 자신들이 반영의 개념을 싫어하는 이유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지식이 객체의 상징이라고 하는 견해를 옹호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감각이나 표상(表象)은 기호이지 대상의 모사(模寫)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사된 객체와의 어떤 종류의 상등성(相等性)을 모사에 요구하지만 이 경우 우리는 그것이 서로 동등하다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지식을 반영으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경향의 철학자, 철학자인 체 하는 수정주의자들로부터 이론(異論)이 제기되고 있다. 후자는 반영이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개념이기 때문에 객체를 실천적 및 이론적으로 파악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주체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과는 화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반영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반영이론은 이러한 철학자들에 의해 교조주의의 기초인 것처럼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실재의 올바른 반영은 교조주의를 배제한다.
물론 사물이나 과정의 복제로 생각되어지는, 인간의 주체적인 적극적·창조적 활동이 거세된 반영은 지식의 특징으로 간주될 수 없다. 지식은 그것이 객관적·능동적·실천적으로 방향지워진 반영인 경우에만 세계 개조를 위한 변혁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지식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점유하고 이 실재를 자기 내용으로 삼는다. 즉,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현상, 과정의 성질과 법칙을 반영한다. 반영 없는 주체적 활동은, 창조와 필요한 사물의 창출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무의미한 임의의 것이 되어 버린다.다시 말하면 지식이 반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지식으로부터 객관적 내용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은 반영원리에 의해 지식을 기초지우고 지식의 본성을 분명히 하며, 반영의 개념을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 그것을 인간의 실천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에까지 확장시킬 것이다. 지식은 사회적 실천에 의해 검증된 현실의 적합한 반영이다. 그것은 객관적 실재의 제 현상의 성질과 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인간 활동의 형태이다. 다시 말해서 객체를 합목적적으로, 창조적·능동적으로 반영하는 방법인 것이다.
지식은 물질적 실재의 관념적인 방영이며 객관적 실재와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식은 객관적 실재의 세계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표현에 있어 특수한 물질적 형태를 취해야 한다. 객관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객관적으로만 행동하며, 그 지식 또한 객관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인간은 지식이 언어의 형식을 취하고, 감성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기호의 체계로 표현될 때에만 그것을 조작할 수 있다. 인간은 사물에 대한 관념이나 심상을 언어를 통해서만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
언어의 형식을 취한 그 정재(定在)와 지식의 연관에 대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정신'은 처음부터 물질에 '씌워져 있는' 저주를 떠맡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물질은 움직이는 공기층, 소리 등으로 이루어지는 언어의 형식을 취하며 나타난다. 언어는 의식만큼이나 오랜 것이다. 언어는 실천적인 의식이고, 다른 인간들에 대해서도 현존하며, 그것에 의해 비로소 나 자신에 있어서도 현존하는 현실적인 의식으로 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지식은 대상, 사건, 행위 등을 지시하는 기호의 체계로 나타났다. 기호가 나타내는 것은 그 기호의 의미이다. 기호와 의미는 불가분한 것이다. 의미 없는 기호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언어기호와 비언어기호는 구별된다. 후자에는 신호적 기호(Signals), 지표적(指標的) 기호 등이 속한다. 지식은 언어기호 속에 존재한다. 언이기호는 객관적 실재의 다양한 현상이나 과정에 대한 인식의 이미지를 그 의미로서 갖고 있다.
기호의 역할을 하는 감성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대상과 그 의미 사이에는 내적으로 필연적인 유기적 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호로서 역할하는 다른 여러 대상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특수한 목적을 위해 만든 인위적인 구성물(부호)도 역시 기호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인식의 발전은 인공적인 상징언어(예컨대 수학·화학 등등의 상징언어)의 고도로 분화된 체계의 발생을 가져왔다. 이러한 언어는 자연언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나 상대적인 자립성을 가진 기호체계이다. 과학은 인식의 결과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상징(symbol)을 더욱 활발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상징은 관념적인 견해를 옹호하기 위하여 특정의 철학적 조류에 의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지식은 기호체계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현대 과학에서 인공적인 구성물(상징)은 더욱 넓은 범위에 걸쳐 기호로서 역할하고 있다. 관념론자들은 지식이 상징일 뿐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는 자신들의 견해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이를 이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실증주의자들(neo-positivists)은 과학이 인공언어를 채택하는 것은 지식이 객관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항상 강조한다. 필립 프랑크(philipp Frank)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 물리학은 우리에게 '물질' 또는 '정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못하지만 의미론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일반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적 경험을 기술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가 물리학의 일반 법칙을 정식화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물론 물리학은 민족적인 자연언어와는 다른 독자의 언어를 갖는다. 그러나 물리학이 그것을 창조한 것은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과정에서 멀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더욱 깊게, 더욱 완전하게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지식은 그 표현형식으로 볼 때 더욱 상징화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과학이론이 기호체계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징이나 방정식은 그 의미에 있어서 객관적 실재를 보다 정밀하고, 보다 깊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인식의 결과는 상징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의 관념적인 의미이며 그 내용을 이루는 것은 그 과학이 연구하는 사물, 과정, 성질, 법칙이다. 아인슈타인의 공식 E=mc2이라는 상징이 지식인 것이 아니라 이 공식을 구성하고 있는 기호의 의미가 지식인 것이며, 이러한 기호사이의 관계는 물리학적 법칙의 하나-에너지와 질량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즉, 이것은 실재적인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개개의 상징이나 이론 전체의 의미, 즉 그것들이 관계하고 있는 대상의 부류를 명백히 하는 일은 그다지 쉽지 않다. 모든 지식이 실제로 일목요연하고 특정의 감성적 이미지나 대상이 개념의 형태로 지각될 때는 그것들이 이미 과거의 일로 되어 버린다. 따라서 어느 정도 형식화된 상징언어로 표현된 이론의 해석이라는 문제가 크게 대두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해석'이라는 용어 그 자체는 전통적인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띠게 되었다. 이제 이것은 제 현상의 법칙, 원인의 탐구를 포함하는 과학적 설명(과학은 일찍이 이 임무에서 해방된 적이 없으며 이것은 지금도 과학적 탐구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일정한 논리적 연산(演算)까지도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한 연산을 매개로 하여 추상적이고 상징화된 체계의 인식상의 의미가 규정되고, 이론의 개개 용어(상징)과 기술(표현)의 내용, 나아가 전체로서의 이론 그 자체의 내용과 적용영역이 확립되는 것이다.
20세기의 논리학 사상은 추상적인 이론체계의 해석과 관련된 제 문제를 대량으로, 또 풍부하게 제기했다. 언뜻 보기에 이 문제는 매우 간단한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른다. 독자적인 언어를 가진 어떤 과학이론이 있는 경우 이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언어를 더욱 보편적이고 형식화된 다른 언어, 예를 들어 현대 형식논리학에 의해 제시된 그런 종류의 언어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언어의 이와 같은 대조는 매우 풍성한 결과를 낳는다. 이로 인해 엄밀한 언어의 기준에 의해 과학이론을 음미할 수 있으며, 그것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사용된 용어가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이론의 대상이 되는 영역, 즉 그 인식상의 의미와 객관적 내용을 밝힐 수는 없다.
과학이론에 대한 이와는 다른 해석방법도 있다. 즉, 그 언어를 관찰이나 실험의 언어와 대조하여, 이론의 용어나 기술의 형태로 존재하는 추상적인 객체뿐만 아니라 실제로 관찰되는 경험적·감성적인 객체를 찾아내는 방식이 그것이다. 경험적 해석이라 칭하는 이 조작은 추상적인 이론체계를 객관적 실재의 현상과 연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조작도 이론체계의 인식상의 의미 전체를 밝힌다고 하는 주요 과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동일 이론을 여러 가지 실험에 기초하여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을 전부 모은다고 할지라도 그 이론에 포함되어 있는 제 현상의 법칙에 관한 지식을 대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 부르조아 철학의 몇몇 조류, 특히 논리적 싫증주의는 지식이 두가지 계기-언어기호와 연산 규칙의 감성적 지각-로 구성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과학이론은 단지 형식논리학의 언어 수단에 의해서도, 관찰과 실험의 언어-이것은 자연언어보다, 즉 감성적인 심상(心像)에 보다 가깝다-로의 환원을 통해서도 해석될 수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싫증주의자의 견해가 갖고 있는 약점은 그것이 과학의 언어를 분석하는 데 있어 지식의 내용을 부정한다는 데 있다. 칸트시대 이후 이미 지식이 인식과정에 의해 형식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명백히 논증되어 왔다. 결국 이론을 이해하고 인식상의 의미를 파악하며 그 속에 포함된 객관적 실재에 대한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식논리학의 언어와 경험적 관찰의 언어에 의한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인식발전의 과정 속에, 그리고 동시에 인류 문명 일반의 발전의 전반적 과정 속에 그 이론을 위치지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론이 지적 발전을 위해, 객관적 현상이나 과정의 정신적 점유를 위해 무엇을 제공하는가, 그리고 또 이론이 인간의 사상과 행동을 어디로 이끄는가 하는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인식상의 이론의 의미를 명백히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것이 철학의 제 범주이다.
앞에서 서술한 것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가 있다. 지식이란 실천활동에 필요하도록 현실을 정신적으로 점유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개념, 이론이 만들어진다. 이 점유는 객관적 세계의 현상, 성질, 법칙을 창조적으로, 합목적적으로, 능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며 언어체계의 형식으로 실재한다.
우리는 실천적 활동을 위해 인간의 의식이나 활동과는 독립적인 본래 그대로의 객관적인 세계를 완전하고도 정확하게 반영하는 지식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식의 진리성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참된 지식을 참된 지식이 아닌 거짓 지식으로부터 구별해 내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고대 철학에서 유래하는 오랜 전통에 의하면 진리는 현실에 조응하는 지식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너무 광범위하고 애매해서 유물론이나 관념론을 포함한 거의 모든 철학적 조류가 이를 받아들여 왔던 것이다. 심지어 불가지론자들조차 '조응'이나 '현실'이라는 용어를 임의대로 해석하여 이것에 동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가지론자들은, 자신들이 지식 일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본래 그대로의 사물이나 과정의 반영이라는 점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철학자들이 진리의 획득을 인식의 목적으로 간주하고 진리의 존재를 인정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전의 모든 철학적 원리(어느 정도 진보적 이론이라고 할지라도)와 질적으로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진리에 대한 이와같은 추상적 정의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진리라는 개념을 객관적 진리라는 개념으로 더욱 구체화했다. 이 객관적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 내용이 주관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이나 인류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지식을 말한다.
이미 지적했듯이, 어떠한 지식이나 진리도 인간의 실천적 활동으로부터 떨어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리 일반을 개인과 인류의 틀을 뛰어넘어 일종의 초월적·피안적 세게에서 찾으려는 객관적 관념론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또한 진리는 객관성, 즉 객관적 실재를 정확히 반영하는 내용을 지닐 때에만 진리이다. 그리하여 "전자는 모든 원소(元素)의 원자구조에 들어있다"라든가, "어떠한 자본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를 기초로 한다."는 등의 주장은 객관적 진리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내용은 객관적 실재로부터,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사태로부터 취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진리에는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이 표현되어 있다. 한편으로 진리는, 그것이 인간 활동의 한 형식이라는 의미에서 주관적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그 내용이 개인에게도, 인류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이다.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형태는 다양하다. 주관적 관념론은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실재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인간 지식의 객관적 내용, 객관적 진리를 부정한다. 실용주의는 진리를 실천으로부터 추출해 냈지만 이 실천은 효용을 성취하기 위한 주체적인 활동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영국 신실증주의의 거장 버트란드 러셀은 진리를 신념의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참과 거짓은 무엇보다도 우선 신념이다. 명제는 오로지 그것이 신념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하는 하나의 신념이다. 그렇게 되면 신념을 뒷받침하는 사실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그것은 기껏해야 무엇인가 외적인 연상(連想) 따위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기에서는 진리의 결정적 요인으로서 지식이 갖고 있는 내용의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는 경직된 정(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질적 상태를 포함하는 과정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를 구별한다.
'절대적 진리'라는 용어는 철학 문헌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거기에는 종종 세계 전체에 대한 완전하고 완결된 지식이라고 하는 관념이 숨어 있다. 이것은 궁극적 진리이며 인간 이성의 노력과 잠재력의 극한적 실현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에 도달할 수가 있을까? 인간은 원리적으로 세계의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능력은 사회의 무한한 역사적 발전과정 속에서 실현되어 간다. 엥겔스는 "사고의 지상성(至上性)은 극히 비지상적(非至上的)으로 사고하는 일련의 인간들을 통해 실현된다……"고 서술했다. 인간 지식의 하나하나의 결과는, 그것이 객관적 실재의 인식과정의 한 계기라는 점에서는 지상적(무조건적으로 참)이지만, 개개 행위로서는 인류 문명의 발전수준에 규정된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비지상적이다. 따라서 온갖 노력을 기울여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고자 애쓰는 것은 헛된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궁극적 진리'라는 용어는 그 확실성이 이미 과학에 의해 증명된 개개현상이나 과정에 대한 사실적 지식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이 경우 그 진리는 영원한 진리라 일컬어진다. 예컨대 "레오 톨스토이는 1828년에 태어났다", "새는 부리를 가지고 있다", "화학원소는 원자량을 갖고 있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지식을 달성하는 데 인식을 한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엥겔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조금바에는 얻을 수 엇다. "만약 인류가 영원한 진리-즉, 지상(至上)의 타당성과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무조건적 권리를 갖는 사고 결과-만을 취급하게 된다면, 그때 인류는, 지적 세계의 무한성이 현실과 가능성에 있어서 완전히 고갈되어 버리고 그와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떤 유명한 기적이 이루어진 그러한 상태로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은 과거에 절대적인 전리인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단지 그 시대에만 진리였음이 입증된 다양한 주장-예컨대 "원자는 분할할 수 없다", "모든 백조는 하얗다" 등-을 만들어 왔다. 현실의 과학이론은 종종 진실이 아닌 것, 환상적인 것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중에 인식과 실천의 발전에 의해 밝혀지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위험한 길에 들어서는 것은 아닐까? 인식과정에서 진실인 것 가운데에 환상적인 것의 요소기가 발견되고 진실인 것과 진실이 아닌 것 사이의 대립이 상대적이라면 양자 사이의 완전한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것은 상대주의자(relativist)의 주장이다. 그들은 지식의 상대성 그 자체를 절대화한다. 그들에 따르면, 진리가 상대적인 것인 이상, 과학은 하나의 진리에서 다른 진리로 또는 하나의 오류에서 다른 오류로 나아가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는 것이다.
상대주의(relativism)는 인식을 포함하는 모든 사물의 유동성과 가동성(可動性)을 인정한다고 하는 올바른 견해를 갖고 있으나 인식의 운동을 객관적 실재로부터 형이상학적인 분리시킨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무조건적으로 상대주의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주의에 귀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은 객관적 진리를 부정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식이 진리에 도달하는 한계가 역사적으로 조건지워져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은 교조주의와 상대주의에 반대하며서 절대적 권리와 상대적 진리의 존재 모두를 인정하지만 객관적 진리에 도달해 가는 과정 속에서 양자의 상호관련을 분명히 한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유물론자라고 하는 것은 감각기관에 의해 우리에게 제시된 객관적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즉 개인 및 인류로부터 독립된 진리를 인정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절대적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절대적 진리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실시한 우리의 지식 가운데에는 이후 과학의 진전에 의해서 폐기되지 않고 단지 새로운 객관적 내용에 의해 풍부해져 가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각각의 시점에 있어서 우리의 지식은 상대적이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현실을 올바르게 반영하지만 일정 한계 내에서는 완전하지 못한 반영이며, 인식의 진전된 운동에 의해 정밀화되고 심화되어 간다.
객관적 진리란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의 인식의 운동과정이며, 이 과정의 결과로서의 지식은 객관적 실재로부터 추출된 내용으로 채워져간다. 그것은 항상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의 통일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의 각 발전단게는 절대적 진리라고 하는 이 총화에 새로운 내용을 부가한다. 그러나 각각의 과학적 명제의 진리의 한계는 상대적이며 지식의 발전에 의해 확대되거나 또는 축소된다."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는 하나의 과학으로서 유클리드 기하학이 창시되었다.그것은 진리인가, 그렇지 않으면 진리가 아닌가? 물론 그것은 객관적인 진리, 절대적=상대적인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객관적 실재 속에 존재하는 공간적 관계로부터 취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 한계 내에서, 즉 공간의 곡률(the curvature of space)을 사상한 한에서만 진리이며, 플러스(+) 또는 마이너스(-)의 곡률을 갖는 공간을 고찰하게 될 때에는 비(非)유클리드 기하학-로바체프스키(Lobachevsky) 기하학과 리만(Riemann) 기하학-으로 이행한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우리지식의 한계를 확대하고 객관적 진리를 한층 심화시키고 방향으로 기하학 지식의 발전에 공헌했던 것이다.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는 데 있어서 인간은 오류로부터 진리를 구별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기준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것처럼 보인다. 과학이 객관적 진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인간은 진리를 논증하고 검증하는 많은 방법을 만들어 내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논증이란 어떤 지식을 다른 지식으로부터 도출해 내는 것이다. 즉, 어떤 지식이 다른 지식으로부터-명제(thesis)가 논거로부터-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지식은 논증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하고, 말하자면 자기 자신 가운데에 틀어박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의 형식적 기준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생겨났다. 즉, 어떤 지식이 다른 지식과 합치될 때 진리인가 아닌가가 확인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소위 정합이론(整合理論, the theory of coherence)은 20세기에 들어와 신실증주의자들에 의해 상당히 보편화되었다. 이 이론은, 일반적으로 진리에는 다른 어떠한 기준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형식논리학에서의 모순배제의 법칙(모순률)에 기초하여 확인되는 지식과 지식의 합치가 진리라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형식논리학은 판단의 전제가 객관적으로 진리인 경우에만 추론된 판단의 진리성을 보증한다. 즉, 'A는 B로부터의 귀결이고 B는 C로부터의 귀결이다' 등으로 끝없이 계속된다.
그러나 보편적인 원리나 공리, 그리고 모든 논증의 기초가 되는 논리적 추론의 규칙은 어디에서, 어떤 지식으로부터 귀결되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문제를 이미 제기했다. 정합이론에 따르면, 남은 길은 단 하나-그 원리를 조건부의 합의(편의)로 인정하고 지식의 객관적 진리성을 확인하는 모든 시도를 단념하며, 인식론에 있어서 주관주의와 불가지론으로의 방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철학의 역사상 지식의 진리성의 기준 문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있었다. 어떤 철학자는 그 기준이 경험적인 관찰에, 인간의 감각과 지각에 있다고 보고 있었다. 물론 경험적 관찰은 지식을 검증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그러나 모든 이론적인 개념이 관찰에 의해 직접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엥겔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필연성은 "관찰에 의한 경험만으로는 결코 증명되지 못한다. 아침에 항상 태양이 뜬다고 해서 내일 아침에도 태양이 뜨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법칙을 확정하는 지식은 반드시 필연성과 보편성을 담보해야만 한다.
물론 과학의 실천에서는 때때로 감성적 경험에 호소하여 판단이나 이론을 검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의 궁극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동일한 이론으로부터 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결론이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의 하나 또는 몇몇 결론의 총화가 경험과 일치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이론 전체의 객관적 진리성의 보증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의 모든 명제가 직접적으로 감성적 경험에 호소한다고 해석 검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검증(경험, 관찰, 실험 데이터의 대조를 통해 지식을 음미하는 가능성)의 원리를 옹호하는 싫증주의자들조차도-특히 고도의 보편성을 갖는 과학이론을 취급하는 경우에는-이 방법을 진리성의 일반적 기준으로서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검증의 원리를 보호하기 위해 '경험에 의한 검증가능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보다 넓은 해석방법을 고안해 내는 한편(모든 진실한 사상이 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등) 그 적용의 범위를 제한했다. 그들 중 일부는 검증가능성을 허위의 입증가능성으로, 즉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반박하는 경험적 데이터에 대한 연구로 바꿔치기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과학에서는 이론을 반박할 사실의 탐구가 필요하다. 특히 다양한 이론체계의 적용 한계는 바로 이것에 의해서 확정된다. 그러나 이 방법을 통해서 그 체계의 객관적 진리성을 증명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만약 경험적 관찰이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보편적 원리, 공리, 놀리적 추론의 규칙 등은 그 명석함이나 명확함 때문에 진리인 것은 아닐까? 즉, 명증적(明證的)이고 그것에 대립되는 것을 전혀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떤 논증도 필요로 하진 않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현대 과학은 본질적으로 비판적이며, 신념이나 명증에 의거하지 않는다. 그 주장의 역설성은 매우 흔한 현상으로 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진리의 기준이 둥극적으로는 지식의 기초인 활동, 즉 사회적 ·역사적 실천에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간적 사고가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어떤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자신의 사고의 진리성을 실천에 있어서, 즉 그것의 현실성과 힘, 차안성(此岸性, this-worldliness)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진리의 기준으로서의 실천의 힘은 어디에 있는가? 인식의 진리성의 기준은 두 개의 질을 가져야함 하며 인간을 지식의 분야에서 객관적 세계로 인도해야만 한다. 지식의 내용이 객관적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지식은-과학의 법칙이 특히 그렇하지만-보편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보편성은 다른 보편성에 의해 증명된다. 개별적인 것을 아무리 많이 끌어모은다 해도 개별적인 것만으로는 보편적인 것, 무한한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인간의 실천은 이러한 특질을 갖고 있으며 그 본서에 보편성이 내포되어 있다.
레닌이 말한 바와 같이 "개념이 실천이라는 의미에 있어서 대자적인 것(being-for-itself)이 될 때 비로소" 인간은 객관적 진리를 '최종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 게다가 보편적인 것은 실천에 있어 사물이나 과정이라는 감성적으로 구체적인 형식을 획득하며, 이 때문에 그것은 "보편성이라는 품위(品位)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현실성이라고 하는 품위도 갖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보편적 성격을 띠는 지식의 객관성은 실천에 있어서 감성적 확실성의 형식을 획득한다. 물론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의 견지에서 보면, 각각의 개념이나 모든 인식행위가 실천으로, 인간의 생산활동과 기타 물질적 활동 가운데에서 직접 검증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증명의 과정은 하나의 지식을 다른 지식으로부터 추론하는 형식으로, 즉 고찰의 논리적 연쇄의 형식으로 진행되며, 이 연쇄의 몇몇 고리가 실천 가운데 들어감으로써 검증된다. 그러나 이것은 실천을 제외하고도 사고의 논리적 장치에 의거한 기준이, 하나의 지식을 다른 지식과 조합(照合)하는 것에 기초한 기준이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논리적 추론의 형식과 법칙은 실천활동의 개개 행위로부터 독립하여 있으나, 이는 그것들이 실천과 전혀 관계가 없다든가 그것에 의해 산출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다양한, 논리학상의 격(格, figure)이 공리라고 하는 의의를 획득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실천활동이 자신의 의식에 이들 격을 수십억 회 반복시켰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실천은 어떤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개개의 계기, 단계, 고리로 구성된 과정이다. 인식이 역사적 시기의 실천을 몇 단계 넘어설 수도 있다. 현재의 실천이 과학에 의해 제기된 이론의 진리성을 확인하기에는 불충분한 경우도 흔히 있다. 이 모두는 실천이라고 하는 기준의 상대성을 말해 준다. 그러나 객관적 진리는 현재의 실천의 기초 위에서만 획인될 수 있기 때문에 동시에 이 기준은 그 본질상 어떠한 인간의 관념을 완전히 확증하거나 논파할 수는 결코 없다. 이 기준은 인간의 지식이 '절대자'로 전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불확정적'이며, 동시에 모든 종류의 관념론이나 불가지론과의 제한성을 발전과정 속에서 극복해 간다. 발전해 가는 실천은 지식으로부터 진실하지 않은 모든 것을 일소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성과를 얻을 수 있게끔 지식을 발전시켜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