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논리

 

논리와 사고 : 소흥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9, page 363 ~ 371.

 

1. 설명적 유비        

2. 역사적 유비         

3. 창조적 유비

 

1. 설명적 유비

유비 (類比) 논리 (analogy) 는 기본적으로 설명의 논리이다. 일상의 경험을 이용하는 설명이므로 가장 편리하고 쉬운 설명의 방법이다. 그러나 과학적 탐구가 추구하는 인과적 설명 또는 원인 설명과는 다르다. 과학적 설명인 원인 설명은 원인 사건과 결과 사건의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발견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연 법칙 또는 인과의 법칙을 전제로 하는 과학적 설명은 연역 논리적 설명이 된다. 따라서 과학적 설명을 '연역적 - 법칙적 설명 (deductive - nomological explanation)' 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설명은 법칙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리고 또 연역 논리적이기 때문에 확실하고 설득력이 있다. 과학의 힘과 과학에 대한 믿음은 이런 과학적 설명의 힘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지배 법칙이 발견되지 못한 현상에 대해서는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과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문제 영역들을 남겨둘 수밖에 없는 한계성이 있다. 과학의 발전이 언젠가는 그런 영역들에 대해서도 과학적 설명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상태에서 쉽게 설명해 보는 것은 대체로 유비적 설명이다. 비유로 설명하거나 유비 관계로 설명해 보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 법칙에 근거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유로 설명하게 된다. 비슷한 상황을 비교하면서 비슷한 원인으로 설명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유비 논리적 설명이 의존하는 유비 관계는 다양하다. 그것은 구조적 유비일 수도 있고, 형태적 유비일 수도 있다. 기능적 유비일 수도 있고, 목적적 유비일 수도 있다. 속성적 유비일 수도 있고, 성향적 유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상태적 유비일 수도 있고, 상황적 유비일 수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유비 관계를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유비 논리적 설명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장 쉬운 설명의 방법이면서 동시에 가장 빗나가기 쉬운 설명 방법이 된다. 유비적 관계에 근거한 설명이 유비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다른 측면들을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유비 (逆類比, disanalogy)' 의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제시된 유비적 설명을 역유비적 관계에까지 확장시켜 볼 때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이 되지 않는 새로운 문제만 파생시키는 결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독교에서는 어린 아이들에게 '하느님 아버지' 에 대한 설명을 이 세상 가정의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로 설명한다. 그러나 영악한 아이들은 자기네 집에서 술에 취하는 아버지와 하느님 아버지의 관계를 물어 본다. 또, 세상의 아버지에게는 부인인 어머니가 옆에 있는데 하느님 아버지에게도 '하느님 어머니' 가 있느냐고 물어 본다.

종교적 경전은 우리가 직접 체험할 수 없는 내세, 즉 죽음 저편의 세상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할 수밖에 없다. 천국과 지옥, 극락과 연옥의 이야기는 모두 유비 논리적 설명이다. 그런데도 천국이나 지옥을 다녀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비유의 이야기이지만 그만큼 설득력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도대체 그러한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지옥 같은 현실 세계 또는 천국 같은 현실 세계를 모형으로 하여, 역시 유비 논리적으로 지옥과 천국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일상 생활의 세계에서 부분적으로 체험하는 '지옥' 이나 '천국' 이 아니라, 지구상의 인류가 다 함께 겪는 자연적 재앙이나 혜택 같은 것이 인류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 남아서 가끔 어떤 사람들의 꿈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유비 논리적 설명은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유비 관계에 대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유비적 설명 자체는 불완전하지만 새로운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사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깨달음의 체험' 에 관한 것이다. 수행의 과정을 통해서 불교의 스님들이 체험하게 되는 '깨달음' 은 비유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스스로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종교적 경지라는 것이다. 언어적 설명을 허용하지 않으며, 다른 어떤 인간적 체험과도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까 불교 경전에서 비유로 설명해 준 것 이상의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깨달음' 의 체험이 어떤 점에서 보편적이며, 어떤 점에서 특수적이냐는 것이다. 분명 '깨달음' 이라고 하는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보편성이 있을 것이다. 불교 경전의 비유는 그른 보편적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별 '깨달음' 의 특수성은 어떤 것일까? 왜 그런 체험을 다른 비유로 설명할 수 없을까? 시대와 문화의 차이가 '깨달음' 의 체험에서 개인별 차이를 나타내는 것일까? 우주와 우리 지구의 자연에 대한 이해가 '깨달음' 의 체험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런 차이가 존재한다면, '깨달음' 에 대한 개인별, 새로운 유비적 설명이 가능할 것이며, 그런 유비적 설명의 다양화는 우리 모두에게 존재 세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을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2. 역사적 유비

역사적 현상은 특이하다. 과거 역사에 대한 설명과 이해가 미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 준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또 현재를 이해하는 데도 과거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할 때가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단절되어 있다면 역사에 대한 관심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역사의 흐름을 시간적 단위로만 구분해서 관련시켜 보는 것만이 아닌 어떤 연속 관계가 있는 것인가? 역사의 법칙이 있는가? 역사의 목표가 있는가? 역사를 지배하는 하느님의 섭리가 있는가?

역사적 변화에도 원인이 있어야 한다. 역사적 설명에도 원인 설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법칙의 지배를 받는 인과 관계의 설명이 아니다. 연역적 - 법칙적 설명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법칙이 역사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역사적 설명은 연역 논리적 설명이 아니다. 만일 연역 논리적 설명이 가능하다면 역사의 미래에 대한 예측도 연역 논리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미래 예측은 불가능하다.

역사는 또한 반복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역사가 반복되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다. 역사의 교훈이 필요한 것도 그런 반복의 가능성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의 반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의 유비 관계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역사적 유비' 는 그런 유비 관계를 통한 역사의 설명과 이해를 위해 필요한 논리라는 뜻이다.

역사 현상을 유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면서 미래 역사에 대한 예측까지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며, 역사에 대한 지혜이다. 그것은 유비 논리적 지혜이며 역사적 · 집단적 체험의 누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적 지혜는 속담으로 전해 내려오며, 전설들로 남아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유비 논리적 사유의 적용이 만들어 낸 '지혜의 말' 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역사적 유비의 산물은 역사 소설이다. 역사적 사실을 문학적으로 해석하고, 모형화하고, 이상화하여 승화시킨 것이 역사 소설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소설이 개인이나 집단이나 국가 사회의 역사를 소개로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일종의 '역사 소설' 이 되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역사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것만이 역사 소설이 아니라, 모든 소설이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소설은 어떤 유비 논리로써 그 주제의 역사를 해석하고 설명하고 이해하느냐를 문제시할 수 있다.

지금은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한 모의 (simulation) 의 방법이 역사적 설명과 이해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미 카오스 (chaos) 현상에 대한 컴퓨터 모의의 방법이 보여 주었듯이, 역사 현상도 카오스 현상처럼, 선형적 방정식이 아닌 비선형적 방정식으로 모형화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역사에는 비약이 있다. 선형적 · 연역적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모형화하여 모의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카오스 현상의 질서와 같은 '역사적 질서' 가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역사의 해석이 다양할 수 있듯이 역사의 모형화가 다양할 수 있으므로 다양한 프로그램화를 통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의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다양한 모의적 설명 중에서 실제 역사에 가장 가까운 모형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비 논리적 사유의 한계 안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므로 결정적 판단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떠한 유비 관계에도 그것에 대한 역유비 관계가 함축되어 있다.

역사적 현상을 하나의 모형으로 고정화하려는 생각은 유비 논리에 의한 모형화의 한계성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미래를 예언하고 점치는 행위보다는 차라리 다양한 역사 소설에서 역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역사적 유비에 대한 솔직한 선택이 될 것이다.

한 가지 관심 문제로 남는 것은 역사의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다. 역사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모의할 수 있다는 것은 역사 자체의 변화 과정이 프로그램에 의거한 것임을 말하는가? 대폭발이 일어난 것도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고, 그 이후의 우주 역사도 프로그램에 의한 것인가? 생명의 출현과 진화의 역사도 프로그램에 의한 것이고, 우리 인간이 등장하여 문화를 창조해 가는 것도 역사의 프로그램을 따라서 일어나는 현상인가? 스피노자 (Baruch Spinoza) 의 '능산적 (能産的)' 자연도 프로그램을 가정했을 때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공 (空) 의 세계에서 색 (色) 의 세계가 출현하게 된 것도 프로그램에 따른 것인가? 인과적 질서, 연기적 질서 및 심미적 질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는가? 법칙적 질서는 프로그램에 의한 질서 중에서 특수한 한 가지 유형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역사의 프로그램을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쉽게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모형화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아니다. 신화에서, 종교에서, 역사 철학에서, 역사 소설에서, 그리고 최근에는 과학의 우주론에서 역사를 프로그램화하고자 해 왔으나 아직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단편적으로, 유비 논리의 한계 안에서 보고 있을 뿐이다.

역사에 대한 유비 논리적 사유의 능력은 우리 인간이 바로 그런 역사의 프로그램이 만들어 낸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아니더라도 다른 더 우수한 종의 생물이 진화되어 나타나면 결국 역사의 프로그램을 더 정확한 유비 논리적 모형으로 모의하고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남겨 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도대체 그런 역사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창조주를 끌어들이더라도 그런 창조주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냐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유비 논리적으로 역사를 설명하고 이해해야 하는 우리 인간의 한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3. 창조적 유비

유비 논리적 사유가 창조 능력에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모방도 유비 논리적 사유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창조적 사유에 해로운 것이 아닐까 염려하게 된다. 표절은 범죄 행위이므로 당연히 나쁜 것이지만, 표절이냐 모방이냐를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모방의 내용이 표절 부분을 포함하기 때문에 모방도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인간의 학습은 모방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다. 모방적인 학습 과정을 거쳐서 창조적인 작업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방에서의 유비 관계와 창작에서의 유비 관계에 차이점이 있어야 한다.

왜 어떤 사람은 전문 예술가가 되어서도 남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는가? 모방적인 유비 관계에서 창조적인 유비 관계로의 사유 방식 또는 사유 능력의 전환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유비 논리에서의 이러한 사유 능력의 성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좋은 유비를 들 수 있는 것은 유비 논리적인 능력이다. 그런데 유비 논리적 설명에 대해서 언제나 역유비 관계를 생각해 내는 것도 또 다른 유비 논리적 능력이다. 서로 비슷한 측면을 보면서도 언제나 서로 다른 측면도 함께 볼 수 있는 능력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도 있지만, 대부분의 창작은 기존의 것과 유사하면서도 새로운 구조나 새로운 기능을 더해 주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고안해 내거나 발명해 내는 능력이 그런 것이다. 건축 설계를 비롯하여 다양한 설계를 위한 창작 능력, 또는 고안 능력은 새로운 기능의 고안, 또는 동일한 목적적 기능을 위한 새로운 방법의 기능을 고안하기 위한 능력으로 생각할 때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 는 원리가 적용된다. 이러한 기능적 고안에 적용되는 사유는 유비 논리적 사유이다. 기능주의적 창작이 필요로 하는 고안적 사유 능력이다.

기능주의적 설계와 대비되는 것은 예술주의 또는 심미주의적 설계라고 할 수 있다. 형태가 기능을 따라야 하는 것은 여전히 하나의 원리로 적용되지만, "형태는 새로운 기능을 창조한다 (Form creates new functions)." 는 원리도 예술적 창작에서는 중요하다. 기능이 결정하는 무미건조한 형태의 현대 건축은 매일 그런 건축물을 쳐다보면서 지나다녀야 하는 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일까? 예술적 창작은 형태적 아름다움을 중요시하는 설계이다. 기능적 고안에 비교할 때 형태적 창작은 거의 무한한 가능성을 허용한다고 할 수 있다. 형태적 창작이야말로 창조 능력에 해당한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형태적 창작에도 대부분은 유비 논리적 사유가 적용된다. 인간의 모든 창작은 결국 자연의 모방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이다.

자연의 유비 논리적 창조성은 참으로 신비롭다. 눈송이들이 눈송이로서의 보편적 형태를 갖는 것은 기능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개개의 눈송이들은 서로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형태적 다원화와 개별화를 뜻한다. 기능적으로 말하자면 서로 똑같은 모양을 갖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기계적 반복을 하지 않는다. 자연은 복제를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어항 속의 열대어들을 보고 있노라면 제각기 특이한 '설계' 의 무늬와 색으로 몸을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어떤 의상 디자이너가 그처럼 과감하게 디자인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하는 열대어들이 있다.

진화의 과정은 기능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하는 형태를 말해 준다. 자연은 분명히 비슷한 기능을 위해서는 비슷한 구조나 형태를 선택한다. 이것은 자연의 기능주의적 유비 논리를 말한다. 그런데 형태적인 창조에서 자연은 완전히 자유로운 것 같다. 하지만 거기에도 유비 논리적 가능성을 벗어난 무질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형태적 창조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심미적 질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우리의 예술적 감수성을 확인한다. 자연을 모방하는 학습 과정에서 우리의 유비 논리적 능력을 개발한다. 그런데 우리의 유비 논리적 능력이 자연을 모형화하는 데서 멈추게 되면 자연이 우리에게 나누어 준 창조 능력에는 미치지 못하게 된다.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자연의 창조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었다. 우리 인간의 창조 능력이 그처럼 자연과의 유비적 관계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면서 설명을 요하는 사실이다.

왜 창조적인 작업은 감동을 수반하는가? 왜 어떤 '작품' 은 감동을 주지 못하는가? 왜 기교에 치중하거나 기계적인 '장난' 에서 멈춘 '작품' 에는 감동이 없는가? 감동을 주는 것과 감동을 받는 것은 유비 논리적 관계의 작용이다. 감동의 체험이 사람마다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 그것은 기계적 반복이 아닌 유비 논리적 관계이다. 따라서 창작하는 사람이 체험하는 감동이 그의 작품에서 표현되지 않는 한 감상자의 감동 체험이 가능할 수 없다. 창작자의 감동이라고 하는 영감은 어떻게 가능하는가?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실현되는 유비 논리적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되 누구나 창조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면서 자연은 그런 창조적 작품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의 영감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여해 준 자연의 혜택이며 선물이다. 유비 논리적 사유의 능력이다. 그처럼 고귀한 능력을 모방하거나 기교적인 장난의 수준에 머물게 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배반'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