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상8호(1994년-봄) : 소흥렬 (이화여대 교수 · 철학), 범양사 출판부, Page 6~23
마음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가능성과 한계성 문제는 철학자들을 두입장으로 나누어 놓는다. 마음의 문제는 과학적 방법으로 충분히 대답할 수 없다는 주장과 이를 부정하면서 과학적 탐구방법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주장이 대립되고 있다. 이것은 곡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이 과학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그 한계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에 과감하게 개입하는 새로운 학문 영역이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을 연구하는 공학이며 과학이다 현대과학과 공학의 힘으로 사람의 마음처럼 기능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면 마음의 과학에 관한 논쟁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의 연구는 그러한 야심과 희망으로 시작되었다. 인공 생명을 만듦으로써 생명의 신비가 해결될 수 있듯이 마음과 대등한 인공지능을 만듦으로써 마음의 신비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다.
인공지능이라는 컴퓨터는 현대과학의 기적이라고 할 만큼 놀라운 '진화' 를 거듭해왔다. '제 5세대 컴퓨터' 나 '제6세대 컴퓨터' 는 그러한 진화의 단계가 점점 더 인간의 마음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표현이다. 컴퓨터가 인간의 마음과 대등하게 될 수 있을 것인지, 또는 그것을 능가하는 단계에까지 발전할 수 있을 것인지는 미래의 과학과 공학에 속한 문제다. 이미 어떤 측면의 컴퓨터의 능력과 인간의 능력을 비교하는 일은 양편 모두에 공정치 못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앞으로도 컴퓨터의 개발 방향이 마음의 능력과는 다른 독자적 능력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리라는 예측을 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현단계에서 인공지능인 컴퓨터와 자연지능인 인간의 마음을 대비시켜 보자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특성과 가능성 및 한계성을 자연지능과 비교를 통하여 이해해보자는 뜻이다. 이러한 관심은 인공지능의 과학과 공학의 발전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연지능의 가능성과 한계성에 관한 것이기도 한다. 인공지능의 발달이 자연지능의 영향을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연지능의 진화도 앞으로는 인공지능의 영향을 받게 되리라 예상할 수 있으므로 이와 같은 상호관계의 고찰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인공지능은 과학의 문제이며 공학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철학의 문제다.¹) 인공지능을 철학의 문제로 볼 때 그것은 예술이나 종교, 또는 윤리나 교육의 문제점처럼 철학이 관련되는 모든 문제들에 깊이 영향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요인임을 이해할 수 있다.
컴퓨터는 만능기계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비행기는 자동비행을 할 수 있다. 컴퓨터를 건물의 관리에 이용되면 지능적 건물이 된다. 컴퓨터를 이용한 로봇은 가정집에 침입한 도둑을 추격해서 체포하는 기능까지 한다. 사람이 하던 사무적인 일들, 공장이나 농장에서의 작업들을 컴퓨터 지능이 대신해주고 있다.
여러 가지 용도에 쓰이는 범용 기계나 도구는 많다. 아마 바퀴 달린 도구나 기계를 나열해본다면 무한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바퀴는 범용적인 도구다. 그러나 '만능기계' 라는 말은 컴퓨터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것 같다. 컴퓨터는 인간의 지능이 해낼 수 있는 일들을 대신해내는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컴퓨터를 만능기계라고 하는 것과 컴퓨터의 만능을 사실 그대로 믿는 것은 다르다. 기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에 비한다면 컴퓨터는 만능기계라고 할 만하다. 지능적인 기계라는 것만으로도 놀라움을 준다. 그러나 여기에는 관념적 비약이 따를 수 있으므로 몇 가지 제한이 필요하다.
만능기계는 만능선수와 같다는 것이다. 만능선수는 운동선수로서 여러 가지 경기에 우수함을 보인다는 뜻이다. 만능기계인 컴퓨터도 기계로서 여러 가지 놀라운 능력을 보인다는 뜻이다. 만능선수와 만능인간이 아닌 것처럼 만능기계도 기계의 한계를 벗어나서까지 만능인 것은 아니다. 만능선수에게 예술적 능력까지 기대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만물박사' 라는 말도 자기 전문분야 외에까지 남다른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인간적인 제한성을 무시하고서 하는 말은 아니다.
만능기계로서의 컴퓨터에 있어서 또한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논리적 가능성 또는 이론적 가능성과 실제적 가능성 또는 기계적 가능성 간의 차이다. 이론적 컴퓨터의 능력과 실제적 컴퓨터의 능력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론적 컴퓨터에 대해서는 무한한 계산시간을 전제해서 말할 수 있으나 실제적 컴퓨터에게는 무한한 시간이라는 것이 허용될 수 없다. 무한한 용량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는 가정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한 가정이 된다 따라서 컴퓨터의 능력을 말할 때는 이론적 가능성이나 논리적 가능성이 아니라 어떤 능력의 계산기능을 위한 실현 조건을 구체화해서 말해야 한다.
한 가지 예로서, '지능형 교수 시스템' 의 실현조건을 보자 김진형 교수에 의하면, 지능형 교수 시스템은 "기존의 교수 시스템이 안고 있던 문제점을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해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능형 교수 시스템이 갖추어야 할 네가지 요소를 김진형 교수는 전문가 모듈, 학생모듈, 교육전략 모듈, 및 사용자 인터페이스 모듈로 나누어 제시한다. 이러한 요소들의 충족 가능성 또는 한계성을 엿보기 위해 각 모듈의 기능적 조건을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보자
첫째, 전문가 모듈은 "일반 교수 시스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학습내용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지능형 교수 시스템의 경우에는 미리 고정된 형태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학습할 내용이나 주어진 문제에 대한 풀이과정을 오랜 경험의 선생님이 일련의 추론을 거쳐서 생성해 내는 것과 같은 과정을 시스템에서 제공할 수 있는 요소를 말한다."
둘째, 학생모형 모듈은 지능형 교수 시스템이 "학습자의 수준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학습자의 지식습득 능력, 선호하는 학습방식, 학습태도 등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는 요소다.
셋째, 교육전략 모듈은 "언제 학생에게 가르침을 줄 것인가?" 라든지,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 와 같은 강의방식 및 전략의 문제를 시스템이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런 내용은 대개 교육학 이론이나 현장교사로부터 수집한 경험적 지식을 컴퓨터나 반영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는 것이다.
넷째, 사용자 인터페이스 모듈은 지능형 교수 시스템과 학습자간의 대화방식에 관한 것으로서 시스템을 사용하는 학생은 학습내용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는 초보자일 뿐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대해서도 초보자임을 전제하면서 그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고 그것을 통해 학습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조건이다.²)
이상과 같은 네 가지 지능적 조건을 다 갖춘 컴퓨터 교수 시스템이 실현가능할까? 오랜 경험을 쌓은 스승이 일련의 추론을 거쳐서 창조적으로 가르치는 그 능력을 컴퓨터가 대신할 수 있을까? 어떤 특정 스승의 능력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입력하여 그 스승의 가르침을 모의하게 할 수 있다. 일단 프로그램화된 것은 복제될 수 있으므로 그 스승의 가르침을 언제 어디서나 모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스승이 살아서 계속 가르친다면 프로그램화된 그의 가르침과 그가 직접 가르치는 것은 같을 수가 없다. 이것은 일란성 쌍둥이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게 되면 서로 다르게 되는 것과도 다르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스스로 적응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이 성장하면서 적응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기계적인 것과 생물적인 것의 차이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인공지능과 자연지능, 즉 컴퓨터와 인간의 두뇌는 지능의 측면에서 대등하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서로 비교될 수 있는 종류의 지능에 대해서는 컴퓨터가 더 우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서로 비교될 수 없는 종류의 지능이 있다는데 있다. 인공지능은 인공물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놀라움은 만능선수의 '만능' 이 놀라운 것과 같다. 만능기계인 컴퓨터는 기계로서의 만능이지 생명체로서의 만능이 아니다. 인공지능과 자연지능은 지능의 차이만이 아니라 인공물과 생명체로서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러한 차이점을 간과함으로써 우리는 컴퓨터의 능력에 대해 과신할 수 있다. 우리의 추측이나 기대가 비약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만능선수에게 예술적인 능력까지 기대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고 한 성철 큰스님의 말이 여기서도 생각난다. "기계는 기계요, 마음은 마음이다."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이요, 자연지능은 자연지능이다."
환원주의적으로 생각하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을 만들고 잇는 기본원소들과 물을 만들고 있는 기본원소들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산과 물의 구별이 없어져 버린다. 모든 것은 에너지 상태로까지 환원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무런 형태가 없는 에너지 상태로까지 환원하여 생각해보면 산과 물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우주의 역사는 에너지 상태로만 머물지 않고 형태가 있는 삼라만상을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산은 산이고, 물이 물이다. 그런데 환원주의자들은 마음은 마음이 아니고 두뇌일 뿐이라고 한다. 환원주의를 철저하게 작용한다면, 두뇌도 두뇌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두뇌가 두뇌라면, 마음은 마음이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팔은 팔이 아니고 앞다리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앞다리와 팔은 다르다. 팔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앞다리와 구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진화의 결과다. 마음도 진화의 산물이다. 두뇌의 기능이 더 진화하여 마음이 된 것이다. 앞다리의 기능이 진화하여 팔이 된 것과 같다.
인공지능과 자연지능의 비교에서도 진화의 요인은 중요하다. 자연지능은 진화된 것이고, 인공지능은 설계된 것이다. 설계된 인공지능이 발전해 가는 과정을 일종의 '진화' 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뜻에서' 기계의 진화'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생명체의 진화를 인공물의 설계와 구별하는 것이 옳다.
민스키 (M. Minsky) 교수는 설계된 로봇이 진화된 인간보다 더 우수한 지능을 가진 의식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3) 그런 로봇이 외계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주공간에서 별들을 오가며 기능할 수 있는 외계인으로서의 로봇이 우리 인간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 지구상의 생태계에 적응하며 생존해가도록 진화되었기 때문에 그런 우주공간에서는 생존할 수 없거나, 아주 불리한 존재 (생명체) 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면, 이 지구상에서 생존하는 생명체와 같은 기능을 하는 로봇을 설계하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설계의 산물이 진화의 산물을 모방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다.
로봇공학은 현재 곤충의 기능 정도를 모의할 수 있는 로봇을 설계하는 단계에 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공곤충 (Artificial Insect)' 이라는 표현까지 쓴다고 한다.4) 그러나 로봇과 곤충의 기능적 비교에서 분명히 한계가 있다. 제한된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몇 가지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는 곤충과 로봇이 비슷하다고 하겠지만, 인공물인 로봇과 생명체인 곤충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기능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진화의 고리 속에 존재하는 곤충을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곤충은 그것보다 더 아래 차원의 진화단계에 의존하면서 존재하게 된 것이며, 또한 그것보다 더 높은 단계의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고리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단계의 로봇을 '곤충 로봇' 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탕으로 하는 이전 단계의 로봇은 어떤 것인가? 또 앞으로 개발될 로봇은 어떤 것들일까? 로봇의 '진화'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생명체의 진화와 같은 단계를 형성할 수가 없다. '로봇 잠수함' 은 물고기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로봇 비행기' 는 새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로봇 인간' 도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로봇의 기능은 생명체들의 기능처럼 진화의 역사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체는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대체적으로 그것이 진화해온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위차원의 기능은 언제나 하위차원의 기능에 의존하는 관계가 유지된다. 설계된 로봇에게는 이런 의존관계가 필요 없다. 어떤 한 차원의 기능을 해낼 수 있도록 기계가 설계되는 것이다. 그 기계는 다른 하위차원의 기능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팔을 앞다리처럼 해서 기어 다닐 수 있다. 그러나 로봇의 팔은 팔의 기능만 하도록 설계될 뿐이지 앞다리의 기능까지 하게 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장에 해당하는 기능을 하는 기관이 로봇에게도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심장처럼 검정적 기능에까지 개입되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감정적 기능을 하는 로봇을 설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심장의 기능이 아닌 다른 어떤 기능구조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로봇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도 인공물과 생명체의 차이, 그리고 설계의 산물과 진화의 산물이 갖는 차이점 때문에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두뇌의 기능에 의존하고, 두뇌는 신체의 기능에 의존한다. 로봇의 마음이 기능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기체다. 또한, 우리 인간의 마음은 다른 동물의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진화한 것이다. 그러나 로봇의 마음인 컴퓨터는 인간의 마음을 모의하기 위하여 설계된 것이다. 인공지능은 자연지능인 우리 마음의 특정한 기능을 모의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그리고 그 특정 기능의 모의에서 제외된 마음의 기능들이 오히려 자연지능과 인공지능의 차이를 말해준다.
왜 인간의 마음이 진화했을까? 어떻게 인간의 마음이 진화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과학적 설명을 필요로 하는 문제로, 생명의 출현이 과학적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문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진화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인간사회와 문화를 보면서 마음의 기능을 생각해볼 수 있다. 마음의 기능이 진화되지 않았더라면 인간사회와 인간문화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동물의 마음은 그런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다른 동물의 마음과 구별시키는 가장 특징적 능력은 사회적 기능을 하면서 문화를 창조해가는 기능이다. 다른 동물은 인간사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의 문화창조와 같은 창조적 기능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합리적 동물' 이라는 말로만 구별한다는 것은 부족하다. '자율적 동물' 그리고 '창조적 동물' 이라는 말들이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로봇의 사회라는 것이 가능할까? 로봇의 문화라는 것이 가능할까? 이것은 컴퓨터를 이용하는 우리 문화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로봇들의 독자적 사회와 문화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로봇들은 노예와 대비되기도 한다. 그래서 노예의 반란과 같은 로봇의 반란을 상상하게 한다. 하지만 로봇은 노예가 아니다. 노예가 없는 사회이므로 로봇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로봇은 반란을 할 수 없는 기계로 설계된다. '만능로봇' 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기능적으로 제한된 영역을 벗어날 수 없게 설계된다. 로봇의 자율성은 노예의 자율성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로봇의 창의성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렇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창의성에 비교될 수가 없다. 생명체의 자율성과 창의성은 진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로봇은 그러한 기능의 일부를 모의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노예는 자율성과 창의성을 제도적 · 강압적으로 제한당한 사람이지만 로봇은 설계상으로 그런 기능을 제한받은 기계다. 그러므로 노예는 언제나 그런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반란할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을 갖고 있지만 로봇은 그런 능력을 부여받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불가능성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컴퓨터는 이름 그대로 계산기다. 그런데 컴퓨터가 인간의 마음과 같다고 한다면 마음이란 계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인공지능인 컴퓨터가 계산능력을 가진 기계이듯이 인간의 지능도 계산능력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컴퓨터의 계산능력이 놀라운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더 개발되어간다. 인간의 계산능력을 모의하도록 만들어진 컴퓨터가 점점 더 인간의 능력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지능을 계산능력으로만 보는 것은 속단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능력을 지나치게 축소시켜서 생각하는 오류가 개입되어 있다. 아마 다음과 같은 축소과정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즉 합리적 동물임을 자부하는 우리 인간의 지능적 특징은 이성적 능력이며, 이성적 능력은 논리적 추리 능력을 말한다. 논리적 추리의 기본은 연역적 추리이므로 만일 연역적 추리를 기계적 계산으로 해낼 수 있는 인공지능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곧 인간의 지능도 기본적으로는 계산능력에 불과함을 말해준다.
이러한 축소적 사유가 왜 문제되는가? 인간의 사유능력을 합리적 사유로만 제한하는 것부터 문제가 된다. 직관적 사유능력이라든지 상상력 같은 것을 제외할 수 없다. 인간 사유의 창조력을 합리적 사유로 대신할 수가 없다. 또한, 합리적 사유를 논리적 추리와 동일시하는 축소도 문제가 된다. '논리적' 이라는 말은 형식화, 체계화 또는 도식화된 추리를 자칭한다. 그러나 그런 논리적 유형의 이름이 붙지 않은 합리적 사유의 종류들도 있다. 그러므로 '합리성' 의 기준을 논리적 유형에 따라서 결정한다는 것은 축소화를 불가피하게 한다. 나아가서 논리적 추리를 연역적 추리로 축소화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연역적 추리가 가장 강력한 추리임은 사실이지만 귀납적 추리나 유추적 추리 같은 비연역적 추리도 그 유용성으로 말하자면 연역적 추리에 못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인간의 사유능력을 계산능력으로 축소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이 사유 자체만 하더라도 계산능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연역적 추리를 기본으로 하는 계산능력에는 축소적 사유가 포함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비약적 사유도 포함될 수 없다.
연역논리적 계산은 단계적으로, 그리고 기계적 방법으로 그 논리체계에 포함될 수 있는 참된 명제들 또는 논리식을 유도해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그 체계에 포함될 수 없는 명제, 즉 그 체계 안에서는 참된 명제가 될 수 없는 것은 연역적으로 유도해낼 수 없다. 그런데 축소적 사유나 비약적 사유는 연역적 추리가 아니므로 그 체계에는 포함될 수 없는 명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거짓 믿음을 생각해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연역논리적인 오류를 범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연역논리적 계산능력에 제한된 사유에서는 비약적 사유가 나올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마음의 사유능력은 계산능력으로 축소될 수 없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계산능력과 자연지능의 사유능력은 동일시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연역논리적 계산의 방법으로 비약적 사유를 모의할 수 조차 없다는 뜻은 아니다. 컴퓨터 자체가 비약적인 사유를 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비약적 사유를 흉내낼 수는 없다. 하지만 비약적 사유를 연역적 계산의 방법에 포함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공지능인 기계가 연역적 계산도 하면서, 필요에 따라서는 비연역적 추리도 하는 다중적 기능을 할 수 있는가? 그러한 기계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 설계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기계의 개념을 바꾸어놓게 되거나, 아니면 '기계' 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지칭하게 될 것이다. 현재까지의 인공지능 연구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약적 진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역논리적 계산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까지의 인공지능 연구의 결실을 반성해보는 박승수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 어쩌면, (인공지능 연구에서) 우리가 얻은 가장 큰 결실은 그동안 당연한 여겨왔던 인간의 여러 가지 형태의 사고능력에 대하여 그 위대함과 오묘함을 재발견했다는 것, 그리고 이를 (모의하는 인공기계를) 만들어보려는 인간능력의 보잘 것 없음에 대한 뼈저린 깨달음인지도 모른다. "5)
인간의 사유능력을 너무 단순화시키고 너무 축소화시킨 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컴퓨터의 계산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하여 그것이 곧 인간의 사유능력인 것처럼 착각한 것이 문제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착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인간의 사유능력을 계산능력으로 축소할 수 없음을 입증해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을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사유능력과 계산능력의 차이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 사유의 위대함과 오묘함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함으로써 그것을 닮고자 하는 인공지능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개발되어야 할지를 문제삼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진화의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도대체 인간의 사유능력이 왜, 어떻게 진화했을까? 여기서도 '어떻게' 에 대한 답은 과학적 탐구에 맡겨둘 수밖에 없다. '왜'에 대한 해답은 철학적으로 시도해 볼 수 있다.
인간의 사유능력, 그 중에서도 특히 다양한 추리능력은 왜 진화했을까? 추리의 기능은 지식의 확장을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경험된 내용의 지식보다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추리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확장은 인간의 사유기능을 위해 끊임없이 요청되는 것이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무엇을 예측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무엇을 목적으로 할 수 있는가? 무엇을 수단으로 할 수 있는가?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런 모든 사유기능에 필요한 것은 지식이다. 경험된 내용의 범위를 넘어서는 지식이다.
추리로써 확장된 지식은 신빙성이 있어야 하므로 추리의 방식이 문제가 된다. '논리' 라는 말은 추리의 방식을 형식화 및 체계화하여 그 신빙성을 보장한다는 뜻이다. 연역적 추리는 이런 뜻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추리의 방식이다. 그래서 필연성을 제공하는 추리라고도 하고 진리를 보장해주는 추리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복되는 현상 또는 규칙적인 현상의 관계에 대한 일반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가장 신빙성 있는 추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외 없이 반복되는 보편적 현상은 제한되어 있다.
보편적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되는 물리적 세계의 현상들도 전적으로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질서 정연한 물리세계의 현상이 있는가 하면, 혼돈적인 물리세계의 현상도 있다. 그리고 물리적 차원을 넘어서 화학적 차원, 생물적 차원, 의식적 차원으로 올라가면 혼돈의 요소가 점점 더 커진다.
우리의 추리능력이 감당해야 할 현상은 참으로 다양하다. 신빙성 있는 지식의 확장을 보장하기에는 너무나 변화무쌍한 현상들이 많다. 하지만 인간의 사유능력은 그러한 상황조건에 순응하면서 생존해가도록 진화되었고, 또 진화되어가고 있으므로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오묘하고 위대한 인간의 사유능력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도전에 대한 끊임없는 응전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은 끝없이 시행착오를 계속하는 유한한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착각을 하고, 오판을 하고, 잘못 선택하고, 오류를 범하고,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유능력이 유한한 탓도 있지만, 상황의 변화와 종류의 폭이 너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처럼 다양한 상황의 조건을 몇 가지 유형의 현상으로 나누어보고, 거기에 적용되는 인간의 추리력을 비교해보면 그것의 한계성과 가능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높은 확률로 반복되는 보편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귀납적 일반화를 할 수 있고, 그 결과로 연역적 추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주 낮은 확률로 나타나는 분포적 현상에 대해서는 오랜 체험을 통해서 분포적 일반화를 할 수밖에 없다. 노련한 스승이나 운동선수의 지혜와 같은 것이 생겨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지혜라는 것도 그런 것이다. 보편법칙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을 분포적 현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지혜나 직관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언제나 신빙성의 문제가 따를 수밖에 없다. 항상 자체가 그것을 불가피하게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현상은 역사적으로 성장, 발전하는 것이다. 단계적 변화, 질적인 비약을 거치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변증법적 사유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지적을 더하게 하지만, 불확실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목적지향적 현상도 생물의 세계, 특히 인간사회에서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짐작해야만 그것에 따른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 또 행동을 통하여 그것이 목적하는 바도 추측해야 한다. 이러한 목적과 수단의 관계는 실천논리적 추리로써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불확실성은 제거될 수 없다.
또 한 가지 중요한 현상은 수반적 현상이다. 예술작품의 효과 같은 것은 수반적으로 일어나는 체험이다. 작가가 의도하는 바와 감상자가 체험하는 바가 일치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종교적 감동도 그렇고, 철학적 이해도 그렇다. 수반적 현상으로서의 결과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수반관계에 대한 추리는 아직 적절한 이름조차 없을 정도로 정리되지 못한 영역이지만, 그것의 중요성은 부정할 수 없다. '수반적 추리', '환원적 추리', '귀추법적 추리' 등이 그러한 추리의 이름으로 제안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몇 가지 현상과 그것에 해당되는 추리력을 분류해보면 반복적 현상에 대한 연역적 추리 외에 다른 추리들은 모두 불확실성을 배제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추리임을 알 수 있다.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비약적 결론을 불가피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리력으로 확장된 지식이란 불가피하게 신빙성이 문제가 되는 불확실한 지식일 수밖에 없다. 거짓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추리력으로 확장된 우리의 지식내용은 거짓 믿음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약적이거나 축소적인 인간의 사유기능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상황조건에 적응하면서 그렇게 진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인공지능인 컴퓨터는 어떠한가? 비연역적 추리를 할 수 있는 컴퓨터가 가능한가? 필요한가? 컴퓨터의 계산능력이 인간의 추리능력과 같은 것으로 확장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기계라는 한계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인가? 자연이 오랜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낸 것을 인공물이 그대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인가? 인공지능과 자연지능의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차이점이 가로막고 있는가?
계산의 논리는 연역논리이지만, 사유의 논리는 연역과 비연역, 그리고 논리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사유방식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논리' 라는 말을 넓게 쓰면 사유능력에 포함되는 이름이 붙은 논리와 이름이 없는 논리가 모두 사유방식의 논리 또는 추리의 일종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컴퓨터는 인간의 추리능력 중에서 연역적 추리를 계산의 방식으로 모의해내는 것이다. 따라서 사유능력의 한 부분에 해당하는 능력인 계산능력만으로는 인간과 같은 사유를 한다고 할 수 없다. 다른 동물들도 그들의 사유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사회에 참여할 수 없듯이 컴퓨터도 그 제한성의 측면은 다르지만 역시 사유능력의 제한 때문에 인간사회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컴퓨터의 능력이 놀랍기는 하지만 만능기계인 컴퓨터도 역시 기계일 뿐이다. 로봇이 노예의 일을 다 해낸다고 할지라도 로봇은 여전히 로봇일 뿐이지 노예가 아니다. 만일 사유능력을 갖는 로봇 , 나아가서 사유기능과 감정기능까지 할 수 있는 로봇이 가능하다면 그때에는 로봇도 인간사회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로봇' 이라는 이름을 벗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의 사유기능과 감정기능은 로봇의 기계적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능력이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우리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되거나 로봇처럼 되고 만다. 동물이 되든 로봇이 되든 그것은 인간이 그 고유의 마음을 상실하고 전락하는 상태를 말하므로 그런 사람은 인간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인간사회와 인간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조건이다. 다른 동물들도 그들대로의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컴퓨터에게도 그것대로의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컴퓨터의 마음은 인간 마음의 한 부분을 모의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동물의 마음은 인간 마음으로 진화되기 이전 단계의 마음인 것이다.
동물들 중에는 사회를 형성하여 살아가는 것들이 있다. 그들에게도 사회의식이나 집단의식 같은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본능의 힘으로 집단생활을 영위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그들의 사회의식이 의문시되는 것처럼 동물들의 집단생활에는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아마 이런 것은 의식의 능력과 창조의 능력이 제한된 데서 나타나는 결과일 것이다. 인간의 사회의식이나 창조능력에는 비교가 될 수 없는 동물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도 동물의 마음과 같은 수준의 마음을 진화의 이전 단계로 갖고 있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된 것은 마음이 새로운 단계로 비약적인 진화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 마음의 특징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의 마음은 관념의 세계라고 한다. 그것은 언어나 비언어적 기호로 표상된 세계다. 그것은 경험의 내용을 개념화 또는 추상화하여 표상하는 기호의 세계 또는 관념의 세계다. 앞서 논의한 사유기능에서의 비약적 추리도 이러한 개념화나 추상화를 필요로 한다. 개념화나 추상화 자체가 일종의 비약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념의 세계는 이러한 추상화와 비약적 추리를 통하여 만들어지는 허구적 세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경험의 내용을 넘어서 허구적인 관념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거짓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상상의 세계를 그려볼 수 있다. 환상에 사로잡힐 수 있다. 꿈의 상태로 빠져들어갈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의 세계는 일종의 가상현실 (virtual reality)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만들어내는 가상현실과는 다르다. 컴퓨터의 가상현실은 "자연환경이 제공하는 감각신호를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부터 인위적으로 차단시키고, 컴퓨터를 이용한 인공적인 감각신호를 생성, 대체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컴퓨터에 내재하는 추상환경에 몰입하도록 " 6) 한 것이다. 마음의 가상현실은 자연환경이 제공하는 감각신호를 차단하지 않으면서, 경험의 내용을 넘어서 추상화한 관념의 세계다. 한편, 컴퓨터에 내재하는 추상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므로 마음의 가상현실이 컴퓨터의 가상현실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마음 속에서 구상된 가상현실이 컴퓨터의 가상현실로 재생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컴퓨터의 놀라움은 역시 그러한 가상현실을 재생할 수 있는 능력에 있으며, 재생과정에서 다양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컴퓨터의 가상현실은 컴퓨터 예술과, 나아가서 컴퓨터 문화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성급한 결론이나 비약적인 추측은 금물이다. 예술은 본래 마음의 가상현실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예술에서는 심미적 가치를 갖는 가상현실의 창조가 중요하다. 모방적인 가상현실이 아니라, 창조적 가상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컴퓨터의 가상현실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예술가가 창조하는 가상현실을 표현해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컴퓨터의 가상현실은 또 하나의 예술 창작의 도구일 뿐이다.
컴퓨터 문화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와 같은 구별을 해야 한다. 중국문화라든지, 불교문화, 또는 여성문화를 이야기하듯이 컴퓨터 문화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컴퓨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문화를 스스로 창조해내지 못한다. 컴퓨터는 문화의 내용을 결정하지 못한다. 컴퓨터 문화는 인간문화의 새로운 표현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컴퓨터를 이용한 문화창조를 뜻하는 것이다. 문화적 표현수단이 새롭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단지, 그것은 표현수단이면서 또한 인간의 표현능력과 나아가서는 창작능력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도구이므로 새로운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언어적 개념화, 추상화, 기호화의 표상방법이 인간의 사유능력을 비약적으로 진화하게 했으리라고 생각되듯이 컴퓨터를 이용하는 인간의 창조능력도 비약적으로 발전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컴퓨터 문화는 인간문화와 대립되거나, 그것으로부터 독립되거나, 그것을 대치할 새로운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문화 그 자체가 새로운 차원으로,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공지능인 컴퓨터는 자연지능인 인간의 마음을 닮아가면서 마음의 일을 도와주고 대신해주는 일을 하게 된다. 생산적인 노동이나 사무적인 업무를 대신해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문화적 창조작업에 속하는 과학, 예술, 종교, 철학에서까지 인공지능의 도움이 가능하게 된다는 뜻이다.
컴퓨터에 의한 모의의 방법은 과학적 탐구에서의 실험이나 증명을 대신해주는 방법으로 등장하고 있다. 컴퓨터 모의의 방법이 아니면 실험이나 검증이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탐구영역들이 개발되고 있다. 예컨대, 혼돈이론의 영역은 컴퓨터 모의의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새롭게 개발되어가는 중요한 탐구영역이다.
컴퓨터를 이용한 예술 창작과 표현, 그리고 감상의 방법은 예술의 가능세계를 그만큼 더 넓혀준다. 창작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그만큼 모방과 반복과 복제의 가능성도 높아졌기 때문에 예술을 타락시킬 위험성도 있지만, 창작은 컴퓨터가 아닌 인간의 마음이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컴퓨터가 비약할 수 없는 계산의 논리에 제한되어 있는 한 스스로 창작할 수 없으며, 그 반면 만일 창조적 사유기능을 하는 인공지능이 만들어진다면 컴퓨터 문화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컴퓨터와 가상현실은 종교적 분위기를 만들어줄 수 있다. 종교적 체험이나 수행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다. 예배의 분위기, 명상의 분위기, 기도의 분위기, 종교적 의식화를 위한 분위기 등을 효과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가 상업화되어 타락할 수 있는 위험성이다. 종교가 대중문화의 한 유형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깨달음과 믿음을 주는 종교가 아니라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마약이 되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컴퓨터의 등장이 철학적 관심사가 되는 측면은 의식의 확장을 위한 도움이다. 윤리와 이념에서 문제시되는 보편적 의식이나 사회적 마음의 실현에 인공지능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말하자면, 인공지능이 자연지능과 연결되어 하나의 유기적 구조물로 가능할 수 있다면 인간의 의식이 인류사회적으로, 또는 생태계적으로나 우주적으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식의 제한성 때문에 나타나는 인종주의나 지역주의 같은 배타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의식의 진화가 가능할 것인가?
이처럼 인공지능의 등장을 인간문화의 창조과정과 관련시켜 생각해 볼 때 인공지능의 '진화' 를 추진하는 인간의 노력은 문화적 창조를 추진해가는 지향성의 발로로 볼 수밖에 없다. 왜 인간의 자연지능은 스스로를 모의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해가는가? 이것은 과학에서, 예술에서, 종교에서, 철학에서 창조적 문화를 발전 시켜가는 인간의 지향성에 어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가? 이것은 인공지능에 관한 문화철학적 관심문제라고 할 수 있다.7)
인공지능의 발상 자체가 본래 철학적 관심에서 나왔듯이, 그것은 이제 공학이나 과학의 관심문제만이 아닌 철학의 문제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서도 공학이나 과학만이 책임질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문화적 문제이며 문화적 충격이나 역기능의 문제를 심화할 수 있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다. 인류문화에 마지막 도전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파괴적 요소를 갖고 있다. 자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어낸 하느님이 그 인간을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하고, 마침내는 자기의 독생자를 인간 역사 속으로 보내어 십자가를 지게 하는 드라마를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인공지능을 만들어낸 우리 인간도 그 인공지능때문에 인간문화가 위협을 받는 드라마를 감당해내야 할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드라마의 주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드라마에서 우리 인간이 맡은 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지능으로 진화한 우리의 마음만이 해낼 수 있는 역이기 때문이다.
주
1) 이초식 교수는 《인공지능의 철학》 (고려대 출판부, 1993) 이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인공지능의 철학적 배경, 인공지능의 철학적 비판 및 인공지능의 철학적 구성문제를 다루면서 인공지능과 철학을 접목시키는 새롭고 과감한 시도를 한다.
2) 김진형, <지식기반 프로그래밍 언어 교수 시스템의 연구현황>,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지능연구센터 소식》, 8 , 1993년 9월 , p. 6.
3) Marvin Minsky, "Alienable Right," Discover, July, 1993, pp. 24 ~ 26.
4) Randall D. Beer et. al., "A Biological Perspective on Autonomous Agent Design," Pattie Maes ed., Designing Autonomous Agents (MIT Press, 1990), pp. 169 ~ 186.
5) 박승수, <인공지능과 철학의 이중 협주곡>, 《철학과 현실》, 1993년 가을, p. 262.
6) 원광연, <Virtual Reality 연구현황>, 《한국과학기술원 이공지능연구센터 소식》, 8, 1993년 9월, p. 11.
7) 소홍렬, 《자연주의적 유신론》(서광사, 1992), pp. 42 ~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