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 · 언어 · 정의

 

 

기호논리학 : 소광희 지음, 경문사, 1985, Page 1~11

 

1. 논리란 무엇인가?

2. 언어의 기능

3. 오류

   (1) 언어적 오류

   (2) 자료적 오류

4. 정의

   (1) 정의의 의의

   (2) 개념 (concept)

   (3) 내포 (intension) 와 외연 (extension)

   (4) 정의의 목적과 유형

   (5) 논리적 정의

   (6) 정의의 규칙

 

 

1. 논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상적으로 논리(logic)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 책에는 논리의 일관성이 없다" 느니 "자네의 이야기는 대단히 논리정연하다" 느니 하여, 마치 논리란 말이 '산'이나 '강', 또는 '정치'나 '경제'라는 말처럼 자명하여, 까다롭게 따질 필요가 없는 낱말로 알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논리란 말은 대단히 애매해서, 도대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다고 생각하는 수도 있다. 과연 논리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논리란 추론이다. A군이 "소나기가 쏟아지겠는데, 그렇게 되면 오늘의 야구시합은 취소되겠지" 한다. 이 말을 듣고 있던 B군이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서 "소나기가 닥쳐 오는 걸" 한다. A군은 "그럼 야구시합은 취소되겠군"한다. 이것을 정리하면,

 

 

로 된다. 이것이 추론 이다. 논리가 추론이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늘 행하는 사고의 실질적 활동이요, 또 행동을 결정하는 인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추론이라고 해서 다 타당한 것은 아니다. 비록 외양은 추론형식을 갖추었지만 타당하지 못한 추론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기에 추론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해야 한다. 그 추론의 타당성 검증을 기능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추론을 형식화하고, 정확하고 엄격하게 하기 위하여 기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논리는 형식논리라 불리우고, 특히 기호를 사용한 논리를 기호논리(symbolic logic)라고 한다. 논리를 추론의 타당성의 검증이라고 한다면 논리는 일종의 기술(technique)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논리는 한갓된 기술 이상의 것이다.

 

지금까지 논리학(logic)은 사고의 과학으로 알려져 왔다. 다시 말하면 논리학은 사고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과학, 사고의 원리를 다루는 과학 (모든 과학은 사고의 산물이거니와 논리학은 바로 그 사고를 원리의 면에서 다루니까 그것은 학문의 학문이다) 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논리학의 특수성이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사고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과학에는 논리학만이 아니라 심리학 도 있다. 심리학과 논리학은 어떻게 다른가? 심리학은 넓은 의미의 사고 즉 상상 · 표상 · 기억 · 자각 등이 생기는 여러 심리현상의 법칙, 사고와 사고와의 연결법칙, 사고와 행동과의 관계양상 등을 주로 그 과정의 면에서 연구하는 데 반하여, 논리학은 대상에 관계없이 사고를 그 개별성에서가 아니라 보편성에 있어서, 실질적 내용의 면에서가 아니라 형식의 면에서, 생성과정에서가 아니라 형성된 명제의 진·위의 판별에서 다룬다.

 

논리학은 명제의 진·위를 형식의 면에서 검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실질과학이 아니라 형식과학이다. 뿐만 아니라 논리학은 '추론의 학'이다. 추론은 하나의 언표된 명제로부터 다른 새로운 명제를, 즉 한 명제를 전제로 하여 결론이 되는 명제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진행되는 심리현상의 변화과정과 다르다. 심리현상에서는 지금 사랑하는 연인을 공상하다가 다음 순간에는 결혼을 반대할 아버지를 상상할 수도 있고,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논리학 시험을 걱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논리학은 그러한 상상을 대상으로 하지도 않을뿐더러 그와 같은 사고의 변화과정을 다루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리학의 대상이다. 논리학은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된 명제의 진·위를 따지고 명제와 명제를 연결하는 추론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탐구한다. 또 심리학은 심리현상을 어떤 자극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기술하기 위하여 몰모트나 쥐를 가지고 실험하는, 말하자면 실험과학 또는 경험과학의 입장을 취하지만 논리학은 실험도 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도대체 경험과학이 아니라 형식과학이다.

 

순수한 형식과학으로서 수학이 있거니와 논리학과 수학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Leibniz 이후 논리학은 언어가 빚는 여러 가지 혼란과 오류에서 탈피하여 명실공히 보편과학이 되기 위하여 점차 수학처럼 기호화하기에 이르렀고, 그리하여 현대의 논리학을 수리논리학(mathematical logic) 이라고도 한다. 논리학은 순수 형식과학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Aristoteles 이래 논리학은 모든 학문연구를 위한 필수 불가결의 기초 내지 도구 즉 organon(기관)으로서 공인되어 왔다. 수학도 한편으로는 순수과학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도구로서 이용되는 과학이다. 그러나 수학은 주로 양의 영역에서 양을 (질에 대해서는 극히 추상적으로만) 연구하는 추상적 특수과학인데 반하여 논리학은 그보다 훨씬 보편적이고 구체적이다. 논리학이 엄격성과 기능성을 기하기 위하여 기호화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논리학의 수학화는 아니다. 오히려 학문의 체계상, 수학은 논리학으로 환원되어야 마땅하다. 수학은 논리학의 기초 위에서 성립되는한 분과과학이요, 논리학은 그것을 포괄하는 보편과학이다.

 

2. 언어의 기능

 

논리학은 시종일관 언어에 의한 과학이다. 언어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고, 그 내용도 복잡다단하므로 언어의 문제는 인간문제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어서, 옛부터 형이상학·언어학·논리학·사회학·심리학 내지 수사학 등 각 분야의 연구대상이 되어 왔다. 논리학에 있어서 언어는 말이나 문장으로 언표된 것을 가리킨다. 교통신호등이 인간의 행위를 규제할 수 있고, 화를 낸 표정이 상대방을 당혹하게 하는 따위는 언표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언어로 언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학의 관심에서는 제외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언어는 대체로 세 가지의 기본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첫째, 언어는 사람이 자기의 의견이나 심정을 표현하는 기능(expressive function)을 가지고 있다. 표현은 내면적인 것의 표명이거니와, 이때 내면적인 것이 정서·신념·태도 등일 경우는 대개 시나 경탄이 되기도 한다.

 

 

는 말은 자기 신체의 어떤 상태를 표현한 것이요, 어떤 소녀가 여름날 뜰에 핀 해바라기를 보고,

 

 

라고 읊는다면 소녀 자신이 바로 해바라기가 된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경우와 전달할 필요가 없는 경우로 다시 나누어 볼 수 있다. 혼자서 중얼거리거나 남에게 보일 필요가 없는 시를 쓰거나 기도할 때의 언어는 자기 자신의 태도 및 심정의 표현일 수는 있으나, 그 태도 및 심정을 남에게까지 환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목사가 설교를 한다든가, 애인에게 시를 바칠 경우 언어는 화자의 태도나 심정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화자와 같은 태도 및 심정이 되도록 환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언어가 잘 표현되었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그 언어는 충분히 기능을 발휘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로 지시기능(directive function)이다. 일방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예컨대

 

 

하는 따위의 명령의 경우도 있겠는데, 언어의 이러한 기능을 말한다.

 

 

할 때, '닫혀 있는 문'을 닫으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런 경우의 명령은 불합리하다(unreasonable) 고 한다. 반대로 '열려 있는 문'을 닫으라고 했다면 그 명령은 합리적(reasonable) 이다. 일방적인 명령이니만큼 그 명령에 객관적인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 합리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충분히 따져 볼 만하다. 그리하여 일부의 학자들 사이에는 명령의 논리(logic of imperatives)를 발전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논리학의 본질은 진·위의 판별에 있기 때문에, 명령의 논리는 특수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기능은 표현하고 전달하되 보고하는 기능(informative function)이다. 그것은

 

 

과 같이 객관성을 띤 과학적 언어가 갖는 기능이다. 그것은 지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보고형식이라 하더라도

 

 

하는 등의 언어는 일종의 인사 즉 의례적 언어이기 때문에 논리학의 본무인 진·위의 판별과는 무관한 것이요,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과도 무관하다. 지식은 객관적 실증성과 보편성을 갖추어야 한다. 지식은 개인의 정서나 신념 태도 등에 대해서는 무관한 몰개인적, 보편적인 것이다. 무지개를 보고,

 

 

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학적 언어가 될 수 없고,

 

 

이라고 해야 비로소 과학적 언어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객관적 실증성과 보편성을 가진 언어는 초개인적이다.

 

 

은 만인에 대하여 강제성을 갖는다. 내가 '나의 경험에 의하면 2+5=10' 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나는 어디에서도 정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 물론 경험적으로는, 예컨대 암탉 5마리와 수탉 1마리는 10개월 뒤에는 30마리가 될 수도 있고, 모두 죽어 버려서 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계산이 선천적 과학인 수학으로 성립될 수는 없다. 비록 그 언어가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단 명제로서 간주하는 것이다.

 

 

등의 명제도 일단 명제로서는 성립한다. 다만 진의 명제가 아닌 위의 명제일 뿐이다. 명제의 진위는 이 장의 거의 전반을 통하여 검토되고 논증 되겠거니와 아무리 위의 명제라 하더라도 그것이 보고의 기능을 갖고 있는 이상은 명제로서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오류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의 하나는 인간이 사고 내지 추리능력을 가진 데 있다고 하겠으나, 우리의 사고나 추리가 항상 올바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학문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매일 영위하는 일상생활에서도 판단력의 부족, 지식의 결핍, 편견, 격정,       , 주관적 기분, 착각 등으로 인하여 잘못 생각하거나 그릇된 판단을 하거나 부당한 추리를 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일반적으로 진리에 대립되는 이와 같은 일체의 잘못된 사고, 그릇된 개념 및 지식을 넓은 의미로  위  또는 오류(fallacy)라 한다. 올바른 사고와 정확한 추리를 하기 위하여 우리가 의거하지 않을 수 없는   논리적 규칙을 적극적으로 밝히는 것이 논리학의 한 임무라고 한다면, 우리가 빠지기 쉬운 이러한 오류라는 함정에 위험표지를 달아 주어 그릇된 사고와 부정확한 추리를 제거하고 방지하는 소극적인 면도 전자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논리학에서 오류의 문제를 논의하여 왔다. 우리는 우선 이러한 오류에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고 장을 달리하여 논리적 타당성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위에서 일체의 그릇된 사고나 지식을 넓은 의미로 오류라고 했지만, 논리학에서 취급하는 오류의 성질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오류란 말의 의미를 좀더 좁게 한정해야 한다 : 논리학에서 말하는 오류란 그릇된 추리과정에서 생기는 잘못, 특히 외견상으로나 심리적으로는 옳을 듯하면서도 논리적으로 검토해 보면 그릇된 부당한 추리를 가리킨다. 일견 그럴 듯하니까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이러한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요( 배리,
 리, paralogism), 또 고의로 남을 속이기 위해서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궤변, sophism).
   오류를 분류하는 방법은 학자에 따라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내용과 용어에도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추론의 형식적인 제규칙을 어겼을 때 생기는 오류와, 이와는 다른 사정에서 생기는 오류로 크게 이분하여 왔다. 전자를 형식적 오류(formal fallacy)라 한다면 후자는 비형식적 오류(informal fallacy)라 할 수 있다. 형식적 오류는 추론의 규칙들을 설명할 때 언급되겠으므로 여기서는 비형식적 오류에 관해서는 언급하고자 한다.
  비형식적 오류는 또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추리(추론)나 주장에 사용된 언어가 애매하든가 그 구성 및 사용이 잘못되어 범하게 되는 오류를 언어적 오류(verbal fallacy)라 하고, 이끌어 낸 결론이나 주장의 근거로 사용된 전제가 잘못되었든가 그 결론에 적합하지 않을 때 생기는 오류를 질료적 오류(material fallacy)라 한다.

 

  (1) 언어적 오류

 

    ① 애매어의 오류(fallacy of equivocation)

    동일한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든가 또는 문맥에 따라 뉴앙스가 다른 경우에 이것을 혼동함으로써 생기는 오류이다.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동일한 단어를 서로 연관없이 사용할 때는 혼동될 가능성이 적으나, 하나의 주장이나 추론에 함께 사용될 때에는 그 애매성 때문에 오류를 범하는 수가 있다. "모든 죄인은 감옥에 갇혀져야 한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두 감옥에 갇혀져야 한다"와 같은 추론은 '법적'인 의미에서의 죄인과 '종교적' 의미에서의 죄인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생긴 잘못된 추론이다. 또 "빠리 평화회담은 무속식이다. 그러니 빠리 평화회담은 희소식이다. 왜냐하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니까"도 같은 예이다.

 

    ② 애매구의 오류(fallacy of amphiboly)
    문법적으로 애매한 문장구조를 가진 말이나 글은 해석에 따라 진일 수도 있고 위일 수도 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을 전제로 하여 결론을 끌어 낼 때에 범하게 되는 오류이다. 가령 "그는 나의 숭배자이다"라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 "내가 숭배하는 인물은 그 사람이다"의 의미로도 해석되고, "그가 숭배하는 인물은 나다"의 뜻으로도 해석된다. 이런 것은 문맥상의 여러 관계에서 밝혀져야 한다. 고전적인 예로는 Lydia의 왕 Croesus와 Delphi 신탁에 얽힌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Persia와의 전쟁을 망설이던 Lydia의 왕 Croesus는 Delphi의 신탁에 이 문제를 묻게 되었다. 신탁은 "Croesus가 Cyrus(Persia의 왕)와 전쟁을 하면 그는 강대한 왕국을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힘 입은 Croesus는 Persia와 싸웠으나 결과는 Lydia의 패망으로 끝났다. Croesus가 거짓 신탁을 꾸짖는 글을 Delphi 신전에 보냈을 때 Delphi의 승려로부터는 다음과 같은 회답이 왔다 : "신탁은 옳았다. Croesus는 강대한 왕국을 멸망시켰다. 자기 자신의 왕국을!"

 

 점장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애매한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③ 강조의 오류(fallacy of accent)
    문장의 일부를 강조함으로써 본래의 의미가 변할 때 생기는 오류이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어떤 문구를 특별히 강조함이 없이ㅣ 그대로 받아들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질투심과 시기심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한다면 별로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촌'을 강조하면, 다른 사람이 사면 그렇지 않으나, 사촌이 사면 배가 아프다는 뜻으로도 들리고, 또 '땅'을 강조하면, 집이나 가구를 사면 괜찮으나 '땅'을 사기만 하면 배가 아프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어떤 문구를 특별히 강조하여 해석하고 이것을 어떤 주장의 논거로 삼는다면 그 추론이나 주장은 강조의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어떤 구절을 특별히 강조하여 해석함으로써 본래의 의미를 변경시키는 것도 강조의 오류를 범한 것이지만, 또 이미 강조하여 표현된 문구를 포함하는 글이 그것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주의나 착각으로 잘못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면 이 경우도 강조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는 그 글 자체로는 어떤 잘못을 범하지 않았을지라도 읽는이로 하여금 잘못 해석하도록 고의로 어떤 특별한 구절을 강조하여 크게 쓴 경우도 있겠고, 고의는 아니나 잘못 생각할 여지를 남겨둔 경우도 있겠다. 상품각격 표시를 크게 9,000원이라 쓰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부가가치세 2,000별도가산이라고 쓴 경우는 전자의 예이고, 신문의 기사 제목이 다음과 같이 표현된 경우는 후자의 예이다.

 

중동사태 삼차대전으로 확대

-미 대통령 우려표명-

 

     이런 의미의 강조의 오류는 주로 과장된 선전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상품선전에 아름다운 영화배우나 저명인사를 동원하는 것은 판매상으로는 매우 효과적이겠으나, 논리상으로는 위험하다.

 

    ④ 결합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
    이것은 처음에는 개별의 의미로 사용된 말을 나중에는 개별이 결합된 전체의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범하는 오류이다. "3과 5는 기수이며 우수이다"라고 한다면, 처음에 기수라 한 것은 '3'과 '5'를 떼어서 생각한 경우이고, 나중에 우수라고 한 것은 즉 '8'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어떤 수든 기수이면서 동시에 우수일 수는 없으니 위의 주장은 결합의 오류를 범했다고 하겠다. "원자는 육안으로 볼 수 없다"는 추론도 결합의 오류를 범한 예이다. 이때에는 개별적인 원자 하나하나에 대하여 진인 것을 그것들의 결합에 대하여서도 진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오류를 범한 것이다. "한올의 머리카락을 뽑으면 대머리가 되는가? 두 올의 머리카락을 뽑으면 대머리가 되는가? 세 올은 어떤가?..." 이런 식으로 범한 결합의 오류를 특히 대머리 오류(fallacy of bald)라 한다. 우리 속담에 "티끌모아 태산"이란 말은 이런 오류를 경계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⑤ 분해의 오류(fallacy of division)
    이것은 결합의 오류의 역이다. 즉 전체에 대하여 참인 것을 그 구성요소인 개별에 적용했을 때 생기는 오류이다. "3과 5는 우수이다. 그러니 3도 우수이고 5도 우수이다"라고 추론한다면 분해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처음에는 '3과 5'를 전체로서 즉 '8'로서 생각하고 우수라 한 것을 다음에는 그 구성요소인 '3'과 '5'에 대해서도 적용함으로써 오류에 빠진 것이다. Caesar의 Galia 정벌기에 "전 Galia를 삼분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개개의 Galia 지방을 각각 삼분한다"라고 해석한다면 분해의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분해의 오류는 'all'을 'all together'로부터 'each one'의 의미로 사용할 때 범하는 오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