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의 과학적 위상
한국어와 인공지능 : 고창수 편저, 태학사, 1999, Page 71~92
한국어 공학 연구소, 김원경
언어학은 언어를 대상으로 그 현상의 기저에 있는
작동 원리를 명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소쉬르가 언어학의 대상이 되는 '언어'를
규정한 이래, 과학으로서의 언어학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그러나 생성 언어학이 발전하면서,
인접 과학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한 언어학의 위상 정립은 새로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TLH).
이러한 논란 가운데 하나는 공리 의존적인 특성을 지니는 생성문법이
경험과학의 하위분과로 분류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생성문법이
개정을 통하여 언어학의 대상인 언어의 정의에 대한 수정과, 인접 학문과 관련한
언어학의 위상에 대한 변모된 관점들이 제기되엇다(홍종선 외, 1993). 이러한 논의는
언어학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언어학의 과학적 위상에 대한 근본적 혼란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는 관련 논의들이 언어학에 대한 안정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의 언어학자들을 정상과학자 집단 내에서
자리매김하는 데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언어학의 새로운 발전을
위해서 이러한 문제들이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또한 언어학이
논리적으로 완비되고 실용적으로 유용한 학문으로 정착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제시된
'언어학의 대상과 방법론'에 대한 문제와, 언어학의 과학적 위상에 대한 문제가 새롭게
음미되고 진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언어학의 대상으로서의 '언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먼저 그 존재론적인 측면과 관련된 철학적 답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특정 이론들의 진술에 따라 '언어'를 규정하고, 이 기준에 맞지 않는 대상을 다른
술어로 명명할 수도 있다. 이 문제의 범위를 좁히기 위하여, 언어학의 대상이 되는
언어의 존재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인지에 대하여 논의해 보자.
흔히 (인간) 언어의
특징을 거론되는 것은 광범위한 의사소통 능력, 분절성, 창의성 등이다. 이와 비교해
동물의 언어는 매우 제한적인 표현 수단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엄밀한 의미의 논의가 될 수 없다. 현대 음성학의 발달로 동물의 소리 연구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서, 매우 다양한 피치와 장단 등의 특성이 보고 되고 있고,
어느 정도의 표현들을 제한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게다가 현재의 연구를 통해 동물 의사소통의 여러 유형과 기능들이 밝혀지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속단은 현명한 선택을 방해할 수도 있다.
분절성이라는 것은 실험을
통해 지지되는 특징이지만, 분절점을 구분하는 데에도 불명확한 부분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명확한 구분보다는 몇몇 자질의 유무에 의해 완만하게 또는 연속체를 이루며
변화하기도 한다. 또한 이 개념 자체가 (다른 언어학적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이론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보다 강화되어 쓰일 수 있으며, 출발부터 인간의
언어만을 대상으로 하여 고안되었다는 한계가 있다.
창의성은 의사소통의 유형이나
한계 등과 같은 언어학 전반에 걸친 종합적인 연구와 관련하여 논의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 특성이 인간 언어에 고유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언어를 인간 고유의 것으로 한정하는 논의는 적절하지 못하다.
오히려 정보의 공유나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측면을 강조해 본다면, 언어는 몇몇
대상들-현재로서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동물에 국한되는-이 공유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동물의 언어까지 포함시켜 언어의 연구를 진행한다고 가정해보자.
언어 능력, 직관 등을 명시화하기 위한 자료체의 수집이나 그 해석 등과 관련하여
지금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일어날 것이다. 또 '언어학적으로 의의
있는 소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의 동물 언어의 범위를 넘어서는 정도로 확대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편의상 언어학의 대상을 인간 언어로 국한하여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이는 인간의 언어가 인간 이외의 존재가 지닌 의사소통 수단과 본질적으로
구분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언어학이 '인간의 언어라는 동질적 대상을 다루는
독립 과학'이라는 과학적 성격을 한정할 뿐이다.
직관(intuition)은 생성문법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개념이다. 생성 언어학은 모어 화자의 마음/뇌의 기저에 있는 언어학적 직관, 지식
등을 규명하고자 한다. 모어 화자가 언어(자기 나라나 민족의 언어)에 대한 직관을
갖는다는 데에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직관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되고 정비된 견해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먼저 직관이
선천적인 것인지 혹은 후천적인 것인지의 여부를 생각해 보자. 어떤 인간이 최초로
세상과 접하게 될 때부터 유창하게 말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는 우선 신체기관의
미숙아라는 물리적인 문제와 맞물리는 현상이다. 어린아이는 운동하는 능력이나 소화하는
능력 등이 부족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말하기 위해 구강조직이나 비강조직 등을 통제하는
일에도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이에 더하여, 모어를 구사하는 데 필요한 어린아이의
인지능력 역시 어른에 비해 낮은 수준에 머무른다.
인간이 발달 초기단계에 원활하게
모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상의 조건들과 관련을 맺는다. 또한 처음에는
의사 표현의 필요성도 그리 광범위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단순하게 파악되므로,
울음소리 등이 최적의 표현이 된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자라면서 복잡한 세계의
여러 양상과 접하게 되어 표현의 필요성도 증가하고, 또 신체기관이나 인지능력도
아울러 발달하면서, 다시 그 환경과 비교해 가장 적절한 언어를 구사하게 된다. 이에는
다양한 어휘나 구문 등에 대한 암기가 수반된다.
발달단계에 따라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달라진다면, 이 가운데 어떤 단계에서 언어학적으로 유효한 직관을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는 직관을 명시화하기 위해 '제보자 조사' 등을 행하는데, 이러한
조사에서는 선천적 직관과 후천적 직관 사이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 생성 언어학에서는
'언어' 가운데서도 '직관'이라는 부분을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논의한 선천적 직관과 후천적 직관 모두가 언어학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언어학자들의 언어관이나, 이들이 의지하는 이론틀에 따라 다르게
제시된다.
우리가 각 언어에 개별적인 어휘나 구문 표현들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보다는 성장과정에서 학습을 통해 늘여 나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은, 이러한 구체적 능력이라기 보다는 골격구조에 가깝다.
이를 구조에 대한 직관이나 추상적인 의미들에 대한 개념망 등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틀이 처음부터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후의 언어활동이 가능해진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언어학적 직관은 따라서 대단히 추상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이와
관련한 논의를 '보편문법'의 존재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좁혀보면, 선천적인 언어학적
직관만이 연구대상이 될 것이다. 선천적인 언어학적 직관이란 바로 언어능력(Language
Faculty)이나 ㅑ언어 등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언어학적 직관의 모습을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세계의 많은 부분에
대ㅐ해 알고 이를 이용하여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으나,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를
완전히 잡아내지는 못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언어학자들은 이러한 직관을 자료체의
수집이나 부분적인 테스트와 이의 해석, 그리고 자료체에 부합하는 공리들의 조합을
통해 포착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언어학적 직관은 내성에 의해 포착될 수
있다.
내성(introspection)도 직관처럼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이는 보통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내성과 언어학자들에 고유한 내성이다. 후자는 언어학자들이 이론적인 훈련을
통해 체계화하는 것으로, 이를 곧 언어학자들의 문법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언어학자들의
임무는 이 두 내성간의 간격을 줄이는 일에 있다. 무의식에 가까운 언어학적 내성에
접근성을 옳게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방향이 된다.
이제까지 언어학의 연구대상은 선천적인 언어학적
직관이 됨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언어학적 직관이 우리에게 관찰 가능한 형태로 바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언어 자료체이며, 이는 언어 능력 그
자체라기보다는 실제 발화와 관련된 여러 과정을 거친 변이체이다. 언어학이 추구하는
것은 언어 능력의 규명이지만, 우리는 일차적으로 자료체를 통해 이러한 규명을 시도하게
된다.
언어 자료체는 실제 발화의 녹음이나 전사, 문헌 자료 등에 의해 다양하게
수집된다. 이 자료체를 통해 우리는 가설을 수립하고, 역으로 이를 다시 검증해 볼
수 있다. 촘스키(1957)에서는 자료체 중심의 귀납적 연구가 언어 수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들까지를 포괄하기 때문에, '언어'를 특정한 시공에 출현하지 않는 대상으로
파악하여 논의를 진행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언어학의 공리체계 내에 시공을
초월한 항구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나, 언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분포한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볼 때 적절하지 못하다.
이러한 주장들은 언어연구가
그 자체로 비경험적 성격을 지닌다기 보다는, 보편문법적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생성문법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논의를 진행하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보편문법
내에서도 원리 사이의 우위성을 정하거나 문법성의 정도를 나누어서, 자료체의 규범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하기도 한다.
실증주의 영향 아래에서 경험 과학과 비경험
과학 사이의 구분이 논의되면서, 언어학은 학자들에 따라 경험 과학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비경험 과학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이는 언어학이 전형적인 경험 과학으로
논의되는 물리학과도 다르고, 대표적인 연역 과학인 수학과도 다른 독자적인 특성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분야가 엄정하게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며, 각각의
특성을 지니면서 과학의 하위 분야로서 서로 특성들을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언어학은 물리학과도 유사점을 가지며 수학과도 공통부분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언어학은 경험 과학과 비경험 과학 중 어느 분야에 속할 수 있을까? 구조 언어학의
절차를 고려하면, 언어학은 경험 과학적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언어학을
경험 과학으로 파악하는 것이 과학에서 언어학이 지니는 지위를 공고하게 해 주는
일과는 별반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다만 이 논의에서는 언어, 특히 개인어(private
language)의 연구를 위한 제보자 조사나 튜링 테스트(turing test)를 언어 연구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언급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언어학의 경험 과학적 측면을 부각시키려
한다. 경험 과학은 경험으로 지각될 수 있는 세계를 대상으로 하며, 이에 대한 진술은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그 진위를 판단할 수 있다.
전통적인 언어학은 자료체로서의
언어를 대상으로 하여 언어의 구성 원리를 밝히는 것이므로, 경험 과학적 특징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에 비해 생성문법은 인간의 정신활동이라는 심리적 실재로서의
언어를 언어과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체로 동일한 과학분야에 속하는 학문은 그
연구 대상이 동일할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언어학과는 구별되는
생성문법의 이러한 입장(심리적 실재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태도)은 첫째, 생성문법이
일반 언어학의 범주에 들지 않거나, 둘째, 생성문법이 언어학 발전의 새로운 대안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생성문법의 연구가 언어학적
행위가 아니며, 단순히 뇌생리학이나 심리학의 연구방법에 부응하는 하위 부문이라고
강력히 주장되지는 않는 것 같다(고창수, 1996). 이는 생성문법에서도, 자료체로서의
언어가 정신활동에 대한 진술의 진위를 가려주는 평가척도의 재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즉 생성문법의 진술 역시 언어자료를 통해 자기의 과학성을 입증(혹은 반증가능성을
포착)하게 되므로, 이러한 사실을 통해 생성문법의 경험 과학적 지위가 지지될 수
있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생성문법에 비해 자료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공리
의존적인 면이 적다. 그러나 구조주의의 진술도 일관성있게 경험적인 것에 기반하지는
않았다. 랑그와 빠롤의 구별에서 빠롤로부터 랑그를 추출하는 절차는 언어적인 실체와
비언어적인 실체로부터 순수히 언어적 실체만을 가려내는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빠롤로부터 추출된 랑그가 적절한 물리적 신호로 변환될 수 있는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현재의 음성인식이나 합성의 연구에서 랑그라고 할 만한 실체가 원리적으로 그리고
계량적으로 포착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물리적
실재로 포착되는 빠롤이 언어학의 대상이 아닌 반면, "하나의 언어 공동체가
공유하는 언어에 대한 지식"이며 화자들에게 공유되는 심리적 실재인 랑그가
언어학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진술은 구조주의 언어학도 근본적으로 인간의
정신이나 심리를 그 연구에서 매우 중요시함을 알게 해 준다.
생성문법이 연역
과학적이라는 주장은 생성문법의 진술이 언어학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상대적으로
공리적인 특성을 지닌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생성문법의 초기 공리는 인간의 언어능력은
선천적이며, 이러한 능력이 자극에 의해 성장한다는 것을 근간으로 한다. 그런데
선천적인 능력이 유전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라면, 생성문법은 오히려 강력한 물질주의를
지지하는 이론이 된다. 성장하는 언어능력이 정보로서 뇌세포에 각인된다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논의는 언어학이 매우 경험 과학적인 학문이거나 혹은 전형적인 경험
과학과 밀접하게 연계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생성문법의 진술이 거의 언제나
적형의 문장만을 산출한다면, 이로 인해 생성문법의 경험 과학적 지위가 지지될 수도
있다. 그런데 생성문법 진술의 참/거짓은 이론 내의 공리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속성은 수학 등의 연역과학과 공통되는 점이다. 그러나 수학의 참/거짓은
결정적으로 경험 세계의 참/거짓과 무관하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생성문법은 여전히
경험 과학적인 속성을 지닌다.
물리학과 같은 경험 과학은 경험세계를 예측하는
강력한 원리(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를 갖고 있는데 반해,
생성문법의 원리는 경험세계를 안정적으로 예측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언어학은 일반적인
경험 과학과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특정 과학의 역사적
전개를 염두에 둔다면, 현재의 언어학이 다른 과학에 비해 후발적이며, 언어학도
모든 과학이 안고 있는 일반 문제를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에 관찰되는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수학과 같은 연역 과학에서는 동일 대상에 대한 상이한 공리 체계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 대 비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존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경험 과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규칙체계는 기존의 규칙체계를 대체하는
성격을 지닌다. 생성문법은 설명적 타당성을 지닌 이론이 가장 가치있는 진술이라고
주장한다. 설명적 타당성은 양립 가능한 진술 체계를 대상으로 하여, 간결성을 위주로
특정한 진술 체계의 우위성을 평가하는 장치이다. 이는 문법 안에 평가 척도를 마련하여,
적어도 양립 가능한 참인 진술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수학과는 달리 생성문법내에는
공리가 다른 진술 체계가 동시에 상정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경험 과학적 위상이
강조된다.
언어학의 경험 과학적 성격을 논하기 위해, 일반적인
경험 과학의 관찰이나 실험에 대응되는 절차가 언어학 내부에 명시적으로 제안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으로는 제보자 조사나 튜링 테스트 등이
있다. 제보자 조사는 제보자의 발화를 녹음하고 정밀 표기 전사나 간략 표기 전사
등을 이용해 이 발화를 기록하여, 살아있는 언어 자료체를 취합하는 일이다. 제보자
조사에 대해 가장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진 분야는 방언학이다. 방언 연구는 지역적인
방언이나 사회적인 방언에 초점이 맞추어져 진행된다. 이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작업은 적절한 제보자를 선정하고, 이 제보자들의 일상적인 자연 발화를 성공적으로
기록하는 일이다. 이 작업에서 조사자가 과도하게 개입하면 제보자들은 규범적인
기준에 맞추어 답변을 조정하게 되므로, 이러한 자료는 지역 방언 연구와 사회 방언
연구에서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없다.
이러한 제보자 조사는 보편문법의 연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를 통하여 '직관'이라는 개념이 공허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며, 이론을 이끌어내고 이를 다시 검증해 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제보자
조사는 개별 언어 사용자의 다양한 직관에 대한 실제적인 연구이다. 특정인의 조사기록은
그 사람의 핵심 언어를 구성하는 일의 재료로 쓰인다. 이 자료체는 언어능력과 언어수행,
보편적 속성과 매개변항적 속성 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필요에 따라 보편
문법, 사회 언어학, 심리 언어학, 지역 언어학 등의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언어학자는
제보자 조사 후 그 자료체를 통해 귀납적으로 언어를 운용하는 원리들을 추출한다.
이 원리는 옳은 것일 수도 있고 옳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원리의 옳고 그름은 이론
내적인 논리적 일관성이나 추가적인 자료에 대한 적용 여부 등을 고려하여 판단된다.
비교적 논리가 정연하고, 경험적인 (부분적) 자료들에 부합하는 이론들이 존재할
때, 이 이론의 타당성이나 효용성 등을 검사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이제까지
제시된 방법 중 튜링 테스트를 이용할 수 있다.
튜링 테스트는 원래, 성공적으로
구현된 인공지능을 판단하기 위하여 가상된 실험 체계이다. 이 테스트는 각각의 분리된
방 안에 인간과 기계를 두고 이들에게 일정한 질문을 던져서, 이에 대한 답변 중
어느 쪽이 인간의 것인가를 판단하는 절차로 이루어진다. 이 경우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수준의 인공지능이 있다면, 이 인공지능은 성공적으로 구현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실험은 기계와 인간 사이의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염두에 두고 행해지며,
이 테스트의 통과는 결국 인간의 언어능력을 논리적 절차를 통해 완전히 형식화하였음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의 지능과 완전히 동일한 기계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 수학적
절차가 있을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대답은 언어학자가 가지는 신념 체계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언어학적 논리의 타당성 여부를 부분적으로 검사하고
이 범위를 확장하여 이러한 테스트를 만족하는 수준의 이론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이러한 신념에 부합하여 수행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튜링 테스트와 관련한
작업은 궁극적으로는 인간 지능의 완전한 모사가 불가능하다는 신념 아래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게다가 이 작업은 현재 크게 진전된 것이 아니며, 일정 수준에 오를 때까지는
이에 대해 논쟁하는 것에 소모적인 면이 있다.
현재의 기술수준에서 완벽한 의미의
튜링 테스트를 기대하고 언어학 연구를 진행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형태소 분석기나
번역 기계와 같은 실제적인 응용 소프트웨어의 개발을 통해 간접적인 튜링 테스트를
행할 수 있다. 즉 두 종류의 형태소 분석기 중 우월한 분석을 내놓는 쪽이 인간의
언어능력을 더 잘 반영한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짓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언어처리
제품들의 개발을 통해 언어 과학에 부과된 요구들을 재정립할 기회도 가질 수 있다.
자연언어처리
제품을 만드는 데 기반이 되는 언어학 이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문제들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일반적인 언어학 이론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실제 시제품을 만들 때는
제품의 성공률, 소요시간 등을 한 눈에 평가할 수 있으므로 문법 부문간의 분배나
정비에 정밀함이 요구된다. 이에는 먼저 어휘무문과 관련된 문제들이 있다. 동음이의어인
'배'나 '은행'과 같은 어휘들이 탐색 사전에 어떻게 등재되어야 하는지, 혹은 이러한
동음이의어들은 '길'이나 '다리'와 같은 다의어들과 얼마나 다른 성격으로 표현되는지와
같은 문제들이 연구 대상이 된다. 전반적으로는 탐색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어휘부(lexicon)가 정비되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구문 분석부문의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과 같은 어절이 '나(명사)+는(조사)'이나 '날(동사)+ㄴ(어미)'
등의 구조를 가질 때, 모형 내에서 이 두 구조가 모두 분석 가능한지 그리고 좌우의
구문적 환경을 통해 바람직한 결과를 선택할 수 있는지와 같은 어절중의성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구문 분석 문제의 또 다른 예는 "나는 순이와 영수와 싸웠다"와
같은 문장에서처럼 구문 중의성을 갖는 문장의 처리와 관련된다.
이에 더하여
화용론적인 문제도 고려되어야 한다. "나는 어제 순이와 싸웠어. 그러나 오늘
그 애와 화해했어."와 같은 문장에서 '순이'와 '그애'의 동지표(co-indexing)
여부 등 문장 내의 지표나 텍스트의 문맥 등을 고려해야 하는 경우가 그 한 예이다.
이 이론은 전반적으로 문법 부문을 효율적으로 분배하여 각기 적당하게 부담을 지우고,
각 절차의 원리나 규칙을 정밀화하며, 절차 간의 순서나 관계가 긴밀하고 효율적인
방향이 되도록 모형을 수립하여야 한다. 이러한 완비된 이론을 통해 실제 제품이
만들어 질 때, 빠르고 정확하며 안정성이 높아 학문적 성과와 상업적인 실용성을
두루 갖춘 결과물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은 문제들의 해결을 통해 자연언어처리
제품들의 우수성도 보장할 수 있으며, 제품의 기반이 되는 언어 이론의 우수성 혹은
타당성을 입증하는 검증의 기회도 가질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검증도구를 활용하여
특정 진술의 참/거짓을 간단히 모의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튜링
테스트의 존재는 언어과학의 경험 과학적 위상을 강하게 지지해 준다.
위에서 언급한 제보자 조사를 통해 언어 자료체들을
모아 보면, 언어가 개인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발화됨을 관찰할 수 있다. 소쉬르는
동질적인 언어 공동체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촘스키도 그의 초기 논의에서 이상적이며
동질적인 언어 공동체를 상정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의 언어 공동체 내에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혼재되어 있다.
소쉬르는 랑그에, 촘스키는 언어 능력에
국한하여 언어를 연구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랑그 또는 언어 능력에
관한 한 동질적인 특성을 지니는 공동의 언어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동질적인 부분은 언어 능력에, 그 밖의 주변적인 부분은 언어 외적인 능력에 관계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어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어휘선택이나 문체론적
차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실제 문법성을 판별하는 데서도 큰 차이를 보이는 예가
많으며, 이는 구조에 대한 직관에도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각 개인의 문법적
직관을 비교하면 일치되는 경우도 상당부분 존재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비교 상대가
바뀌거나 추가되면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동질적인 언어 공동체를
상정하기보다는, 언어능력이 개인마다 모두 다르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개인어,
특히 개인에 특정적인 I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언어 이론은 언어 공동체를 상정하는
언어 연구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제기될 수 있다. 이제까지의 언어 연구에서는
자료체를 통한 언어 이론 수립과 그 검증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해 왔다. 또한 문법성이
매우 높아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는 문장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는 (부분적이라도) 동질적인 언어 공동체의 존재를 인정하는 연구가 주를 이루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개인들의 I언어는 각기 다르면서 동시에 공통적인 부분을 지닌다.
정밀하게 가려진 공통의 부분을 통해 우리는 인간 언어 능력의 보편적 기제들을 명시화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의 완성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문헌 조사나 제보자 조사 등을
통한 광범위한 직관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에도 유용한 자료체들이 다양한
기준과 방법에 의해 정비되고 있으며, 계속되는 작업을 통해 더욱 완성도 있는 자료체가
갖춰질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한 I언어 연구는 사회 언어학적인 방법론과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 I언어들의 원리와 매개변항적 요소가 체계적으로 정비되는
것은 사회 언어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광범위한 자료체를 대상으로
언어능력의 핵심적인 부분에서 발견되는 심각한 개인차는 어떤 유형인지, 그 범위나
정도는 어떠한지 등이 체계적으로 정리될 수 있다. 개인어가 지니는 핵심적 특성의
추출, 각 개인어간의 공통점과 차이점 등에 대한 계량적 연구와 그 해석을 바탕으로,
개인어가 갖는 사회 언어학적인 의미가 체계화될 것이다.
이에 더하여 언어학
이론 내적인 공리 체계의 정비와, 인접 과학 분야와의 긴밀한 공조로 I언어의 완전한
실재를 밝혀낼 수 있다. 인접 과학 분야는 이러한 개인어간의 차이가 무엇에 기인하는지,
또 이 차이가 인간두뇌에 각인되어 있는 핵심적인 정보의 차이를 의미하는지 등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I언어의 실재에 대하여는 자료체 중심의 언어 연구와
함께, 자연과학이나 심리학 등의 분야가 언어학에 직접적인 증거물을 제공하면서
그 결과물이 축적될 것이다.
결국, 언어 현상에 대한 전면적인 연구는 개인어와
언어 공동체의 언어를 모두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가능하다는 점, 더 나아가 (현재로서는
언어학과 구별되는) 언어학 이외 분야와의 공조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개인어의 차이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매우 핵심적인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개인의 언어 능력, 즉 I언어에 대한 연구는 개인어가 언어 공동체와 맺는 관련성과
별도로 수행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생성문법은 각 개인들의 언어학적 직관, I언어를
연구대상으로 한다. 이 연구에서는 개인어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흔히 사회성과 역사성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 가운에서 사회성과 관련해서는 앞 절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실제로 후자의 문제는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이 별로 없다.
인간의
언어는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으면서 방향없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이론으로 미래의 언어 현상을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과거의 언어 자료와 현재의
자료를 비교하여 변화의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특정한 언어 이론이
이러한 발견을 통해 미래의 언어적 사실을 예측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그 예측이 정확한 것으로 판명된다면, 이 이론은 또다른 그리고 매우 어려운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통과한 우수한 언어 이론으로 평가될 것이다.
언어의 역사적
변화에 대해 연구하는 경우에는 언어 과학의 경험 과학적 속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때에도 과거 언어 자료체의 신빙성 판단이나 그 해석 시, 논리의 전개를
위해 연역적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역사 언어학의 경우에도 대부분은 특정 이론의
진술을 참이라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그러나 진수의
참/거짓은 결국 자료체를 통해 입증할 수밖에 없다. 다만 역사 언어학에서는 특정
진술의 참/거짓을 명백히 가려줄 자료체가 부재하여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하며, 이때에는 연역적인 논리가 주도하여 이 빈칸을 예측할 수 있다.
이상에서 언어학의 과학적 위상을 생성문법의 연구
대상과 방법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언어학의 여러 측면 중 경험 과학적
특성에 주안점을 두어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직관과 내성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과 학습에 의해 성장하는 것으로 다시 나누어 지며, 후자는 일반적인 화자들이
공유하는 것과 언어학자들에 고유한 것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 언어학의 대상은
선천적인 직관(I언어 또는 언어 능력)이다. 언어학자는 두 내성 간의 간격을 줄이면서
이러한 직관을 기술하는 것을 연구 목표로 한다.
둘째, 언어학은 연역 과학적
특성과 경험 과학적 특성을 모두 지닌다. 언어학의 연역적 특성은 그 공리 의존적
성격에 기인한다. 경험 과학적 특성은 자료체를 통한 귀납적 연구(경험적 사실을
통한 참/거짓의 판별)의 중요성과, 이론간의 우위성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평가 장치의
존재, 관찰 및 실험 가능성에 기인한다. 관찰 및 실험에 대응되는 언어학적 방법론으로는
제보자 조사, 튜링 테스트 등이 있다. 또한, 자연언어처리 제품의 제작을 통하여
그 기반이 되는 언어학적 이론을 검증해 볼 수 있다.
셋째, 개인에 고유한 언어를
언어학의 연구 대상으로 설정하는 방법론은 언어의 사회적, 역사적 측면을 고려하는
연구 방법론과 양립가능한 것으로, 상호 보완을 통해 함께 발전할 수 있다. 또한
I언어의 전면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자료체의 수집과 이의 분석, 이론 내적인
공리 체계의 완비, 그리고 I언어의 실재를 함께 입증할 수 있는 인접 과학 분야와의
공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