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세대 : 제 2 컴퓨터혁명

 

제 5 세대 : Edward Feigenbaum, Pamela McCorduck 공저, 윤진수 역, 홍익, 1983  (원서 : The Fifth Generation: Artificial Intelligence and Japan's Computer Challenge to the World, Pearson Addison Wesley, 1983), Page 71~96

 

1. 생각하는 기계는 가능한가?

     (1) 인공지능 부정론

     (2) 지식이란 무엇인가?

2. 마음의 장치

     (1) 지능기계는 프랑켄슈타인인가?

     (2) 인공지능에의 길

     (3) 전문가 시스템의 탄생

3. 인간처럼 영리한 기계

     (1) 정보를 만들어내는 기계

4. 인공지능에 대한 신뢰감

     (1) 아직도 많은 반대론자

5. 마음을 위한 잠수구

     (1) 지능을 증폭한다

     (2) 지식계급에게는 위협적?

6. 문맹, 그리고 컴퓨터 음치

     (1) 컴퓨터는 맹장인가?

     (2) 컴퓨터가 여는 세계

7. 컴퓨터의 미래도

     (1) 상식이 오히려 어렵다

     (2) 일본인들, 그곳에 가다

 

1. 생각하는 기계는 가능한가?

(1) 인공지능 부정론

파멜라 맥코덕은 1959 년, 파이겐바움한테서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인간의 지능적 행동을 모방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다만 그때는 컴퓨터의 실용이 아직 오보단계에 있얶고, 그와 함께 파이겐바움이나 맥코덕 역시 너무 어렸다.

그 무렵 「기계가 정말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격론이 되곤 하는 주제였다. 맥코덕이 만난 많은 과학자들이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이 문제를 열심히 토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까지만해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 조차도 그녀는 흥미를 갖지 않았었다.

그 후, 미국의 유명한 여류 과학저널리스트가 되고나서 인공지능에 관한 역사와 역할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졌을 때, 그녀는 아직도 그 문제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때는 서양 장기인 체스의 말을 놓는 프로그램, 퀴즈놀이의 문제를 푸는 프로그램, 또는 일부 과학자들의 조수로 사용되는 전문가 시스템 등이 있었는데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아직도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었다.

거기서 가장 흔하고 강하게 대두되는 주장은 지극히 단정적인 한 마디, 즉 「기계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단정적인 주장은 19 세기 중엽에 최초의 전자계산기가 등장했을 때에도 나왔던 주장이었다. 또한 1950 년대 중엽에 인공지능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목표를 발표했을 때, 마치 노도와 같은 기세로 격렬하게 부정적인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하나의 맥을 잇고 있었다. 인간의 지적 행동과 똑같은 것을 해내는 프로그램이 나와도 <기계는 생각할 수 없다> 는 주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파멜라 맥코덕은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공지능은 지난 몇 년 동안 줄기차게 존재해왔으나 그것에 대해 소리높여 반대의견을 펴는 사람은 광범한 계층에 걸쳐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철학자는 컴퓨터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고라는 것은 인간의 두뇌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철학자들 가운데는 마치 과거에 자연과학이 물리학ㆍ화학ㆍ생리학으로 발전된 결과 철학자의 손에서 그것을 탈취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장차 자신들의 고유영역 가운데 하나를 철학 없는 경험주의자들에게 빼앗겨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하면, 일반인들 중에도 인공지능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고> 와 <기계> 가 동일한 무대에 등장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 자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며 그럴 만한 능력조차도 없다. 지능기계를 반대하는 논의는 크게 4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감정론이다. 「기계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의 상식이다. 그러므로 기계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는 식의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사고란 그 정의부터가 인간적인 특성을 갖는다. 게다가 인공지능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 공격도 서슴치 않는다.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사용하기 좋아하는 것은 <사기꾼> 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자신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일반 대중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관심을 끌려고 하는 영웅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난한다.

두번째의 것은 <넘을 수 없는 장벽> 이란 논리이다. 사고에는 창조성과 독창성이 필요하다. 또한 특별한 경험을 필요로 한다. 그 경험은 현실세계와의 교류를 통하여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의 교제 속에만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기계는 창조적일 수도, 독창적일 수도 없다. 지능은 자율성을 필요로 하는데 비해 어떤 기계도 자율적인 힘은 없다. 지능적인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기계가 그런 일을 설령 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을 성취할 때 갖는 성취감을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의식은 지능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여러 이유로 기계가 지능을 갖는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그들은 믿는다.

세번째의 논리는 실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컴퓨터가 지능적 행동을 한다고 해도 컴퓨터에 그런 일을 시키는 일을 성공시킨 사람이 아직 없다. 그것이 가능한지 어떤지를 아는 사람이 아직 하나도 없는 이상 기계가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공상일 뿐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마지막 네번째 논리는 윤리적인 것이다. 「가령 기계가 생각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런 두려운 계획을 인간 스스로 추진해도 좋단 말인가?」하고 그들은 묻는다.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별개가 아닌가고 그들은 묻고 있다.

이상과 같은 논의는 이미 어딘가에서 제기된 바 있다. 예를 들면 실리콘 연산소자와 신경세포는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견해는 핵심적이고도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기능을 비교될 수 있으며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는 여러가지 과제를 해결하려고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의식이라는 개념은 19 세기 유럽에서 발견된 것인데 이런 개념이 생기기 전부터 인류의 문명은 기세당당하게 지능적으로 진보되어 왔다. 아뭏든 외부조건에 대해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맺어나갈 것인가를 아는 것이 의식이라면 컴퓨터도 상당한 의식이 있는 셈이다. 윤리적인 논리에 대해 말하면 어떤 지식의 진보도 인류를 불행하게 할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 새로운 지식이 인류를 위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냐, 즉 행복을 갖다 줄 것이냐 아니면 재앙을 갖다 줄 것이냐를 예측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그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우리 인류는 끊임없이 무지보다는 지식을 선택해왔다. 그리고 그 덕택으로 보다 윤택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

(2) 지식이란 무엇인가?

감정론은 처음에 파멜라 맥코덕의 관심을 끌었다.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였다. 첫째 이유는 어떤 섬세한 신경의 소유자가 있어 지능기계에 관한 말을 듣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일까 하는 점에서 이다. 인공지능에 반대하는 소리가 높고 날카로와졌으므로 어지간히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겠지 하며 그녀가 생각한 제 2 의 이유는 그녀 자신은 왜 인공지능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초조감을 느끼지 않는 것인가, 그 까닭을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감정론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신문의 투고란에 비웃는 듯한 편지형식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학술논문의 형태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방적으로 설득하려는 듯한 투로 쓰여진 것이 있는가 하면 격렬한 비난과 야유로 일관한 내용도 있었다. 인공지능의 개발에 반대하는 철학자들은 때로는 조소하는 듯한, 때로는 완강한, 또 어느 때는 사뭇 흥미있긴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어투로 말하곤 했다. 일반적으로 이성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상대방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어 놓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것이 실현되어도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주장과 요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것으로 대처했다. 예를 들어 한 철학자가 「컴퓨터는 결코 체스를 잘 둘 수 없다.」고 말했다 치자. 그때 어떤 과학자가 체스를 잘 두는 컴퓨터를 제작했다. 그런데 이 기계가 그 철학자와의 시합에서 이겼다ㅏ. 그러면 철학자는 재빨리, 「그러나 기계는 체스의 챔피언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얼마 안가 선수권자에게마저도 이기는 기계가 만들어진다.

이런 논의를 함에 있어, <지능이란 무엇인가> 를 모두 알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가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석된 적이 없는 신념 비슷한 것이다. 이와 똑같은 개념으로 창조성, 독창성, 자율성, 의식 등도 확실히 아는 것으로 전제하고 이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연구는 지금까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 연구는 지능적 행동에 관한 이론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분명히 드러냈다. 창조성, 독창성, 자율성 및 의식의 이론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컴퓨터에 지적 행동을 취할 수 있게 하려면 먼저 우리들은 행동이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컴퓨터에 그것을 세밀하고 명확하게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심리학에도, 철학에도 그런 지능의 정확한 모델은 없다. 따라서 기계가 생각하는가 어떤가를 물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나는 인간의 지능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이다. 우리는 지성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제 2 의 문제는 기계가 그와 같은 것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능은 과학자에게 있어서도, 놀라울 정도로 파악하는 길이 없는 신비한 분야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능기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2. 마음의 장치

(1) 지능기계는 프랑켄슈타인인가?

영어의 intelligence 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legere 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은 원래 과일 따위를 따모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사물을 선택해서 인상을 형성하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intellegere 는 많은 것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이해하고 인식하며 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우리가 모으기도 하고 선택하기도 하며 이해하고 인식도 할 줄 알며 어떤 대상을 알기도 하는 기계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 기계를 인공지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넓은 의미로 말한다면 일본제품이든, 미국제품이든 미래의 지식처리 기계는 그런 일을 해낼 기계인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런 기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 물론 상상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상상의 역사이다. 유사 이래 인간은 생각하는 기계에 관해, 즉 인공지능에 관해 꿈꾸어왔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속에는 굉장한 로봇트가 등장한다. 그것은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수많은 남녀 신들은 그들이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이 로봇트에게 만들어내라고 명령했다. 그리이스인들은 그런 로봇트를 생활에 필요한 훌륭한 도구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것을 현대의 상황에 관련시켜 보면, 로봇트가 척척 작업해내는 조립공장에서 황홀한 표정을 짓는 경영자는 그리이스의 신들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태양이 찬란히 비치는 지중해 연안의 한편에서는 이와 같은 상상에 반대의견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생각하는 기계의 제작을 장려한다는 것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기계들이 접근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이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넘어선 안될 선을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기계에 대한 인간의 이와같은 두 가지 기본적 태도는, 그후 시대에 따라 형태를 바꾸면서 서구의 문화 속에 계속 전승되어왔다. 예를 들면, 중세기에는 <놋쇠의 머리> 라는 전설이 있었다. 연금술사에 의해 발명된 것으로 알려진 이것은 수학의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풀었다고 한다. 또 옛 유태교에서는 이교도의 활동상황을 감시하기 위한 스파이 역할을 맡는 흙인형도 있었다고 한다.

기계문명이 시작됨에 따라 지능기계에 대한 두려움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유행병처럼 번져갔다. 1818 년, 메리 쉘리 (Mary W.Shelley) 가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은 그러한 두려움을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프랑켄슈타인박사가 만든 이름도 없는 이 괴물은 미쳐날뛰는 과학에 대한 강박관념을 그대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 괴물때문에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친구들은 빠짐없이 곤경에 처했는데, 이유는 프랑켄슈타인이 자기가 만든 괴물을 소흘히 다루었기 때문이지 과학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점을 잊고 단지 과학의 폭주만을 두려워했다.

(2) 인공지능에의 길

프랑켄슈타인이 읽히고 연극으로 공연되고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대에 변덕스럽고 편벽한 수학자로 알려진 한 사나이가 어떤 기계를 고안하고 있었다. 이 기계가 오늘날 디지털 계산기의 시초로 기록된다. 다만 그의 기계는 그 즈음의 기술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었다. 기계 속의 <해석기관> 을 만드는 데 필요한 수백만개나 되는 정밀한 부품을 만들어내는 공작기술이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요?」하는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때 그의 동료이며 젊은 수학자였던 한 백작부인이 <해석기관> 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그녀는 그 논문을 통해 기계는 생각할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후에 이 말은 몇 번이고 사람들에 의해 인용되었고 기계에 대한 사고 능력을 평가하는데 기초가 되곤 했다. 그러나 백작부인이 행간 속에 신중하게 유보해두었던 내용, 즉 「최종적으로는, 기계를 사용한 경험을 토대로 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제출돼야 할 것이다.」라는 말은 인용되는 일이 없었다. 어쨌든 기게가 생각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논의는 시대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1950 년대 초, 조잡한 진공관을 사용한 거대한 컴퓨터가 제작되었다. 그때는 벌써 맨처음 기계의 사고능력 유무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1 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러나 그와같은 진공관에 의한 제 1 세대의 컴퓨터가 탄도를 계산하는 작업 외에 더 흥미로운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선견력이 필요했었다. 그와 함께 과학적인 통찰력 또한 필요했다.

인공지능이 과학으로서의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컴퓨터라는 이름 자체가 대단히 틀린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난 후였다. 컴퓨터라는 단어는 단지 사물을 헤아리고 계산한다는 의미밖엔 없다. 그러나 전선, 진공관, 스위치, 램프 등의 덩어리에 불과해 장래성마저 변변치 못하게 보이던 이 기계는 놀랍게도 모든 기호를 조작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계속 이 점에 관심을 두었다. 기호를 조작할 수 있다면 지능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컴퓨터 개발의 선구자로 자처하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번번이 중지당해야만 했다. 어떤 이는 「컴퓨터는 지능을 가질 수 없다.」라는 긴 논문을 써서 널리 배포함으로써 젊은 과학자들의 인공지능 컴퓨터에 대한 관심을 방해하려 했다.

그러나 젊고 탐구정신이 강한 과학자들은 그런 방해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1950 년대 후기부터 1960 년대 초기까지의, 인공지능 개발 초기단계에는 그들의 개별적인 흥미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 한 예로 체스를 두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탄생되었고 평면기하학이나 논리학의 정리를 증명하는 프로그램 등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그 당시의 이런 실례들이 현실 세계에 응용되기는 힘들었지만 연구만은 진지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젊은 과학자들은 항상 분명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만일 체스의 승부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기계라면 그것들은 인간의 지적 행동의 본질에도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신념이었다. 여기서 그들이 훌륭한 체스 경기자이면서도 다른 일에는 이렇다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든지 훌륭한 인물이면서도 체스를 잘 두지 못하는 사람에 관해서도 주의를 기울였어야 한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능력 한계를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인공지능이라는 말이 탄생된 것은 1956 년경이었다. 그 당시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모든 행동의 밑 바탕에는 어떤 커다란 원칙이 도사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한 커다란 원칙은 체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가장 쉽게 끄집어 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끄집어내어진 원칙을 다른 지적인 노력에도 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은 부분적으로는 옳았다. 지적인 행동에 밀착되어 있는 어떤 종류의 전략이 곧 발견되었다. 그러한 전략을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 전략 속에는 문제의 해답을 찾는 <행동> 도 포함된다. 이 경우, 그 행동은 <추측의 원리> 를 이용하여 탐색의 영역을 좁힌다. 또 실제로 시도하고 시험한다. 「이것으로 잘 될까?」하고 시험해 보고는 좋지 않으면 다른 것을 해 본다. 어떤 목표를 반대로 추리함으로써 보다 빨리 그 목표에 접근하는 것도 전략의 하나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의 연구자들은 이런 전략을 발견하고는 이것을 명확히 정의해야 했다. 컴퓨터는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지시에 따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교나 회사에서 창조적 문제해결법에 관한 세미나가 흔히 열리는데 그 내용의 대부분이 인공지능의 초기 연구과정과 아주 흡사하다.

지적인 행동을 하는 데는 먼저 어떤 전략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외에도 필요한 다른 중요한 하나는 바로 <지식> 인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이 산처럼 많이 필요하다. 아무리 똑똑한 머리를 갖고 태어난 어린이라 할지라도 질병과 그 증상, 인간의 신체와 그 구조에 대한 폭넓은 전문지식 등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신뢰받는 의사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고의 대원칙과 관련된 이러한 부가물은 사람들에 의해 환영을 받지 못한다. 지능이라는 것은 물리학처럼 예리하고 확실한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와같은 자질구레한 사실들, 즉 판단하고 추리하는 원리나 경험적 지식 등은 한낱 쓰레기더미와 같은 것이리라. 그러나 지능이라는 것은 그렇게 정돈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물리학이 잘 정돈된 논리의 집합이 결코 아닌 것처럼.

(3) 전문가 시스템의 탄생

이 문제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해대는 내전이 일어났었다. 그 결과, <전문가 시스템> 이라는 낯선 견해가 등장하면서 그 내전은 일단 수습되었다. 그것은 문제해결의 일반적, 인간적 전략과 그 문제에 직접 관계를 맺는 실제적 경험적 지식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과학은 종교적 교리와는 다르다.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새 논리의 타당성에 따라 이제까지의 견해를 바꾸는 것은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에 의해 지금까지의 과학적 논리는 깨어지고 있다. 그와 함께 로봇트공학, 자연언어의 이해, 도형인식, 인식의 정리, 증명 등등 열거하면 끝이 없는 숱한 분야에서 인공지능은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

<전문가 시스템> 의 연구는, 지금 추진되고 있는 컴퓨터 연구의 전부라고는 볼 수 없지만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문가 시스템> 과 <지식기반 시스템> 은 같은 것인데 이 계획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대한 커다란 근거를 갖고 있다. 그것은 과제와 직접 관계가 있는 지식과, 그것을 프로그램 속에서 조작하는 기술과를 결합시키면 현실 속에서 확실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추상적인 이론은 언제나 화려한 법이다. 이것이 현실 속에서 훌륭한 사색 이상의 가치를 지니려면 직접 시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문가 시스템> 덕분으로 인공지능 연구는 확실히 전진했으며 새로운 생명력을 갖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은 인공지능이 실제생활에 유용하게 쓰여질 수 있는가 어떤가 하는 문제로 궁금해 했다. 그때까지, 그들은 체스의 프로그램이 실제 시합에서 이기고 있는지 어떤지, 로봇트가 장애물을 피하는지 아니면 그냥 부딪히고 마는지 등의 것을 자기 나름대로 예측해 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일하고 있는가 어떤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공지능의 연구성과를 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이미 인공지능이 들어와 있는 영역의 전문가들, 예를 들면 화학자나 의사들뿐이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말한다. 「인공지능은 이미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인공지능이 전에 약속했던 일을 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인공지능의 등장을 우려하고 있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계가 생각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공지능 컴퓨터과학자들은 이와같은 공격을 받아도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구에 몰두하느라 바빠서 그런 식의 비난에 일일이 답변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역사의 맥을 잇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공격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인공지능의 역사는 이제 25 년 정도이다. 과학에 있어 4 반세기란 짧은 기간이다. 생물학의 경우, 멘델이 유전법칙을 발견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물을 관찰한 후 2000 년도 더 지난 때의 일이다. 다시 그때부터 1 세기가 지나서야 유전자의 이중나선구조가 발견되어 멘델의 관측 결과를 뒷받침했다. 인공지능 연구가들은 인간의 지능이 생물학만큼이나 복잡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 25 년 정도라면 그들이 선구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을 지탱시켜 주는 긍지가 되고 있다.

컴퓨터의 특징이기도 하고, 또한 탈공업화 사회의 특징이기도 한 인공지능의 연구는 극적일 정도로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일본인들이 가세하여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진행 속도를 가속화시켜 놓은 것이다. 그런데도 첨단기술의 본향이라 할 미국의 모든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이미 우리들에게 미치고 있는 과학적, 경제적, 심리적 충격이 상당한 크기인데도 불구하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

3. 인간처럼 영리한 기계

(1) 정보를 만들어내는 기계

인공지능에 관해서 말할 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주위에 있는 기계를 보고 <기계란 원래 저런 것> 이라고 단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계라는 것은 거의 예외없이 에너지를 처리하는 기계인 것이다. 그것들은 에너지를 증폭하여 분배하고 변화시키는 가계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정제되어 이미 변환시킨 연료를 운동에너지로 바꾼다. 이 변환은 인간의 운동에너지를 증폭하여 인간생활에 유용하게 쓰인다. 자동차를 사용하면 발로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에너지의 변환은 원시적 과학법칙으로도 쉽게 설명할 수가 있다.

컴퓨터는 이제까지 인식되어온 여타의 기계와는 다르다. 그것은 에너지가 아니라 정보를 처리한다. 물론 그렇게 함에 있어 얼마간의 에너지도 관계되긴 하지만 그것은 전화나 방송기계의 작동 속에 어느 정도 정보의 변환이 관계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컴퓨터의 에너지 변환은 별로 흥미를 끌 만한 정도의 중요한 테마가 아니다.

기계로서의 컴퓨터의 본질적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낡은 고정관념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방법의 인식이 필요하다. 컴퓨터는 정보시대의 중요한 기계이다. 이 기계의 목적은 당연히 정보를 변환하며 증폭하고, 분배하며 변화시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정보를 처리하는 기계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컴퓨터가 정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컴퓨터혁명의 본질은 미래의 세계에서 지식의 창조가 인간의 머리로서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이럴 가능성은 과학이 살아있는 한 충분히 있다.

그런데 이 기계에는 컴퓨터, 즉 계산한다는 (compute) 잘못된 이름이 붙여져 있기 때문에 이 기계가 비장하고 잠재적 능력에 관해서는 우리가 도무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본인들은 바로 이 점에 유의하여 제 5 세대 컴퓨터를 <지식정보처리 시스템> 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 단어는 지식과 정보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전화와 텔레비젼은 정보와 에너지의 두 세계에 다 관계가 있는 것인데 우리들은 전화와 텔레비젼으로 상징될 수 있는 하나의 전환기를 지나왔었다. 그러다가 제 1 컴퓨터시대를 맞이했을 때, 우리는 참으로 새로운 시대에 돌입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음 단계인 <지능기계의 시대> 에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능이란 대체 뭡니까? 지능기계라는 것이 인간처럼 명석한 두뇌를 갖기라도 했나요? 지능기계가 알고 있는 것들은 모두 우리 인간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닌가요?」

파이겐바움은 언젠가 파멜라 맥코덕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간과 같은 정도로 영리한 기계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맥코덕은 이때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전문가의 능력 이상으로 일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이미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간보다 더 영리하다고 보아왔던 그 프로그램들은 모두 속임수였단 말인가? 아니면 파이겐바움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인가?

「좀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맥코덕이 말했다.

「간단한 원리입니다. 우선 기계에게 시키고 싶은 일을 대단히 정확하게 기술해야 합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전문지식에 의거하여 계속 기술해야 되겠지요. 전문가들이 갖고 있는 전문지식을 모두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기계는 아직도 전문가와 같은 정도로 영리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프로그램과 지식의 상세한 내용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면 어디를 개량해야 할지를 곧 알 게 됩니다. 이때 기계는 갑자기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힘을 발휘합니다. 엄밀히 얘기해서 기계가 인간과 완전히 같은 정도로 영리하다고 말할 만큼의 순간은 없다는 얘기입니다. 어느 순간까지는 인간보다 영리하지 못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돌연 인간보다 영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계는 방법론적으로 볼 때, 미세한 곳까지 빠뜨리지 않고 일하며 피곤을 모르고, 싫증내는 일도 없고 게다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한다. 파이겐바움의 말은 <인간 이하의 기계> 와 <인간 이상의 기계> 는 존재하지만 인간과 동일한 능력의 기계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인간은 이 시점에서 겸허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기계에 여러 가지를 가르친 인간은 과연 얼마만큼 영리했던가?」하고.

진화에 소요된 시간의 길이라는 점에서 보면, 생각하는 동물이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때문에 인간의 인식력을 완성시킬 만한 진화의 시간은 없었다.

「이 환자는 어떤 병으로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가?」라든지, 「어떤 특정한 유전자를 특별히 증대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또는 「최근 발명한 치료약을 보다 효과적으로 합성할 묘안은 없을까?」 따위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현대과학의 상식으로는 누워서 떡먹기보다 쉬울 정도이다. 그러나 장래에는, 인간보다 훨씬 더 영리한 기계가 지금보다 몇 배 더 어려운 문제를 일상적으로 풀 게 될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감각기관에 닿는 신호를 인식기호로 바꾸면 상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대량의 데이터가 눈 앞에 놓이면 우리들은 그만 기세가 꺾이고 만다. 계통에 약하고 잘 망각하며 곧잘 싫증내고 기분이 자주 변한다. 영리한 컴퓨터는 이런 인간의 약점을 보완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지능을 갖고 있다.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으며, 그 한계의 약점을 메우기 위해 기술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4. 인공지능에 대한 신뢰감

(1) 아직도 많은 반대론자

제 5 세대 컴퓨터회의에 참석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려고 일어섰다. 그것은 중대한 반론은 아니었지만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의견을 끝맺었다.

「우리들은 지금 다음 세대의 컴퓨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기계를 인공지능기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참석한 많은 분들이 인공지능의 출현을 확실히 믿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라서 나는 제 5 세대 컴퓨터는 인공지능과는 좀 다르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을 믿지 않겠다는 것은 이상한 표현처럼 들렸다. 그 말은 마치 인공지능이 신비적 신앙의 대상이기라도 하다는 것 같았으며 또 그것이 경험적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 같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는 의견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것을 움직일 가장 훌륭한 프로그램 언어는 무엇인가, 또 컴퓨터를 지능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클까 등이 그가 언급한 것들이었는데 그 의문들은 4 반세기에 걸쳐진 인공지능 연구에 언제나 주요 이슈로 등장하던 문제이기도 했다.

제 5 세대 컴퓨터가 결국 새롭게 설계된 기호추론기계로 될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의 4 개 세대 컴퓨터를 개량하여 그 성능을 보다 크게 높인 것뿐으로 끝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분명히 들어날 것이다.

회의장 안에서 인공지능을 믿지 않는다고 소리높여 외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결국, 기계가 생각한다는 따위의 말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는 데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컴퓨터를 지능적으로 작동하게끔 제작할 수 있다.」고 처음으로 말했던 때로부터 그것에 반대하는 커다란 합창은 계속되고 있다. 컴퓨터가 아무리 지능적으로 작동한다 해도 아예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믿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믿는다> 라는 말은 기독교의 교리문집서에 따르면 종교상의 교리나 신조 (Dogma) 에 관계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때문에 신의 존재 따위는 믿지 않아요.」이런 표현법을 흉내내서 말한다면 인공지능의 반대론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하드웨어 (Hardware) 주의자이다. 때문에 인공지능 따위를 믿지 않는다.」

파이겐바움은 이런 식의 논리를 너무나 자주 들어온 나머지 이제와서는 짤막한 예화 하나씩을 꼭 들려주기로 하고 있다. 그 얘기 중의 하나로 위대한 물리학자 한 사람에 얽힌 일화가 있다. 어느날 박사의 거처에 젊은 과학도 한 사람이 방문했다. 젊은 과학도는 이 위대한 인물의 집 현관에 말의 편자가 붙여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것은 귀신을 쫓는 부적이었다.「선생님, 설마 이런 옛날의 미신을 믿으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그러나 박사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는 유쾌한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믿든 안믿든 그건 상관이 없지. 사람들이 퍽 효험이 있다고들 하니까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5. 마음을 위한 잠수구

(1) 지능을 증폭한다

다른 분야의 과학자들이 인공지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는 한 가지로 인공지능의 연구가들이 무책임하게 내뱉는 조악한 예언이 있다. 실현 가능성이 전혀 희박한 예언을 듣고 사실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58 년도에, 「10 년 이내에 컴퓨터는 체스의 세계 선수권을 획득할 것이다.」라는 예언이 있었다. 그 결과 10 년이 지난 후에는 많은 과학자들이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될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그러고도 20 년이 지나고서야 컴퓨터는 겨우 체스 토너먼트에서 우승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서툰 체스 경기자의 단계에서 훌륭한 경기자로 탈바꿈시킨 것은 차고나 지하실에 있는 잡동사니나 다름없는 인공지능이었다. 체스의 말을 놓는 컴퓨터는 이제는 세계선수권자와 동일한 수준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체스를 잘 둔다.

그러나 이러한 향상은 몇 안되는 사람들이 애정을 갖고 애쓴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처음의 예언에 의하면 체스 연구는 지능적 행동의 원칙을 발견하기 위한 시험대가 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지능적 측면에서 본다면 체스를 잘 두는 사람은 단지 체스에 강할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즉, 지능이란 전문화된 지식이라는 사실이다.

어느 분야의 전문가도 싫증내는 일이 없이 미래에 관해 예언한다. 그들과 비교해 보면 인공지능에 관한 예언은 다른 분야의 과학에 대한 예언보다 훨씬 잘 실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관한 예언을 들으면 다른 분야의 예언에는 가만히 있으면서 벌컥 화를 내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비교적 수월하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의 예언을 듣고 불유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본래 인공지능 자체를 불유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도대체 불유쾌한 것이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과학자들은 지능기계를 만들기 시작하고 있다. 이 기계의 목적은 인간의 지능을 증폭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잠수구와 같이 인간의 마음이 지금까지 절대로 미칠 수 없었던 곳까지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도구이다. 불유쾌하게 생각하면서 인공지능의 개발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가서는 안될 곳으로 가기 위한 도구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잠수구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기계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측면은 보려고도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인공지능은 그런 사람들의 자존심을 다치게 한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지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간 이외의, 더구나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을 지능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그의 자화상을 대폭 수정해야만 한다.」그들의 주장이다.

(2) 지식계급에게는 위협적?

실로 현실적으며 절박한 것인데, 지식계급은 전에 노동자계급이 경험했던 일들을 지금 경험하게 될 단계에 있다. 즉 자기들의 고유하고도 특수한 기능이 기계에 의해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MIT 공과대학의 교수 한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것은 실로 좋은 것이다. 나도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나는 인간을 좋아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인간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서 땅을 제일 잘 파는 쪽은 기계이지 인간은 아니다. 인간은 기중기처럼 무거운 것을 들어올릴 수가 없다. 비행기 없이는 잘 날 수도 없다. 트럭처럼 화물을 운반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간은 낙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기 때문이다. 증기해머 (Hammer) 가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증오심과 같은 마음으로 그 기계를 대했다. 체력이라는 점에서 기계에 추월당했다는 분노가 그들을 참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인공지능에 반대하는 사람들, 특히 지식계급의 사람들은 그런 기계가 나옴으로써 기계가 자기들보다 일을 더 잘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공지능이 가능하게 되어도 자존심 따위를 상하는 일 없이 객관적 입장에 서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그들은 기계의 본질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로써 가슴이 두근거리는 듯한 기대감으로 인공지능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기계를 하루밤 사이에 완성시킬 수는 물론 없다. 한 걸음 두 걸음 착실히 전진되는 것이다. 일반인들이야 별로 생각하지 않겠지만, 알고 싶은 것, 해 보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들, 그리고 인공지능이라면 어떤 일을 보다 빨리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 기계의 탄생을 환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빨리 실용화되었으면 하고 학수고대하고 있다.

한편, <지능> 이라는 말에는 사이비과학의 턱없는 내용이 담겨 있어 선험적인 엄밀성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컴퓨터의 작동에 <지능> 이라는 말을 붙여도 별로 이단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맥코덕은 생각하는 기계에 반대하는 의견을 19 세기에 범람하던 여성 멸시 풍조와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 아주 명쾌한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19 세기에는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지성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째서 여성은 사고할 수 없단 말인가? 감정적이기 때문인가? 남성과 여성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도 있단 말인가? 남성 수준으로 사고능력을 가진 여성의 실례가 없기 때문인가? 남성 수준으로 사고능력을 가진 여성의 실례가 없기 때문인가? 윤리적으로 그런 것인가?

처음 그녀는 이런 논의는 대학의 강의내용으로나 다룰 법한 얘기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이런 논의 속에는 굉장한 진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지능> 이란 정치적인 단어인 것이다. 그때 그때, 권력자에 의해 이 말의 의미는 결정된다. 따라서 그 의미는 참으로 탄력적으로 변한다. 이 사실을 알 게 되었을 때, 맥코덕의 경우에는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따위의 질문은 더 이상 문제거리가 아니게 되었다. 그런 트집은 아무 중요성도 없는 시시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6. 문맹, 그리고 컴퓨터 음치

(1) 컴퓨터는 맹장인가?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은, 「컴퓨터가 과연 그렇게 중요한가?」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대부분 <그렇다> 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현대생활에 있어, 컴퓨터는 우리 모두에게 큰 의미를 주고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에게 컴퓨터는 맹장과 같은 존재이다.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그것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에 관해서 이따금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컴퓨터는 인간을 기계나 로봇트와 같은 하잘 것 없는 존재로 떨어뜨리고 말 것이다.」라고.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그런 틀에 박힌 문구를 남발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왜냐하면 결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최근 해리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인구의 60 % 이상이 컴퓨터가 인간생활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컴퓨터는 유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사랑해야 할 존재는 아니다.

게다가 컴퓨터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추상적인 것이며 어딘가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세계의 것처럼 느껴진다. 1974 년 석유 위기는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인구폭발 또한 무서운 기세로 인류의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만일 어느 지방에 가뭄이 들면 그 지방은 심각한 용수난을 겼어야 한다. 그러나 컴퓨터의 고장이 그와 같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리란 퍽 어렵다.

현실적으로, 우리 생활에서 컴퓨터를 제거하면 큰 문제가 야기될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직접 목격하지 못할 뿐이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신문은 컴퓨터에 의해 편집되는데, 옛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집에 배달된다. 미국의 주간지 기사는 컴퓨터로 제어되는 인공위성으로 미국 각지의 인쇄소에 전송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잡지는 옛날처럼 우편배달부에 의해 배달된다. 숱한 과학의 혁명들이 이처럼 우리 눈에 띄지 않은 채 전진되고 향상되어 왔던 것이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다.

그런데도, 「그렇다고는 하지만 …」하면서 갖가지 단서를 붙이려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성의 상실이나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된다는 이유가 그들의 불평이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많건 적건간에 이와같은 의견은 나오기 마련인데 컴퓨터에 관한 여러 의견 속에는 얼마만한 것이 새로운 과학기술의 여파로 나오는 것일까? 사람들이 말하는 이런 여러 의견들은 보기조차 싫은, 혹은 두려운 기계에 대한 <당황> 을 그대로 반영하는 게 아닐런지?

컴퓨터와 인간의 대화는 이전과 비교하면 많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컴퓨터를 조작하고 사용한다는 것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쉽지 않다. 컴퓨터의 작동은 인간의 사고 방법이나 행동 양식과는 많이 차이가 있어 그것은 마치 이방인 같다.

그 결과, 우리들의 대부분은 컴퓨터와 어울리기 위해서 프로그램이라는 중개인의 주선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중세기 귀족이나 이집트의 왕과 닮았다. 그들은 글자를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다.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기의 힘을 빌어야 했다. 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그대로 쓰여졌는지, 자신이 전하고 싶은 테마가 잘 표현되었는지, 또는 도대체 자기 생각이 잘 전달되는지 어떤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기에 명령하여, 자기 생각을 정확히 전달할 것을 부탁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편지를 받는 쪽에서는 이런 일의 반대 현상이 생겼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서기에게 편지를 읽게 했다. 자연히 악의를 품은 서기에 의해 범죄가 저질러질 가능성이 컸으며 또 숱한 범죄가 저질러졌다. 실질적인 권력이 문자를 알고 있는 몇 명의 서기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던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문자를 읽을 수 없는 사람의 경우에, 글자를 쓴다는 기술은 기분이 나쁘고 불안한 것이다. 아마도 문자를 읽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다만 그 이유만으로도 쓴다는 사실에 저항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글을 쓸 수가 있었다면 상당한 수준의 힘을, 특히 지적인 힘을 소유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황폐한 집》은 정보의 가치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작품 속에는 <죠> 라는 문맹인 굴뚝 청소부가 등장한다. 그는 하루에도 수천 미터의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다니지만 상점이나 길모퉁이, 창문 등에 쓰여진 신비한 기호의 의미를 전혀 모른다.

「사람들이 글자를 읽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들이 뭔가를 쓰고 있는 것을 본다. 우편배달부가 편지를 배달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는 그 글자들에 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는 소경이나 다름없는 인간이었다. 저것들이 대체 무엇을 뜻하지? 하고 때때로 생각해 보지만 그런 때마다 그는 더욱 난처해질 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는데 어째서 나한테는 의미가 없을까…」

(2) 컴퓨터가 여는 세계

컴퓨터에 관한한 많은 사람들이 죠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자> 로 읽을 수 있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 그 점을 이해하고서, 우리는 「문자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의 뜻을 가장 넓은 뜻으로 파악하려든다. 신문의 안내광고는 읽을 수 있지만 대중소설은 읽을 수 없다는 사람도 있으며 상거래의 메모는 읽을 수가 있지만 쓰지는 못한다는 사람도 있다. 시인이나 작가는 단어를 도구로 삼아 선택하고 갈고 닦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고 만족시키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자연적인 사고방법을 그 시대의 기술과 조화시킨다는 과제는 결코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읽고 쓰기를 배우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잊고 있다. 또 지금도 읽고 쓴다는 문제를 장벽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은 잊고 있다. 만약, 어린이들이 읽고 쓰기를 배우면서 그와 동시에 컴퓨터 기초기술을 배워나간다면 그들은 컴퓨터에 대해 아무 두려움 없이 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참으로 몇 안되는 어린이만이 컴퓨터를 배우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읽고 쓰는 문제에 장벽을 느끼는 사람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참으로 풍성한 마음의 세계에 닿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은 변하고 있다. 그러나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에겐 그런 세계란 참으로 불가사의한 장벽, 바로 그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컴퓨터에 관해서 알고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다른 하나의 세계가 열린다. 지금 누구나 문자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머지 않아 누구라도 컴퓨터의 세계에 일상적으로 들어가 살 게 될 것이다. 그것은 펜이나 신문이 우리에게 준 힘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힘을 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정말 보람있는 전진이 아닐가? 특별한 목적을 가진 수많은 기계에 의해서 우리의 힘이 놀랍도록 증폭된 것처럼 우리는 컴퓨터에 의해서 마음의 힘을 증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컴퓨터는 우리들의 사고의 내용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사고 방법을 변화시킨다. 컴퓨터의 네트워크를 좀더 효율적으로 만들어나가려는 것도 이와 같은 변화의 작은 실례인 것이다.

7. 컴퓨터의 미래도

(1) 상식이 오히려 어렵다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논의는 10 여년 전부터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불꽃들은 한 줌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불이 꺼진 이유 중의 하나는 인공지능과 그것에 관한 논리를 통하여 우리들이 과학을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 우리들이 사고에 관해서 얼마나 애매한 이해밖에는 갖고 있지 못했던가 하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조상은 「지구는 평평하다. 절대로 둥글지 않다.」는 겉보기에는 그럴 듯한 가정을 믿었었는데 지능기계에 대해서도 현대인들의 생각은 거의 마찬가지였다.

그 불이 꺼진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프로그램 자체의 위력이었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잘 훈련된 지적 전문가와 동일한 수준으로 기계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비록 그것이 의학계에서의 진단과 같은 작은 영역의 것일지라도 기계가 지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부정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80 년대의 초기에는 지능기계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해도 별 물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기계는 대단히 일을 잘한다. 대량의 기호를 필요로 하는 과제에서 뿐만 아니라 고도의 전문적 훈련을 필요로 하는 과제에 있어서도 기계는 경우에 따라서 자기를 가르쳐온 선생님보다 우수할 수가 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이내에 보고 듣고 사태를 이해해야 할 경우, 그 기계는 능숙하지 못하다.

연구가들 가운데는 물리학 기초를 이해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한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그 위에 함부로 올라앉으면 부숴진다.」는 등의 아주 기본적인 물리학 분야이다. 기초적 심리학을 프로그램화한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그녀에게 계속 열중하다 보면 마침내 그녀도 내게 마음을 주게 된다.」는 따위의 심리학이 그것이다. 그러나 컴퓨터에게 상식을 가르치기에는 오랜 세월이 흐를 것이다. 왜냐하면 상식들 중에는 너무나 많은 일상적 지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를 기계에게 이해시키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언어가 상식의 세계에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하나의 역설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수학, 논리학, 유전자를 분리하는 능력, 그리고 도구를 사용하여 지질구조를 추리하는 능력 등은 그야말로 인간이기 때문에 비로소 해낼 수 있는 분야라고 득의만만해왔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컴퓨터가 가장 용이하게 해낼 수 있는 분야이다. 왜냐하면 보다 고도로 축적된 지식을 컴퓨터가 알 수 있게 부호화시키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그것과는 반대로 현실의 세계 속에서 살아나간다는 문제는 그처럼 고도로 구축된 과제가 아니다. 개나 고양이가 현재의 세계 속에서 살아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기계에게는 그것이 쉽지 않다. 물론 기계가 상식문제를 다루는 것이 앞으로도 계속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그렇다는 것뿐이다.

(2) 일본인들, 그곳에 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컴퓨터 속에 강대한 힘을 갖는 도구를 조립해 넣었다. 우리는 이제 컴퓨터에 지능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안된다는 이유는 없다. 인간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런 일을 하고 싶다고 언제나 생각해왔다. 인간의 야심을 역사에 기록하게 된 후에, 인간은 그러한 기계를 만들어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왔다.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에 나온 인공지능에 관한 문헌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술적인 생물체, 주술의 대상으로 그려진 생물체 등에 관한 것을 들춰봐도 그렇다. 그런 생물체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 그대로의 특징을 가진 것이 있는가 하면 예기치 않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마법으로 부릴 수 있는 종, 파우스트에서 나오는 하인, 중국 주나라 시대의 로봇트, 일본 신사의 인형기계 등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역사를 통해 줄기차게 이런 상상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커다란 일의 끊임없는 진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일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어, 맥코덕은 심지어 거기에 어떤 맥이 흐르지 않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것은 프랑스의 화가 샤르댕의 표현처럼 무엇인가가 이미 진행되고 있으나 직선적으로 나가지는 않고 마음이 내키지 않은 듯 쉬엄쉬엄 앞으로 나가는 것과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는 거기에 커다란 흐름이 있음을 분명히 알 게 된다. 그것은 회피할 수 없는 흐름이며 신의 계획처럼 확고부동한 것이다.

20 세기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그 꿈이 구체화된 형태로 실현되기 시작했다. 컴퓨터는, 그 초기의 볼품없고 짜증스러운 기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희망에 따라 우리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켰었다. 그리고 컴퓨터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킬 것이다.

마침내 일본인들이 그곳에 갔다. 그들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려고 한다. 이 컴퓨터는 인간처럼 말을 한다. 그림을 보여주기도 하며 사람의 말을 이해하기도 한다. 그것은 단지 계산만 하는 컴퓨터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 기계는 지능적으로 생각할 줄 알며, 추리하고 이해하며 행동까지 한다.

일본인들은 거기에 가기 전에 제 5 세대 컴퓨터 계획이라는 것을 이미 발표했다. 그러나 제 5 세대의 중심이 된 아이디어는 일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적인 것도 영국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 인 것이다. 그것은 어느 나라 사람이 만든다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가 그것을 맨처음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본다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보면 누가 그것을 최초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는 커다란 경제적 의미를 갖는다.

우리들의 아들의 아들 시대에는 지능기계가 일상생활 속에 확고히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것은 TV 가 오늘의 생활 속에 하나의 필수품으로 정착한 것과 똑같이 우리의 생활필수품이 되는 것이다.

파이겐바움은 이 모든 것을 컴퓨터의 미래도라는 면에서 보기를 좋아한다. 미국의 국가로서의 미래도는 초기에 이미 예견되었었다. 미국의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동해안쪽의 13 주를 대표할 뿐이었는데도 그들은 서부쪽의 주들이 장래에 어떤 역할을 담당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었다. 그리고 그 주들을 총괄하기 위해서는 헌법을 어떻게 기초하는 것이 현명한가도 논의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컴퓨터의 미래도도 초기의 이 시점에서 충분히 예견할 수가 있다. 지능기계를 만든다는 일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시대에 이미 선견지명이 있는 과학자들은 「그것은 반드시 된다.」고 믿고 쉬지 않고 일해왔다. 그런 노력을 통해서 그들은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일본인들은 똑같은 아이디어를 말함에 있어 독자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신세대 컴퓨터 기술개발 기구의 소장이며 제 5 세대 컴퓨터 계획의 핵심인물인 엔이찌 하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식정보처리 시스템으로 가는 길은 실천적 철학이며 그것은 컴퓨터과학이 가야 할 필연적인 목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으며 피해서도 안됩니다. 문제는 전진하는가, 아니면 멈추는가 하는 두 가지 뿐입니다. 행선지에 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