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반성, 자유의지, 의도

(Self-reflection, free will and intentions)

 

컴퓨터와 마음 : Philip N. Johnson-Laird 지음, 이정모. 조혜자 옮김, 민음사, 1991, Page 425~445 (원서 : The Computer and the Mind: An Introduction to Cognitive Science, Harvard Univ. Press, 1988)

 

병렬처리와 심적 구조

운영체계로서의 의식적인 마음

의식과정과 무의식과정의 분리

자기반성과 자아에 대한 모델

자기반성, 자유의지, 지향성

결론

 

의식과 무의식적인 마음 (The Conscious and the Unconscious Mind)

……여러분은 인간의 만족은 전 범위를, 통계적인 도표들과 과학 경제적 공식에서 나온 평균치로부터 추론한다. 여러분은 부와 자유, 안정, 번영 들을 좋은 것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도표에 나온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 반동주의자거나 미친 사람이 될 것이다. 안 그럴까? 그러나 …… 모든 통계가들과 전문가들, 그리고 박애주의자들까지도 인생에서 좋은 것들을 열거할 때 항상 특수한 한 가지를 빠뜨리는 것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 ……

더욱이 과학은, 사람들이 의지나 공상을 사실상 가지고 있지 않고 과거에도 가져본 적이 없다고, 그리고 사람이란 피아노 건반이나 손풍금통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 그리고 자연의 법칙은 지구상에 여전히 존재하며, 따라서 인간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건 간에 인간 자신의 의지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말 말할 나위도 없이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한다 …… 물론 모든 인간 행위들은 그러한 법칙들에 의해서 수학적으로, 마치 지수함수 도표처럼 작용되어야만 할 것이고, 그리고 연감에 기록될 것이다……

개개인 자신의 자유와 속박받지 않는 의지력, 개인 자신의 변덕, 그리고 얼마나 기발하건 간에 개인 자신의 환상은 때때로 광기의 지점에까지 이르지만 최선의 것이며 가장 좋은 것이다. 그것은 어떤 범주에도 맞지 않기 때문에 결코 고려되지 않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생략하게 되면 모든 체계와 이론 들은 항상 몰락하고 말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Dostoevskii)

 

인지과학은 많은 심적 기능들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전 장들에서 우리의 로봇에게 시력과 기억 및 사고의 기본능력을 갖추게 하면서, 신비주의적인 관점이 아닌 계산주의적 관점에서 심적 기능들을 설명해 왔다. 그러나 데카르트로부터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는 인지과학에 대한 반대자들이 계속 지적하는 것처럼, 자동기계 (automaton) 는 자체의 의지를 갖고 있지 않으며, 느낌도 갖지 않고, 의식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대한 능력들> 은 도대체 계산 가능한 것일까 ?

철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긍정적으로도 대답하고, 부정적으로도 대답해 왔다. 지프 (Paul Ziff) 와 같은 학자들은 피와 살로 만들어진 존재들만이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논의하였다. 퍼트남 (H. Putnam) 과 같은 학자들은 주관적인 경험이 자동기계 내의 어떤 상태와 비슷하다고 논의하였다. 이는 크레익과 튜링의 관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두 관점은 모두 직관에 의존하고 있고, 따라서 직관과 반대되는 양자 역학과 같은 이론이 성공함에 따라 직관에 의존하는 접근이 신뢰를 잃게 되었다.

의식이 무엇이며, 의식이 어떤 목적에 맞는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많은 심리학적 이론들이 있다. 험프리 (Nick Humphrey) 는 의식이 가장 복합적인 문제, 타인과의 사회적인 상호작용에 대처하는 데 사용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의식은 여러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직접 접근하도록 하기 때문에, 타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상상하는 것도 가능하게 도와준다. 맨들러 (George Mandler) 는 의식이 행위를 지배하는 심적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특정 처리 양식에 의존하고 있다고 논의하였다. 샬리스 (T. Shallice) 는 더 나아가서, 의식은 무슨 행위를 취할지, 어떤 목표를 추구할지를 결정해 준다고 논의한다. 즉 의식은 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최종의 항소심 법정인 셈이다. 이러한 설명들은 모두 그럴 듯하다. 그러나 어느 것도 총체적인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계산주의 모형에 기초해서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에 대한 하나의 이론을 개괄해 보려 한다. 나는 마음의 구조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고 나서, 자아에 대한 심적 모델의 개념을 발전시키려고 한다. 나는 어떻게 그 이론이 우리에게 자각될 수 있는 것과 자각될 수 없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지, 자기반성과 자유의지, 지향성 (intentionality) 을 포함하는 주관적인 경험 현상을 다룰 수 있는지를 보일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나는 그 이론을 동기와 정서에까지 확장시킬 것이다.

병렬처리와 심적 구조

어떤 이론가들은 심적 현상을 의식으로만 파악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신경생리학의 문제로 본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은 의식 경험을 일으키는 신경생리학적인 사건들의 상태와, 예를 들어 기억 속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떠올려 의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그러한 신비로운 힘에 대해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두 상태들은 모두 동일한 내용을 표상하기 때문에,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일 수 있는 심적 표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보인다.

다른 이론가들, 특히 프로이트는 무의식적인 저장고를 상정하였다. 무의식적 저장고에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충동들과, 의식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많은 불안을 야기시키므로 억압되는 것들이 저장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헬름홀츠가 논의하고 내가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지각과 인지의 기저에는 억압에 의한다고 보기 힘든, 긍정적인 무의식 과정들도 많이 존재한다.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많은 각기 다른 심적 과정들이 병렬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 각기 다른 처리기들이 마음에서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병렬처리기들은 우리가 말하거나 걸을 때, 또는 걸으면서 말할 때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제한다. 병렬처리기들은 또한 기술 (skill) 의 위계적인 조직을 잘 다룬다. 예를 들어 담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성 파악, 단어 재인, 문법구조 분석, 의미표상의 구성, 추론을 다루는 개별적인 처리기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들 각각은 다른 활동들과의 상호관계를 가지고 절묘하게 시간을 맞추는 것이 요구된다. 그 처리기들은 말소리의 파장형태를 원자료로서 취하고 그것을 이해라는 마지막 생산품으로 변형시키는 , 공장 생산라인에서의 노동자들처럼 함께 작동해야 한다.

병렬구조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설계는 처리기들이 의사소통이 되도록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망체계, 즉 유한상태 장치로 되어 있다. 하나의 처리기는 다른 처리기의 세부작업을 관찰하거나 방해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서로 정보를 전달할 뿐이다. 그것들을 동시화 (synchronize) 시키기 위한 중앙 시계는 없다 : 각각의 처리기는 적절한 입력정보를 받아 들이면 곧장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 설계에는 많은 변형이 있다. 의사소통 통로는 분명히 구조화된 상징 메시지들을 전달할 수 있다. 그 상징 메시지들에 대하여 처리기들은 하나의 산출체계 (제 9 장 참조) 의 조작처럼 분명한 규칙 지배적인 조작을 수행해 내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일어나도록 조정된 똑같은 절차를 각 처리기들 모두가 동시에 수행할 수도 있다. 이는 지난 10 년 동안 만들어진 <배열 (array)> 컴퓨터와 같은 것이다. 한편 처리기들은 단지 활성화 수준만으로 의사소통할 수도 있다. 이때 각각의 처리기는 입력정보 활성화의 합에 기초하여 동일한 단순 절차에 따라 반응한다 (제 10 장의 연결주의 체계 참조).

병렬처리가 취하는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그것이 보편 튜링기계와 같은 단일 계열처리기에 의해 계산될 수 없는 것을 계산해 낼 수는 없다. 처리 불가능한 탐색 (search) 문제를 처리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과 계산과의 관계는 마치 맬서스 (Malthus) 의 인구증가 이론과 문명의 관계와 같다. 병렬처리기가 행할 수 있는 것은 처리 가능한 절차들을 가속화시키고, 처리체계가 잡음이나 손상에 의해 영향받는 것을 줄이기 위해 동일 과제를 행할 처리기들을 여러 개 허용하는 것이며, 특정과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즉 전문적인 <단원들 (modules)> 을 형성하는 처리기 집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여러 인지과학자들이 언급했던 것처럼, 뇌는 독립된 단원들로 분화되지 않고서는 진화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속도와 신뢰성, 전문성은 분명히 진화적인 이점을 지닌다. 그러나 병렬 계산에도 역시 위험은 있다. 만일 하나의 처리기가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하나의 입력을 기다릴 때, 마찬가지로 후자도 전자로부터 입력을 취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면, 그 둘은 모두 빠져나갈 수 없는 치명적 교착상태에서 마비될 것이다. 비슷하게, 만약 하나의 처리기가 <왼쪽으로 움직이라> 고 말하고 다른 처리기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라> 고 말한다면, 유기체는 두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려고 노력함으로써 그 자체가 찢어져 분열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는 정상적인 유기체에게는 발생하지 않는다 : 자연선택 (도태) 은 여러 처리기들 사이의 병리적인 연결들만을 제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신경체계에 내장된 행동들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학습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경우, 프로그램들이 여러 처리기들에 걸쳐 분산될 때 새로운 병리현상들을 다루는 기제를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여기에서 하나의 단순한 원칙을 세울 수 있는데, 한 처리기가 다른 처리기들의 조작을 감시하도록 하고, 만약 그 처리기들이 병리적인 형태의 교착상태에 빠진다면, 그것들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 설계가 큰 규모로 복사된다면, 그 결과는 하나의 위계적인 구조가 되는 것이다. 이는 19 세기 이래로 신경 과학자들이 제안해 왔던 신경체계에 대한 구조이다.

운영체계로서의 의식적인 마음

단순한 의식, 예를 들어 통증과 같은 사건의 자각이라 할지라도 그 근원은 병렬처리의 망에서 시작하여 상위 수준의 감찰기 (monitor) 가 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위계의 최상에 있는 이러한 <운영체계 (operating system)> 는 하위 수준의 처리기들에 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들의 수행을 감시한다. 운영체계는 최상에 있기 때문에 그것의 지시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라>. <걸어라> 와 같이 분명한 상징적인 용어로 목표를 명시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떻게 근육을 수축하는가에 대한 세부적인 지시들을 보낼 필요는 없다. 그러한 지시는 근방추의 수축에까지 이르는 하위 수준에 있는 처리기들에 의하여 점차 더 세밀한 형태로 형성될 것이다 (제 11 장 참조). 운영체계는 하위 처리기들에서 나온 계산의 결과를 받아들이나, 상위 수준의, 그리고 분명히 상징적인 형태로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실제의 세상은 아주 생생하다. 따라서 존슨 박사는 버클리의 관념론을 단지 돌을 걷어차기만 해도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현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심적 구조가 있기에 가능하다. 운영체계는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처리과정들에까지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열치를 옹호하는 진화론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만약에 여러분이 지각의 전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으려면, 그것은 병렬처리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훨씬 느리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 여러분은 지각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위급상황에서는 결정적인 결함인 것이다.

로봇도 병렬 계산구조를 가질 수 있다. 위계의 가장 위에 있는 운영체계는 로봇의 행위를 계획하는 것과, 로봇이 갖고 있는 세상 모델에 의한 피드백을 통해 행위들을 감시하는 것을 책임질 수 있다. 운영체계의 계산에 따라서 로봇의 작업 기억의 내용들은 때로는 하나의 목표로, 때로는 세상 모델의 특정부분으로, 때로는 로봇 자체의 내적 환경에서 나온 하나의 신호로, 때로는 장기기억에서 인출된 정보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로봇의 의식으로서, 가능한다 : 그 내용들은 위계의 최상위 수준에서 계산을 수행하는 어느 순간에 로봇이 자각하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의식과 위계상 하위에 있는 무의식적 처리들은 분리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한 분리 (dissociations) 가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것이다.

의식과정과 무의식과정의 분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저 새를 보세요>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가시적인 세상 내에서 새를 찾거나, 아니면 그렇게 하기를 그만두거나 할 수 있고, 그 결정은 의식적일 수 있다. 그러나 불수의적인 눈 움직임과 주의의 변화는 무의식적인 과정에 의해서도 발생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칵테일 파티 장소에서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이 대화 중에 여러분의 이름을 언급한다면,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여러분의 주의를 끌게 된다. 이것은 적절한 소리 형태가 제시된 후 그것을 소생시킬 때까지 잠복해 있는 처리기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현상이다 (제 8 장 참조).

어떤 경우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을 통제하고 싶어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정말로 담배를 끊으려고 의도하지만, 그 의도를 실천에 옮길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와일드 (Oscar Wild) 의 말처럼, 어떤 사람들은 유혹만은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상황마다 변화한다. 우리들은 종종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 : 우리는 그러한 감정의 표현을 억제하기도 하지만 그 감정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현상 기저에 놓여 있는 것은 내적인 갈등이다. 운영체계와 같은 계열적인 처리기 내부에서는 갈등이 있을 수 없지만, 다른 처리기들과는 갈등 상태에 놓일 수 있다 : 운영체계는 하나의 목표를 갖고, 다른 처리기들은 또 다른 목표를 갖는 경우이다. 그 갈등은 처리기간의 상호 작용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 만약에 갈등이 운영체계에 유리하게 해결이 된다면, 여러분은 의도된 행위를 수행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실패하고, 의도하지 않은 다른 행동이 나타날 수가 있다.

자기자만은 또 다른 형태의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를 보여준다. 그것은 히스테리성 마비에서 가장 심하게 나타난다. 히스테리성 마비는 신경체계의 손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동기들에서 비롯된다. 프로이트의 사례사들에 대해 의심을 품는 사람들은 에이드리언 경 (Lord Adrian) 이 어떻게 1 차 세계대전 동안의 <포탄 신경증> 으로 인한 신경 마비를 치료했는지의 설명을 들어야 할 것이다. 에이드리언은 후에 생리학 연구로 노벨상을 탄 사람이다. 그는 그의 히스테리성 마비환자들이 꾀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비되고 있다고 정말로 믿었고, 따라서 에이드리언이 그것은 마비가 아니라고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 병은 회복되지를 않았다. 그는 그 질병을 발생시킨 무의식적인 과정의 허를 찔러야만 했고, 따라서 그는 그 마비증세를 진짜 마비처럼 치료하면서, 환자들에게 그 병은 특수치료법으로 치유될 것이라고 설득시켰다. 그는 약한 전기적 흥분을 주는 철망 솔로 병에 걸린 수족을 문질렀다. 이 절차를 통해 90퍼센트 이상의 환자들이 치료되었다. 의지주의적인 형태의 심리치료도 동일한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즉 무의식적 과정 내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의식분리의 인상적인 현상은 바이스크란츠 (Larry Weiskrantz) 와 그 동료들이 기술한 <맹목 (blindsight)> 현상으로서, 내 동료인 마르셀 (Tony Marcel) 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어떤 환자들은 뇌의 시각 담당 부위에 손상을 입은 후, 시야에서 많은 영역이 장님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보고한다. 그들이 못 본다는 것은 임상검사에서 분명히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 환자들에게 안 보이는 시야의 영역에 비쳐지는 한 점의 불빛의 위치를 추측하도록 강요하면, 그들은 그 위치를 아주 잘 알아 맞춘다. 어떤 하위 수준의 시각과정들은 계속 기능을 하고 있지만, 상징적인 결과를 더 이상 의식으로 산출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미묘한 분리현상을 일으키는 외과적인 수술 (개입) 이 있는데, 그것은 <뇌 분할 (split - brain)> 수술이다. 그 결과는 뉴욕의 코넬 의료 센터의 가자니가 (Mike Gazzaniga) 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 만약에 여러분이 자기 앞에 있는 장면의 한 점에 눈을 고정시킨다면 그 점의 왼편에 있는 모든 것은 뇌의 오른편으로 투사되고, 오른편에 있는 것은 모두 뇌의 왼편에 투사된다. 정보는 방대한 신경섬유 다발, 즉 뇌량에 의해 한쪽 뇌반구에서 다른쪽 뇌반구로 신속히 전달된다. 뇌 분할 수술은 극단적인 형태의 간질을 통제하기 위해 실시된다. 외과의사는 왼쪽의 대뇌 피질을 오른쪽의 피질과 분리시키기 위해서 뇌량을 절단하는 것이다. 그 수술은 아주 유익하기도 하지만, 이상한 부작용을 낳는다.

가자니가가 처음으로 발견했던 것은 수술 후 환자들이 왼쪽 시야에 있는 대상의 이름을 대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 그 물체는 뇌의 우반구에 투사되지만 언어 담당 영역은 뇌의 좌측반구에 있기 때문이다. 정보는 한 반구에서 다른 반구로 더 이상 전달될 수가 없고, 따라서 환자들은 자신이 그 물체를 보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그것이 무엇인지를 추측게 하면 그때 환자들의 느낌은 그들이 실제로 그것을 볼 수 있을 때 갖는 느낌과 거의 유사하였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그림을 보고 놀랐지만, 자신의 공포감에 대한 이유를 실험자의 태도 때문이라고 엉뚱하게 귀인시켰다. 비슷하게, <걸어라> 라는 명령이 우반구에 투사되면, 그 환자는 일어나서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왜 걷느냐고 물으면, 좌반구는 그 명령을 지각하지 못하므로 그 설명을 하기 위해 엉뚱한 이야기를 꾸며내었다.

만약에 내가 내 소형 컴퓨터에서 냉각 팬을 제거한다면, 그 기계는 곧 어떤 계산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컴퓨터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냉각 팬이 계산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추론상의 오류가 뇌손상 연구에서 항상 일어나는 위험이다. 가자니가는 그런 오류들에 저항하여, 좌뇌 사고 (분석적) 와 우뇌 사고 (직관적) 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한때의 유행을 거부하였다.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의 분리현상을 심리학에서 이론 형성하는 방식에 시사점을 준다. 무의식적 심적 과정들은 규칙 지배적인 상징 조작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제 10 장에서 본 연결주의 체계에서처럼 분산적인 표상형태에 의존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의식적인 사고는 분명하게 상징화된 조작양상으로 무의식적 과정들을 수용 (accommodate)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소리를 우리가 의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알파벳 글자들처럼 소리들이 연결되어 구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개념들을 생각할 때, 의식적으로 내린 정의 (definition) 처럼 필요조건과 충분조건들을 갖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사고 자체에 대해 생각할 때, 논리학자들이 명료하게 공식화한 것과 같은 논리적인 형식 규칙들에 의해 사고가 지배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이 책의 앞부분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이러한 신조는 잘못된 것이다.

자기반성과 자아에 대한 모델

자각 (awareness) (주석 : awareness : 엄밀하게 번역하자면 <알아챔> 이란 의미의 <수지> 라는 번역이 적절하겠으나 일반 독자가 친숙하지 않으므로 <자각>으로 번역한다.) 의 주관적인 경험, 즉 통증의 실제 느낌이나 갈증, 또는 빨간색에 대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 왜 어떤 상태들은 의식적으로 경험되고, 다른 상태들은 그렇지 않은가 ? 지금까지 제시한 이론은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이 구별되어 있다는 것만을 말할 뿐이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는다. 제임스 (William James) 가 주장했듯이, 무의식적 과정들은 각기 독립적으로는 의식적이지만, 의식적인 마음에 이 사실을 전달할 방도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보다 그럴 듯한 생각은, 무의식적 마음과 의식적 마음 간에는 진정한 차이가 있고, 의식적인 마음은 자각이란 주관적 경험을 만드는 특정한 처리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일단 조작체계가 작동되면 그것은 그런 하나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고, 내가 믿기로는 이러한 처리양상이 우리의 자기자각 (self - awareness) 능력이다. 여러분은 스키타기와 같은 어떤 활동에 몰두할 수 있다. 아니면 여러분은 지각하고 행위함으로써 여러분 자신을 자각하게 될 수 있다. 이러한 자기자각의 상태는 일상적인 자각과는 구별되지만, 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특정한 현상적 특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자기반성 (self - reflection :  자성) 은 자기자각과 유사하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한 통합감, 연속감, 개별감을 가진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한 역사, 성향, 선호,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내적인 마음의 작용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상위 수준의 선택과 의도에 대한 정보를 가진다.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 그리고 여러분은 무엇을 행할지 결정할 때에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내가 논의코자하는 자기반성은 자기자각과 동일한 양상의 처리과정에 의존적이지만, 그것은 또한 특정한 심적 표상, 즉 어느 정도까지는 처리체계로 하여금 그 자체를 이해 가능케 하는 표상 내용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처리기, 즉 단순한 자동기계가 그 자체를 이해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

하나의 가능성은 튜링기계에 의해 지적된다. 즉 빈 데이프가 제시될 때 이진 부호로 튜링기계 그 자체에 대한 기술을 프린트해 내는 것이다 (보편 튜링기계의 계산을 모사하여 실행한다). 자기기술적 튜링기계를 고안한다는 것이 사소한 작업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가장 손쉬운 접근법은 튜링기계의 지시들 각각을 프린트하기 위해 지시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프린트하라> 는 지시 역시 프린트될 필요가 있고, 이런 식의 필요는 순환적으로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그 해결책은 이진 숫자가 주어질 때 그 숫자를 만들어내는 기계상태의 기술을 프린트하는 특정절차의 개발에 달려 있다.

어떤 컴퓨터 과학자들은 자기기술적 튜링기계는 내성능력을 갖는다고 믿는다. 그것은 그 자신에 대한 기술을 하고, 바로 그 기술은 자기재생산에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DNA 분자가 유전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튜링기계는 자기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민스키 (Marvin Minsky) 는 한때, 자기기술적 튜링기계는 그 자신의 기술을 행할 것인지를 계산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 착상은 아주 좋은 것이지만, 그것은 자기반성을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기계는 그 자신의 내적 작용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기술에 접근하게 되기 때문에 그 자신을 완전히 모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기 기술에 의존하기보다는 심적 모델에 의존하는 것 같다.

어떤 것이 모델이 될 수 있는가는 그것이 하나의 해석체계에 의해 사용될 수 있는가에 의존한다 : 로봇의 행동이 어느 정도 세상에 대응되는 내적 표상에 의해 주도된다면, 로봇은 세상에 대한 모델을 갖는 것이다. 로봇이 구멍에 대한 표상을 가지고 있고, 어떤 길로 가야 할지를 결정할 때 그 표상을 사용하기 때문에, 로봇은 구멍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비슷하게 로봇의 조작체계는 그 자신에 대한 모델, 즉 로봇의 역사, 선택지, 선호, 작업 등을 사용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조작체계의 선택지들 중 하나는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그 자신에 대한 모델을 사용하는 것이고, 또한 이 선택은 다시금 그 모델 내에 속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에는 약간의 역설적인 문제가 있다. 그러한 순환은 악순환은 아니지만, 자기반성이나 자기자각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그리고 특수한 형태의 처리를 필요로 한다. 이 처리는 운영체계가 자신의 조작에 대한 모델을 구성할 것을 요구하고, 이 조작 모델을 그 처리과정들을 주도하는 데 활용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자기반성> 절차는 그 자신의 출력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체계는 그러한 모델들을 스스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모델을 구성할 수 있고, 계속 상위 수준으로 올라가며 그런 식으로 표상을 형성할 수 있다. 유사하게 동일한 양상의 처리가 조작체계의 작업기억 내용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정상적으로 지각을 한다면 세상에 대한 모델이 생성되는데 로봇은 작업기억 내의 이러한 내용들이 무엇인지를 그저 약간 감지할 뿐이다. 그러나 조작체계는 그러한 내용을 처리하는 자신에 대한 모델로 그 내용을 대치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세상을 지각하고 있는 그 자신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경험에 대한 모델을 요청할 수 있고, 그래서 세상을 지각하고 있는 자신을 지각하고 있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다. 자기반성 절차는 하나의 구조 내에 다른 구조를 순환적으로 삽입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는 문법 규칙들과 관련해서 논의했던 것이다. 단, 조직체계가 수준과 수준 사이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은 다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수준에서 무엇을 행할지를 결정했다면, 하위 수준에서 이러한 지식을 활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순환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무한한 소급 가능성은 제한된 작업기억의 용량 때문에 정지되게 된다.

자기반성에 대한 이론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자. 그러나 그것을 지지할 증거가 있는가 ? 이 가설은, 유물론자들이 논박할 것처럼, 잘못된 것일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 행동에 대해 추리를 하고 설명하기 위해 반성과 의도라는 틀을 사용하는데, 그 가설은 이러한 반성과 의도라는 틀이 부수현상 (epiphenomenon) 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주도하는 인과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사실상 앞으로 보겠지만, 그 이론은 다양한 현상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자기반성, 자유의지, 지향성

조작체계가 자신의 모델에 접근할 수 있고, 그것을 자기반성적 양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가설은 의식 경험에 대한 많은 관찰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여러분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 실제 수행에서 보다는 상위 수준에서 ─ 반성할 능력을 가지며, 이러한 반성의 결과로 자신의 수행을 수정할 능력을 지닌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성공하고, 어떤 한 문제에 쩔쩔매게 된다면, 여러분은 자신에게 <나는 이 문제들을 해결할 때 무엇을 하고 있는가 ?> 라고 물을 수 있다. 그에 대한 답변은 여러분이 자신의 수행을 자세히 조사하는 능력에 근거한다. 즉 여러분 자신은 한 단계 올라서서, 자신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얻은 답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실제 수행수준에서 어떻게 진행해야 할 것인지를 재구성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여러분이 자신의 수행에 대한 모델을 사용하는 능력은 <메타 인지적 (meta - cognitive)> 기술의 근거가 된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떻게 사물들을 기억하는지를 생각해 보고, 여러분의 능력 개선을 위해 교정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여러분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리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 어려운 사회적 상황을 접했을 때 대처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여러분은 자동차 운전과 같은 실제적인 기술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지속적인 오류를 피하기 위해 의식적인 방략을 채택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자기반성적 처리 개념이 예언해 주는 대로, 여러분은 여러분이 특정한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생각할 때, 여러분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 <이 문제는 과거에 내가 풀었던 방법을 생각함으로써 다룰 수 있는 문제들 중 하나이다 ; 그렇지만 나는 이런 능력을 사용할 때는 언제나 이전에 성공했던 것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여러분은 어떤 계획을 따를 때, 고착된 행위 순서를 따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관찰하고, 그 결과로 계획을 수정하기도 한다. 때로는 계획을 포기하기조차 할 수도 있다. 여러분은 계획을 수행할 때, 특히 여러분이 자신의 상상력을 활용하고 있다면 (제 14 장 참조), 도중의 여러 시점에서 많은 선택지들 가운데서 선택할 자유를 갖는다.

내가 여기에서 뜻하고 있는 자유의 개념은 의지의 자유 (freedom of will) 이다. 이는 데카르트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정신과학에 대해 의심을 제거하면서 불러일으켰던 심적 성향이다. 과학자들은 종종 자유의지는 환상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반성적 사고의 능력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 논의는 독자에게 간단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

여러분이 만일 자유 의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내가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발견하려고 한다면, 이 책을 계속 읽겠다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여러분은 여태껏 인지과학에 대해서는 충분히 읽었으므로, 산보를 나가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다. 가능성은 아주 많은 것이다. 때때로 여러분은 의식적인 생각 없이 일련의 행위를 채택한다. 반면에 두 개의 똑같이 매력적인 대안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때에는, 여러분은 자신에게 <이건 말도 안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단 말이지> 라고 말하고서, 여러분은 상위 수준의 반성을 통하여 임의적인 결정을 할 수도 있다. 여러분은 그것이 외부적인 수단을 통해 확실히 임의적인 확실히 임의적이 되도록 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동전을 굴리거나, 라인하트의 소설, 『 주사위 던지는 사람 (Dice Man) 』의 주인공처럼 주사위를 던질 수도 있다.

가장 하위 수준에서, 여러분은 전혀 의식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단지 읽기를 계속하거나, 산보를 가거나, 무슨 다른 일이거나 하는 것이다 :

메타 수준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행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예를 들어 단순한 선호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린다.

여러분은 이러한 선택방법에 어떻게 도달하였는가 ? 여러분은 선택할 수 있었던 각기 다른 모든 방식들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나서, 그 방식들 가운데 선호도를 평가하여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단지 적절한 방식이라고 마음에 떠올랐던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선택방법들은 이런 방식으로 선택된다. 그러나, 현재의 이론이 허용하는 바로는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 여러분은 의식적으로 (메타 - 메타 수준에서) 그 문제에 맞설 수 있고, 여러분이 사용할 다양한 선택방법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마도 여러분은 그것들 중에서 합리적으로 선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

왜 여러분은 다양한 선택방법들 중에서 합리적 선택방법을 골랐는가 ? 그것은 단지 적절한 처리방식이라고 마음에 떠올랐던 것이다. 최상위 수준에서의 결정방법은 무의식적으로 선택된다. 만약에 어떤 결정이 의식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 결정보다 상위의 결정수준이 있을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결정에 대한 결정에 대한 결정의 위계에는 끝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생사에서는 무엇을 행해야 할지를 결정할 방식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기보다는 어떤 일을 행하도록 요구한다. 결정을 미루는 것은 어디에 선가는 멈추어야만 한다.

우리는 자유롭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많은 결정의 근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 우리는 이를 모르기는 하지만), 우리 자신에 대한 모델이 우리로 하여금 선택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선택지의 범위 가운데는 생태적인 활동범위라든가 자기 이익 중심의 합리적 계산과 같은 제약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임의적인 방법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장 서두의 인용문에서 요약되어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깊은 신념 배후에 놓여 있으며, 이유 없는 행위에 대한 실존주의자들의 매료 배후에도 놓여 있다. 사람들은 임의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상상력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자유를 보여준다.

여러분이 무엇을 행할지를 결정하고, 어떻게 그것을 행할지 계획했다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할 수 있다.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려고 시도하는 컴퓨터 프로그램들도 존재한다 (제 9 장 참조). 매카시 (John McCarthy) 와 같은 인지과학자들은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의도를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들이 의도를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 프로그램들에서 빠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반성이다. 예를 들어 우리들 대부분은 지옥에 이르는 길은 선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담배를 끊으려는 것과 같은 의도를 갖는다는 것이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반드시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러한 지식에 비추어서, 우리는 때때로 의도된 결과가 일어나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 특수한 단체들을 밟는다.

최하위 수준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인간은 다음과 같이 행할 수 있다 :

컴퓨터 프로그램과는 달리, 인간은 이러한 능력들에 대한 모델에 접근하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무엇을 행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이러한 지식을 사용할 수 있다.

다시 언급컨대, 본 이론이 허용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결정을 내리는데 자기지식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

   2 수준 : 수준 1 의 모델과 협의하여 무엇을 행할지를 결정 :

   1 수준 : 수준 0 의 모델과 협의하여 무엇을 행할지를 결정 :

   0 수준 : 사건들의 가능한 미래 상태에 대한 모델 세우기.
그러한 사건들 상태를 일으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계산하기.
이러한 계획을 수행하기.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행할지를 결정하는 데 이러한 지식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수준조차도 위계에서 가장 윗수준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결론

내가 제안했던 구조는 병렬 처리기들의 위계로 구성되어 있다. 최상위 수준에 있는 조작체계는 작업기억의 내용에 접근할 수 있다. 그 내용들은 조작체계가 행위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이다. 조작체계는 또한 그 자체에 대한 부분적인 모델에 접근할 수 있고, 모델들을 삽입하기 위해 자기반성적인 구조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들은 자기자각과 자기반성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데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이 충분한지는 의문이다 : 또한 인지과학자들이 자기반성적인 프로그램들을 구성할 수 있는지는 역시 의문이다.

시걸 (Don Siegal) 의 무시무시한 1956 년 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 (The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에서는 조그만 마을의 거주민들이 차례차례 자유의지가 결여된 완전 복제품으로 변형되고 완전히 외계 세력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개인에게 자유의지가 결여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아는가 ?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의식적인 행위주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 그 영화의 주인공에게 있었던 이러한 문제는 인지과학자들에게는 더욱더 심각한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이 의식적인 행위주체자로서 기능하고 있지 않다는 분명한 표시들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 실패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징표가 없기 때문에 의식이 있다고 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여러분과 나를 제외한 (나는 여러분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화성에서 온 의식이 없는 로봇일 수 있다. 내가 제안했던 이론은 의식이란 한 부류의 특정 계산절차들의 성질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절차들의 결과는 원칙상 의식을 일으킬 수 없는 계열적인 절차들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유기체가 의식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행동을 관찰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행하는가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그것을 행하는 방식과 관련되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행동 예로 법률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감경된 책임 (diminished responsibility) 의 사례들을 알고 있다. 정신의학자들은 강박 행동의 사례들을 알고 있다. 일반대중은 불수의적인 행동의 경우를 알고 있다. 의식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는 개인이 자기반성적 판단 사용과 관련되는 담화를 참여하는 능력을 들 수 있다. 의식의 내용은 현재 이루어지는 반성적 사고의 최상위 수준과 동일하고 때문에, 이 방법은 연구자로 하여금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자기반성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을 허용한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자기들은 여러 대안들에 대한 찬반을 저울질했고, 어떤 것이 최상위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특정한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며, 많은 방식들을 반성해 본 결과로 이러한 선택방식을 택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책임감 있고 의식적인 행동주체자로서 판단받아야만 한다. 정신질환이나, 뇌손상, 또는 다른 충격 (trauma) 들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는 환자들은 자신에 대한 모델이나 반성적 절차에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책임감이 부족한 채 행동할 것이고, 자기반성적 담화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심리학 연구들은 불안과 긴장들의 요인들이 정상인들에게도 수행상 잘못을 일으키는 경향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요인들 역시 일상생활에서 자기반성적인 능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의식의 내용들은 두 범주로 분류된다 : 상징적인 것과 비상징적인 것이다. 상징적인 내용들에는 지각과, 사상, 신념, 가설, 그리고 철학자들이 명제적 내용을 가지는 것으로 보는 모든 심적인 것들이 속한다. 그것들은 선험적인 것에서부터 사소한 것에까지 걸쳐 있다. 즉 윤리적인 주의에서부터 여러분이 받아보는 신문의 제목에 이르기까지이다. 그것들은 여러분이 자시의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 묘사할 때처럼, 단어들로 대응시켜 표현할 수 있다. 그것들은 여러분이 한 문장에 분할 부정사가 있는지를 신중히 검토할 때처럼, 의식에 접근 가능한 구조적 규칙들에 의해 신중히 조작될 수 있다. 의식의 비상징적 내용들은 느낌과 감각이다. 여러분은 공포와 같은 정서를 느끼고, 통증과 같은 신체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것들은 어떤 것에 대한 상징이 아니며, 어떤 내적인 명제 구조를 갖지 않는다. 의식의 상징적 내용과 비상징적 내용 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려고 한다.

읽을거리

여기에서 개진된 이론의 초판은 존슨 레어드 (1983, 제 16 장) 에서 제안되었고, 거기에서는 자기 묘사적 튜링기계 (대처 (Thatcher, 1963) 를 따름) 에 대해서도 상술하고 있다. 비슷한 생각이 홈스태터 (Hofstadter) 와 테네트 (Dennett) (1981) 에서도 발견된다. 의식에 대한 연구들은 비시아치 (Bisiach)와 마르셀 (1987)에서 보여지며, 자기기만에 대해서는 마틴 (Martin, 1985) 에서 보여진다. 자기반성은 철학적으로 긴 역사를 가진다 ─ 예를 들어 자유의지의 존재를 옹호하는 데네트 (1984)를 참조하기 바란다. 스키너 (Skinner, 1971) 는 자유의지의 존재를 거부한다. 오틀리 (Oatley, 1978) 는 신경체계가 위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사상에 대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신경체계가 단원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은 사이먼 (Simon, 1981) 과 마 (Marr, 1982) 에 의해 옹호되었고, 포더 (Fodor, 1983)에 의해 과시적으로 설명되었다. 수행에서의 오류에 대한 이론들은 노만 (Norman, 1981) 과, 리즌 (Reason) 과 마이킬스카 (Mycielska)(1982) 에 의해 제안되었다. 현대 인지심리 치료의 설명에 대해서는 베크 (Beck, 1976) 와 오틀리 (1984) 를 참조하기 바란다. 어델리 (Erdelyi, 1985) 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인지심리학의 연구결과들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