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물리학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황제의 새마음 : Roger Penrose 저서, 박승수 옮김, 이화여대 출판부, 1996 (원서 : The Emperor's New Mind : Concerning Computers, Minds, and The Laws of Physics, Oxford Univ, 1989), Page 613~680

 

마음이 왜 필요한가?

의식이 실제로 하는 일이 무엇인가?

알고리즘의 자연 선택?

수학적 통찰력의 비알고리즘적 특성

영감ㆍ통찰력ㆍ독창성

사고의 비언어성

동물의 의식?

플라톤 세계와의 만남

물리적 실체에 관한 견해

결정론과 강결정론

인간 원리

타일링과 준결정체

두뇌의 가소성과의 연관 가능성

의식의 타임 딜레이

의식적 감지에서 시간의 이상한 역할

결론: 어린 아이의 관점

 

마음이 왜 필요한가?

심신 상관 문제 (mind - body problem) 를 언급할 때 주로 두 가지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 하나는 "어떻게 물질적인 것 (두뇌) 이 생각을 실제로 불러일으키는가?" 하는 것과 그 역으로 "어떻게 생각이 의지의 작용으로써 실제로 물질적인 것의 동작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의문은 심신 상관 문제의 수동적인 측면과 능동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 (혹은 의식) 속에는 어떤 비물직적인 "것 (thing)" 이 있어서 한편으로 물질 세계에 의해 불러일으켜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 세계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마지막 단원의 서문에서 좀 색다르고 어쩌면 좀더 과학적인 질문에 대하여 다루어 보고 싶다. 이 질문은 능동ㆍ수동 양쪽 모두의 문제와도 관계가 있는데, 내가 바라는 것은 질문의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이 오래되고 근본적인 철학의 수수께끼에 대하여 좀더 많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나의 질문은, "의식이 그 소유자에게 주는 이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을 제시하는 데에는 몇 가지 묵시적인 가정이 있다. 우선 의식이란 실제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객체' 라고 믿는 것이다. 이 '객체' 가 실제로 '무언가를 하고' , 그뿐 아니라 그것이 하는 일이 그 소유자를 도와서 같은 생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으면 무언가 덜 효과적인 방법으로 행동을 하게 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의식이라는 것이 충분이 정교한 조정 체계를 소유하면 자동으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이고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강인공지능주의자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의식의 현상에는 어떤 신성하고 신비한 목적 -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목적론적 의미 - 이 있어서 이 현상을 자연 선택적 관점으로만 다루게 되면 그 '목적' 을 완전히 놓치게 되고 만다는 믿음이다. 이들보다 내 사고 방식에 좀더 와 닿는 가설은 훨씬 과학이 가미된 형태로서 인간 원리 (anthropic principle) 라고 불리는 것인데, 우리가 살게 된 이러한 우주의 특성은 우리와 같은 감정이 있는 생물이 꼭 거기에 실제로 있어야만 이를 관측할 수 있다는 강력한 제약에 구애를 받는다는 주장이다. (이 원칙은 제8장, p.542에서도 잠시 언급되었는데 후에 다시 다루기로 하자.)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언급하겠지만 우선 한 가지 밝히고 싶은 것은 마음과 육체의 문제 (심신 상관 문제) 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보인다. 사람들은 가끔 '무의식적인 마음 (생각)'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우리가 마음과 의식을 동의어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인 생각이라고 말할 때는 어쩌면 막 뒤에서 활동하며 특별한 경우 (예를 들면 꿈, 환영, 망상, 프로이트식 실언 등) 를 제외하곤 우리의 감각에 대하여 직접 나서지 않는 '저 뒤편의 그 무엇' 이라는 어렴풋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무의식적인 생각은 실제로 그 나름대로의 자각이 있는데, 그 자각이 대게 '우리' 생각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부분과는 꽤 많이 분리되어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어떤 실험 결과에 의하면 환자가 전신 마취 상태에서 수술을 받고 있는 도중에도 어떤 형태의 '자각' 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 때 대화를 하거나 하면 그것이 환자에게 '무의식' 적으로 영향을 줄 수도 있고 후에 최면 상태에서 실제로 '경험' 했던 것을 기억해 낸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최면술로 인해서 지각으로부터 가려져 있던 감각까지도 다른 최면에 의해서 '경험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그 기억들은 단지 '다른 선로' 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을 확실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의식적 마음에 정상적 '지각' 을 결부시기는 것은 옳다고 생각되지 않으며. 그러한 주장에 대하여 여기에서는 별로 자세히 다루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의식적 마음과 무의식적 마음을 분리하는 것은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로서 다시 다룰 필요성이 있다.

'의식' 이라는 것, 그리고 의식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가장 평범한 의미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지금 상태에서 의식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것은 별로 현명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느낌, 그리고 직관적 상식만 가지고도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과 의식의 특징이 언제 주로 나타나는가 정도는 알 수 있다. 내가 의식이 있을 때는 이를 대충 알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이 점에서는 나와 마찬가지의 경험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이 있으려면 무언가를 의식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아픔ㆍ따뜻함 혹은 화려한 장면이나 음악의 소리와 같은 감각을 의식할 수도 있고 당혹감ㆍ괴로움 또는 즐거움 같은 느낌을 의식할 수도 있으며,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의식하거나,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거나 혹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의식적으로 말을 하려 하거나 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등의 동작을 할 수 있다. 나는 또 '한 발짝 물러서서' 그러한 의도라거나 아픈 느낌, 기억에 대한 경험, 혹은 아이디어의 떠오름 등을 의식할 수도 있다. 게다가 내가 의식이 있다는 사실 자체도 의식할 수 있다. 내가 잠이 들더라도 꿈을 꾼다거나 일어나려 할 때는 어느 정도의 의식이 있어서 그 꿈의 방향을 의식적으로 바꿀 수 있다. 내가 믿는 것은, 의식이란 단지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의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의식 (consciousness)' 과 '자각 (awareness)' 이 근본적으로는 동의어라고 생각하지만 (자각이 의식보다는 약간 수동적인 의미는 있다.) '마음(mind)'과 '영혼(soul)'이라는 말에는 지금으로서는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의식' 이라는 말 자체만 해결하려 하여도 문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에 '마음' 과 '영혼' 의 문제에 손을 대지 못하더라도 독자들이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 밖에도 '지능 (intelligence)' 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사실 인공지능학자들은 모호한 '의식' 보다는 '지능' 에 대해서 관심이 더 많다. 튜링은 그의 논문 (1950, chapter 1, p.6) 에서 '의식' 이라는 말보다는 '생각 (thinking)'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지능이라는 단어도 그 제목에 등장하고 있다. 나의 관점으로는 지능에 대한 문제는 의식의 문제에 부수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나는 진정한 지능이란 의식이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본다. 반대로, 만약 인공지능 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지능을 흉내낼 수 있게 된다면 '지능' 이라는 단어에 그러한 유사 지능까지를 포함시키지 않고는 완전한 정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경우에는 '지능' 이라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나의 주안점은 '의식' 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능에는 의식이 필수적이라는 나의 신조를 주장하면서 나는 암묵적으로 지능이라는 것은 단순한 알고리즘적 방법, 즉 컴퓨터로는 절대로 정확히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왜냐 하면 나는 단순한 알고리즘의 수행만으로도 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강인공지능주의자들의 주장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제1장의 튜링 검사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뒤에서 수학적 사고에 대한 주제를 다룰 때 나는 의식의 작용에는 필수적으로 비알고리즘적인 요소가 가미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것이다.

이번에는 똑같은 것이라도 의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행동상의 특성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어떤 객체에 의식이 있을 때 그것이 항상 외부로 드러나 것인가? 나는 이 질문의 답이 '예' 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동물의 왕국 어디에서 의식을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에 나도 확고한 믿음을 갖기가 매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 외의 동물들은 이를 보유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기원전 1000 년 이전의 사람에게도 의식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곤충 · 벌레 심지어는 바위에까지 의식을 부여하는 사람도 있다. 내 경우에는 바위는 물론이고 곤충이나 벌레에게서도 이러한 자질이 얼마간 있다는 것에는 회의적이지만, 포유류는 일반적인 면에서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이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에 의식의 표출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실제로는 의식적인 행위를 구분할 수 있는 어떤 확실한 지표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다만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기준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기준이 있더라도 이는 아마 의식의 능동적인 역할에만 의미를 부여한 것일 것이다. 능동적인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자각이 있다는 것을 직접 단언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러한 사살은 소름끼치는 현실로서 입증되었는데, 1940 년대에 쿠라레 (curare) 라는 약초에서 추출한 약이 유아 수술 때 마취제로써 사용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후 밝혀진 이 약의 실제 효과는 단지 근육의 운동 신경만을 마비시키는 것으로서 이 불쌍한 아기들이 실제로 겪는 고통이 집도의에게 전달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비교 : Dennett, 1978, p.209).

의식에 부여될 수 있는 능동적인 역할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의식이 감각적 혹은 기계적으로 분별될 수 있는 능동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혹은 한다는) 사실은 필연적인 것인가? 내가 그렇다고 믿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상식적' 으로 다른 사람이 의식이 있음을 직접 알 수 있다고 종종 느끼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러나 쿠라레 약에서처럼 의식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게 보일 수는 있어도 의식이 없는 사람의 경우에는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의식을 특징 지을 수 있는 어떤 형태의 행위가 (항상 의식에 수반되는 것은 아니라도)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고 이를 우리는 '상식적 직관' 으로 감지할 수 있다.

둘째로, 자연 선택이라는 비정한 과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앞 장에서 보았듯이 두뇌의 모든 활동이 의식에 직접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결부시켜 이 과정을 보기 바란다. 실제로 신경 세포가 훨씬 밀집되어 있는 '오래된' 소뇌는 의식의 직접적인 간섭을 전혀 받지 않고도 복잡한 행동을 수행한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대자연은 완전히 무의식적 조정 기관에 따라 움직이는 생물에 만족하지 않고 사람과 같이 지각이 있는 생물을 진화시키는 쪽을 선택하였다. 만약 의식이 선택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대자연은 고생스럽게 의식이 있는 두뇌들을 진화시켰을까? 소뇌처럼 지각이 없는 '자동 기계' 적인 두뇌들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다.

그뿐 아니라 의식에 분명히 어떤 능동적 효과가 있다고 믿게 하는 단순한 '근본적' 이유가 있다. 비록 그 효과가 자연 선택과 직접 관계가 없더라도 말이다. 우리같이 의식 있는 동물들은 왜 가끔 (특히, 그에 관한 질문에 접했을 때) '자아' 에 관한 문제 때문에 고심하게 되는 것일까?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당신은 왜 이 책을 읽고 있는가?" , 또는 "내가 왜 애당초 이 주제에 대한 책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어을까?") 완전히 의식이 없는 자동 기계적 생물이 이러한 문제 때문에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런데 의식있는 생물은 때때로 이러한 재미있는 행동을 보여 주고 있고 이러한 양태는 의식이 없는 것들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의식에는 무언가 능동적인 효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컴퓨터에도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프로그램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왜 여기 있는가? 도대체 내가 느끼는 이 '자아'의 정체는 무엇인가?" 같은 말을 투덜대도록 프로그램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연 선택은 왜 이러한 종족을 선호했을까? 정글의 비정한 생존 경쟁에서 그러한 쓸데없는 넌센스에 집착하고 있다가는 진작에 도태되었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가 (일시적으로나마) 철학자연할 때 빠져드는 사색이나 넋두리는 그 자체가 자연으로부터 선택되는 특성이 아니고 지각이 있는 생물들이 필연적으로 짊어져야 할 (자연 선태의 관점에서 보면) '봇짐'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연으로부터 선택받은 것은 지각 때문이고 그 봇짐과는 전혀 별개의 매우 강력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봇짐은 해로운 것은 아니고 자연 선택의 강자들에게 좀 귀찮을지는 몰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지워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사람들처럼 재수 좋은 종족들이 가끔 즐길 수 있는 평화와 번영의 순간들이 찾아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적 (혹은 이웃) 과 벌일 필요가 없을 때에 그 봇짐 속에 든 보물들에 대하여 궁금해 하기도 하고 하나씩 생각해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와 같이 이상스러운 철학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말고 다른 사람들도 분명히 마음을 지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의식이 실제로 하는 일이 무엇인가?

생물에서 의식의 존재가 실제로 그 생물에게 우생학적 이점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하자.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이점이란 무엇일까? 내가 아는 한 가지 학설은 포획류가 먹이를 사냥할 때 지각이 있으면 '먹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봄으로써 그 먹이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를 추측할 수 있어서 이점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먹이라고 상상해 봄으로써 그 먹이보다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부분적으로 맞을지 모르지만 수긍할 수 없는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이 학설은 먹이에게도 이미 어떤 형태의 의식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왜냐 하면 자동 기계적 생물의 경우 그 입장이 되어 보았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동 기계적 생물은 정의에 의하면 의식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처럼 생각할 수조차도 없다. 어떻든 간에 온전히 의식이 없는 자동 기계적 포획류가 그 프로그램 역시 자동 기계적인 프로그램 속에 역시 자동기계적인 먹이의 프로그램을 서브루틴으로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포획류와 먹이간의 상호 관계에 의식이 꼭 관여하여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리적 필연성을 나는 별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자연 선택의 불규칙적 과정에 의해서 자동 기계적 포획류에 먹이의 프로그램이 그대로 카피가 될 정도의 특성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는 자연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자연에 의한 첩보처럼 들릴 것이다. 그리고 부분적인 프로그램 (튜링 기계의 '테이프의 일부, 혹은 튜링 기계 테이프의 근사체) 만으로는 포획류가 선택적 우위를 점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테이프 전체를 얻을 수 있든지 혹은 최소한도 충분히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완전한 형태의 부분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대안으로서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닌, 의식의 어떤 요소가 포획물 - 먹이 관계로 생각해 볼 때 추론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에 부분적으로 수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적인 행동과 '프로그램' 된 행동의 실제적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진짜 이슈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암시하고 있는 아이디어는 어떤 시스템이 어떤 것의 모형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을 때 그것을 지각하게 된다는 것이고 특히 자기 자신의 모형을 갖게 될 때 '자각 (self - aware)' 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컴퓨터 프로그램을 자기 프로그램의 일부 (예를 들면 서브루틴) 로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을 때 그 프로그램에 다른 프로그램에 대한 지각이 생기지 않고,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이 자기 자신을 참조한다 하더라도 그 프로그램에 자각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주장이 자주 있어 왔지만 내 의견은 지작과 자각을 결정하는 진짜 이슈는 이러한 내용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비디오 카메라는 자기가 찍고 있는 광경에 대한 지각이 전혀 없다. 거울 속을 찍고 있는 비디오 카메라가 자각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닌 것이다. (그림 1)

 

나는 이에 대하여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앞에서 두뇌의 활동에 의식적인 지각이 항상 수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특히 소뇌 활동은 의식이 없이도 일어나는 듯하다.) 의식 있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의식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원래는 지각을 필요로 하지만 일단 터득된 다음에는 무의식적으로 (어쩌면 소뇌에 의해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까다로워진다. 어쨌든 우리가 새로운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경우와 아직 대응되는 규칙을 수립하지 못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지각이 필요하다. 의식을 필요로 하는 정신적 활동과 의식이 필요없는 활동들 사이의 특징을 아주 자세하게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렵다. 어쩌면 강인공지능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우리가 말하는 '새로운 판단의 수립' 역시 어떤 잘 정의된 알고리즘적 규칙을 적용하면 될지 모른다. 물론 이 새로운 규칙은 우리가 그 확실한 작용은 잘 모르지만 보통 규칙들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규칙일 것이다. 그러나 의식적 정신 활동과 무의식적 정신 활동의 특징을 짓는 용어들을 보면 최소한도 알고리즘적인 것과 비알고리즘적인 것의 차이를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식이 필요한 경우

의식이 필요없는 경우

'상식'

'진실의 판단'

'이해'

'예술적 감상'

'자동'

'생각 없이 규칙에만 따름'

'프로그램된'

'알고리즘적'

어쩌면 이러한 차이가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다. 특히 많은 무의식적 요소들이 의식적 판단에 관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경험ㆍ직관ㆍ편견, 또는 논리의정상적 사용까지도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것은 판단 그 자체는 의식적 활동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뇌의 무의식적 활동은 알고리즘적 과정에 따라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고, 의식적 활동은 아주 달라서 어떤 알고리즘으로도 기술될 수 없는 방법으로 수행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여기에서 내가 주장하는 관점은 다른 사람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의견과는 거의 정반대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종종 '합리적'인 방법을 따르는 의식적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무의식은 불가사의하다고 주장한다. 인공지능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의식 가운데 생각하는 일련의 과정을 이해할 수만 있으면 이를 컴퓨터가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만 불가사의한 무의식적 과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방안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내가 추구해 온 사고 방식에 따르면 무의식적 과정이야말로 알고리즘적 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를 세부적으로 풀어헤치는 것이 엄청나게 어렵고 매우 복잡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완전히 합리화될 수 있는 의식적인 생각도 (때로는) 알고리즘적으로 정형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완전히 다른 수준에서의 이야기이다. 이제 다룰 내용은 내부적 작동 (신경 세포의 활성 등) 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전체 사고의 운용에 대한 것이 위주가 되는 것이다. 때로는 이 사고 운용 가정이 알고리즘적 특성을 갖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형화시킨 고대그리스의 삼단 논법과 같은 초기의 논리학이나 수학자 불 [George Boole] 이 만든 기호 논리처럼. 비교 : Gardner, 1958)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괴델의 정리, 혹은 제4장의 다른 예들처럼). 내가 의식을 특징짓는 지표라고 주장하는 판단 수립 과정도 그 자체로는 인공지능 학자들이 컴퓨터에 어떻게 프로그램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부분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판단의 기준자체가 의식적이 아닐 텐데 내가 왜 그러한 판단을 의식에 결부시키려 하는가 하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에서 좀 벗어난 이야기이다. 나의 주장은 우리가 의식적인 인상 혹은 판단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에 대하여 의식적인 이해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조금 전에 언급한 레벨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식적인 인상을 결정짓는 뒤에 깔린 이유는 의식되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실제 생각들보다는 더 깊은 물리적 레벨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의식적인 인상 그 자체가 바로 (비알고리즘적인) 판단인 것이다.

우리의 의식적인 생각에서 무언가 비알고리즘적 요소가 있는 것 같다라는 것이 앞의 장들의 배경에 깔려있는 주제였다. 특히 제4장의 결론 부분, 정확히 말하면 괴델의 정리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최소한도 수학에서는 때때로 의식적인 사고를 이용하여 어떤 알고리즘도 해결할 수 없는 결론, 즉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실제로 알고리즘 그 자체는 절대 참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어떤 알고리즘이 항상 거짓만을 말하게 만드는 것이나 그것이 항상 참만을 말하게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로 간단하다. 어떠한 알고리즘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결정하는데는 외부적 통찰력이 꼭 필요한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적절한 환경에서 참과 거짓 (혹은 아름다움과 추함) 을 구분 (직관) 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의식이 있다는 보증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하게 하고 싶은 것은 내가 의미하는 것이 마술적 어림짐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권의 당첨 번호를 (공정한 경우) 추측하는 데에 의식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의식 상태에서 계속적으로 수행하는 판단으로서, 모든 사살들과 느낀 인상, 관련된 과거 경험의 기억 등을 불러내어 선택 대상을 서로 비교하고 때로는 영감에 의한 판단을 내리기도 하는 것이다. 어떠한 판단을 하는 과정에서 원칙적으로는 충분한 관련 정보가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데이터의 수렁 속에서 필요한 것만을 끄집어내어 적절한 판단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은 분명한 알고리즘이 존재하지 않는, 혹은 존재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과정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애당초 판단을 형성하는 것보다 일단 판단이 내려지면 그 판단이 정확한가를 살펴보는 것이 더욱 알고리즘적인 (혹은 어쩌면 단순히 쉬운)경우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그러한 경우에 의식이 적절한 판단을 만들어 내는 수단으로 저절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비알고리즘적 판단 형성 과정이 의식을 규정하는 지표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분적인 이유는 내가 수학자로서 경험한 바에서 비롯된다. 나는 단순히 의식에 의하여 잘못 선택된 무의식적인 알고리즘적 활동을 믿지 못한다. 때때로 어떤 계산을 할 때 사용하는 알고리즘이 알고리즘 자체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지만 그 문제를 푸는 데 과연 그 알고리즘이 적합한 것인가엔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다. 간단한 예로서 사람들은 두 개의 수를 곱하는 것이나 어떤 수를 다른 수로 나누는 알고리즘적 규칙을 배웠을 것이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알고리즘적 포켓 계산기를 선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문제가 주어졌을 때 이를 풀기 위하여 곱셈을 해야 할지 나눗셈을 해야 할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를 위해서는 생각이 필요하고 의식적인 판단을 내려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판단이 왜 항상은 아니더라도 거의 비알리고리즘적인가 하는 것은 잠시 뒤에 다루겠다.) 물론 사람들이 비슷한 문제를 많이 풀어보면 곱셈을 택할 것인가 나눗셈을 택할 것인가하는 것은 거의 손에 익어 버려서 어쩌면 소뇌에 의해서 알고리즘적으로 수행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 상태에서는 의식은 더 이상 필요치 않기 때문에 그동안 의식이 잠시 다른 곳으로 흘러가 딴 생각을 하다 오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물론 가끔 알고리즘이 딴 길로 가고 있는지를 체크는 해야겠지만.

비슷한 현상이 수학적 사고의 모든 레벨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사람들은 수학을 할 때 알고리즘을 찾기 위하여 애쓰지만 애쓴다는 것 자체는 알고리즘적 과정으로 보이지 않는다. 일단 알고리즘이 발견되면 그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풀린 것이나 다름없다. 뿐만 아니라 어떤 알고리즘이 실제로 정확하고 적절한가를 결정하는 수학적 판단은 많은 의식적 주의를 요하는 일이다. 제4장에 기술된 수학의 정형 체계에 관한 논의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우리는 어떤 공리에서 시작하여 그를 통하여 여러 가지 수학적 명제들을 도출할 수 있다. 그 도출 과정은 물론 알고리즘적이다. 그러나 그 공리가 적합한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있는 수학자의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판단이 필수적으로 알고리즘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다음다음 절의 논의에서 좀더 확실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두뇌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널리 일반화된 관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알고리즘의 자연 선택?

만약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인간 두뇌의 활동이 단순히 아주 복잡한 알고리즘의 결과에 따른 것이라면 그러한 굉장이 효과적인 알고리즘이 어떻게 생성되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에 대하여 일반화된 대답은 '자연 선택' 일 것이다. 두뇌를 가진 동물이 진화하면서 더 효율적인 알고리즘을 소유한 동물들이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더 많은 자손을 갖게 된다. 이 자손들도 이처럼 더 좋은 알고리즘의 인자를 부모로부터 물려받게 되므로 다른 사촌들에 비해서 더 효과적인 알고리즘을 소유하는 경향이 있게 된다. 그럼으로 차츰차츰 (진화에서 멈추었다가 갑자기 나아가는 수도 많이 있기 때문에 꾸준하진 않을 수도 있지만) 알고리즘이 개선되어 사람의 두뇌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의 놀라운 상태까지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림은 나의 입장에서도 수긍할 만한 점들이 몇 가지 있다고 본다. 왜냐 하면 우선 두뇌 활동의 많은 부분이 알고리즘적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고 앞의 논조에서 독자들도 추측하였겠지만 나는 자연 선택의 위력을 신봉하는 사람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 선택 그 자체만으로 어떻게 우리가 보유한 것과 같이 다른 알고리즘의 정당성을 의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도의 알고리즘으로 진화할 수 있는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보통의 컴퓨터 프로그램을 상상해 보자.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분명히 (직접적인) 자연 선택에 의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 프로그래머가 있어서 그것을 고안하고 그것이 원하는 작업을 정확하게 수행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였을 것이다. (실제로는 거의 모든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램은 오류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경미한 오류지만 때로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등장하지 않는 포착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그러한 오류의 존재 여부는 여기에서의 논점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그 자신 다른 컴퓨터 프로그램 - '마스터' 프로그램이라 부르자 - 에 의해서 '작성'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 마스터 프로그램 자체는 인간의 창의력과 통찰력의 산물이였을 것이다. 또 프로그램이 여러 가지 요소가 합쳐져서 조립되는 경우도 물론 생각할 수 있다. 그 요소들 중에는 다른 프로그램을 통해 생성된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그 프로그램의 정확성과 개념 정립에는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 (들)의 의식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컴퓨터 프로그램도 어떤 자연 선택 과정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약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의식적인 행동자체가 단순한 알고리즘이라고 믿는다면 결과적으로 알고리즘도 바로 이런 방법으로 진화했다고 믿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은, 알고리즘의 정확성에 대한 판단은 그 자체가 알고리즘적 과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이미 제2장에서 다루었다. (어떤 튜링 기계가 궁극적으로 멈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알고리즘으로 결정될 수 없는 사항이다.) 어떤 알고리즘이 실제로 잘 돌아갈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또 다른 알고리즘만으로는 부족하고 통찰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 중에는 그래도 어떤 형태의 자연 선택 과정이 대체로 정확한 알고리즘을 효과적으로 생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이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종류의 자연 선택 과정은 모두 알고리즘의 결과에만 작용하지 그 알고리즘 작동의 배경에 깔려있는 아이디어에 직접 관여하는 경우는 없다. 이것은 단순히 지극히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내 생각에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우선 출력 결과만 보아서는 그것이 실제로 어떤 알고리즘인지 결정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 (아주 다른 동작을 하는 두 개의 간단한 튜링 기계가 출력 테이프의 예를 들어 265536 번째 칸까지 똑같은 값을 생성하게끔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 경우 그 차이는 우주의 역사가 모두 흐르더라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알고리즘에 아주 작은 '도치 (순서 바꿈)' 가 일어나게 되면 (예를 들어 튜링 기계의 사양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거나 입력 테이프에 변화가 있게 되면) 그 알고리즘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고 이러한 임의적인 방법으로 어떤 알고리즘이 실제로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의미' 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깊이 생각해서 하더라도 개선 작업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우리가 가끔 겪게 되는 상황에서도 때때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해설이 없는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바꾸거나 고쳐야 되는데 이를 작성한 프로그래머가 직장을 떠났거나 아니면 세상을 떠난 경우를 가정해 보자. 그 프로그램 코드 하나하나의 의미와 의도를 풀어헤쳐 나가기 보다는 오히려 다 포기하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어쩌면 알고리즘을 기술하기 위한 훨씬 '강력한 (robust)' 방법이 보안되어 위에서 언급된 비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내가 말해왔던 바로 그것이다. '강력' 한 사양이란 알고리즘의 배경에 깔려있는 아이디어를 말한다. 그러나 아이디어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의식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다시 의식이란 실제로 무엇이고 그것이 할 수 있는 것들 중에 무의식적인 것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그 놀라운 성질을 도대체 자연 선택은 어떻게 그렇게 현명하게 진화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로 돌아온 것이다.

자연 선택이 빚어낸 결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다. 사람의 두뇌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얻고 나서 나는 놀라움과 경외감에 거의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각각의 뉴런의 하는 일도 대단하지만 그 뉴런들이 구성된 방법도 실로 놀랍다고 할 수 있다. 날 때부터 엄청난 수의 선들이 서로 연결되어 후에 필요하게 될 모든 작업에 대하여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의식 자체만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이를 보조하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보여지는 자질구레한 장치들 하나하나가 모두 놀라운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떠한 물체가 의식이라는 것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자질을 자세하게 알 수만 있다면 우리도 어쩌면 그러한 것을 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여기에서 얘기하는 '기계'에는 해당되지 않을런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의식의 생성이라는 당면 과제에 특별히 알맞게 설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람보다 훨씬 유리할 수 있다. 인간처럼 단세포로부터 성장해야 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짐가방' (먼 조상들에게서 '우발적인 사건'에 의해 생겨난 후 근근이 이어온 낡고 '쓸데없는' 두뇌 혹은 신체의 일부) 을 계속 짊어지고 갈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점을 가만하여 어떤 사람은 비록 알고리즘적인 컴퓨터는 사람에게 복종해야 될 운명에 있지만 이러한 물체는 실제로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식에는 이러한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어떤 면에서 우리의 의식은 각자의 핏줄과 각 사람에게 수십억년 동안 진화되어온 내역에 따라 좌우되는지도 모른다. 진화가 분명히 어떤 미래적 목적을 향하여 '더듬어' 나아가는 것은 나에게는 아직도 미스터리인 점이 많이 있다. 모든 사물이 맹목적인 진화나 자연 선택에만 국한된다고 보기에는 필요이상으로 잘 조직되어 보인다. 물론 이러한 느낌은 아주 틀린 것일 수도 있다. 물리의 법칙이 작용하는 가운데 그 무엇인가 있어서 자연 선택이 무작위적 법칙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도록 해 주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로 얻어진 분명한 '능력 더듬기'는 재미있는 이슈로서 뒤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수학적 통찰력의 비알고리즘적 특성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의식이 비알고리즘적 방법으로 진위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데에는 괴델의 정리가 큰 이유가 되었다. 정확한 계산과 엄밀한 논증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수확적 판단에서 의식의 역할이 비알고리즘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좀더 일반적인 (비수학적) 경우에도 의식이 하는 일에 그러한 비알고리즘적 요소가 필수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 4장에서 괴델의 정리와 복잡성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서 언급된 논의를 기억해 보기 바란다. 그 곳에서의 결론은 수학적 진리를 푸는데 수학자가 어떠한 (충분히 방대한)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또는 결국은 같은 의미지만, 그의 진리의 기준을 세우는데 어떠한 정형화된 체계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괴델의 명제 Pk(k) 와 같이 그 알고리즘이 답할수 없는 수학적 명제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교 : p. 181). 만일 어떤 수학자의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완전히 알고리즘적이라면 그가 실제로 판단을 형성하는데 사용하는 알고리즘 (혹은 형식체계) 은 그 알고리즘으로부터 생성된 명제 Pk(k) 를 다룰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체로) 그 명제 Pk(k) 가 실제로 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결국 그 사람은 이 두가지를 다 알기 때문에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수학자는 알고리즘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두뇌의 작용이 완전히 알고리즘적일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루카스 (Lucas, 1961) 가 사용한 논지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도 심심치 않게 제기되었다 (Benacerraf, 1967 ; Good, 1969, Lewis, 1969, 1989 ; Hofstadter, 1981 ; Bowie, 1982). 이에 관해서 내가 밝혀 두고 싶은 것은 '알고리즘' 혹은 '알고리즘적' 이라는 말은 범용 컴퓨터에서 흉내 (처리)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물론 '병렬 처리' 도 포함될 뿐 아니라 '신경망 (혹은 연결형 기계 [connection machine])' , '휴리스틱 (heuristics : 경험적 알고리즘)' , '기계학습 (기계가 어떻게 지식을 습득할 것인가에 대한 일정한 프로그램이 항상 미리 지정된다)' , 그리고 외부와의 의사 소통 (튜링 기계의 입출력 테이프로 구현될 수 있음)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반박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다음과 같다.

Pk(k) 가 실제로 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수학자의 알고리즘이 진정 무엇이었는가를 꼭 알아야 되고 그뿐 아니라 수학적 진실을 도출하는 방법으로서 그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수학자가 그의 머리 속에서 어떤 매우 복잡한 알고리즘을 사용했다면 우리는 그 알고리즘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도 없고 그에 따른 괴델의 명제를 수립할 수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의 정확성 여부는 고사하고라도 말이다. 괴델의 정리가 인간의 수학적 판단이 비알고리즘적임을 입증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러한 반박이 종종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이와 같은 반론에 수긍할 수 없는 점들이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잠시 수학자들이 수학적 진리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방법이 완전히 알고리즘적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가정으로부터 괴델정리를 이용하여 이것이 논리적인 모순 (reductio ad absurdum) 임을 보이고자 한다.

우리는 먼저 진실 증명에서 수학자들이 서로 다른 알고리즘을 사용하지 않는가 하는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명제의 진실성 여부가 추상적 논의에 의해서 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은 수학의 가장 놀라운 특징 중에 하나이다 (어쩌면 모든 학문 중에서 거의 유일할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수학자를 설득할 수 있는 수학적 주장은 (오류가 없는 경우) 그 내용이 충분이 이해만 된다면 다른 수학자도 즉시 납득시킬 수 있다. 이것은 괴델식 명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만약 어떤 수학자가 특정한 형식체계에 대하여 거기 관련된 공리와 규칙들이 참의 명제들만을 도출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 체계에 대한 괴델 명제도 참이라는 사실을 곧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수학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컨데 수학적 진실에 대한 논의들은 공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어떤 특정한 수학자들 머리 속에서 우연히 돌아가고 있는 모호한 알고리즘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수학적 진실을 다루는데 모든 수학자들이 적용하고 있는 알고리즘과 동일한 포괄적 (universal) 형식체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소위 '포괄적' 인 체계 혹은 알고리즘이 우리 수학자들이 진실을 규명하는 데는 결코 사용도리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 체계안에서 괴델 명제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이 수학적으로 참이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은 수학자들이 수학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실제로 사용하는 알고리즘은 너무 복잡하거나 모호해서 그것의 진위여부는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수학이라는 학문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정면으로 상충하게 된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수학적 유산과 그 훈련의 궁극적인 의미는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규칙의 권위에는 머리 숙이자 않는다는 것이다. 논증의 각 단계에 대하여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그것이 좀더 간단하고 명료한 것으로 바뀌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수학적 진리란 그 옳고 그름이 우리의 이해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엄청나게 복잡한 교리 따위는 아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고 명백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할 수 만 있다면 그것의 진리 값은 명확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드려 지는 것이다.

내 생각에 위에서 거론한 내용은 실제 수학적 증명에는 못 미치지만 충분히 명약관화한 모순이다. 결론은 명확하다. 수학적 진리란 단순히 알고리즘만으로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내가 믿는 것은 의식이 수학적 진리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수학적 논점이 옳다고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본다' 는 것이 바로 의식의 진수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직접 수학적 진리를 대할 때마다 의식이 함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괴델의 정리의 정당성을 확신한다 함은 이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본다' 는 과정 자체의 비알고리즘적인 면을 드러내게되는 것이다.

영감ㆍ통찰력ㆍ독창성

이제 우리가 영감 (inspiration) 이라고 부르는 현상 - 즉 때때로 선광처럼 떠오르는 새로운 통찰력 (insight) - 에 관하여 몇가지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불가사이하게 떠오르는 이러한 생각들과 영상은 무의식의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의식자체의 산물인가? 유명한 사상가들 가운데 그러한 경험을 글로써 기술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수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특히 다른 수학자들의 영감과 독창적인 생각에 대하여 관심이 많지만 내 생각에는 수학과 다른 과학, 그리고 예술에서도 이에 관해서는 공통점이 매우 많다고 생각된다. 매우 좋은 관련 서적으로 독자들에게 프랑스의 저명한 수학자 아다마르 (Jacques Hadamard) 의 고전 [수학 분야에서의 발명에 관한 심리학] 이라는 소책자 하나를 추천하고 싶다. 그는 저명한 수학자 혹은 다른 분야의 위인들이 전하는 수많은 영감의 경험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 중의 하나는 대수학자 푸엥카레의 경우이다. 푸엥카레는 처음부분에서 그가 푸시앙 (Fuchsian) 함수라고 부르는 식을 구하기 위하여 한동안 얼마나 고심하고 의식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는가 그리고 결국은 더 나아갈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한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자,

...나는 광산학과에서 주관하는 지질학 탐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내가 살던 칸을 떠났다. 여행으로 인해서 수학에 관한 일은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쿠탕스에 도착하자 우리는 다른 곳을 가기 위하여 작은 버스에 탑승하게 되었다. 버스의 계단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갑자기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그것은 그 바로전에 생각하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그 아이디어란 바로 내가 푸시앙 함수를 정의하기 위하여 사용하던 변환들이 비유클리드 기하에서의 변환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 아이디어를 검증할 수는 없었다. 버스에서 자리를 잡자마자 나는 곧 잡담에 참여하여 그럴만한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확실히 옳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캉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편리한 대로 틈틈히 그 결과를 검증하였다.

이 예에서 (그리고 아다마르의 책에 기술된 수많은 다른 예에서) 눈에 띄는 점은 푸엥카레의 의식적은 생각은 전혀 다른 곳을 헤매고 있는 동안 이러한 복잡하고도 깊은 아이디어가 그의 마음속에 선광처럼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와 함께 그것이 분명히 옳다는 확신감이 동반되었다는 사실이다. (후에 실제로 재산에 의해서 정확성이 검증되었다.)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 아이디어 자체는 말로는 절대로 설명하기가 용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측컨대, 만약 그가 이 아이디어를 말로써 정확히 전달하려 하였다면 그 대상이 비록 전문가들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한 시간 정도의 세미나가 필요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아이디어가 푸앵카레의 의식 속으로 완전한 모습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오랜 시간 심사 숙고하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의식의 활동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그 문제의 여러 가지 면모에 관하여 이미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작용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푸앵카레가 버스에 오르면서 떠올린 아이디어는 한순간에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아이디어였다는 사실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 아이디어가 옳다는 것에 대한 푸앵카레의 확신이다. 그러므로 후에 그가 자세한 검증을 하는 것이 거의 불필요한 작업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와는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내 자신의 경험을 이와 연관시켜 이야기하여야 할 것 같다. 사실 내 기억에는 푸앵카레에게 (혹은 그 책에 언급된 영감에 관한 다른 예) 와 같이 어떤 좋은 아이디어가 완전히 불시에 튀어나온 경우는 거의 없다. 나의 경우에는 당면한 문제에 관하여 (어렴풋이나마) 일단 생각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 같다. 그 생각은 의식적이지만 마음 뒤편에서 천천히 진행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어떤 다른 편안한 작업중에 있을 수도 있다. 면도가 좋은 예이다. 어쩌면 한동안 젖혀 두었던 문제를 막 생각하려 하는 중일 수도 있다. 여러 시간 동안 열심히 따져 가며 생각하는 의식 활동도 물론 필요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문제에 대한 감을 다시 잡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문제에 대한 아이디어가 '섬광' 처럼 떠오르는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강한 확신감이 동반되는) 경험은 나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한 가지 특정한 예를 이야기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이 경우는 또 다른 점에서도 흥미로운 사건이다. 1964년 가을, 나는 블랙홀의 특이점 문제에 관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와 슈나이더는 1939년에 커다란 별의 정확한 구면 붕괴 (spherical collapse) 만이 고전 상대성 이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중심 시공 특이점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제7장 참조, p. 512) . 많은 사람들은 만일 (비현실적인) 정구면 대칭 (exact spherical symmetry) 의 가정을 제거한다면 이와 같이 개운치 못한 결론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면의 경우 모든 붕괴되는 것들이 중심의 한 점을 향하기 때문에 예상할 수 있듯이 무한대의 밀도를 갖는 특이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한 대칭만 아니라면 붕괴되는 것들이 중심부에 뒤죽박죽 도착하기 때문에 무한대의 밀도라는 특이점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오히려 그 붕괴물들이 돌면서 밖으로 소용돌이쳐나와 오펜하이머와 슈나이더의 이상적인 블랙홀과는 판이하게 다른 양태를 보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하여 근자 (1960년대 초) 에 퀘이서 (quasar) 라 불리는 유성체가 발견되고 블랙홀 문제에 대한 새로운 흥미가 고조되면서부터 나 나름대로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엄청나게 밝은 머나먼 항성체의 물리적 성질은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중심에 오펜하이머- 슈나이더의 블랙홀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펜하이머 - 슈나이더의 구면 대칭에 대한 가설이 사람들에게 완전히 잘못된 그림을 심어 준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다른 상황에서의 연구 경험에 미루어볼 때) 어떤 정확한 수학 정리가 존재하여서 이 정리의 증명이 (일반상대성 이론에 따라) 시공 특이점의 불가피함을 증명하여 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붕괴 현상이 어떤 '돌아올 수 없는 점' 에 도달하는 경우 블랙홀 그림이 옳다는 것을 대변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명제 혹은 그에 해당하는 정리의 증명은 고사하고 '돌아올 수 없는 점' 에 대하여 (구대칭을 이용하지 않는) 수학적으로 정의 가능한 그 어떤 기준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동료 한 사람이 (아이보 로빈슨 [ Ivor Robinson ]) 이 미국으로부터 방문하여, 함께 런던의 버크벡 대학에 있는 나의 연구실로 걸어가면서 우리는 전혀 다른 주제에 대하여 담소에 열중하고 있었다. 대화는 길을 건너기 위하여 잠시 중단되었고 건너편에 도달하자 다시 계속되었다. 분명히 그 잠깐 사이에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는데 대화가 계속되면서 마음속에 뭉개져 버리고 말았다.

그날, 얼마 후 그 친구는 떠났고 나는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 때 나는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되살아났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가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이 기분을 느꼈던 사건을 알아내기 위해서 그날 하루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하나하나 머리 속에 되살려 보았다. 부적합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거한 뒤 비로소 나는 내가 길을 건너는 동안 머리에 떠올랐던 아이디어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그 아이디어는 바로 나의 머리 한편에서 맴돌고 있던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어서 나는 잠시 동안 희열을 느꼈던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내가 찾던 기준으로서 (후에 나는 이를 '갇힌 표면[trapped surface ]' 이라 불렀다.) 일단 이를 찾아 낸 후 내가 원하던 정리의 증명을 위한 윤곽을 잡는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Penrose, 1965). 그런 후에도 그 증명이 완전한 수식으로 완성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길을 건널 때 떠올랐던 그 아이디어가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됐던 것이다. (가끔 나는 만일에 그 날 내가 희열을 느낄 수 있는 다른,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궁금해 한다. 어쩌면 갇힌 표면의 아이디어는 결코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위의 일화는 영감과 통찰력에 대한 또 다른 이슈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즉, 우리가 판단을 형성할 때 미적인 기준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예술에서는 물론 미적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 예술에서 미라는 것은 복잡 미묘한 주제로서 많은 학자들이 평생을 이 연구에 바쳐왔다. 수학이나 과학에서 미적인 기준은 단지 부수적인 것이고 진리의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감이나 통찰력에 관한 주제를 다룰 때에는 그 두가지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내 추측에는 번쩍 떠오르는 영감이 옳다는 강한 확신은 (물론 100퍼센트 다 옳진 않겠지만 그냥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훨씬 정확하다.) 그 미적인 요소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아이디어는 지저분한 것에 비해서 맞을 확률이 훨씬 높다. 최소한 나의 경험이 그러하고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Chandrasekhar, 1987) 예를 들면 아다마르의 저서 (1945, p. 31) 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분명한 것은 어떠한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에서도 찾고자 하는 의지가 필수적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푸앵카레에게서는 좀 다른 점이 있다. 미적인 감각이 발견을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수단으로서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다음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발명은 선택이다.

그선택은 과학적인 미적 감각에 의해서 크게 좌우된다.

뿐만 아니라 디렉 (Dirac, 1982) 같은 사람은, 딴 사람들이 찾으려 했으나 실패한 전자의 공식 (제6장에서 잠시 언급한 '디렉 방정식') 을 그가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예리한 미적 감각 덕분이였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고 있다.

 

 

나도 물론 나 자신의 사고 과정에서 미적 요소가 갖는 중요성을 단언할 수 있다. 이는 '영감' 의 범주에 속할 수 있는 아이디어에 동반하는 '확신' 과 연관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사람들이 자신이 희망하는 목표를 향하여 더듬어 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해야하는 '일상적인' 추측 과도 연관될 수 있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른 곳에서 비주기적 타일 (그림 3) 의 발견과 연관시켜 언급한 적이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처음 몇 가지 무늬의 미적 요소 (모양뿐 아니라 신기한 수학적 특성까지) 가 나로 하여금 지그소와 같은 적당한 매칭 규칙 (matching rule) 을 적용하여 배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직관을 갖게 하였다. (섬광처럼 왔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옳다는 확신은 약 60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다.) 잠시 뒤에 이 타일 무늬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Penrose ,1974)

분명한 것은 미적 기준이 영감의 순간적 판단 등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수학 (혹은 과학) 연구에서 우리가 항상 사용하는 훨씬 번번한 판단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완전 무결한 증명은 대게 맨 나중 단계이다! 그 이전에는 수많은 추정 작업이 필요한데 이 때 미적 확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이들은 항상 논리적 규칙과 이미 알려진 사실들의 통제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판단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의식적 사고를 결정하는 지표이다. 나의 추측에 의하면 그것이 비록 무의식적 사고로 생성되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통찰력이라 할지라도 의식이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하여 만일 그 아이디어가 옳지 않다고 여겨지지 않으면 곧 거부되거나 잊혀져 버리게 된다. (신기하게도 나는 갇힌 표현의 아이디어를 곧 잊어버렸는데 이는 여기서 다루는 내용과는 다른 수준의 문제이다. 그 아이디어는 나의 의식의 세계로 뚫고 들어와 그 인상을 오래 남겨 놓을 만큼 머물러 있었다.) 내가 말하는 미적 거부란, 내 생각에 별로 탐탁치 않은 아이디어가 의식의 꽤 영구적인 수준에까지 절대 도달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감적 사고 (inspirational thought) 에서 무의식 역할에 대한 나의 견해는 무엇인가? 이에 관해서는 내가 원하는 만큼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일단 이 분야는 무의식이 실제로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며 나 자신 무의식적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관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무의식작인 생각이 무작위로 아무렇게나 아이디어를 띄우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의식적인 생각이 그들 중 '가능성이 보이는' 아이디어에 대해서만 구애를 받게끔 할 수 있는 강력한 선별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내 생각에는 이러한 선별 기준 (주로 무언가 '미적' 이라고 할 수 있는) 도 이미 의식적인 요망에 의하여 많이 영향을 받고 있다고 여겨진다. (마치 수학에 관한 어떤 생각이 이미 밝혀진 일반 원칙에 어긋날 때 추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이와 관련하여 순수한 독창성의 여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띄워 올리는' 과정이고 또 하나는 '깎아 내리는' 과정이다. 내 추측은 띄워 올리는 것은 주로 무의식적이고 깎아 내리는 것은 주로 의식적이라는 것이다. 효과적인 띄어 올리는 과정이 없이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절대로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 자체만으로는 가치가 별로 없다. 그러한 아이디어들 중 어느 정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만 살아남을 수 있도록 판단을 해 주는 효과적인 절차도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꿈에서는 엉뚱한 생각들이 쉽사리 떠오르지만 그들 중 깨어있는 의식하에서 까다로운 판단을 통과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나의 경우에는 꿈 속에서 과학적 아이디어를 얻는데 성공한 적이 없다. 그러나 화학자 케쿨레 [Friedrich August Kekule von Stradonitz] 같은 이는 운이 좋아서 꿈 속에서 벤젠의 구조를 발견하였다.) 내 의견은 무의식적인 띄워 올리기 과정보다는 의식적인 깎아 내리기 (판단) 과정이 독창성을 결정하는 요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바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와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다.

이처럼 다소 불만스러운 상태에서 이 주제를 떠나기 전에 영감적 사고에 대한 또 한가지 놀라운 면모, 즉 총체적 (global) 특성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위에 든 푸앵카레의 일화는 놀라운 한가지 예이다. 왜냐하면 잠시 스쳐 가는 순간에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는 수학적 사고의 방대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수학을 잘 모르는 독자에게 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물론 보통 사람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 겠지만) 에는 에술가들이 (일부) 창작품 전체를 동시에 마음 속에 넣고 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놀라운 예는 모차르트의 생생한 증언이다. (아다마르의 저서에서 인용).

내가 기분이 좋고 쾌활한 상태거나 마차를 탈 때나 좋은 식사 후에 산책할 때 혹은 잠 못 이루는 밤중이면 내 마음 속에는 수만 가지 상념이 몰려 들어 온다.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 나는 알지도 못하고 또 나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 그들 중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머리 속에 남겨두고 이를 콧노래로 불러 본다. 최소한 딴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말한다. 일단 처음 주제가 잡히면 딴 멜로디가 나타나서 작곡 전체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을 그 앞의 멜로디에 연결시킨다. 대위법이 이루어지고 각 악기의 파트와 선율의 조각이 합쳐지면서 하나의 곡이 완성된다. 그러면 나의 영혼은 영감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곡은 차츰 커지기 시작한다. 나는 자꾸 이를 확장하고 마음 속에서 차츰차츰 명확하게 다듬어 결국 그것이 아무리 길더라도 전체의 작품이 머리 속에서 완성된다. 그리고는 마치 나의 눈길이 아름다운 그림이나 빼어난 젊은이의 용모를 사로잡듯이 내 마음은 그 완성된 곡을 붙잡게 된다. 이 때 내 마음 속에는 이 곡을 연속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로서 듣는다. 물론 나중에는 이를 순서적으로 생각하며 여러 가지 파트의 자세한 부분을 완성시켜 나가지만.

내 생각에는 위의 내용이 내가 말하는 띄어 올리기 / 깎아 내리기 이론에 부합된다고 본다. 띄어 올리기는 무의식적이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다.") 물론 이 경우는 매우 선택적이지만. 한편 깎아 내리기는 기호에 따라 의식적인 중재가 가미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머리 속에 남겨두고") 영감적 사고의 총체성은 모차르트가 언급한 내용 ("연속적이 아닌... 하나의 전체로서 듣는다.") 이나 푸앵카레의 증언 ("나는 이 아이디어를 검증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다.")에 특히 잘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놀라운 총체성은 보통의 의식적 사고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사고의 비언어성

아다마르의 창조적 사고에 대한 연구에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요즈음도 자주 언급되는, 사고 과정에서 언어화가 필요하다는 가설을 인상적으로 반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그가 아인슈타인에게서 받은 편지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을 것이다.

 

나의 사고 과정에서 마지막 글 그 자체는 아무런 역할을 하는 것 같지 않다. 생각의 요소로서 작용하는 심리적 객체 (psychical entity) 는 어떤 신호 (sign) 들, 그리고 '자발적으로' 생성되기도 하고 결합되기도 하는 어느 정도 명확한 영상들이다.... 위에서 말한 요소들은 나의 경우에는 시각적이고 약간 구체성도 있다. 보통 사용되는 글이나 부호는 앞에서 말한 요소들의 결합 작용이 충분히 벌어지고 마음 먹은 대로 생성된 후에야 두 번째 단계로서 공을 들여 다루게 된다.

유명한 유전공학자 프란시스갤턴 (Francis Galton) 의 말도 인용할 가치가 있다.

 

내가 말 (단어들) 로써는 생각을 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글을 쓸 때나 특히 내 속마음을 설명하고자 할 때 심각한 핸디캡으로 작용한다. 나는 어떤 일을 열심히 한 후 혹은 완전히 명료하고 만족한 결과를 구한 후 이들을 말로 옮기려 할 때, 우선 이와는 전혀 다른 지적 차원으로 일단 옮겨가야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난 우선 나의 생각을 말로 번역해야 하는데 그 말이 생각의 차원에서는 부드럽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적당한 글과 구절을 찾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하고 또 갑자기 연설을 해야 될 경우에도 말이 매우 모호해지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생각이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단지 말이 서투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인생에서 약간 짜증나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아다마르 자신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정말로 생각할 때에는 단어들은 나의 생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질문을 읽거나 듣게 되면 이를 숙고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그 곳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들은 사라져 버린다는 점에서 나의 경우도 갤턴과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Arthur Schopenhauer) 의 "생각은 글로써 실체화되는 순간 죽어 버린다." 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내가 위의 예들을 인용한 것은 그들이 나의 사고 방식과 일맥 상통하기 때문이다. 나의 수학적 사고 대부분은 시각적으로 이루어지고 비언어적인 개념을 사용한다. 물론 그 생각들이 '저건 저래서 이건 이렇고' 등의 공허하고 거의 쓸모없는 말들과 동반되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간단한 논리적 추론 등에 말을 사용해야 되는 경우는 가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색가들이 생각을 말로써 표현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나 자신 자주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때때로 그 이유는 단순히 그 필요한 개념을 설명해 주는 말이 없기 때문일 때도 있다. 실제로 나는 가끔 어떤 타입의 대수 방정식을 나타내는 특별 설계된 도표를 이용하여 계산을 수행하기도 한다. (Penrose & Rindler, 1984, p. 424 - 34). 이러한 도표를 말이나 글로 다시 바꾸어 주는 것은 실로 지겨운 작업으로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야 될 때처럼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경험으로서 내가 한동안 수학에 깊이 몰두하여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대화를 걸어오면 몇 초 동안 전혀 말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전혀 말로써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수학적 사고에서 나의 경우 말은 거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종류의 사고들 (어쩌면 철학 같은 것) 은 언어적 표현에 훨씬 적합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때문에 수많은 철학자들이 언어가 지능이나 의식적 사고에 필수적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람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경험으로 미루어 본 사실인데 심지어는 같은 수학자들도 서로 다르다. 수학적 사고에서 양 극단은 분석적 / 기하적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다마르의 경우 수학적 사고를 위해서는 언어적 이미지보다 시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였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분석 쪽이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의 경우는 기하 쪽 극단에 매우 가깝다. 그러나 수학자들 사이의 스펙트럼은 일반적으로 매우 넓다.

일단 의식적 사고의 대부분이 비언어적 특성을 기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위에서 언급된 사항 등에 의하면 이는 불가피한 결론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사고가 비알고리즘적 요소를 가질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제9장에서,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반쪽 두뇌 (대부분의 경우 좌측 뇌) 만이 생각도 하게 한다고 자주 제기되는 주장에 관하여 언급한 적이 있다. 위에서 제시한 관점에서 보면 내가 왜 이 주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는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수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어느 한쪽 뇌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진정한 수학적 사고를 위해서는 높은 레벨의 의식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분석적 사고가 주로 좌측 뇌의 영역에 속하는 데 비해서 기하학 사고는 우측 뇌에 속한다는 주장이 많다. 그러므로 상당한 양의 의식적인 수학적 사고가 실제로 뇌의 우측에서 벌어질 것이라는 추측도 설득력이 있다.

동물의 의식?

의식에서 언어 구사 (verbalization) 의 중요성에 관한 주제를 마치기 전에 앞에서 잠시 언급된 바 있는 문제, 즉 인간이 아닌 동물에도 의식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내 생각에 사람들은 때때로 동물이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들어 그들이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으로 결부시키고 은연중에 아무런 권리도 줄 수 없다는 쪽으로 유도하는 것 같다. 이에 독자들은 내가 왜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아주 복잡한 의식적 사고 (수학) 가 언어 사용 없이도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측 뇌도 마찬가지로 언어 능력 결핍으로 인하여 침팬지 정도의 '적은' 의식만이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도 가끔 등장한다. (LeDoux, 1985, pp. 197 - 216)

침팬지나 고릴라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방법 대신 (그들에게 적합한 성대가 없어서 말은 불가능하다.) 수화 (手話) 를 사용할 수 있다고 했을 때, 그들에게 진정한 언어 구사 능력이 실제로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Blakemore, Greenfield, 1987). 분명한 것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최소한도 기초적인 의사 전달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의견은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언어구사' 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약간 야비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사람들은 유인원이 언어 사용자 클럽에 입회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의식적 동물의 클럽에서도 제외시키고 싶은 희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어에 관한 문제를 제쳐 놓으면 침팬지에게 진정한 영감이 가능하다는 유력한 증거가 있다. 콘라트 로렌츠 (Konrad Lorenz, 1972) 는 어떤 방에 바나나를 천장에 손이 닿을 수 없도록 매달아 놀고 방 다른 편에는 상자를 놓고 나서 침팬지를 집어넣은 실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이로 인하여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그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갑자기 (이렇게 밖에는 이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우울하던 얼굴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의 눈길이 바나나로부터 그 아래의 빈 공간에 머물렀다가 상자 쪽으로 갔고 다시 눈길이 그 공간으로 돌아온 뒤 바나나를 향했다. 다음 순간 그의 기쁨의 괴성을 질렀고 신나게 상자 쪽으로 재주넘기를 하며 달려갔다. 성공에 대한 완전한 자신감에 가득 차서 그는 상자를 바나나 아래로 밀고 갔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 누구도 유인원에게도 '아하!' 하는 경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가 없었다.

주의할 것은 마치 푸앵카레가 버스에 오르며 경험한 것처럼 침팬지도 그 아이디어를 검증해 보기 이전에 이미 그가 성공할 것에 대하여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판단에 의식이 필요하다는 나의 주장이 옳다면 인간이 아닌 동물에게도 정말로 의식이 있을 수 있다는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돌고래 (혹은 고래) 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의문점이 제기된다. 한 가지 알아둘 것은 돌고래 대뇌의 크기는 사람의 그것과 같거나 오히려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돌고래들은 극도로 복잡한 소리 신호를 서로에게 보낼 수 있다. 그렇게 큰 두뇌가 사람이나 혹은 유인원 등의 기준에서 보는 '지능' 과는 다른 어떤 목적 때문에 필요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물건을 잡을 만한 손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문명' 을 이룩할 수 도 없다. 또 같은 이유 때문에 책 같은 것은 저술할 수 없겠지만 그들도 때로는 철학자가 되어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기도 하고, 그들이 왜 '그 곳에'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숙고할런지도 모른다. 때로는 그들고 '성찰 (省察)' 의 감정을 그들만의 두뇌 한쪽을 사용하여 '언어 구사' 를 하고 서로 의사 소통을 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지는 않다. 가끔 인간에게 수행된 '뇌 분리' 수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자아' 의 연속성에 대한 뒤엉킨 듯한 혼돈감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돌고래는 잠잘 때 모든 두뇌가 동시에 수면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쪽씩번갈아 잠을 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돌고래에게 그들의 의식의 연속성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는가' 를 물을 수만 있다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세계와의 만남

앞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에 매우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수학자들이 수학에 대하여 사고하는 방식마저도 제각기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내 기억에 내가 처음 수학을 배우러 대학에 들어왔을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수학과 동료들이 나와 비슷한 방법으로 생각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 당시 학교에서 친구들이 나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웠던 경험이 있다. 그 전에는 속으로 '이제는 쉽게 말이 통하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테지. 사람에 따라 나보다 좀더 효과적으로 생각하거나 덜 효과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떻든 모두 나와 똑같은 주파수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하고 생각하며 흥분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훨씬 많은 형태의 사고 방식들을 경험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내 방식은 다른 사람에 비하여 좀더 기학적이고 덜 분석적이였다. 그러나 나의 동료들의 사고 형태는 그 외에도 매우 여러 가지가 있었다. 특히 나는 말로 설명된 수식을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낀데 반하여 대다수의 동료들은 그러한 어려움이 전혀 없어 보였다.

동료 친구들이 어떤 수학 문제에 대하여 설명하려 할 때 느꼈던 공통된 경험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들으려해도 그 말과 말 사이의 논리적 연결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그가 전달하는 아이디어에 대하여 추측에 의한 영상이 생겨나곤 하였으며 그에 따라 대답도 하였다. 그 영상은 순전히 내 나름대로 만들어 낸 것이고 그 친구가 생각하고 있는 그림과는 전혀 연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대답은 대게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대화는 이런 식으로 이리저리 계속되어 나갔다. 분명히 궁극에 가서는 무언가 진정한 그리고 확실한 의사 소통이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서로 나눈 문장 하나하나는 거의 실제로 이해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뒤 직업적인 수학자 (수리물리학자) 가 된 후에도 이러한 현상은 내가 학부 시절 때와 별로 달라진 점이 없었다. 어쩌면 수학적 경험이 늘어감에 따라 다른 사람이 설명할 때 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좀 더 잘 추측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에도 다른 형태의 사고 방식에 대하여 좀더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약간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달라진 점은 없다.

이렇게 이상한 방법으로 의사 소통 자체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끔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 대하여 한가지 설명을 제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다른 주제와도 매우 깊은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점은 수학의 의사 전달에서 사람들은 단순한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러 개의 (불확정) 사실들이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사람이 그 사실들을 조심스럽게 발표하고 두 번째 사람은 이를 하나씩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수학에서는 사실적 내용은 별로 많지 않다. 수학적 명제들이란 필연적인 진리들이기 때문에 (혹은, 그렇지 않으면 필연적인 거짓이거나) 첫 번째 수학자의 주장이 그러한 필연적 진리에 대하여 더듬거린 표현에 불과할지라도 두 번째 수학자가 이를 적절히 이해했다면 그 진리성 자체가 전달되는 것이다. 두 번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영상은 첫 번째 사람이 생각하는 그림과 세부적으로는 다를 수 있고 말고 된 설명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해당되는 수학적 아이디어는 이미 서로 통한 것이다.

만일 흥미롭고 심오한 수학적 진리들이 보통의 수학적 진리들 사이에 띄엄띄엄 퍼져 있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형태의 의사 소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전달하고자 하는 수학적 진리가 4897 × 512 = 2507264 와 같이 재미없는 주장이었다면 두 번째 사람이 그 주장을 정확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첫 번째 사람의 말을 그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학적으로 흥미로운 주장의 경우에는 설명을 부정확하게 하더라도 종종 의도한 개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모순점이 있어 보인다. 왜냐 하면 수학은 정확성을 가장 필요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이에 쓰는 경우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정확하면서도 완전한가 조심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수학적 아이디어가 전달되기 위해서는 (대개의 경우 말로써 설명) 그러한 정확성은 처음 단계에서는 오히려 방해 요소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좀 모호하고 서술적인 형태의 의사 소통이 필요하다. 그 아이디어의 정수가 일단 이해가 되면 자세한 내용은 후에 검토해도 되는 것이다.

수학적 아이디어는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의사 소통이 가능한 것일까? 내가 추측하는 것은 마음이 수학적 아이디어를 감지할 때마다 플라톤식 수학적 개념의 세계와 교감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플라톤식 관점에서는 수학적 아이디어가 그들 자체의 존제성이 있을 뿐 아니라 이상적인 플라톤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 플라톤 세계는 지성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비교 ; p. 166, 257.) 어떤 사람이 수학적 진리를 '보게' 되면 그의 의식은 이 아이디어 (이데아) 의 세계로 뚫고 들어가 직접적인 접촉 ('지성을 통해서만 도달함') 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본다' 라는 것을 괴델의 정리와 부결시켜 설명한 적이 있지만 사실 그것이 수학적 이해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학자들이 서로 의사 전달을 하기 위해서는 각자 수학적 진리로의 직접 통로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들의 의식은 수학적 진리를 '본다' 는 과정을 이용하여 직접 감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게 된다. (실제로 이러한 감지에 종종 수반되는 영어 감탄사 중엔 '그래 이제 보여 [Oh, I see]!' 라는 것이 있다.) 각자가 플라톤의 세계와 직접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예상보다 훨씬 수월하게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식 교감이 일어나면서 그들 마음 속에 떠오르는 영상은 각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의사 전달이 가능한 것은 각자가 동일한 플라톤 세계에 접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마음은 항상 이와 같은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한 번에 아주 조금씩만 통과할 수 있다. 수학적 발견은 그러한 접촉면의 면적을 넓혀 준다. 수학적 진리는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사실 때문에 기술적인 관점에서의 실제 '정보' 는 그 발견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모든 정보는 이미 거기에 죽 있어 왔던 것이다. 다만 문제는 모든 것을 종합하여 해답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 자신의 생각, 즉 (예를 들어 수학적) 발견이란 기억의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과도 아주 잘 부합된다. 실제로 나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알맞는 수학적 개념을 찾지 못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에 깜짝 놀라곤 한다. 양쪽 모두 찾고자 하는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 발견되지 못한 수학적 개념의 경우에는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없겠지만.

사물을 이러한 방식으로 보는 것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수학적 의사 소통의 경우, 흥미롭고 심오한 수학적 개념일수록 재미없거나 당연한 것들에 비하여 무언가 강력한 존재성이 있다고 상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다음 절에서 다루어지는 나의 추측과 관련하여 볼 때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물리적 실체에 관한 견해

생각이 물리적 실체의 세계에서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견해들은 모두, 최소한 간접적으로라도 물리적 실체 그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강인공지능주의자 같은 이들은 '마음' 이 충분히 복잡한 알고리즘의 몸을 빌어 실세계의 물체들이 이 알고리즘에 따라 동작을 함으로써 존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 물체가 무엇인가를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신경 신호이건, 전선을 흐르는 전류이건, 톱니바퀴, 도르레, 혹은 수도관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알고리즘 자체라고 여긴다. 그러나 알고리즘이 특정한 물리적 구현과 무관하게 '존재' 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적인 시각에서 수학을 보는 것이 필수적이라 여겨진다. 강인공지능주의자가 "수학적 개념은 마음 속에만 존재한다" 식의 주장은 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알고리즘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미리 마음이 존재하여야 하고 마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알고리즘이 있어야 라는 순환 논리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반박할지 모른다. 즉, 알고리즘은 종이 위의 표시나 쇳조각의자성 방향 혹은 컴퓨터 기억 장치의 충전 이동 등의 단순한 형태로써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물체의 재료의 특성 배열 자체로는 알고리즘이 성립될 수 없다. 알고리즘이 되기 위해서는 의미 해석 과정이 필요하다. 즉, 그 배열을 풀어 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그 알고리즘이 작성된 '언어' 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 언어를 '이해' 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기존의 마음이 필요하고 또 다시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만일 알고리즘이 플라톤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강인공지능론자의 주장은 바로 그 세계에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이기에 이제는 실세계와 플라톤의 세계를 어떻게 상호 연관지어야 하는가가 새로운 문제로 부각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강인공지능 관점에서의 심신 상관 문제라고 본다.

나의 견해는 이와는 좀 차이가 있다. 왜냐 하면 나는 (의식적인) 마음이 알고리즘적 존재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인공지능주의자의 견해와 나의 견해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신은 약간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의식이라는 것이 필연적 진리를 감지하는 것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이 된다고 믿고 있다. 그리하여 수학적 개념으로 이루어진 플라톤 세계와 직접적인 접촉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알고리즘적 과정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특히 관심을 갖는 그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도 알고리즘이 아니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에서도 플라톤 세계와 실제 물체들로 이루어진 '실세계' 가 어떤 관계인가하는 심신 상관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우리는 제5장과 6장에서 실체의 물리적 세계가 매우 정밀한 수식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았다. (SUPERB 이론, 비교 ; p. 247) 그 정밀성이 얼마나 놀라운가는 가끔 지적된 바 있다. (Wigner,1960) 이미 몇몇 사람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그러한 Wigner 이론이 단순히 무작위적인 자연 선택에 의하여 좋은 것들만 살아남는 방법으로 생겨났다고는 믿기가 어렵다. 그 좋은 것들이 무작위적으로 생겨난 것들 중에는 살아 남은 아이디어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좋다는데 문제가 있다. 실로 수학과 물리학, 즉 플라톤의 세계와 실세계 사이의 조화 이면에는 어떤 깊은 배경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다.

'플라톤 세계' 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것에 대하여 마치 실세계에서와 같은 실체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실세계의 실체성 자체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의 SUPERB 이론 등장 이전에 비하여 모호해진 것도 사실이다. (p. 247, 248, 446 참조) 이러한 이론의 정확성으로 인하여 실제의 물리적 실제에 대한 추상적인 수학적 실체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모순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구체적인 현실이 추상적이고 수학적으로 바뀔 수 있는가? 이는 어떻게 추상적인 수학 개념이 어쩌면 플라톤의 세계에서 구체적인 현실성을 이루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두 세계는 실제로는 같은 것이 아닐까? (Wigner, 1960 ; Penrose, 1979a ; Barrow, 1988 ; Atkins, 1987)

비록 나 자신은 이 두 개의 세계가 실제로 같다는 의견에 강한 동감을 갖고 있지만 여기에는 또다른 무엇이 있다고 본다. 제3장과 이 장 전반부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떤 수학적 진리는 다른 것보다 더 강한 ('깊은' , '더 흥미로운' , '더 풍요한'?) 플라톤적 실체를 갖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물리적 실체의 작용들과 동일성이 더욱 강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제3장의 복소수 체계가 좋은 예이다. 이들은 확률 진폭의 형태로 양자 역학의 기본 요소가 된다.) 이러한 동일성을 인식함으로써 '마음' 이 어쩌면 실세계와 플라톤의 수학 세계 사이의 신비한 연결 관계를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4장에서 기술된 것을 기억하여 보면 수학의 세계에서 특히 깊고 흥미있는 많은 부분은 알고리즘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였다. 그러므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견해에 따르면 비알고리즘적 행동이 실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역할이 '마음' 이라는 개념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정론과 강결정론

지금까지 나는 심신 상관 문제의 활성부에서 근본적인 이슈로 알려진 '자유 의지' 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대신 나는 의식적 행동의 역할에서 필수적으로 비알고리즘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의견은 피력하였다. 보통 자유 의지에 의한 이슈는 물리학의 결정론 (determinism) 과 관련하여 논의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SUPERB이론에서는 만일 어떤 시스템의 한 시점에서의 상태를 알 수만 있다면 그 이론의 공식에 따라 그 이후 (혹은 이전의) 모든 시점에서의 상태도 완전히 고정된다는 점에서 분명한 결정론이 성립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떤 시스템의 미래 행동이 물리적 법칙에 의하여 완전히 결정되기 때문에 '자유 의지' 가 깃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양자 역학의 U 부분도 이러한 완전 결정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R '양자 도약' 의 경우 결정적이 아닐 뿐 아니라 완전한 무작위적 요소를 시간 전개상에 도입하고 있다. 일찍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어쩌면 자유 의지의 역할이 있지 않는가 하는 가능성에 대하여 흥분한 적이 있다. 의식의 작용이 어쩌면 각 양자 시스템이 도약하는 방법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만일 R 이진정 무작위적이라면 우리가 자유 의지를 이용하여 무언가를 하고 싶더라도 별로 도움이 될 수 없다.

나의 견해는 - 아직 확정적으로 잘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 U와 R (둘 다 지금은 근사치로 간주됨) 사이에 보간적으로 양자 - 고전의 경계선에서 작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프로시듀어 (제8장의 CQG 참조) 가 있어서 이 새로운 프로시듀어가 본질적으로 비알고리즘적인 요소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내포하는 것은 미래는 현재에 의해서 결정적일 수는 있지만 계산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나는 제5장에서 계산 가능성과 결정론의 차이를 명백히 하고자 노력한 바 있다. 내 생각에는 CQG 가 결정적이지만 계산 불가능한 이론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제5장에서 제시한 계산 불가능한 '장난감 모형' 을 기억하기 바란다.)

사람들은 간혹 고전적 (혹은 U 양자) 결정론의 경우라도 미래 상황이 실제로 계산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초기 조건이 완전히 알려질 수 없기 때문에 효과적인 결정론이 있을 수 없다는 견해를 취하기도 한다. 초기 조건의 극히 작은 변화가 최종 결과에 아주 커다란 차이를 초래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예를 들면 (고전) 결정론적 체계안에서의 '카오스' 현상 - 기상 예보의 불확실성들을 설명하는데 사용하기도 하는 - 에서 일어나는 것도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고전적 불확정성이 우리의 자유 의지 (의 화상?) 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살은 매우 납득하기 힘들다. 여전히 미래의 양태는 - 비록 계산은 할 수 없을 지라도 - 빅뱅 이래로 완전히 결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비교; p. 279).

현재 비알고리즘적 특성이 있다고 간주되고 있는 동역학 법칙들에서 초기 조건의 정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계산 가능성이 본질적으로 결여되었다는 나의 견해에 대하여 같은 식의 반박이 있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미래는 비록 계산 가능하지는 않지만 이 역시 빅뱅으로까지 멀리 이어지는 과거에 의하여 완전히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CQG 가 꼭 결정적이지만 계산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집할 만큼 독단적인 것은 아니다. 추측하건데 우리가 찾는 이론은 이보다는 좀더 미묘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어떤 본질적인 종류의 비알고리즘적 요소들을 내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절을 마무리하기 전에 결정론에서 좀더 극단적인 견해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이는 내가 강결정론 (strong determinism) 이라고 부르는 관점이다 (Penrose, 1987b). 강결정론에 따르면 단순히 미래가 과거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확한 공식에 따라 우주 전체 역사의 모든 시간이 이미 결정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플라톤 세계와 실세계가 어떤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약간 수긍이 갈지 모른다. 왜냐 하면 플라톤 세계는 우주에 대하여 '다른 가능성' 이 있을 수 없고 한 번 결정으로 고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아인슈타인이 다음과 같은 글을 쓸 적에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내가 진정 흥미를 갖는 것은 신이 이 세상을 다른 식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즉, 논리적 간결함의 필연성에 다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 에른스트 슈트라우스 [Ernst Strauss ] 에게 쓴 편지 중에서, Kuznetsov, 1977.)

강결정론의 변형으로서 양자 역학의 다세계 관점을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정밀한 공식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단순히 하나의 우주 역사 (universe-history) 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가능한' 우주 역사들이 한꺼번에 결정된다는 것이다. 비록 이 방법이 (최소한도 나에게는) 썩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점과 비합리성을 내포하고는 있지만 그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내 생각에는 만일 우리가 다세계가 배제된 강결정론을 인정한다면 우주의 구조를 총괄하는 수학 법칙은 어쩌면 비알고리즘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만일 그렇지 않다고 가정한다면 원칙적으로 누구든지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미리 계산할 수도 있고 이를 참조하여 완전히 다른 일을 하도록 '결정' 함으로써 '자유 의지' 와 그 이론의 강결정론 사이에 완전한 모순을 피할 수는 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러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내가 기대하는 것은 이 세계가 돌아가는 방법을 총괄하는 실제 (비알리고즘적) 규칙이 이보다는 훨씬 복잡 미묘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인간 원리

의식의 존재는 우주 전체로 볼 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우주라는 것이 의식을 보유한 그 어떤 서식체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가? 물리학의 법칙들은 의식이 있는 생명체의 존재를 위하여 특별히 설계된 것인가? 우주 안에서 우리의 시공간적인 현재 위치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종류의 질문이 인간 원리 (anthropic principle) 라 부르게 된 영역에서 주로 다루는 문제들이다.

이 원리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Barrow & Tipler, 1986). 이들 중 가장 명료하게 받아들여지는 형태는 의식을 보유한(혹은 '지능적인') 생명체에 대한 우주에서의 시공간적 위치를 다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약인간 원리 (weak anthropic principle) 이다. 그 내용은 현재 지구상의 여러 가지 조건들이 왜 (지능적인)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딱 알맞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 왜냐 하면 만일 그 조건이 그렇게 적합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도 지금 현재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고 혹은 다른 적당한 때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브랜든 카터 (Brandon Carter) 와 로버트 디키 (Robert Dicke) 가 물리학자들이 오랫동안 불가사이하게 여겨왔던 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 문제란 여러 가지 물리적 상수들 (예를 들면 중력 상수, 양성자의 질량, 우주의 나이 등)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관측이 여러 가지 놀라운 수치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의 불가사이한 점은 그 관계들이 지구의 역사에서 현 시대에만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연히도 아주 특별한 시기 (몇 백만 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에 살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는 후에 카터와 디키에 의해서 이 시대에 태양과 같은 주계열 (main - sequence) 항성의 활성기와 우연히 일치한다는 사실로써 설명되었다. 그 주장에 의하면 다른 시기에는 그 물리적 상수들을 측정할 만큼 지능적인 생물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우연성은 성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성립 이유는 그 우연성을 만족하는 시대에만 지능적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인간 원리는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즉, 현우주에서 우리의 시공간적 위치만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가능 우주 내에서의 위치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제는 물리적 상수들, 혹은 일반적인 물리 법칙들이 왜 지능적인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도 답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주장에 따르면 만일 상수들이나 법칙이 조금이라도 달랐더라면 우리는 지금의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우주 속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내 의견으로는 강인간 원리는 약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주로 이론가들이 관측된 어떤 사실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이론이 없을 때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입자 물리학 이론에서 입자의 질량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한 경우 만일 그들의 질량이 관측된 값과 달랐다면 생명체가 불가능했을 겻이라는 주장). 그에 비하여 약인간원리는 만약 아주 조심해서 사용되기만 한다면 나무랄 데 없는 이론이라고 생각된다.

인간 원리 (강이건 약이건 간에) 를 사용하면 이 세상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같은 지각적인 생물이 존재해야 된다는 사실을 들어 의식이 불가피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장한 것처럼 지각력이 자연 선택에서 유리하다는 식의 가정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 의견은 이 주장이 기술적으로 틀림없다는 것, 그리고 약인간 원리는 의식이 자연 선택이 도움 없이도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최소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 원리적 주장이 의식이 개발되게 된 진짜 이유 (혹은 유일한 이유) 라고는 믿을 수 없다. 다른 측면의 수많은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의식은 실제로 강력한 선택적 이점이 있어 보이고 인간 원리적 주장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타일링과 준결정체

앞에 몇 절에서는 주로 추측에 근거한 내용을 다루었지만 이제는 좀더 과학적이고 '파악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물론 여기서 다루는 것들도 추측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언뜻 보면 이 내용은 좀 주제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절에 가면 이 내용이 왜 중요한가 하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앞에서 (그림 4.12) 제시된 타일링 (tiling) 의 무늬를 생각해 보자. 이 무늬들은 그들이 결정체 격자 (crystal lattice) 에 대한 일반 수학 정리를 '거의'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 놀랐다. 그 정리에 따르면 결정 구조 패턴 (crystalline pattern) 에서 허용되는 회전 대칭 (rotational symmetry) 은 2중, 3중, 4중, 또는 6중의 경우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정 구조 패턴이라 함은 평행 대칭성 (translational symmetry)을 갖는 점들로 구성된 이산 구조이다. 평행 대칭성이라는 것은 어떤 무늬를 자기 자신 위에서 회전 없이 평행으로 이동할 때 다시 일치하게 되는 점이 있는가 하는 것으로서 (그 움직임으로 무늬의 변화는 없다.) 주기적 평행 사변형 (periodic parallelogram, 그림 4.8) 을 갖는다. 이러한 회전 대칭 행성을 가진 무늬의 예는 그림 2 에 주어졌다. 그런데 그림 4.12에 주어진 무늬는 그림 3 에 무늬 (이는 본질적으로 그림 4.11 의 타일들을 짜맞춘 타일 배열이다.) 처럼 거의 평행 대칭에 가깝고 또 거의 5중에 가깝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거의' 라는 마른 자기자신과 완전 일치는 불가능하더라도 미리 주어진 어떤 정도 (100퍼센트에서 약간 모자라는) 이상 일치 가능한 배열 이동 (평행 혹은 회전) 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에 대하여 정확한 의미를 우려할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에게 관심있는 점은 만약 이러한 패턴의 꼭지마다에 원자가 붙은 물체를 갖게 된다면 그 물체는 결정체처럼 보이면서도 금단의 5중 대칭성을 보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1984년 겨울, 미국 워싱턴의 국립 표준국에서 공동 연구 중이던 이스라엘의 물리학자 대니 쉐이트만 (Dany Shechtman) 은 알루미늄과 망간의 합금으로서 5중 대칭성을 가진, 결정체 비슷한 (준결정체 [quasicrystall] 로 불리게 됨) 물질의 위상 (phase) 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였다. 실제로 이 준결정체는 평면뿐 아니라 3차원에서의 대칭성도 보여줌으로써 금단의 20중 (icosahedral) 대칭성이 되었다 (Shechtman, et al. 1984). (나의 5중 평면 타일 배열과 유사한 3차원에서의 20중 대칭 패턴은 1975년에 로버트 암만 [Robert Ammann] 에 의해 발견되었다. Gardner, 1989.) 쉐히트만의 합금은 직경이 약 10-3밀리미터로서 현미경에 보일까 말까 하는 크기로 밖에 형성되지 않았지만 후에 다른 준결정체 물질들이 발견되었고 특히 알루미늄 - 리튬 - 구리 합금의 20중 대칭 물질은 약 1밀리미터까지 퍼져서 육안으로도 충분히 식별될 정도였다 (그림 4).

 

위에서 기술한 준결정적 타일링무늬의 놀라운 특성은 그들의 조립이 필수적으로 비국소적이라는 사실이다. 그 말은 그 무늬를 조립할 때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꼭 때때로 지금 조립하는 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상황을 확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내가 자연 선택과 관련하여 '지능적 탐색 [intelligent groping]' 이라 부르는 것과 유사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종류의 특성은 현재 준결정체의 구조와 성장에 관한 의문을 둘러싼 심각한 논란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에 관하여 현재로서는 추후 중요한 관련 문제들이 해결될 때 까지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별로 현명치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추측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의견을 감히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이 준결정적 물체들이 매우 체계적으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의 원자 배열이 내가 생각해 오던 타일 무늬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나의 (현재) 의견은 이것이 그들의 조립이 일반적인 고전 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는 것처럼 결정체의 성장이 국소적으로 원자를 하나씩 추가함으로써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이 조립 과정에 필수적으로 비국소적인 양자 역학적 요소가 가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준결정체의 성장에 관하여 내가 생각하는 그림은 원자가 하나씩 들어와서 계속 움직이는 성장선에 붙게 되는 것 (고전적 결정체 성장 이론) 이 아니고 접착되는 원소들의 여러 가지 가능한 배열들 (양자 프로시듀어 U 에 의한) 에 따라 생성되는 양자 성형 중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양자 역학에 따르면 바로 이러한 것이 (거의 모든 일에) 발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그저 한 가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별개의 원자 배열들이 복소 선형 중첩상에 공존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첩된 배열중 몇 개는 아주 큰 덩어리로 자라나게 되어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그들 사이의 중력장 차이가 1그라비톤 수준만큼 (혹은 임의의 적정량만큼-제8장 참조) 나게 된다. 이단계에 이르면 그 배열중 하나, 혹은 더 가능성이 많은 것은 아직 중첩된 상태 중의 하나가 '실제' 배열로서 선택되게 된다 (양자 프로시듀어 R). 이러한 중첩 조립 과정이 좀더 확실한 배열로의 변호나 과정과 병행되어 스케일이 점점 커지게 되고 결국 꽤 큰 크기의 준결정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자연이 결정체의 구조를 택하고자 할 때에는 가장 작은 에너지 (배경 온도를 0으로 잡았을 때의) 를 필요로 하는 구조를 선택하게 된다. 나는 준결정체 현상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추측한다. 다만 다른 점은 이 과정에서 최소의 에너지를 찾기가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원자의 '최적' 배열을 찾는 데에도 단순히 원자를 하나씩 첨가에 나가면서 각 원자가 자체의 최소화 문제 (minimization problem) 를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대신 총체적인 문제풀이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개의 원자가 동시에 힘을 합친 노력이 필요하다. 나의 주장은 이러한 협력이 양자 역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여러 방식으로 구성된 원소 배열들이 선형 중첩상에서 (어쩌면 제9장에서 언급된 양자 컴퓨터 비슷한 방법으로) 동시에 '시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화 문제에 대한 적절한 (비록 최선은 아니라 할지라도) 답은 1그라비톤 (혹은 임의의 적정량) 기준에 따라 선택되어야 하는데 이 기준은 모든 물리적 조건이 딱 들어맞을 때에 비로소 달성된다고 여겨지고 있다.

두뇌의 가소성과의 연관 가능성

이제 이러한 추측을 좀더 발전시켜 이것이 두뇌의 작용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가능성은 두뇌의 가소성 (plasticity) 현상과의 관계이다. 두뇌가 실제로 컴퓨터와는 좀 다르고 오히려 계속 변화하는 컴퓨터에 가깝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러한 변화는 수상돌기 (p. 602, 그림 9.15) 의 확장과 수축에 따라 시냅스가 활성화되는가 아닌가 하는 데에서 야기된다. 난 여기에서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러한 확장과 수축이 준결정체의 성장에 관련된 것과 비슷한 과정에 의해서 조정된다는 추측의 해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여러 가지 가능성 중 하나의 상황만 시도되는 것이 아니라 복소 선형 중첩상에 중첩된 무수히 많은 상황들이 시도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들의 효과가 1그라비톤 (혹은 다른 값) 수준 이하로만 유지되는 한 그들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U 양자 역학의 법칙에 따른다면 거의 필수적으로 공존할 수밖에 없다.). 이 수준하에서는 양자 컴퓨터의 원리와 거의 흡사한 방법으로 동시에 중첩 계산이 수행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첩이 오래 지속되리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 하면 신경 신호는 전자장을 생성하고 그에 따라 그 주위의 물질이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골수막 [myelin sheath] 에 의한 절연 효과가 있기는 하다 .). 그러한 중첩 계산이 충분히 지속되어 1그라비톤 (혹은 다른 값) 수준에 이르기 전에 중요한 내용이 실제로 계산될 수 있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러한 계산의 성공적 결과는 바로 준결정체의 성장에서 단순히 에너지를 최소화 시키는 '목표' 와 같이 하나의 '목표' 가 된다. 그러므로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마치 준결정체의 성장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이 가설에 대해서는 물론 모호하고 의심스러운 점이 많이 있으나 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일리가 있는 유사점임을 의심치 않는다. 결정체나 준결정체의 성장은 주위의 적절한 원자와 이온의 농도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수상돌기군의 확장과 수축이 그 근방의 여러 가지 신경 전달 물질의 농도에 따라 (예를 들면 감정 등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음)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준결정체에서 어떤 원자 배열이 실제로 채택되는가 하는 것은 에너지의 최소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내 추측에 의하면 두뇌에서 표출되는 실제의 생각도 결국은 문제를 푸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는 에너지 최소화의 문제처럼 단순한 것은 아닐 것이다. 대개 이 경우에는 훨씬 복잡한 성질의 목표가 주어질 것이다. 욕심이라거나 의도가 관여하게 되는데 그들 자체도 두뇌의 계산적 측면이나 능력에 깊은 관계가 있다. 내가 추측하기에 의식적 생각의 활동은 선형 중첩상에 존재하던 여러 가지 가능성을 푸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는 모두 우리가 아직 잘 모르는 물리학의 일면, 즉, U 와 R 사이의 경계를 관장하는 어떤 법칙과 연관되어 있고 내가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양자 중력 이론인 CQG 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한 물리적 활동이 비알고리즘적일 수가 있을까? 제4장에 기록된 일반 타일 배열 문제는 알고리즘적인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중의 하나였다. 원소의 조립 문제도 이러한 비알고리즘적인 성격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문제들이 내가 암시하고 있는 종류의 수단으로 '풀릴' 수만 있다면 내가 생각하는 타입의 두뇌 활동엔 비알고리즘적 요소가 존재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기 위해서는 CQG 에 비알고리즘적인 요소가 있어야만 한다. 분명히 여기에는 상당한 추측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관점에 따르면 무언가 비알고리즘적인 성질을 필요로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두뇌 연결의 변환이 얼마나 빠르게 진행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신경 생리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영구적인 기억도 몇 분의 일초만에 새겨질 수 있는 것을 보면 그러한 연결의 변화도 그 정도 시간이면 가능하리라 보인다. 나의 가설이 가능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속도는 필수 적이라 할 수 있다.

의식의 타임 딜레이

이제 인간을 대상으로 실시된 두 가지의 실험 (Harth, 1982) 에 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결과는 여기에서 논의되는 내용과 놀라운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그 실험은 의식이 행동하고 반응되기까지의 시간에 관한 것들이다. 처음 실험은 의식의 능동적 역할에 관련된 것이고 두 번째 실험은 수동적 역할에 관한 것이다. 두 가지를 종합하면 그것이 함축한 의미는 더욱 놀라운 것이 된다.

처음 실험은 코른후버 (H.H.Kornhunber, 1976) 와 그의 동료들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Deecke, Grotzinger, & Kornhuber, 1976) 몇 명의 실험대상자들이 자원하여 머리 부분에서 뇌파 (EEG) 를 측정할 수 있게 장치를 끝낸 후 오른쪽 인지 손가락을 아무 때나 완전히 자의로 갑자기 구부리게 하였다. 그 이유는 뇌파 측정이 손가락을 굽힐 때 실제로 벌어지는 의식적 결정에 대하여 두개골 속에서 벌어지는 심적인 활동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뇌파 검사를 통하여 의미 있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실험치를 평균하여야 되고 대개의 경우 구체적인 결과는 얻기가 힘들다. 그런데 매우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즉, 손가락이 실제로 굽혀지기까지 약 1초 혹은 1초 반 가량 포텐셜의 치수가 서서히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 결과는 의식적 판단 과정이 1초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반응의 형태가 미리 결정된 상태에서 외부 신호에 대응하는 속도에 비하면 훨씬 느린 것이다. 예를 들면, '자유 의지' 를 주는 대신 빛을 비추게 하고 이를 신호로 이에 반응하여 손 가락을 굽히게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정상적인 반응 속도는 5분의 1초 였는데 이는 코른후버에 의하여 측정된 (그림 5) '의도적' 행동에 비하면 다섯 배 가량 빠른 것이다.

 

두 번째 실험은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리베트 (Benjamin Libet) 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시온산신경연구소 (Mount Zion Neurological) 의 파인슈타인 (Bertram Feinstein) 의 도움을 받아서, 실험과 관계없이 뇌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 중에서 뇌의 체성 감각 피질(somatosensory cortex) 몇 군데에 전극을 설치하는 것에 동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Libet, et al., 1979). 리베트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이 환자들의 피부에 자극이 주어지고 그들이 그 자극을 의식적으로 자각하는 데는 약 0.5초 가량 걸렸다. 그런데 두뇌 자체는 그 자극에 대한 신호를 받는데 약 백분의 1초밖에 걸리지 않았고 그러한 자극에 대하여 미리 프로그램된 '반사' 작용은 두뇌에서 갹 십분의 1초 내에 수행될 수 있었다. (그림 6). 게다가 그 자극이 지각되는데 약 0.5초의 딜레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 자신들은 그들이 자극을 감지하는 과정에서 전혀 딜레이가 없었던 것 같은 주관적 느낌을 가졌다는 것이다. (리베트의 실험은 시상 [htalamus] 에 대한 자극 반응도 있었으나 체성 감각 피질과 큰 차이가 없었다).

 

체성 감각 피질은 대뇌의 한 부분으로서 외부로부터 감각 신호가 들어오는 곳이라고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피부의 특정 부위에 해당하는 체성 감각 피질의 한 점을 전기적으로 자극하게 되면 마치 어떤 것이 그 피부 부위를 실제로 접촉한 듯한 감각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밝혀진 바에 따르면, 만일 전기적 자극이 너무 짧으면 (약 0.5초보다 짧으면) 그 대상은 이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피부에 직접 주는 자극과 대조를 이룬다. 왜냐 하면 피부에서는 아무리 짧은 자극이라 할지라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제 피부를 먼저 자극하고 곧이어 체성 감각 피질의 해당 부위가 전기적으로 자극된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 때 환자는 어떤 것을 느낄 것인가? 만약 전기적 자극이 피부 접촉 후 약 4분의 1초 후에 시작된다면 피부의 자극은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효과를 후방향 마스킹 (backwards masking) 이라고 부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두뇌 피질의 자극이 정상적인 피부 접촉 감각이 의식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의식적인 지각이 어떤 사건에 의하여 가려지게 ('마스크') 되는 것이다. 그 사건이 0.5초 이내에 벌어진다는 가정하에서 말이다. 그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그러한 감각에 대한 의식적 지각은 실제로 그 감각을 생성한 사건 발생 약 0.5초 이후에야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에 그렇게 긴 시간적 지연 (딜레이) 이 있다는 것을 '지각'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이상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모든 사람들의 '감각' 의 '시간' 이 '실제 시간' 보다 약 0.5초 지연된다고 보는 것이다. 마치 그들의 인체 내의 시계가 단순히 0.5초 가량 '틀리다' 고 여기는 것이다. 그 경우 사람들이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느끼는 순간은 실제로는 항상 그 사건 발생 약 0.5초 이후가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비록 지체된 것이긴 하지만 일관된 감각에 관한 인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리베트의 실험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좀더 뒷받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실험에서 그는 우선 뇌파에 전기적 자극을 가하고 이 자극을 0.5초 이상 오래 지속하였으며 전기적 자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러나 자극 시작 후 0.5초 안에) 피부에도 직접 자극을 주었다. 뇌파의 자극과 피부의 자극이 별도로 감지되었고 그 대상 환자는 그들 자극이 각기 어디에서 오는가도 분별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환자에게 어떤 감각이 먼저 느껴졌냐고 물으면 뇌파의 자극이 먼저 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피부의 접촉이 먼저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므로 그 대상은 피부 접촉의 감각에 대하여 약 0.5초간 시간적 후향성을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6). 그러나 이는 단순히 내적인 시간 감각의 전체적 '오류 (error)' 라기보다는 사건들에 대한 시간적 감각의 미묘한 재배열로 추측된다. 뇌파의 자극은 그것이 0.5초 이내에 느껴지기만 한다면 이러한 후향성은 없어 보인다.

처음 실험에서 우리는 의식적인 행동이 실행되려면 약 1초 내지 1초 반이 걸린다는 결론에 접근하였고 두 번째 실험에서는 두 외부 사건에 대한 의식은 그 사건이 발생한 후 약 0.5초가 지나서야 의식된다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예상치 못한 외부 사건에 대응하려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나 상상해 보자. 그 반응이 잠시나마 의식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리베트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의식이 불려오기 위해서는 최소한 0.5초가 흘러야 하고, 또, 코른푸버의 결과가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1초 이상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의식적' 반응이 실시된다. 그 전 과정, 즉 감각적 입력으로부터 운동 기관의 출력까지 약 2초나 걸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실험을 합쳐서 보았을 때 명백해지는 것은 외부의 사건에 반응할 때 만일 그 반응이 약 2초 내에 이루어져야 하는 경우에는 의식을 불러들일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의식적 감지에서 시간의 이상한 역할

이 실험들의 결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떼밀리는 셈이 될 것이다. 즉, 어떤 반응에 대하여 1∼2초 이내에 대응해야 되는 경우 우리는 완전히 자동 기계처럼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의식이 다른 신경조직에 비하여 느린 것은 분명하다. 나 자신 때로는 차 속에서 꺼내고 싶은 물건을 발견하고도 내 손이 그대로 차 문을 닫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보고만 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내 손의 동작을 멈추게 할 의지적 명령이 너무나 느려서 문 닫는 것을 멈추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무려 1∼2초나 걸리는 것일까? 내 생각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관여되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물론 차 속의 물체에 대한 의식적 지각과 내 손을 멈추기 위한 가상의 '자유 의지적' 명령은 각 사건 이후에 비로소 발생하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의식은 단순히 전체 드라마의 저속 재생 화면을 바라보는 관객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표면상으로는 - 위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 테니스나 탁구에서 공을 칠 때에 작용할 시간이 전혀 있을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운동의 대가들은 반응에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소뇌의 조종부에 미리 잘 프로그램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어떤 공을 쳐야 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의식이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다. 물론 상대방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예상할 수 있고 각각의 예상되는 행동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반응을 미리 프로그램해 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러한 방법은 비효율적이고, 이때에 의식의 역할이 완전히 배제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 대화에서는 더욱 뚜렷해진다. 여기에서도 대개의 경우 상대방이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지각할 수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상대방이 예기치 못한 말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렇지 않다면 대화라는 것 자체가 완전히 필요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보통의 대화에서 반응이 2초 이상 걸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의식이 반응하는 데 '실제로' 1초 반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는 코른후버의 실험 결과에 대하여 의심할 만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손가락을 굽히려는 의도에 대한 EEG곡선들의 평균을 취할 때 그와 같이 신호가 일찍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경우에만 손가락을 구부리려는 의도가 훨씬 일찍 발생하고 (그러한 경우에는 그 의도가 실행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 외의 많은 경우에는 의식활동이 이보다 훨씬 행동과 가깝게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후의 실험 결과들에 따르면 [ Libet, 1987, 1989 ] 코른후버와 약간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시간차에 대한 의문점은 그대로 남아있다.)

잠시 앞의 두 실험 결과가 실제로 옳다고 인정해 보기로 하자.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경고성 제안을 하고자 안다. 즉, 우리가 의식에 대한 이야기할 때에는 시간에 대하여 일반적 물리 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간이 우리의 의식적 지각 상태 속으로 들어오는 방법에는 아주 이상한 점이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지각 상태를 일반적인 시간 순서의 틀 속에 맞추어 넣기 위해서는 아주 다른 개념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식이란 결국 우리가 아는 것들 중에 시간이 '흘러야' 하는 유일한 현상이다. 현대 물리하에서 시간이 다루어지는 방법은 공간이 다루어지는 방법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리고 물리학에서 말하는 '시간' 은 실제로는 전혀 '흐르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우주의 사건들이 펼쳐진 정적인 고정 '시공간' 을 다루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감각에 의하면 시간은 실제로 흐른다. (제 7장 참조). 어쩌면, 이것도 일종의 착각으로서 우리가 감각하는 시간은 실제로는 우리가 흐른다 (그 의미가 무엇이건) 고 느끼는 것처럼 직선적으로 앞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의 주장은, 우리가 느낀다고 생각하는 시간적 순서는 단지 바깥 세계의 일정한 전향 시간 전개와 관련하여 우리 감각이 적응하기 쉽도록 강요된 느낌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위의 주장에 대하여 여러 가지 철학적 '결함 (unsoundness)' 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들은 당연히 옳은 내용일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실제로 감지하는 사항에 대하여 어떻게 '틀릴' 수가 있을까? 분명히, 사람들이 실제로 감지하는 것은 - 정의에 의하면 - 바로 그들이 직접 깨닫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틀릴'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간적 전개에 대해서 느끼는 것이 '틀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하며 (이를 설명하는 데 일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매우 불합리하지만) 이러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도 있다 (Churchland, 1984).

극단적인 예로서 모차르트가 '아무리 긴' 곡이라 할지라도 전 곡의 악보를 '한 눈에 포착' 할 수 있는 능력을 생각할 수 있다. 모차르트가 기술한 내용으로 보아 사람들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 '한눈' 속에는 전 곡의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느낌의 의식 활동이 진행된 실제 외부적 시간 폭 (일반적 물리 용어) 은 그 곡이 실연되는 데 필요한 시간과는 상대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짧다는 것이다. 추측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모차르트가 작곡을 할 때 그의 지각 내에서 완전히 다른 형태의 모양, 예를 들면 공간적으로 펼쳐진 시각적인 영상 혹은 악보 전체가 펼쳐져 있는 모양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보라 할지라도 전체를 숙독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그의 작곡에 대하여 애초 지각하는 것이 이러한 형태를 취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만일 그렇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시각적 영상이 오히려 그의 설명에 가깝다. 그러나 (내가 더 친숙한 수학적 이미지에서도 거의 공통적으로 볼 수 있듯이) 음악을 시각적 용어로 직접 번역하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다고 본다. 내 생각에 모차르트가 말하는 '한눈' 에 대하여 가장 그럴 듯한 해석은 진실로 순순하게 음악적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음악을 들을 때 (혹은 연주할 때) 의 독특한 시간적 함축성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음악은 연주하는 데 한정된 시간을 요하는 소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시간이란, 모차르트가 실제로 기술한 바에 따르면 "…나의 상상력이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바흐의 「푸가의 예술 (Art of Fugue)」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4중 푸가를 들어 보기 바란다. 음악은 세 번째 테마에 들어가자마자 연주 시작 10분도 채 못 되어 끝나 버린다. 그러나 바흐의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 음악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작품의 전 곡이 아직 '그 곳' 에 있는 듯한데, 한순간에 그 곡은 사라져 버린다. 바흐는 이 곡을 완성하지 전에 세상을 떠났고 악보는 바로 그 자리에서 멈추어 버리고 만다. 그 곡을 어떤 식으로 전개시킬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그러나 이 곡의 도입부에서 보여 주는 확신감과 전체적 완결성으로 미루어 볼 때 바흐가 이 곡을 작곡할 당시 곡 전체에 대한 요소들을 이미 머리 속에 갖고 있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이 곡을 작곡할 때, 과연 전 곡을 머리 속에서 보통 연주 속도로 계속 반복하여 연주해 보고 이를 다방면으로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었을까? 내 추측으로는 결코 이러한 방법이 아니었으리라는 것이다.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그도 전 곡을 한꺼번에 생각하였음에 틀림없다. 푸가 작곡이 요구하는 서로 엉킨 복잡성과 예술성을 총망라한 형태로서 말이다. 그러나 음악에서 시간적인 특성이 필수적 요소의 하나임은 틀림없다. 음악이 '실시간' 상에서 연주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음악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소설의 창작이나 역사의 고찰도 비슷한 (그보다는 덜 불가해하게 보이지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어떤 개인의 한평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사전들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 각각의 사건을 옳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실시간' 에서 이들을 마음 속으로 실연시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필요없어 보인다. 우리 자신의 장시간에 걸친 경험에 대한 기억의 인상도 어떤 형식으로건 아주 '압축' 되어 마치 기억하는 순간 이를 가상적으로 '재경험'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음악 작곡과 수학적 사고 사이에 밀접한 유사성이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수학적 증명이 각 단계가 그 전 단계로부터 생성되는 논리적 전개라고만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명제에 대한 고안은 이러한 과정을 따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수학적 명제를 구성하는 데는 전체성 (globality) 과 일견 분명치 않아 보이는 개념적 요소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소는 순서적으로 제시된 증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시간이 필요한 것과는 달리 시간과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의식 안에서의 시간이 혹은 시간적 전개가 바깥 세계의 그것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단 받아들인다고 가정해 보자. 혹시 이로 인하여 모순에 봉착하게 될 염려는 없을까? 의식의 효과에 확실치 않지만 어떤 목적론적인 측면까지 있어서 미래에 대한 인상이 과거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가정하여 보자. 이것은 당연히 모순에 귀착되지 않을까? 예를 들면 제 5장 마지막 부분에서 살펴보고 그 모순성을 밝힌 빛보다 빠른 신호 같은 식으로 말이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꼭 모순에 빠진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이 실제로 수행하는 어떤 성질 때문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의식이란 본질적으로 필연적 진리 (necessary truth) 를 '보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이상적인 수학적 개념으로 이루어진 플라톤 세계와의 만남을 의미한다는 나의 가설을 기억하기 바란다. 플라톤적 진리를 감지하는 데는 실제 (메시지에 의해서 전달될 수 있는 객체라는 기술적 관점에서의) 정보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적 감지가 시간적 역방향으로 확산된다 할지라도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의식 자체가 시간과 그러한 이상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의식이 어떤 의미에서 물리적 외부 세계와 시간의 개념이 없는 세계의 접촉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것이 물리적으로 결정되고 시간 순서적인 성격을 갖는 물질로서의 두뇌 활동과 어떻게 연계될 수 있을까? 우리가 만일 물리 법칙의 정상적인 진행에 어떤 수작을 부리지 않으려면 결국 의식은 또다시 단순한 '관객' 의 역할에 만족해야만 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의식에서 분명히 어떤 종류의 능동적 역할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아주 강력하고 (자연) 선택적인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딜레마의 해답은 양자 역학 프로세스인 U 와 R 이 상충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CQG 의 이상한 활동에 있다고 본다 (제8장 참조).

R 프로세스가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관성을 갖도록 하는 데 시간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기억하기 바란다 (제6,8장 참조). 이 과정을 시공 차원에서 설명하면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두 개의 입자가 갖는 양자 상태를 생각해 보자. 그러한 관계는 정상적으로는 상관 관계적 (correlated) 인 상태이다 (즉, 가 각각 하나의 입자 상태를 나타낼 때 단순히 단항식  로 표시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의 합, 로 표시됨). 이 경우 그중 하나의 입자에 대한 관찰은 다른 입자에 대하여 특수상대성 원리 (EPR : Einstein - Podolsky - Rosen)와 일관된 보통 시공간적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국소적인 형태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한 비국소적 효과는 내가 제시한 '준결정체' 와 수상돌기의 확장ㆍ수축 사이의 유사성에도 암묵적으로 관여되어 있다.

여기에서 나는 '관찰' 이라는 단어를 각 관찰된 입자의 활성화를 촉진하여 CQG 의 '1 그라비톤' 기준을 만족시키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 해석한다. 더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관찰' 은 훨씬 불투명한 개념으로서 두뇌가 항상 '자기 관찰' 을 한다는 가정하에서 어떻게 두뇌의 활동을 양자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는 매우 의심스럽다.

내 나름대로의 생각은 CQG 가 - 이와는 달리-의식의 개념과는 무관한 객관적인 상태 벡터 환원 (R) 의 물리 이론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그러한 이론이 없다. 그러나 최소한 그 이론을 찾기 위한 작업은 의식이란 실제로 '무엇인가?' 를 결정해야 하는 것과 같은 심오한 문제 때문에 지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보는 관점은 일단 CQG 가 실제로 밝혀지게 되면 그 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이용하여 의식이라는 현상을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이론이 완성되었을 때 CQG 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성격은 위에서 암시한 두 개의 입자간의 불가사의한 EPR 현상보다도 통상적인 시공간적 설명과는 더욱 동떨어진 것이 될 것이라고 믿어진다. 만일 내가 추정하는 대로 의식이라는 현상이 이 가상적인 CQG 를 따르는 것이라면 의식 자체가 현재 통장적인 시공간적 설명으로는 아주 부자연스럽게 비쳐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결론: 어린 아이의 관점

이 책에서 나는 사람들의 생각이 아주 복잡한 컴퓨터의 행동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현재 철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점에 대하여 반박하는 여러 가지 주장들을 제시하였다. 단순한 알고리즘의 수행으로 의식적 자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명확한 가정이 주어질 때 설의 '강인공지능' 이라는 용어들도 가끔 사용되기는 했으나 정확히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어떤 독자들은 아예 처음부터 '강인공지능주의자' 들을 그저 떠벌이 정도로만 여겨 왔다. 단순히 계산만 가지고 즐거움이나 아픔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 아닌가? 시나 저녁 노을의 아름다움, 소리의 마술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며 희망ㆍ사랑ㆍ고뇌도 할 수 없고 진정으로 자발적인 목표를 갖는 것도 당연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가 아주 정밀한 수학 법칙에 완전히 좌우되는 (어쩌면 궁극적으로는 단순히 확률적일 수도 있지만) 이 세계의 단지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을 관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뇌도 바로 이 정밀한 법칙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실제 행동들이 궁극적으로 어떤 거대한 (어쩌면 확률적인) 계산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그러므로 우리의 두뇌와 마음도 그러한 계산적인 차원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그림이 대두되었다. 어쩌면 그 계산이 아주 복잡해지면 시적인 것, 또는 '마음' 이라는 것과 관련된 좀더 주관적인 특성들에 대해서도 설명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림에는 무엇인가 빠진 듯한 꺼림칙한 감정을 피할 수가 없다.

나는 여러 가지 논의를 통하여 순수 계산적 그림들에는 무언가 핵심적인 것이 분명히 빠져 있다는 나의 관점을 지원하려 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한 과학과 수학을 통하여 마음을 이해하는 데 중대한 진전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희망도 가지고 있다. 이는 명백히 딜레마라고 볼 수 있으나 이를 빠져 나가는 방법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계산 가능하다는 것은 결코 수학적으로 정확하다는 말이 아니다. 플라톤의 정확한 수학 세계는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로움의 대부분은 알고리즘과 계산이 머무르는 제한된 지역 너머에 존재하는 개념들과 함께하고 있다.

의식이란 내 생각에는 너무나 중요한 현상이기 때문에 그것이 복잡한 계산에 의해서 '우연히' 생성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그것은 그로 인하여 우주의 존재 자체가 밝혀 질 수 있는 현상인 것이다. 의식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법칙에 의하여 좌우되는 우주는 이미 우주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우주를 설명하기 위하여 제시된 수많은 수학적 설명들이 이러한 기준에 미달된다고까지 단언할 수 있다. 의식의 현상만이 가상의 '이론적' 우주를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살려 낼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여러 단원을 통하여 제시된 나의 주장들 중 일부는 아주 뒤틀리고 복잡해 보일는지 모른다. 어떤 것들은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또 어떤 것들은 도저히 빠져 나갈 방도가 없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기술적 문제의 기저에는 의식적인 마음이 컴퓨터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 당연하다 ’는 느낌을 갖게 된다. 비록 정신 활동에 관여된 많은 부분이 그와 같을런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어린아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종류의 '당연함' 이다. 물론 그 아이도 나이가 들면 당연한 문제가 '문제없는' 것으로 믿게끔 압력을 받게 되고 조심스런 논리와 교묘하게 선택된 정의를 이용하여 그러한 문제가 없다고 설득당하게 될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때로는 나이가 들면 잘 볼 수 없는 것도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어린아이로서 '실세계' 의 활동에 관한 여러 가지 걱정거리가 어깨를 눌러오기 시작할 무렵에 느끼던 의문에 대하여 우리는 종종 잊고 사는 경향이 있다. 어린이들은 우리가 어른으로서 묻기에는 창피한 기본적 질문을 묻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으면 각자의 의식의 흐름은 어떻게 될까? 그 흐름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미래에, 혹은 과거에 다른 사람이었을까? 우리가 왜 무엇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이 곳에 있는가? 우리가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이 우주는 왜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우리 모두가 자성에 눈뜨기 시작할 무렵 갖게 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정녕 그것이 어떤 동물이건 혹은 객체건 간에 진정한 자성에 눈뜰 때면 처음으로 갖게 되는 의문이기도 하다.

나 자신도 어린아이일 때 그러한 많은 의문으로 고심한 기억이 있다. 어쩌면 나의 의식은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 것과 뒤바뀐 것은 아닐까? 각 사람이 자신에게 관한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나에게 그러한 뒤바뀌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뒤바뀜' 의 경험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나는 똑같은 10분간의 경험을 계속 반복하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각각의 10분간 느끼는 것도 똑같이 말이다. 어쩌면 나에게는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내일의 '나', 혹은 어제의 '나' 는 실제로는 독립된 의식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실제로 의식의 흐름이 과거를 향하는, 시간적으로 후진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나의 기억은 실제로는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앞으로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고, 학교에서 있었던 언짢은 경험은 실제로는 나에게 미리 준비된 것으로 불행하게도 머지않아 닥치게 될 것이 아닐까? 이러한 가정과 정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의 흐름의 차이가 실제로 '의미' 가 있어서 하나는 '틀리고' 다른 하나는 '맞다' 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본질적인 답을 얻을 수 있기 위해서는 의식의 이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의식이 없었던 객체에게 그러한 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설명을 시작이나마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