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운동
나의뇌 뇌의나1 : Richard M. Restak 지음, 김현택. 류재욱. 이강준 옮김, 학지사, 1997 (원서 : The Brain), Page 71~139
텔레비젼 회로를 카메라에서 화면까지 샅샅이 파헤쳐 본다해도, 그 회로의 어디에서도 피사체의 축소상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두개골을 열어 뇌를 검사해 봐도, 우리가 뇌의 내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랑말랑한 분홍색 조직덩어리뿐이다. 이러한 두 가지 예에서 보건대 대상은 텔레비젼이나 신경계로 실제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표상으로 - 예컨대 TV 화면상의 점으로 또는 뇌 속에서 라면 뉴런들의 활동으로 - 변형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시각과 텔레비젼을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둘다 다음과 같은 문제 점을 가진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에 대해 지니는 의미에 따라 그 중요성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서 교차로에서 녹색에서 적색으로 갑자기 바뀌는 교통신호등은 단순히 하나의 색깔에서 바뀐 것이 아니라, 정지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초원에서 목초들이 움직임은 바람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를 습격하려는 사자가 있다는 경고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각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려면 시지각의 상징적인 측면을 고려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적색을 보고 적색으로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운전중인 차를 즉시 정지시키라는 명령으로 표상시킬 수 있는 상징들이 우리의 머리 안에 존재해야만 한다. 시각, 더 나아가서 지각은 환경에 존재하는 대상을 뇌의 뉴런들의 활동형태로 부호화된 상징적인 표상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좀더 생각해 보면 TV 의 상과 우리의 머리속에서 형성된 시각상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보는 것은 흔히 우리의 눈앞에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착각의 집' 에서의 재미있는 경험은 정교하게 배치된 거울에 의해 만들어진 왜곡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착시는 우리가 단순히 명암을 근거로 형태를 탐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주의하지 않으면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과는 상당히 다르게 대상을 식별하게 된다. 더우기 우리가 착시의 존재를 깨닫게 될 때 변화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갑자기 우리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몇 가지 착시들은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알고 있을 때조차 우리를 바보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 예를 들면 아내, 장모 착시는 우리가 둘중 한 가지로 보려고 노력해도 계속 일어난다. 에셔 (M.C. Escher) 의 작품에 나타나는 착시는 철저한 검사에도 불구하고 일어난다.

에셔의 그림 : 끝없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승려들

아내, 장모 착시를 보라. 털코트를 입고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아릿다운 여자로 보이기도 하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 심술궂은 할멈으로 보이기도 하지 않는가
이러한 예는 우리의 눈이 그림을 단순히 뇌로 보내는 것 이외에 더 많은 일을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시각은 (암호) 해독식으로 보다 정확하게 기술될 수 있다. 눈은 빛을 흡수하고, 망막에 있는 특정한 원추세포들에 의해서 각각의 색채에 대해 상이한 파장들을 구별한다. 망막뒤에서 두 눈의 시각통로 내측의 1/2 섬유는 교차되어 대측으로 가는데, 이러한 교차는 입체적인 삼차원적 시각을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시자극은 뇌의 후두에 있는 선조피질 (striate cortex) 에 종지할 때까지 여러 통로를 따라 전달된다. 이러한 통로 내에서, 빛 (구체적으로, 특정범위의 전자기파장) 은 전기와 화학적 신호로 변환된다. 눈의 렌즈에 의해 역전된 최종 상은 뇌의 신경망 내에서 부호화되어 상하좌우가 뒤바뀐 뒤집혀진 상이다. 이러한 부호의 해독은 현대 신경생물학에서 가장 도전적이며 각광받는 연구대상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시각과정을 해독하는 첫번째 단계로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볼 때 일어나는 일 중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우선 우리의 시각장치는 명암이 대비된 상에 가장 잘 동작한다. 백색 울타리를 배경으로 해서 코트의 끝으로 넘어오는 백색의 테니스공은 발견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일상적 관찰은 망막 내의 세포가 어떤 한 광점의 절대강도보다는 오히려 광점들간의 명암대비에 대해 반응한다는 발견으로서 이는 1950 년대에 실험결과로도 얻어졌다. 이러한 발견을 토대로 해서, 발로우 (Horace Barlow) 는 시각피질 내 하나의 뉴런이 형태, 모양, 그리고 색채의 속성을 탐지할 수 있다는, 그 당시에는 매우 비범하고 증명할 수 없었던 이론를 제안했다.
후벨 (David Hubel) 과 비젤 (Torsten Wiesel) 은 노벨상을 받은 자신들의 연구에서, 고양이의 대뇌피질에 있는 뉴런들의 시각입력의 기하학적 특징 - 직선의 모서리, 밝거나 어두운 줄무늬 등에 특정적인 반응을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발견을 좀더 확장 시킴으로써, 시각의 형태탐지이론은 유의미한 시각정보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시각 정보를 부호화하는 뉴런들의 위계망을 토대로 우리가 보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 줄 것이다.

양안시, 즉 입체시각은 이 그림에서 보듯이 시신경이 뇌 안에서 교차함으로써 일어난다.
단세포 기록법의 발달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사상들에 대해 세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아내는 연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 방법으로 단세포에 기록용 전극을 삽입하고 주위의
여러 대상에 대한 세포의 반응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한때 신경과학자들은 우리가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반응을 하는 특정한 뉴런인 '할머니 세포' 도 존재할 것이라고
농담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일생동안 만나는 무수히 많은 대상들과 사람들에
해당되는 특정한 세포들이 있을 것이라는 시각이론에는 문제가 있다. 우리의 할머니가
새로운 머리치장을 했을 때에 할머니는 이전과 정확하게 똑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구체적으로 저 멀리서 할머니가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을 본다고 가정하자. 우리가
뒤에서 할머니를 확인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그러한 환경하에서 재인 (recognition)
은 '할머니 세포' 의 활성화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가 '할머니' 의 핵심을 추출할
수 있게 서로간에 상호작용하는 유연한 신경형태에 의존할 가능성이 더 많다.
시각경험 : 일요일 오후
시각은 인간의 뇌에서 어떻게 처리되는가? 두 가지 이론이 우리가 보는 방법의 기전에 대한 가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첫번째로 후벨과 비젤의 이론은 우리가 보는 모든 상들이 수많은 막대, 모서리, 그리고 직선들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한다. 비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직선을 보지 않음에도, 선조피질의 세포는 직선에 대해 이러한 선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우리는 대상을 본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잠시 생각해보면, 대상 자체가 명-암의 윤곽으로 구성됨을 깨달을 것이며, 시각피질이 하는 것은 '윤곽이 있으면, 그 윤곽이 어느 방향으로 있는가?' 를 묻는 것이다. 따라서 탐지되는 것은 직선이 아니라 윤곽과 윤곽의 방향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장면을 바라볼 때 필요한 정보일 것이다.
두번째 이론은 '버클리 대학' 에서 드 발로아 (Russel De Valois) 가 이끄는 과학자들의 연구이다. 방사성 글루코스를 사용해서 드 발로아는 시각처리 동안 가장 활동적인 세포를 보여주었다. 드 발로아에 따르면 직선, 막대기, 그리고 모서리에 반응하는 대신에 어떤 세포는 매우 상이한 종류의 자극에 대해 반응한다.
수영장의 잔물결, 폭포 또는 구름이나 인간의 얼굴과 같이 보다 복잡한 형태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이들 매우 복잡한 형태를 모서리와 모서리의 위치를 확인한 후 막대기 그림 (stick figure) 과 같은 것으로 세분해서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와는 반대로, 여러분은 복잡한 형태를 공간상의 변화, 즉 여러 공간 주파수로서 세분할 수 있다.
드 발로아의 발견이 후벨과 비젤의 이론과 상반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하라. 그렇지만 드 발로아의 연구가 더 진전된 것이다. 모서리가 핵심적인 특징이 아닌 경우에서는, 물에 대한 햇살의 미묘한 효과나 결의 스펙트럼적 소용돌이에서처럼, 어떤 신경세포들은 빛의 주파수나 결 또는 색조에서의 차이에 민감하다.
이와 똑같은 효과가 아래의 유화를 볼 때 일어나는데, 이 유화는 수많은 점들의 집합 (점묘화) 으로 되어 있지만 연속적인 그림으로 보인다.
예술가들은 여러 해 동안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 왔다. 예를 들면 영국의 예술가인 그린 (Anthony Green) 은 시각을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기억하는 모든 대상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를 기억하는 것이다. 다리를 기억할 땐 커다란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주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내가 그 대상의 특성이라 부르는 것으로 그것들을 정리보관한다. 그 예로 포크를 생각해 보자. 만일 포크가 포크의 특성을 부여한다. 포크에는 세 개 내지는 네 개의 갈퀴가 있는 데, 이러한 것이 포크의 전형적인 모양이다. 이러한 원리는 귀, 코, 입, 구렛나루, 문, 그리고 여러분이 기억하고자 원하는 모든 것에 적용된다.
지난 20 년 동안, 신경생물학자들은 '포크를 포크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특징' 과 '다리를 다리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특징' 에 대해 생각해 왔다. '대상-재인문제' 로 알려진 이러한 연구는 진행중인 신경활동 '대상- 재인문제' 로 알려진 이러한 연구는 진행중인 신경활동 중에서 소위 할머니를 나타내는 신경활동만을 추출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러한 지식을 기게에다 옮겨서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최종결과는 맹인을 위한 보조장치가 될 수 있고, 언급하긴 싫지만, 근접해 있는 군인과 탱크가 '아군' 인지 아니면 '적군' 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개량된 무기로서 탱크에 장착될 수 있다.
'대상-재인문제' 의 해결을 추구하는 최근의 연구들은 우리가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 위와는 다른 보다 현실적인 연구를 토대로 한다. 예를 들면 나의 할머니를 크로키하는 만화가를 상상해 보자. 그 여행스케치가 얼마나 왜곡되어야 내가 할머니를 알아볼 수 없겠는가? 의심할 여지없이, 이는 내가 할머니와 얼마나 생활을 많이 하였는가와 내가 할머니의 사진을 얼마나 자주 보았는가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인들과는 상관없이, 뇌는 나의 할머니 얼굴에 대한 구조적인 묘사를 부호화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묘사는 더욱 단순한 구조적 묘사인, 일반적인 얼굴위에 덧붙여져야 한다.
얼굴을 더이상 재인할 수 없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왜곡이 가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는 실용적인 의미도 없지 않아 있다. 심한 외상을 입은 환자를 치료하는 성형외과 의사는 이러한 문제를 매일 접한다. 성형외과 의사는 환자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환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환자의 얼굴이 바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시간, 떨어진 거리, 노화 등과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개인을 재인할 수 있게 하는 코의 크기, 턱의 형태, 입술의 모양 등과 같은 구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달리 표현해서, 우리는 'Gestalt' 심리학의 원리와 매우 유사한 이론에 이르렀다. 전체지각은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의 합 이상이다. 다시 말해서 시지각에서 부분들은 개별적인 실재가 아니라, 부분들은 형태 (gestalr) 를 형성하기 위해 상호작용한다.
예를 들면 내가 당신의 장모 사진을 가지고 머리에 한 쌍의 뿔을 그린다면 악마를 만든 셈인데, 이는 나에게 있어서는 당신의 장모와는 전혀 다른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늘 장모의 얼굴을 보아왔으므로 뿔이 달렸어도 장모에게 별로 달라진 게 없을 것이다. 이처럼 각 개인들의 사적인 경험을 토대로 해 형태가 개인에 따라서 유의미하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특질적 형태를 제쳐두고서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자, 책상, 또는 축구 경기장과 같은 것들의 형태에 부합하는 부분들의 특정한 구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의자의 몇 가지 부분들이 수정되더라도 우리가 사다리가 아니라 의자라고 알아볼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몇 개의 속성이 있다.
문자 L 같이 간단한 것을 예로 들어보자. 글자 하나로만 본다면 L 은 가장 단순한 글자이다. 그야말로 L 은 L 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아래를 잠깐 흝어보면, 문자 L 을 거의 무한하게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뇌속에 문자 L 을 재인하는 특별한 세포가 거주한다는 견해에 반박하는 강한 논증이 된다. L 이 제시될 때에만 활성화되는 광수용기 세포들의 집합을 배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문자 L 에 대해서는 간단히 생각해봐도 너무나 많은 변형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시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보다 단순한 시스템 (생물체), 즉 상징과 논리를 덜 포함하고 있는 시스템을 연구해야 한다. 이에 대한 주요한 후보로 창게를 들 수 있는데, 이 동물은 수백 만년 동안 진화하지 않고 남아 있는 동물이다.
초기의 창게 연구들은 록펠러대학에서 수행되었고 현재 카플란 (Dr. Ehud Kaplan) 을 중심으로 계속되고 있다. 비록 창게가 여러 쌍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 한 쌍, 즉 측면을 따라 배열된 두 개의 눈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조심스럽게 해부해 보면, 눈에서 뇌까지 가는 거미줄같이 가느다란 창게의 시신경 전부를 추적해 볼 수 있다. 본 저서를 촬영하는 동안 실시한 실험에서는 시신경을 전극으로 둘러쌈으로서 그 시신경으로부터 전달되는 전기적인 신호를 탐지할 수 있었고, 전극을 통해 탐지된 신호는 증폭되어 스피커로 보내져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강한 한줄기의 빛을 겹눈의 한 부분에 집광시켰을 때, 시신경의 발화율은 즉시 증가하였다. 이러한 발견은 빛 충동을 전기적 충동으로 변환시킴으로써 눈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증명하였다. 그러나 천정에 있는 조명을 켜서 보다 많은 빛을 보탰을 때, 발화율이 감소하였다. 이 이상한 결과는 창게의 눈이 밝은 빛에서 보다는 어두운 빛에 대해서 잘 반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보다 정교한 실험으로 정말로 그러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만일 그림자가 눈을 따라 점차 이동한다면, 그림자의 모서리가 눈을 교차하는 순간에만 연쇄적인 전기적 충동들이 기록될 것이다. 밝은 빛은 신경의 발화율을 감소시킨다. 눈은 명 또는 암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부분에 대해 강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야생세계에서 명과 암의 경계선은 어떤 대상의 외곽선, 즉 확실한 형태를 알려 주는 것이다. 초원에 웅크리고 있는 사자는 어두운 배경하의 밝은 형태로서만 드러날 수 있다. 위장을 성공적으로 하느냐 못하느냐는 또렷한 윤곽이 식별되지 않게 배경과 섞이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의 시각도 이와 유사한 형태로 작용한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사진을 볼 때, 우리의 눈은 사진 속에 있는 형체의 모서리에 반응한다. 따라서 사진 속의 할머니를 재인하는 것은 '할머니 세포' 의 활성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 에 해당하는 명암의 형태로 배열된 모서리의 재인에 의존한다.

이 그림에서 점들은 모든 똑같은 크기지만 우리는 이들 점을 다르게 '본다'. 집단 A 는 세 개의 쌍으로, 집단 B 는 행이나 열로, 집단 C 는 행의 집합으로, 집단 D 는 열의 집합으로 본다
단순한 유기체나 복잡한 유기체에 상관없이 시각능력을 지닌 모든 피조물들에서 보편적인 어떤 과정이 있는 것 같다. 눈은 명암의 모서리에 반응한다. 전기적 신호는 시신경을 통해 눈에서 뇌를 향해 들어간다. 그러한 여행중에 신호는 최종적으로 시각피질에 이르기 전에 중간 정거장인 외측 슬상체 (lateral geniculate body) 또는 상구 (superior colliculus) 를 경유한다. 두 개의 대뇌반구를 가진 유기체에서, 각 반구는 상의 1/2 을 받는다. 그 두 반쪽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합쳐져서 우리는 얼굴 같은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각 시스템의 최종 산물인, 그 얼굴이 뇌에서 어떻게 부호화되는 것일까?
부호화는 일련의 법칙을 따라서 뇌에서 일어난다. 예를 들면 시자극은 근접성에 따라 집단화 된다. 이책의 82 쪽에 제시된 그림에서 일렬의 점들은 6 개의 점들이 아니라 세 쌍의 점으로 경험된다. 만일 일련의 점들을 나란히 압축한다면, 열로 배열된 점들이 나타난다. 이들 어떤 경우에서도 점의 갯수는 동일하지만, 점들의 배열은 이처럼 상이하게 나타난다. 부지불식 중에 일어나는 이러한 일련의 지각법칙들에 따라서 집단화 과정이 일어난다. 우리가 점들을 볼 때, 눈과 뇌는 점들의 배열로부터 명칭을 붙일 수 있는, 예를 들면 행, 열, 등으로 부를 수 있는 형태를 추출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각이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 두어야겠다. 예를 들어서 어린 아이는 행 또는 열 같은 형태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그것을 언어적으로 구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점들의 군집을 지각한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우리의 지각을 지배하는 이들 법칙들은 철학자 칸트 (Immanuel Kant) 의 사상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그는 시간과 공간은 어떤 특정지각 이전에 존재하는 자각의 일반적인 형태라고 믿었다. 그는 후에 시간과 공간의 범주에다 수와 양의 범주를 보탰다. 칸트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마음이 지각에 기여하는 바이며, 우리식의 표현으로 하자면 뇌가 지각에 기여하는 것이다. 보다 생물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우리의 뇌는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지각할 수 있게 '생득적으로 배선되어 있다'.
MIT 에서 과학자들은 최근에 정상적인 시각에 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연구해 왔다. 그들 연구를 뒷받침하는 원리는 인간의 시각 시스템에 의해 군집화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컴퓨터가 환경의 특정한 특징들을 추출해 내고 부호화할 수 있게 컴퓨터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들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데 색채, 운동, 그릭 삼차원적인 입체 시각 등이 그것이다. 이런 연구를 위한 영감은 1981 년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컴퓨터 과학자인 마아 (David Marr) 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미아의 연구는 미아의 고무된 제자들인 MIT 학생들 덕택에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연구의 초기단계에서조차 컴퓨터는 우리의 뇌가 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근집하는 것' 을 훈련받을 수 있음이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우리가 점들의 행이나 열을 볼 때에, 우리의 뇌는 그점들을 재인할 뿐만 아니라 특징들이 통합된 군집인 구조를 발견한다. 컴퓨터 용어로 우리는 원래의 시지각 자료들을 우리의 뇌에 있는 어떤 신경망 통해 상징적 표상으로 변환시킨다. 컴퓨터는 이미 어떤 물체가 운동하는 것에 대해서 반응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배경에서 전경을 완전하게 불리시켜야만 한다.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점들의 열은 단순히 이차원적인 ㅛ상들의 점들이 아니라 삼차원적 대상으로 지각된다.

그림 7 은 컴퓨터가 의자의 윤곽을 추출할 수 있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미아의 초기 연구문헌에서 발췌한 것인데, 유사한 방향성을 가진 요소들은 함께 군집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각 군집들은 하나의 유닛으로 집단화 되고 컴퓨터 내에서 적합한 상징적 표상으로 변환된다. 이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디지탈 정보로 변환되어서 저자오디고, 후에 불러낼 수 있다. 우리의 눈과 뉘가 점들을 열이나 행으로 함께 집단화 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컴퓨터는 '지각적' 특징들을 재인하게 프로그램되며, 그 지각적 특징은 이후에 더 상위수준의 상징적 묘사로 조직화 된다.
컴퓨터가 대상을 재인하지 못할 수도 있을까? 우리의 눈과 뇌가 착시에 의해 속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컴퓨터가 속을 수 있을까? 컴퓨터와 사람은 모두 다 어떠한 특정한 환경에 가장 '적합한 책략' 을 사용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지식을 형성해 간다. 배경은 흔히 우리의 눈앞에 있는 것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장의 처음에 언급한 착시처럼, 배경이 도움을 주지 못하거나 단서가 모호스러우면, 생소한 종류의 지각을 하게 된다.
본다는 것은 일기예보와 같다. 우선 상당한 양의 자료들을 수집해 여러 가지 다른 범주들, 예를 들면 온도, 습도, 기압, 풍향과 풍속, 대기오염 등과 같은 범주들로 분류한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눈은 여러 가지 종류의 자료들, 즉 빛, 색채, 운동, 깊이 등과 자료들을 수집한다. 바람과 온도를 그대로 수집하거나 저장할 수 없는 것처럼, 뇌 안에 색채, 운동, 또는 빛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이 특성들은 그것을 표상하는 부호나 상징들로 변환된다. 상위 수준의 부호화에서 모든 기상정보는 일기예보라 하는 것으로 구체화되는데, 그 일기예보란 모든 자료의 합성물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을 비 또는 맑음이라고 하는 상징적인 표시로 접하게 되는 것이다.
각 감각 시스템은 그 감각 시스템이 특별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소수의 물리적 자극군이 있다. 눈은 약 400 에서 700 nm 파장 사이의 협소한 범위 내 전자기적 에너지에 반응한다. 실제로 명료한 시각은 500 ~ 560 nm 에 한정된다. 우리는 이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무엇도 볼 수 없으며, 따라서 많은 실재 중에서 우리의 시각 시스템이 가진 물리적 한계에 부합하는 '실재' 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에 대해 한계를 지니고 있다. 즉 방사되는 에너지 (전자기파) 의 협소한 영역에 대해서만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뿐만 아니라 명암대비, 근접성 등에 의거해서 시각적 상을 군집화시키는 경향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그것을 질감, 움직임 등 아마도 '보는 것' 을 가능하게 만드는 미지의 다른 것들과도 결합시킬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나 사상을 상기할 때, 여러분 마음의 눈에 떠올리는 정신적인 '그림' 은 여러분이 원하는 어떠한 각도로도 회전시키거나 돌릴 수 있다. 이에 더해서 시각상은 엄격히 말해서 비시각적으로 뇌에 흡수된다. 예를 들면 어떤 대상을 보고 나면,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한 느낌이라든지 무게 (이는 비시각적인 것임) 에 대해 명확한 인상을 형성하게 된다. 재담가는 모양만 보고서 무게를 짐작하는 우리의 뇌가 지닌 경향을 근거로 해서 많은 우스갯거리를 만들 수 있다. 스티로폼 (styrofoam) 으로 만들어진 바위는 수백 파운드의 무게가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을 손쉽게 들어올려 다른 사람에게 던져 관객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가!
생후 몇 주가 지난 유아는 접근하는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팔이나 손을 올릴 수 있다. 방어해 본 경험이 없이 유아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신경과학자들도 자세하게 이해하지는 못한 상태이지만 현재로서는 크기, 그리고 감촉의 통합이 출생때부터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놀라운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눈을 통하지 않은 시각입력을 시각통로 상위에 있는 어떤 곳에서 포착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즉 시각경험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처음에는 바보스럽게 들릴지도 모른겠다. 시각은 시각인 것이다. 사람이 눈을 사용하지 않고 시각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눈이 아닌 다른 수용기들에 의해 시각이 매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시각과 청각과 촉각의 기본적인 통합을 예시해 주는 몇몇 실험에 의해 상당히 실제적으로 증명되었다.
10 원짜리, 50 원짜리, 100 원짜리 동전 여러 개를 모아서, 여러분의 주머니에 넣고 그 동전 중 하나를 집어 손으로만 만져서 어떤 동전인지 알아 맞추어 보자. 확실하게 알아 맞추었다고 생각되면 동전을 꺼내서 확인해 보자. 여러분은 알아 맞추기가 쉽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제 이 실험을 약간 다르게 해보자. 동전들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은 다음에 집게손가락의 끝으로 동전들의 표면을 만져봐라. 동전들을 집어서는 안 되고 표면만을 만져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은 50 원짜리와 100 원짜리, 그리고 10 원짜리 동전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내 말만 믿지 말고 손수 해 봐라. 이러한 불일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들 두 가지 예에서 우리는 '만지다' 라는 단어를 상이하게 사용하고 있다. 두 번째 예에서는 우리는 단순히 접촉에 의지한 것이다. 첫 번째 예에서 우리의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을 손으로 만진 것은 그것을 주무른 것인데, 즉 우리는 동전을 뒤집고, 손가락 사이에서 굴린 것이다. 이는 촉감 (haptic touch) 이라고 알려진 과정이다. 손으로 주무를 때는 대상의 압력, 운동, 저항, 그리고 위치 등으로 이루어진 지각적 일체감을 얻는다. 우리의 뇌는 그 대상에 대해서 일종의 삼차원적인 재창조를 하게 되고, 따라서 우리는 그 대상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접촉 그 자체만으로는 정보를 거의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손으로 주물러서 동전을 알아 맞추고 정확하게 알아 맞추었는지 눈으로 확인해 보는 위의 예는 감각정보의 양태전이 (cross-modal transfer) 의 예가 된다. 사각 이외의 양태전이들을 가지고서 정확한 '시각' 을 형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분석에서 대상이 실제로 얼마나 큰지는 시각이 결정한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충치 구멍은 우리에게 그 구멍이 커다란 분화구같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우리가 손가락 끝으로 그 구멍을 더듬어볼 때, 우리는 보통 그 구멍이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치과에서 우리가 치과용 반사경에 비친 구멍을 볼 때, 그 구멍이 '실제로' 얼마나 큰지에 대해 올바른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손으로 주무르는 것과 시각의 관계는 양태전이 중 가장 흥미있는 예가 된다. 노련한 '카드 사기꾼' 은 특정 카드를 다른 카드보다 약간 튀어나오게 표시해 놓고는 손가락 끝으로 전체 카드를 훑어보고는 그 카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다음에 여러분이 동전 던지기로 어떤 것을 결정하고자 할 때에는 상대편이 그의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로 동전을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몇 분간만 연습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뒷면과 앞면을 거의 순간적으로 알아 맞출 수 있다.
감각에 의한 확인을 위해 다른 기관을 사용하는 이런 능력은 마술가, 복화술사, 그리고 전문 도박사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맹인이 촉각을 사용해 책을 읽을 수 있게 도와 주는 맹인용 점자해독기 (optacon) 는 정교한 공간적 식별을 할 수 있는 손가락 끝의 능력을 이용한다. 맹인이 독서할 때 자신들의 손가락 끝을 사용하는 것은 특히 인상적이다. 손가락의 끝부분이 아닌 다른 부위를 사용할 때의 밀도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수용기들의 밀도는 손가락의 끝에서 가장 높으며 손목에 가까이 갈수록 그 밀도는 비례적으로 감소한다. 일반적으로. 감각적 식별은 손가락의 끝부분에 수용기들이 가장 많이 있으며, 이런 사실이 혀와 손가락 끝이 손등, 발바닥, 발뒤꿈치보다 훨씬 예민한 이유인 것이다.
우리가 뒷장에서 논의하겠지만, 뇌의 피질지도 (cortical map) 는 신체의 특정영역을 담당하는 피질의 퍼센트를 나타내게 그려져 있다. 손 특히 손가락의 끝과 혀는 그 크기로만 볼 때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넓은 피질표상을 지닌다. 예를 들면 손은 팔뚝이나 등보다 훨씬 커다란 피질영역을 차지한다. 우리가 손에 든 물건은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동일한 물건을 등에 놓거나 팔에 놓을 때에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보지 않고 동전을 쥐고 손가락 사이에 그 동전을 굴려서 확인할 때에, 우리의 피부소용기들이 활성화되어서, 시각상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접촉할 때와 손으로 주무를 때 관련 수용기들이 지각에서의 일체감을 제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뇌에서 시각수용기와 결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여러분이 방을 지나가는 어떤 사람을 보면서 지나가는 소리를 함께 들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보자. 그 사람에 대한 시각상은 여러분의 망막을 가로지르게 되는데, 이때 망막상에서는 크기, 모양과 방위상에 상당한 변화가 있게 된다. 또한 청각적 상도 변한다. 그 사람이 왼쪽 방향이나 오른쪽 방향으로 움직이면, 발걸음 소리도 오른쪽 귀에서 왼쪽 귀 또는 반대로 바뀌게 된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은 이미지와 소리간의 불협화음이 아니다. 통합된 지각으로 한 사람을 지각한 것인데, 방을 가로질러가는 재인이 가능한 특정인을 지각한 것이다. 변화하는 감각입력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확고한 지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인간 뇌가 지닌 풀리지 않은 시비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감각입력을 통합하는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기 없으며, 이들 요인들은 시각 대용장치에 이용되어 출생시부터 맹인이었던 철학자 과르니에로 (Gerard Guarniero) 같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될 수 있었다.
과르니에로 교수가 사용한 시각 대용장치는 TV카메라를 이용한 것으로 교수는 TV카메라를 손으로 쥐고 보고자 하는 대상으로부터 반사되어오는 빛이 카메라에 들어와서, 교수의 등 전체에 배열되어 있는 끝이 무딘 핀들로 전달된다. 빛이 들어왔을 때, 즉 명암의 대비가 있을 때 핀이 진동하게 된다. 피부가 ― 이 핀의 진동으로 ― 따끔거림을 느끼게 되지만, 교수는 카메라를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핀의 진동을 시각상으로 지각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뇌가 속고 있는 것이 되는데, 왜냐하면 카메라에 의해 전달된 신경충동을 시지각으로 변환시키기 때문이다.그리하여 카메라로부터의 입력이 피부를 자극하는데 사용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촉감보다는 시각상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맹인인 철학자 과르니에로가 '보기 위해서' 사용하는 장치
과르니에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 장치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마치 텔레비전 카메라가 잡아내는 상이 내 피부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점차로 ― 그 시스템을 가지고 보는 ― 대상이 내 피부의 어딘가에 있다는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나는 항상 대상을 촉감으로 밖에는 느낄 수 없었으나 이 시스템을 통해 난 갑자기 새로운 감각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멀리 떨어진 대상을 지각할 수도 있게 되었다.
과르니에로 교수의 감각 대치경험은 여러 가지 복잡한 철학적인 의문들을 불러 일으켰다. 만일 '시지각' 이 피부의 촉자극을 통해 수정될 수 있다면, 이는 뇌의 한 영역에 있는 뉴런이 적당한 환경만 주어지면 다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도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크기, 형태, 거침과 부드러움, 날카로움과 뭉툭함 등의 지각에 있어서 모든 감각들에 공통되는 기능이 존재할 것이다. 설령 모든 감각들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시각과 촉각에는 공통기능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뇌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고, 따라서 그는 자신이 이론의 기초를 자신의 감각적 관찰에 두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그는 형태와 수같은 것은 여러 가지 감각에 의해서 지각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두 개의 대상을 볼 수도 있고 또한 그 두 개의 대상을 촉각으로 느낄 수도 있으며, 두 개 음을 들을 수도 있다. 수, 지속기간, 그리고 강도와 같은 것을 여러 가지 감각들이 공히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라틴어 sensus communis (공통적 감각) 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지각을 상호연결된 많은 신경세포들의 활동 패턴으로 이루어진 과정으로 간주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통적 감각을 신경생물학적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어떠한 단일 지각적 특석이나 성질이라도 전문화된 뉴런들의 소집합의 반응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 대신에 뉴런들은 복잡한 말 내에서 상호간에 분주하게 상호통신하며, 이러한 전체적 상호소통 덕분에 우리는 스쳐가는 소리와 시각형태의 혼합물 같은 것으로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방을 지나가는 사람이라는 통합된 지각을 얻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복합감각적 정보의 이러한 통합은 감각 시스템들 자체내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면 고양이에서 일차적인 시각 수용기인 상구에 존재하는 세포들은 청각자극에 대해서도 반응한다. 일정한 음, 변하는 음과 단순한 소음에서도 이들 세포들은 활성화된다. 사실 빛에 최대반응을 보여주는 상구의 심부층에 있는 세포들의 80% 는 소리와 촉각에도 반응한다. 이렇게 이중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세포들은 시각피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청각통로에서 중요한 간이역인 고양이의 하구의 전기자극은 눈과 외이의 귓바퀴 운동을 또한 일으킨다.
방금 위에서 제시한 각 예들에서 세포들은 평균적으로, 시각피질의 시각과 청각피질의 청각처럼 그들의 주 감각양식에 대해 훨씬 더 민감하지만, 만일 촉각과 같은 여타 자극들이 충분히 강하다면 그 세포들은 그러한 자극에 방전할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신경세포들의 상당한 부위가 모양, 크기, 운동, 운동정지뿐만 아니라 개수 등과 같은 공통 감각특성들의 매개자임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서 대뇌피질에 있는 피부와 시각담당 뉴런은 모두 다 직선과 모서리, 그리고 특정한 방항성에 대해 가장 예민하다. 피부에 접촉시킨 어떤 물체는 물체의 모서리가 피부에 자국을 낼 때에 가장 쉽게 탐지된다. 이것은 특정한 방향을 가진 직선이 가장 쉽게 지각되는 시각피질의 '특정 탐지기' 와 대단히 유사하다. 그러면 과연 특정한 방향으로서의 모서리 예민성이 시각과 촉각에서도 공통특성이 될 수 있는가?
대비 (contrast) 와 같은 것을 고려해 보자. 모든 감각들은 그들이 배경과 강하게 대비될 때에 가장 정확하게 지각된다. 한 줄기의 광선은 어두운 방에서는 순간적으로 탐지되지만, 한낮의 햇살 아래에서는 알아볼 수가 없다. 산림에서 나무가 넘어지는 소리는 조용한 날에는 수킬로 떨어진 곳에서도 들을 수 있지만 폭풍우치는 동안에는 전혀 들을 수 없다.
강도 (intensity) 는 여러 감각들이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공통성질이다. 국민학생들에게 색을 소리에 대응시키라고 하면, 보라색과 남색은 낮은 음과 연관시키며 녹색과 노란색은 높은 음과 연관시킨다. 철학자인 로크 (John Locke) 는 '주홍색이 무엇인지 안다고 어느 날 허풍을 떨고 있는 맹인에게 그의 친구가 주홍색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그 색은 트럼펫 소리와 같은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고 기술하였다. 과연 주홍색이 트럼펫 소리와 어떤 유의미한 방식으로 닮았을까? 시인인 스윈번 (Algernon Swinburne) 은 다음과 같은 말로써 이를 인정했다.
트럼펫의 선율은 불처럼 소리의 어둠을 뚫고 빛난다.
다른 시인들과 작곡가들 또한 빛과 소리 사이의 기본적인 일체성을 확신했다. 18세기와 19세기에 복합양식의 콘서트가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이러한 콘서트에서는 빛과 때로는 냄새와 결합시킨 음악을 연주했다. 1725년에 카스텔 (Louis - Bertrand Castel) 은 각각의 키를 누르면 음색에 따라서 색광이 만들어지는 세계 최초의 오르간을 발명했다. 복합감각적 음악의 전성기는 아마도 피아노, 합창과 색광을 발하는 오르간을 위해 작곡한 스크리아빈 (Alexander Scriabin) 의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일 것이다. 이들은 상이한 뉴런들이 적당한 상황하에서 하나 이상의 감각입력에 대해 반응할 수 있다는 주장이 수백년 전에 어떻게 예기되었는지에 대해 반응할 수 있다는 주장이 수백년 전에 어떻게 예기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기 때문에 이들의 진기한 역사를 언급한 것이다.
생후 며칠이 지난 유아라도 어떤 물체를 만질 때는 놀라운 선택성을 보여준다. 만일 유아가 두 개의 공, 즉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작은 공과 너무 커서 쉽게 잡을 수 없는 공을 보면, 유아는 언제나 작은 공으로 손을 뻗는다. 크기와 관련된 시각정보는 접촉이 있기 전부터 벌써 촉감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후 몇 시간밖에 안 된 유아는 소리가 나온 곳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는데, 이는 소리에서 장면으로의 감각정보의 변환이 경험 이전에 이미 발생함을 명쾌하게 증명해준다. 그러나 만일 시각, 청각과 촉각이 상반된 정보를 보고한다면 어떻게 될까? 상이한 감각들이 서로간에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뇌는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밝히려는 실험이 시도되었다. 미대생은 대상을 면밀히 관찰하는 특별한 훈련을 받으므로 수잔나 (Susannah Fiennes) 라는 미대생을 피험자로 선정하였다. 수잔나의 눈에 상하좌우가 거꾸로 보이는 한 벌의 역전 렌즈를 끼우면 수잔나에게 어떠한 영향이 미칠 것인가? 실제로 수잔나가 착용한 렌즈는 시각정보가 뇌로 중계되기 전에 모든 광경이 역전시키는 까닭에, 역전 렌즈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뒤집혀 보이게 할 것이다. 이것이 수잔나의 세계는 대한 시지각에 어떠한 효과를 미치게 될까?
처음에 수잔나의 세계는 거꾸로였다. 그녀는 주전자에 든 우유를 컵에 따를 수 없었다.
나는 두손을 아무리해도 조화시킬수 없었다....모든 것이 완전히 반대였다. 매우 이상했다.
그러나 수잔나가 그렇게 낯설게 바뀐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손과 발의 위치를 주의깊게 재학급함에 따라, 삼일째되는 날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쓰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실패하였다. 그로부터 렌즈를 착용하고 4일을 더 생활한 후 (그동안 그녀는 걷기, 자전거 타기, 가사의 허드렛일 등을 했다) , 그녀는 다시 이름쓰기를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성공하였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 그녀는 자신의 뒤바뀐 시각정보를 자신의 운동형태와 일치시키는 것을 학습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주변 세계를 탐색함으로해서 그녀는 시지각이 엄청나게 변화되었음에도 감각과 운동을 재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각은 운동과 결혼한다고 할 수 있겠다. 수잔나는 문자 그대로 자신의 상이한 감각으로부터 온 정보를 협조시키는 법을 재학습한 것이다. 시각은 대단한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처음에 세계를 거꾸로 '보았고' , 그런 결과로서 나타나는 혼동, 혼미, 그리고 경미한 공포 등에 의해 즉시 몸이 굳어져 버렸다. 그러나 유모차 안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유아처럼 그녀는 곧 자기가 만진 것을 자기가 본 것에 협조시킬 수 있게 되었다. 잠시 후 세계는 그녀를 위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어떤 다른 법칙들에 의하여 시각과 운동이 재편성됐다고 생각할 수 있다.
수잔나의 뇌에서 일어났던 정확한 세부사건은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과르니에로 교수에게는 핀이 진동하는 것이 '시감각' 이 된 것처럼, 그녀의 시각입력은 마침내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해석을 통합시켰다. 수잔나와 과르니에르 교수 두 예에서 모두 뇌는 조리 있는 현실을 세우기 위하여 상이한 감각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다양한 감각으로부터의 입력을 결합시키고, 시각적 왜곡을 촉각과 손조작에 의해서 교정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시각은 환경에 대한 우리의 전체적이 탐색중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주변의 세계에 반응해서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들 두가지 분리된 과정, 즉 시각과 운동은 상호연관된 전체를 형성한다. 시각에 대해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운동에 내재되어 있는 기전을 더 탐색해 보자.
본질적으로 모든 운동은 신비스럽다. 예를 들어서 걷기를 분석해보면 걷기에는 우리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겠다고 마음먹은 즉시 실행되는 운동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이 곧 바로 분명해진다. 비록 우리가 처음에는 우리의 '의지' 에 의해 걸음을 시작하지만 우리는 걷는 활동이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측면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춤을 추거나 테니스를 칠 때, 다리를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서 일부러 의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위의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 수가 있다. 우리가 보통은 자동적으로 수행되는 어떤 운동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려고 시도하면, 거의 대부분은 그 운동이 서툴게 되어버린다. 이런 몇가지 사실로 보건대 자동화된 활동을 담당하는 중추 프로그램이 신경계 내의 어디엔가에 실재한다는 힌트를 얻을 수 있다.
50년전, 소련의 과학자들은 뇌간의 한 영역인 중뇌의 보행영역 (mesencephalic locomotor region : MLR) 을 고립시켰는데, 고양이의 이 영역은 자극을 가하면 실제적으로 걷는 운동을 일으키는 부위이다. 이 처치는 고양이의 뇌간 (brain stem) 과 뇌의 상위부분을 외과적으로 절단하는 것이므로 섬뜩한 것이다. MLR 영역에 대한 자극을 증가시킴에 따라 고양이들의 이러한 운동변화는 중뇌의 보행영역에 대한 자극변수 이외의 다른 요인에 달려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현재 신경과학자들은 MLR 이 보행명령 시스템이긴 하지만 MLR 에 걷기를 위한 중추 프로그램이 들어 있지는 않다고 믿는다. 이러한 증거는 네 다리와 척수의 연결만 남기고 다른 모든 신경계는 외과적으로 절단시킨 실험에서 나왔다. 이 실험에서 그 고양이를 트레드밀 (달리기용 실내 운동기구)의 속도에 맞추어 걷게 할 수 있었다. 이런 능력은 생후 몇 주만에 척수를 고립시키는 시술을 받은 고양이에게서도 나타났다. 이 실험들을 토대로 해서, 신경과학자들은 걷기를 담당하는 중추 프로그램이 척수 내에 존재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 세계에서의 걷기는 트레드밀에서의 걷기와 분명히 다르다. 실제 세계에는 지형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언덕을 오르는 걷기는 동일한 언덕을 내려오는 걷기와는 상이한 근육운동을 필요로 한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가며 걸을 때는 우리는 전진하려고 생각하기 전에 몸의 균형부터 잡아야 한다. 까페에 앉아서 무심코 봐도 개인마다 독특한 지문이나 뇌파가 있듯이 개인마다 독특한 걷는 스타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신체운동의 기본단위를 연구하는 운동학 학도들은 우리가 걷는 방식에서 우리가 기분이 좋은지 우울한지 심리적인 상태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언어 또한 이러한 주장을 지지한다. 즉 우리는 행복할 때에는 '기뻐 날뛴다' 라고 말하고, 우울할 때에는 '터덜터덜 걷는다' 라고 묘사하지 않는가. 정신과 의사인 라이츠 (Wilhelm Reich) 는 환자가 움직이는 방식의 관찰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성격분석' 방법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이런 연유로 척수를 고립시킨 시술 후에 트레드밀 위를 걷게 한 고양이에 대한 연구는 우리 자신들의 걷기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줄 것 같지 않으며, 달리 말하면 발레를 할 때의 멋진 협응운동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겠다.
물론 인간에게서 자동적인 걷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스톡홀롬에 있는 '카롤린스카 (Karolonska) 연구소' 의 그릴너 (Sten Grillner) 교수와 그의 동료들은 신생아 연구를 통해서 걸을 수 있는 능력이 출생시부터 존재하므로, 그것은 학습된다기보다는 선천적임을 보여준다.
출생 전에 기본적인 걷기 형태가 우리의 신경계에 각인되고, 처음으로 도움없이 걸을 수 있을 때에 그 형태를 사용하는 법을 학습하게 된다. 유아와는 달리 세상이나 네 살짜리 여자애는 자신의 다리로 자신의 전체증을 지지할 수 있게 되어서 (즉 두발로 설 수 있으므로) 팔 흔들기와 같은 다른 운동들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뇌는 여전히 운동의 선천적인 형태에 부분적으로 의존할 것이다. 그 아이의 걷기에는 예를 들면 발가락들이 뒷꿈치보다 앞서서 땅에 닿는 것 같은 여러 가지 '아기때의' 특징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말의 운동을 보여 주는 뮈브리지의 유명한 사진집 중의 하나
선천적인 운동형태를 따라서 이미 설정되어 있는 동작이 나타나는 것은 동물세계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1세기 전에, 뮈브리지 (Eadweard Muybeidge) 가 처음을 말의 걷는 모양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는 말의 다리 동작과 그 순서를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뮈브리지의 사진 이전에는, 말을 회전목마처럼 앞다리와 뒷다리가 쭉 뻗어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실제로는 뮈브리지의 사진이 증명한 것처럼 말은 그의 다리를 상이한 리듬으로 움직인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각 다리를 들어올리고 나면 다음 걸음으로 옮기려고 의도적으로 다리를 뻗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들어올린 다리를 다시 내려놓을 뿐이다).
어떤 운동은 그 운동을 완성시키기 위해 신경연결의 단순한 순차동작만 있으면 된다. 고전적인 '슬개건 반사 (knee jerk)' 는 무릎에 있는 수용기들과 척수 사이의 폐쇄회로 (closed loop) 의 작동이다. 의사가 환자의 무릎을 진단용 헤머로 치면, 무릎은 자동적으로 뻗어진다. 이는 불붙은 성냥이 건초더미에 닿으면 불나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반사의 예가 된다. 예를 들면 따분한 영화를 보다가 그만두고 나오려고 결심을 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러한 활동에 얼마나 많은 신경연결들이 포함되는 것일까?
최근에 신경과학자들은 슬개건 반사와 같은 단일반사 동작으로부터 의식적인 결정을 필요로 하는 매우 복잡한 운동으로 그들의 관심을 돌렸다. NIH 신경생리학자인 에벗스 (Edward Evarts) 의 다음과 같은 실험을 고려해보자.
우선 뇌의 신경활동을 기록하기 위해 원숭이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기록용 뚜껑을 부착시킨다. 그 다음에 미세전극을 원숭이의 운동피질 내에 있는 단일 뉴런에 삽입한다. 원숭이를 의자에 앉아 있도록 구금한 후, 핸들을 중립단에 위치시켜 놓고 과제를 훈련시킨다. 과일쥬스를 보상으로 주어서 원숭이가 적색이나 녹색빛에 반응하도록 훈련시킨다. 적색은 핸들을 '당겨라' 는 것을 의미하고, 녹색은 핸들을 '밀어라' 는 것을 신호한다. 원숭이가 핸들을 실제로 밀거나 당기는 운동수행보다 더 중요한 것을 단일 뉴런의 전기적 활동이다. 세포는 '당김' 지시에 대한 반응으로 방전이 증가하지만 '밀음' 에 대해서는 방전이 감소한다. 더욱이 뉴런 활동의 이러한 변화는 실제로 운동 (밀거나 당기는) 을 수행하기 전에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원숭이가 핸들을 움직이려는 어떤 낌새가 있기도 전에 뉴런의 발화율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 운동 뉴런의 활동은 전적으로 내적인 것이다. 즉 핸들을 움직이기 전에 발화하며, 마찬가지로 핸들의 움직임을 일으키는 동인인 원숭이의 근육수축에 앞서서 일어난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에벗스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중추적으로 프로그램된' 동작형태의 증거라고 한다. 적색 또는 녹색 빛은 뇌가 '중추적으로 프로그램된 동작이 특정방향으로 수행되도록 준비상태를 설정하게 하는' 자극역할을 했다. 그러나 단일 뉴런은 이 회로의 한 성분에 불과했다. '내적 반응' 과 핸들을 밀고 당기는 원숭이의 실제운동 사이에 있는 다른 성분들은 무엇이며,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충분한 안목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뇌가 어떻게 운동을 통제하는가에 대한 몇 가지 초기연구들을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뇌에 정말로 중요한 정보들이 알려진 것은 그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다.

1864 년의 프로이센과 덴마크의 전쟁이 발발한 동안 독일인 의사인 프릿취 (Theodor Fritsch) 는 머리부상을 치료하는 도중 한쪽 대외반구를 건드리면 반대쪽 신체에서 연축 (근육에 순간적인 자극이 가해져 수축이 최대치에 이른 다음 이완되어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으로 단순한 근운동의 단위) 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는 이러한 발견을 베를린에 있는 개업의인 힛찌히 (Eduard Hitzig) 와 의논했으며, 두 사람은 프릿취의 관찰을 실험적으로 검사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둘다 마땅한
실험실을 구할 수 없었던 까닭에, 힛찌히 부인의 화장대에서 실험을 하였다. 조잡한 실험절차에도 불구하고, 실험결과는 프릿취의 원래의 관찰과 일치하였다. 개의 피질표면에 전기자극을 가하니 대측 신체의 근육이 수축을 일으켰던 것이다.
프릿취와 힛찌히는 자신들의 관찰을 토대로 해서 신체의 부분들이 뇌의 대측 영역에 의해 통제된다고 주장했다. 희랍의 의사인 히포크라테스 (Hippocrates) 도 군인의 머리 한쪽에 칼로 상처를 입은 경우 대측 신체에 마비를 일으킴으로 발견하고 이와 동일한 주장을 했었다.
비록 프릿취와 힛찌히의 발견이 현재 우리의 대뇌 국재화 (cerebral localization) 라 부르는 것 (뇌의 상이한 부분들은 각기 특정한 활동을 담당한다는 것) 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증명이었지만, 이 두사람은 자신들의 발견이 뜻하는 완전한 의미를 깨닫지는 못했다. 그들과 동시대 사람인 잭슨 (John Hughlings Jackson) 은 자신의 우연한 관찰들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뇌기능 이론을 만들어 내었다.
잭슨은 남들과 다른 독특한 사람으로 전무후무하게 어떠한 신경과학자들과도 다른 배경을 가졌다. 농부의 아들인 잭슨은 주로 독학을 했다. 그러나 그는 진지한 관찰력을 지닌 예리한 관찰자였으며, 운수가 사납게도 그의 아내는 오늘날 잭슨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잭슨 간질 (Jacksonian Epilepsy) 이라는 간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잭슨 간질병은 신체의 한정된 부분에서만 발작이 일어나는 것이 특징이다. 특징적으로 발작은 손에서 시작해서 손목, 팔꿈치, 어깨, 그리고 최종적으로 얼굴로 상승한다. 그러고 나서 발작은 동측의 다리로 가서 끝난다.
자기 아내의 발작, 특히 신체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까지 항상 특정방식으로 '진행하는' 간질의 경향을 관찰하여 잭슨은 뇌조직화에 관한 중요한 이론을 도출하게 되었다. 그는 대뇌피질이 신체 각부분들에 대해 운동력을 제공하는 특정한 구역으로 조직화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최초로 뇌가 자신의 고유한 내적인 지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자기 아내가 간질발작을 하는 동안, 간질방전이 대뇌피질 상의 손영역에서 손목영역으로 , 그후에는 어깨영역 등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러한 패턴이 전혀 변화가 없었으므로,
뇌의 조직화는 매우 규칙적이어서, 손목 - 손과 같은 몇 가지 영역들은 매우 근접해 있는 반면에 손목-발과 같은 영역들은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잭슨이 처음 주장한 바, 운동을 일으키는 '운동피질 (motor cortex)' 이 있다는 생각은 그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뇌졸중이나 종양을 앓은 환자들의 뇌에 대한 부검을 토대로 해서, 신경과학자들은 대뇌반구란 '생각' 을 일으키는 자아소라고 확신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모든 것들이 도전받게 되었다.
대뇌반구가 동작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완강히 반대하는 의견이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피질의 회선 (convolution) 이 '동작' 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라고 잭슨이 기술하였다.
잭슨의 견해로는 뇌의 활동은 자동적 활동과 수의적 활동으로 엄격하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자기 아내가 발작하는 동안 그녀는 의식을 잃지 않았지만 손은 억제할 수 없이 흔들렸다. 그녀가 '의지적으로' 발작을 멈추려 하였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에서 간질발작은 손을 담당하는 운동통제중추를 비활성화시켰다. 그 결과로 손이 '자동적이며' 불수의적이고, 그리고 꼴사납게 운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발작이 지나간 후에, 손은 점차적으로 기능을 회복했으며, 잠시 후에는 제기능을 모두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60년 후에, 잭슨의 생각은 신경외과적 수술을 받고 있던 환자들의 피질을 전기자극한 캐나다의 신경외과의인 펜필드 (Wilder Penfield) 에 의해서 확증되었다. 그는 잭슨이 주장했던 것처럼, 뇌가 기능적인 면을 따라서 조직화되었음을 발견했다. 이것은 아내의 간질발작에 뚜렷한 패턴이 있다던 잭슨의 관찰에 대한 멋진 확증이었다.
펜필드의 수술실 '실험' 으로 작은 사람 (motor homunculus : 대외 운동피질의 담당영역 모형) 을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체의 부분들이 실제의 크기가 아니라 숙련된 동작을 담당하는 정도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여 그려진 그림이다.
잭슨이 대뇌 국재화의 원리를 밝혔을 뿐으로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날 인간의 뇌 이해의 장에 있어서 위대한 혁신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갔는데, 그것은 의사로서는 희귀한 관심분야인 철학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의 의학경력 초기에 잭슨은 영국의 철학자인 스펜서 (Herbert Spencer) 의 영향을 받았다. 잭슨은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진화론에 대한 신념을 확고하게 구축하여 후에 그는 그러한 신념은 뇌에 대한 자신의 이론에 통합시켰다. 예를
들어서 그는 뇌가 위계적인 도식에 따라서 조직화된다고 생각하여, 하위중추가 점차 발달하여 보다 복잡한 상위구조로 융화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사상을 기술하는 적당한 비유를 찾다가 스펜서의 또 하나의 사상인 사회 시스템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잭슨은 뇌를 반란자, 무정부주의자 등과 같은 반대세력들을 억압함으로써 지속해 나가는 정부에 비유하였다. 만일 그 정부가 무너진다면, 이들 '하위' 의 통제형태들이 지위를 떠맡게 될 것이다. 이러한 유추를 해보면, 고위중추에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보면 그 영향력이 분명해질 것이다. 잭슨의 생각이 획기적인 것은 흥분보다는 억제가 건강한 뇌의 품질증명이라는 주장에 있다. 과연 뇌의 전체 뉴런들 중 적은 수만이 특정한 운동에서 ' 발화함이 밝혀졌다 '. 나머지 뉴런들 대다수는 다른 뉴런들에 의해 능동적으로
억제된다.
어쩌면 철학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던 잭슨이 신경과학자들로 하여금 골치아픈 일련의 철학적 문제들과 씨름하게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서구철학의 밑바탕에는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 존재한다. 내가 손을 움직이려 결정한다면, 나는 그렇게 한다. 만일 내가 내 손을 움직이기 싫으면, 또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간질발작 동안, 나의 손은 내가 억누르려는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나의 손은 또한 발작후에는 나의 바램에 반응하지 않고, 무기력하고 무용하게 축처져서 잠시동안 마비될 수도 있다. 내가 펜을 집어들고 이 문장을 쓰려고 결심할 때, 나의 뇌 어디에서 충동이 기시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신경과 학자들은 수많은 연구를 해왔고 한편으로는 수없이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기도 하였다.
내가 몇 페이지 전에 기술했던 에벗스의 실험을 되돌아보기로 하자.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원숭이의 어떤 운동에 앞서서 원숭이의 뇌에 있는 하나의 운동 뉴런이 방전한다는 것이 관찰되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내적' 인 운동활동의 예였다. 중추적 운동 프로그램이 있다는 에벗스의 생각은 원숭이가 그 핸들을 밀거나 당기는 결정을 하는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는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협응적 활동의 기초가 되는 뇌기전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 에벗스는 대뇌피질뿐만 아니라 기저핵 (basal ganglia) 과 소뇌 (cerebellum) 까지 단세포 기록법으로 연구하였다. 기저핵은 대뇌피질 바로 아래에 있는 구조물과 뇌의 실체 내에 깊숙히 있는 일련의 구조들로 이루어진다. 이들 ganglia (뉴런들의 대집합을 의미하는 19세기 용어임) 는 자체의 신경망 내에서 상호연결될 뿐만 아니라 대뇌피질과 뇌간의 영역과도 양방향적 연결을 형성한다. 섬유들은 또한 소뇌로도 투사하는데 소뇌는 다시 기저핵의 여러 부분을 활성화시킨다.
아래 그림에서 피질 ― 기저핵 ― 소뇌연결의 풍부함과 복잡성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상호연결 시스템의 어디에서 운동활동이 기시하는 가와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그 후보지로 피질이 선택될 것은 뻔한 일이다. 어쨋든간에 피질은 자극될 때에 운동을 발생시키는 운동세포들의 시발처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서 에벗스의 최초실험에서 핸들을 밀려는 원숭이의 '결정' 에 앞서서 발화한 피질세포들이 관찰되었지 않는가 (나는 원숭이의 뇌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연관된 불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결정이라는 단어에 강조를 했다. 분명히 레버를 당기거나 미는 것은 예를 들어서 법대에 입학하려는 것과 같은 '결정' 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이미 증명된 것처럼, 레버를 밀거나 당기려는 '결정' 은 피질, 기저핵, 그리고 소뇌 모두를 포함하는 영역에서의 방전을 수반한다. 더욱이 이들 방전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운동이 나타나기 전에 시작된다. 간단히 말해서 운동 프로그램을 기시시켜서 부가적인 뇌영역으로 확산시키는 어떠한 '집행 센터' 가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대신에 신경충동은 피질, 피질하 기저핵, 그리고 소뇌연결들과 같은 뇌 조직화에 관한 우리의 단순한 개념을 문자 그대로 뿌리째 날려버리는 주목할 만한 개념이다.
에벗스의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고위기능 (결정, 의지에 의한 행동등) 이 운동피질과 같은 하나의 장소에 전적으로 위치한다는 개념을 떨쳐버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대신에 피질은 그런 센터들과 신경계 전체에 걸쳐서 상호작용을 하는데, 그런 센터들 중 많은 것들은 선사시대 이래로 많은 생물체들의 뇌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계통발생적으로 볼 때 뇌의 새로운 부분인 포유류의 운동피질은 뇌의 오래된 부분들이 가지고 있는 반사활동의 법칙과 동일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고 에벗스는 말한다.
분산 시스템 (distributed system) 이 무엇인지 그 예로서, 이글을 쓰는 나의 활동을 생각해보자. 나는 오른손잡이인 까닭에 오른손에 펜을 쥐고 있다. 이때는 내 오른손, 팔뚝, 그리고 어깨근육의 집합이 활성화된다. 이 근육들은 내 앞에 있는 원고를 볼 수 있게 특정한 각도로 돌아가야 하는 내 목의 근육과도 상관이 있다. 그러나 어제 내가 태권도를 하다가 손을 다쳤다고 가정하자. 나는 여러 가지 대안적인 필기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만일 내가 그리 급하지 않다면, 단순히 왼손으로 바꿀 수 있다. 만일 왼손쓰기가 잘 안된다면, 타자기를 가져와서 왼손으로 문자를 칠 수도 있다. 나는 또한 나중의 필사를 위해서 속기사나 녹음기에 구술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이들 각각이 방법들은 완전히 다른 뇌영역을 사용한다. 이들 여러 다른 방법들의 기본적인 요소는 물론, 이글을 쓰려는 나의 의향이다. 달리 말하면 나의 목적은 무수히 많은 다양한 뇌의 활동에 대해서 기본적인 주제를 제공한다. 이글을 쓰는 것과 같은 행동은 정형화된 근육운동 (물론 펜을 잡는 방법중에서 정말 효율적인 방법은 몇 안될 것이다) 과 딱 집어서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떤 수의적인 요소 양자에 의해 일어난다. 수의적 활동과 반사적 생명체도 아니며 (나는 오늘 이글을 전혀 쓰고 싶지 않다고 결정짓고는 태권도나 하러 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행동이 완전히 자유스럽지도 않다 (만일 내가 글을 쓰려고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식이랑 또한 몇 안 되는 것이다).

기저핵의 주요부분들을 보여 주는 뇌의 내부 그림
뇌는 목표와 목적하에 기능적인 측면을 따라서 조직화된다로 생각할 수 있다. 이글을 읽는데 관련된 뇌의 영역을 국재화시키려는 시도는 자신의 그림자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목적이란 바로 분산 시스템의 생산물인데, 이는 대뇌피질과 같은 뇌의 새로운 부분들이 피질하 기저핵과 같은 계통발생적으로 오래된 뇌영역과 결합된 것이다.
예를 들어서 뇌의 오래된 ' 하위 ' 영역의 중요성은 환자의 팔과 어깨가 계속 비틀어지는 것 같은 일련의 무작위 운동을 일으키는 헌팅턴씨 병 (Huntington's Chorea) 같은 것에서 볼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들 운동들의 각 요소들은 적절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헌팅턴씨 병에 걸린 환자는 그런 운동을 '하려고 한 것' 이 아니라 자신이 근육에 대한 무기력한 피해자가 된다. 이러한 헌팅턴씨 병에 관련돼 침해받은 뇌영역 중에 하나는 기저핵의 일부인 미상핵이다.
편무도병 (hemiballismus) 은 또다른 신경학적 질병으로 불수의적인 운동이 특징이다. 편무도병 환자는 갑자기 외관상으로 투수가 야구공을 던지는 것과 같은 동작을 한다. 그러나 투수가 잘 던지려고 애쓰는 것과는 달리, 편무도병 환자는 그러한 동작을 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헌팅턴씨 병과 편무도병에서 보이는 불수의적 형태의 운동은 의지의 통제를 벗어난다. 이들 병에 걸린 사람들은 그들의 통제력을 벗어난 일련의 당혹스러운 활동 때문에 시달리게 된다.
보기에 따라서 이들 질환자는 자신들의 삶을 앗아가버린, 공포영화에나 나오는 괴물 같은 그들 자신의 운동 프로그램의 구경꾼이 된 것이다.
의지적 운동에 뇌의 '하위' 영역이 중요하다는 진일보된 증거는 파리에 살고 있는 25살된 프랑스인에 의해 1982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었던 그 사람은 의식을 회복했지만 자활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비극적인 손상을 입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 사람은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고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거나 그저 그럴 건들이기만 해도, 그는 갑자기 정상적인 신체적, 지적, 그리고 정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이 환자와의 대화에서 무활동기 동안 그의 마음에는 그가 활동으로 옮길 수 없는 사고와 충동들이 넘쳐 흐른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사고와 충동들에 사로잡힌 채로 그는 문자 그대로 몇 시간이라도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 있었는데. 이때 그의 마음에는 일련의 반복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런 것은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거나 신체적으로 자극을 가해야만 중지되었다.
이 환자에게 CAT검사를 해보니, 보통 의지적인 운동과는 관련이 없는 기저핵의 영역인 담창구가 손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예에서는 담창구의 파괴로 말미암아 이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삶에 지극히 중요한 통제력을 빼앗겼다. 즉 그는 문자 그대로 자발적으로 활동하고나 생각을 표현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비극적인 환자의 가장 흥미있는 점은 기저핵의 도움없이 특정한 운동을 수행하려는 바람만으로는 도대체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1976년 독일의 신경생리학자인 콘후버 (H.H Kornhuber) 는 정상적인 지원자들의 두피상의 여러 지점으로부터 EEG 신호를 기록하였다. 피험자들이 일련의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이들의 뇌전도 (electroencephalogram : EEG) 가 기록되었다. 컨후버의 실험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간은, 히펌자들이 단순이 그들의 집게손가락을 구부리라고 요청받았을 때였다. 어떠한 제약이나 특정한 자극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손가락을 구부렸다. 운동 순간에 대한 정밀한 지표를 얻기 위해서 손가락운동과 관련없이 발생하는 자발적인 배격 '잡음' 을 제거하기 위해 컴퓨터를 사용해서 이들을 평균화시켰는데, 이렇게 하면 손가락을 움직이는 활동에 특별히 관련된 뇌전위들을 뽑아낼 수 있다. 이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즉 손가락운동에 앞서서 뇌 안에서 손가락은동에 관련된 뇌전위를 탐지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신호를 탐지한다면, 그 신호는 대뇌반구의 어디에서 방사되는 것일까?
콘후버는 손가락을 위로 올리기 1.5초 전에 뇌활성화에서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더해서 이러한 준비전위 (readiness potential) 는 보통 손가락운동과 관련되는 피질영역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 대신 대뇌 양반구의 많은 표면에서 이러한 준비전위를 기록할 수 있었다.
콘후버의 실험은 운동이 시작되는 순간에 앞서서 이미 상당한 양의 뇌처리가 발생한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어떤 자극에 대한 단순반응이 대개 약 0.1초 걸리는 반면에, 우리는 의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1.5초 전에, 운동은 준비전위의 형태로 시작한다.
콘후버의 실험에서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주장들이 나온다. 첫 번째로 우리의 뇌가 마음의 명령을 따라 운동을 산출한다는 과거의 사상을 개정할 수 있다. 짧지만 매우 중요한 순간 동안 되는 '운동 프로그램' 을 형성하고 수행하기 시작한다. 뇌의 꽤 많은 영역들이 운동이전에 동작하고 있다 ― 사실상 뇌의 많은 영역들은 그 운동을 시작하고자 하는 의지의 의식적인 행위에 앞서서 동작한다. 만일 누구든지 마음이 어떤 방식으로든 뇌와 분리되어 있으며 마음과 뇌의 관계가 부대지휘관과 부하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면, 위의 결과와는
모순된 것이다. 한편 만일 '우리란 바로 우리 뇌다' 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던지 또는 뇌 연구자인 하스 (Eric Harth) 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개념적인 문제는 사라진다.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힘은 한 실체 (마음) 가 다른 실체 (몸) 에 행사하는 힘이 아니라 뇌가 그 자체에 대해서 갖는 영향력이다.
콘후버의 실험의 두 번째 의미는 특정한 운동이 뇌의 한 영역에서만 기시하지 않는다는 에벗스의 입장을 확증한다는 것이다.
운동행위나 지각을 적절히 분석해 보면 언제나 그런 것들에는 뇌의 여러 부분들에 있는 매우 많은 뉴런들이 관여한다는 것이 발견된다. 이런 이유로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의식에는 여러 장소들의 매우 많은 세포들이 필수적으로 관련되는 것 같다.
라고 노벨상 수상자인 신경생리학자 그래니트 (Ragnar Granit) 는 말한다.
대뇌피질은 의심할 여지없이 운동과 관련된 의식적인 경험의 정교화에 중요한 영역이지만, 대뇌반구 아래의 심부 뇌영역들에 의존하는 내적으로 생성된 운동 프로그램이 없이는 움직이려는 원래의 충동을 행위로 옮길 수 없다. 내가 펜을 집으려고 의식적으로 의도할 수 있지만, 그러한 행위를 행하는 기전은 나의 의식외부에 머무는 것이다. '운동 프로그램'과는 의식적으로 접촉할 수 없는 이같은 불가항력은 자유의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흥미 있는 의미를 가진다. 이 예에서 나는 내 이름을 쓸 때에 동원되는 근육수축의 특정한 구성을 '의도' 할 수 없다. 나는 내 이름을 쓰는 것만 결정할 수 있고 그러한 행위는 자체의 불가사의한 방식을 따라 펼쳐진다. 우리는 이제 이들 방식들이 대뇌피질에서 피질의 감각영역으로, 그리고 시상으로 내려가서는, 피질하 중추, 특히 기저핵으로부터의 기여도 함께 한, 되먹임 (Feedback) 을 포함한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처리가 의식을 일으킬 수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이지 우리의 의지를 특정한 운동으로 변환시키는 시전에서 볼 때, 우리 자신에 대해서 거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행위할 때에 정말로 우리 자신이 된다. 따라서 현대의 뇌연구는 특정 철학적, 그리고 심리학적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방식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학과 심리학이 잘못된 종류의 질문을 추구해 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백조의 뇌에 백조가 비상할 때 보이는 아름다움과 정교함을 담당하는 중추가 없는 것이다. 뇌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최종적으로 운동으로 표현되는 의도라는 것이 신경조직화의 패턴 내에서 어떻게 부호화되는가를 밝히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시킬 때에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화는 뇌의 여러 부위와 수준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그것들이 연관되는 방식, 그것들이 상호작용하는 정도, 그리고 결과적으로 운동이 일어나는 방식 등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첫 번째 단계는 불수의적 운동과 수의적 운동간의 경계가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의식적인 활동들, 예를 들어 테니스 게임과 같은 것에서조차도 많은 불수의적인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는 의식의 관여가 없이도 많은 운동을 잘 수행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일본의 무술인인 데시마루 (Taisen Deshimaru) 는 공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격법을 선택하는 것이란 없다. 공격은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만일 생각이 있으면 생각하는 시간이 걸리게 되고, 이는 곧 약점을 의미하기 때문에…, 생각이 있을 수 없다. 만일 당신이 '나는 이 공격법이나 다른 공격법을 사용해야겠다' 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면, 생각하는 동안 공격을 받을 것이다.
자동적인 것에 대해 이렇게 의탁하는 일은 테니스, 발레, 축구, 그리고 권투에서도 발견된다. 사실 어떤 운동경기에서 보이는 절묘한 장면은 따지고 보면 운동선수들이 긴박한 순간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게 충분히 훈련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좁혀진다. 어떤 선수가 ' 얼어붙었다 ' 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 동안 망설이고 주저하는 그 선수의 버릇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바로 그 순간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정상급 선수는 정신적 특성이 중요하다고들 현재 생각하고 있지만 슈퍼스타와 초보자의 차이점이 무의식적으로 수행되는 불수의적 운동에 있다는데 초점을 맞추는 해설자는 거의 없다.
현대의 뇌연구는 운동선수에게서 '운동 프로그램' 이 중요하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를 제시하는데, 그런 견해는 사실상 1890년대부터 있었다. 더들리 (A.T Dudley) 는 그 당시에 < Harvard Monthly > 에 기고한 글인 'The Mental Qualities of Athlite'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뛰어난 선수의 현저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뛰어난 선수는 훈련과 연습에서 대담하며, 결정적인 경기에서는 자신의 충동을 전적으로 믿으며, 모든 움직임을 생각하지 않는다……일류선수는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을 따라 행동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부각시키며, 압력이 심할수록 경기를 더 잘한다.
우리가 이제까지 시각과 운동에 대해서 논의해 온 것을 함께 모아서, 스타플레이어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보자. 다이빙 세계 챔피온인 추가니스 (Greg Louganis) 의 솜씨를 보자.
루가니스의 멋진 다이빙은 시각, 운동, 그리고 감각단서들을 절묘하게 시간에 맞추어서 근육운동들과 결합시킨 정밀한 실행에 달려있다. 운동순서에 약간의 변화만 있어도 치명상을 입어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실패로 끝날 수 있다. 이처럼 복잡한 기술을 구사하는 데서, 다이빙 선수는 각 팔이나 다리를 움직이는 때와 방법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다. 눈, 손, 그리고 다리운동으로의 신속한 전이가 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다. 많은 훈련을 해서 순식간에 필요한 동작들이 통합되는 '자동 프로그램' 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뛰어난 솜씨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소뇌이다.
소뇌가 인간 뇌의 일부이지만, 소뇌는 소뇌만이 갖는 뇌세포들의 뚜렷한 배열을 이루고 있으며, 또다른 독특한 특징들도 지닌다. 소뇌는 신체의 완전한 운동과 감각표상을 지닌다. 이 섬세한 구조는 손상을 받아도 근육의 약화나 또는 자각할 수 있는 감각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그 대신에 소뇌가 손상된 사람은 똑바로 걷는 것과 같은 단순한 운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사실 그러한 환자는 알코올성 음료를 마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술취한 것 같이 보인다. 만일 소뇌의 질병이 넓게 확산된다면, 환자는 부축없이는 앉을 수조차 없게 된다. 눈과 손 운동협조가 상실되어서 코를 긁으려고 코 끝에 손을 갖다대는 단순한 몸동작이 엉뚱하게 얼굴을 찌르게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소뇌는 근육의 긴장상태, 자세잡기, 그리고 눈과 손운동의 협조를 책임진다. 이를 위해서 소뇌는 신체의 모든 부분들로부터 감각정보를 받는다. 이러한 정보는 소뇌의 전측과 후측에서 합성되어서 신체지도가 된다.
소뇌의 전엽은 여러 해에 걸친 알코올 섭취의 누적된 영향에 의해서 손상될 수 있다. 이 영역은 다리와 몸통의 안정성과 관련되는 까닭에, 전형적인 알코올 중독자는 비틀거리게 되며, 의자에 똑바로 앉을 수도 없다. 만일 손상이 보다 외측에 생겼다면, 환자가 수족으로 무언가 하려고 할 때마다 신체 한쪽의 손과 팔은 영뚱한 방향으로 뻗쳐져서는 심하게 흔들릴 것이다. 소뇌의 팔영역에 조그만 손상을 입으면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오른쪽 소뇌반구에 문제가 생긴 한 환자는 자신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내 왼쪽손의 운동은 의식하지 않아도 되지만, 내 오른팔의 각 운동은 일일이 생각해야만 한다. 즉 나는 일단 멈추어서 다음 동작을 생각해야만 한다.
사소한 일이긴 하나 만일 모든 활동을 수행하기 전에, 그 활동이 의식의 검열을 받아야 한다면, 이는 매우 지겨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숙련된 운동의 자동적 수행에 필요한 세세한 것을 '프로그램' 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소뇌 덕택에, 이처럼 지루한 일을 겪지 않는다. 만일 소뇌가 없다면, 그레그는 결코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며 더군다나 서서 완전한 자세를 취하고, 다이빙 신호를 기다리는 것 등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루가니스가 다이빙 신호를 기다릴 때, 그의 소뇌는 대뇌피질로부터의 정보와 함께 신체전체의 감각 채널들로부터 정보를 받고 있다. 과학자들은 운동, 특히 다이빙과 같이 복잡한 운동을 하려는 의향은 대뇌피질에 있는 운동연합영역의 활성화를 일으킨다고 믿는다. 대뇌피질의 운동연합영역으로부터의 신경충동은 먼저 직접적으로 외측소뇌로 보내지는데, 여기에 '프로그램' 이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 프로그램은 일종의 매개체인 시상을 통해서 대뇌반구, 이 경우에는 운동피질로 되돌려진다. 운동피질이 부하들에 대해 명령을 내리는 조직체의 고위간부에 해당한다면 그 명령의 세세한 실행은 부하의 몫이 된다. 이러한 유추에서 본다면, '부하' 의 역할은 매순간마다 운동형태를 지시하는 운동피질의 명령에 관한 정보를 계속 받는, 소뇌의 보다 내측 부분이 맡는다. 루가니스의 경우에는 흔히 다이빙보드의 팽팽함, '탄력성'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한 '분위기' 에 따라 그런 조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중 하이다이빙 경험이 많은 사람은 거의 없으므로, 소뇌통제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예인 테니스 게임으로 잠시 화제를 바꾸어 보자. 한 인터뷰에서 일본의 소뇌 전문가인 이토 (Masao Ito) 는 격렬한 테니스 시합 동안 뇌 안에서, 특히 소뇌에서 일어나는 몇가지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소뇌는 여러모로 테니스 선수들을 도와준다. 우선 선수가 멀리서 날아오는 공을 볼 때, 자기 토너에 볼이 떨어진 시간과 위치를 순식간에 알아내야만 한다. 이러한 예측은 대뇌피질에 의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볼이 날아올 위치를 향해서 라켓을 신속하게 휘두르는 것은 소뇌에 의해 일어남이 틀림없다. 달리고, 점프하고, 스윙하는 것은 서로간에 잘 협조되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전체기능이 소뇌의 작업이다. 원하는 방향으로 볼을 치려면 매우 숙련된 손가락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술도 역시 연습을 하는 동안 소뇌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분명하다. 즉 소뇌의 학습능력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방식으로, 소뇌는 테니스 게임에 훌륭하게 기여한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역할들은 소뇌의 다양한 영역에 의해 수행될 것인데, 각각의 영역에는 나름대로의 기능적 단위가 사실상 있는 것이다.
잭슨이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소뇌와 대뇌피질은 원치 않는 방전을 억압해서, 보다 적절한 형태의 신경발화를 상승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들 뉴런 발화의 형태는 소뇌를 통해서 프로그램되는데, 이토에 따르면 이는 마치 하늘을 나는 동안 비행기 조종사를 도와주는 컴퓨터와 같은 기능이다.
이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비행기 조종사는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서 로켓엔진을 제어함으로써 제트기를 조종한다. 우리의 운동에서 대뇌피질은 비행기 조종사와 같이 우리의 생물학적 컴퓨터인 소뇌의 도움을 받아서 수많은 근육을 제어한다. 만일 당신이 인간과 로봇을 비교한다면, 로봇의 동작이 인간의 동작보다 훨씬 조잡함을 알 수가 있다. 이는 로봇이 단 하나의 컴퓨터만을 가지고 있음에 비해서, 인간은 소뇌에 30,000개나 되는 컴퓨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뇌에 의해 수행되는 활동의 예를 들어보기 위해 다음과 같이 간단한 검사를 해보자. 얼굴에서 약 15cm앞에 집게손가락을 똑바로 세워두고 난 다음, 손을 가능한 한 빠르게 좌우로 움직여 보라. 그러면 그 손가락은 아마도 그 빠른 움직임으로 인해 흐릿하게 보일 것이다. 이제 반대로 그 손가락은 고정시켜 놓고 머리를 빠르게 좌우로 돌려보라. 훨씬 덜 흐릿하게 보이지 않는가? 이 경우 손가락이 흐릿하게 보이지 않도록 해주는 것은 전정안구반사 (vestibuloocular reflex : VOR) 덕분인데, 이는 내이에 있는 전정중추 (vestibular center) 에서 시작하며, 머리를 돌릴 때에 고정된 대상을 주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U자형 커브로 접어든 자동차경주의 운전자의 머리는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쏠릴 것이다. 시각적 흐릿함이 생겨서 사고를 당하지 않으려면 이런 것이 순간적으로 교정되어야만 한다. 눈의 신속한 재응시는 소뇌의 작은 영역에 의해 조정된다. 이 영역은 눈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서, 시야에 상이 고정되게 한다.
실험동물에서 이토와 다른 연구자들은 전정 ― 안구반사를 담당하는 소뇌의 작은 영역의 위치를 알아냈다. 만일 그 중추가 손상된다면, 동물들은 빠른 머리 움직임을 정확하게 보상을 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손을 눈앞에서 빠르게 움직일 때 우리의 손가락이 흐리게 보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머리를 돌릴 때 사물들이 흐리게 보이게 된다.
사물에 대해 안정된 상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각 개인에 따라 다르다. 자동차 경주자는 이것에 생존이 달려 있겠지만, 다른 직업에서는 VOR 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이 글을 읽기 위해서는 눈이 열을 따라서 주사 (scanning)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열을 다 읽고 나면 신속히 왼쪽으로 이동하고 또 한줄 아래로 이동한다. 난독증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그들은 두 개의 눈을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보다 한쪽 눈만으로 볼 때 글을 더 쉽게 읽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이런 독특한 난독증은 환자들에게 교대로 한쪽 눈을 가리도록 함으로써 경감시킬 수 있다.
새들이 걸아다니는 것을 영화로 찍어서 슬로모션으로 분석해 보면, 새들이 걷는 동안 몸은 분주히 움직이지만 머리는 거의 완전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추측하건데 그래야만 새가 돌아다니면서도 움직임에 대해 최대의 예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섬세한 조율은 전정중추와의 연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새가 나뭇가지 위를 걷거나 추가니스 하이보드 (high board) 로부터 점프하거나, 균형을 유지하는 데는 갖가지 유형의 감각정보들이 필요하다. 그러한 신호는 관절, 피부, 그리고 근육 등에 있는 특별한 감지기들로부터 축색을 따라 중계된다. 시각은 또한 공각에서의 정위감각을 위해 중요하다. 만일 여러분이 이를 의심한다면, 두 눈을 감고 한발로 얼마나 오래 성 있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라! 하지만 전체적으로 각각의 분리된 요소들은 환경의 여러 가지 변화를 뇌에 계속 통고해 주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수천만 년의 진화를 거쳐서, 특정한 기관들이 발달해 왔다. 중력 탐지기인 이석 (또는 청석) 은 모든 척추동물의 하위뇌간 근처에 존재한다. 이 기관에는 회전을 탐지하는 반규관이라 부르는 하나 이상의 관이 붙어 있다. 이들 기관은 함께 정위감각과 연관된 정보를 뇌간으로 전달하는 전정기관 (vestibular organ) 을 형성한다. 진화의 과정 동안, 전정기관에서 따로 팽창되어 나온 것이 청각기관이다.
전정척수계 (vestibulospinal system) 는 목과 몸통, 사지의 근으로 투사하는 신경섬유들로 이루어진다. 이들 반사들은 안정계 (stabilizer) 로서 작용한다. 정상적인 활동 동안, 전정척수 반사는 머리를 원래의 위치로 계속해서 복귀시키는 교정운동을 담당한다. 전정핵, 뇌간, 동안근 (VOR를 통한 전정안구반사) 과 소뇌 (전정소뇌로) 사이에 또한 연결이 이루어진다.
여러 해 동안, 신경과학자들은 만일 여러 전정 채널들이 완전한 무중력의 상태를 겪게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러한 환경에서는 방향을 알려주는 정상적인 단서들과 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환경에 사람들은 어떠한 경험을 하게 될까?
유원지에 가게 되면 바이킹이나 청룡열차를 타는 사람들의 나이가 평균 몇 살이 되는지 살펴 보라. 나이를 먹게 되면 우리 대부분은 공간상에서 우리 신체의 위치가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것을 잘 참지 못한다. 이는 곡예사와 고공줄타기 전문가들이 평균적으로 상당히 젊다는 사실의 부분적 이유가 된다. 어린이들은 또한 많은 어른들, 특히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 대단히 싫어하는 운동인 그 자리에서 빙빙돌기, 큰 원을 그리면 회전하기, 그리고 흔들림 등을 즐긴다.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신경과학자들은 우주여행의 영향에 대해 신중하게 고려해 보았다.
우주비행사들에게 멀미증이 나타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순수하게 학문적이라기보다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다. 만일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여행 중에 정위반응의 심한 변화를 견딜 수 없다면, 전체 우주 탐사계획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 (멀미로 고생하는 동안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또, 일을 하더라도 보통 때의 1/10정도 이상의 능률을 올릴 수 있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전정계는 적응력이 뛰어나서 우주비행사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다음은 1973 'Skylab Ⅱ' 를 탔던 의사이자 우주비행사 커어윈 (Joseph Kerwin) 이 쓴 무중력 경험에 대한 진술이다.
나에게 직립의 전정감각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우연히 지구를 바라보게 되지 않는 한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우주선의 두 방 중에서 어떤 것이 위층이고 어떤 것이 아래층인 지도 알 수 없었다. …… 위라고 생각하면 위이다. 며칠 동안만 익숙해지면 당신은 마음대로 놀 수가 있다……당신을 둘러싼 우주에 대해 불가사의한 권능감이 있다. 눈만 감으면 모든 것이 사라졌다. 따라서 신체는 혹성 그 자체가 되었고, 외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말로 알지 못했다.
무중력 환경에서 우주비행사의 신속한 적응력은 인간 뇌의 가소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우주여행은 전적으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전정계는 적응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중력권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정위감각이 다시 생겼다는 사실이다.
지구로 귀환한 우주비행사를 검사해 보면, 눈을 뜬 채로 문지방에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것 같은 쉬운 일을 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눈을 감으면 그런 일은 더 어려웠다. 그러나 며칠 후에는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자세잡기의 기전이 오랜 무중력 상태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정상적인 중력장에 있으면 거의 정상으로 회복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현상은 여러분이 며칠간 배를 타고 내린 직후 땅위를 걸을 때 일어나는 것과 유사하다. 처음 몇 시간 동안 여러분은 ' 마른 땅 ' 이 울렁거림을 경험한다. 그러나 몇 시간 내지 몇 일이 지나고 나면, 전정계는 적응하게 되고, 다시 발밑의 대지는 안정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시각과 운동의 협조는 인간 뇌의 기적들 중 하나이다. 뇌의 기능이 비정산적일 때, 무시무시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고인이 된 세계적인 코메디언인 토마스 (Terry Thomas) 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어느 날 의사가 그에게 도파민 (Dopamine) 의 결핍에 의해 나타나는 파킨슨씨 병 (Parkinson's disease) 에 걸렸다고 말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도파민은 뇌 세포들간의 전달자 (신경전달물질) 로서 작용한다. 하나의 세포가 다른 세포와 통신할 때, 세포들 사이의 틈으로 도파민의 작은 '분출' 이 일어난다. 그러면 두 번째 세포에 있는 특정한 도파민 수용기가 그 도파민을 취하여 그 결과 두 번째 세포가 활성화된다.
토마스도 그랬지만, 도파민이 없으면 상황이 무섭게 나빠진다. 많은 신경세포들이 활성화될 숭 없고, 그에 따라서 발화될 수 없다. 그러면 파킨슨씨 병을 가진 환자에게 특정적이고도 불행한 효과가 나타난다. 운동이 느려지기 시작하고, 진전 (tremor) 이 자주 나타나고, 구부정한 걸음거리가 나타난다. 주요 관절의 탄력과 유동선의 상실이 급속하게 따라온다.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씁쓸한 우스겟소리를 했다.
내 최상의 부분은 내 귓불이다. 귓불은 여전히 견고하며 활기 있다. 그러나 내 몸의 나머지는 모두 이 증후군의 침범을 받았다.
토마스는 신체가 파킨슨씨 병에게 야금야금 침해당하는 것을 비통하게 서술하였다.
마치 다리가 땅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춤추는 듯한 동작을 취했고 가끔 발걸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면 ' 그렇기! 잘 했어요 ' 라는 말을 듣게 되지만 다음날에 그렇게 하면 쓰러져 버린다. 그렇게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한동안 파킨슨씨 병의 치료가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1960년대 후반, 과학자들은 도파민의 화학적 선구물질인 L-도파를 합성했다. 파킨슨씨 병 환자에게 충분히 많은 냥의 L-도파를 투여한다면, 많은 증후들이 원상태로 회복된다는 것이 발견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그러한 회복세는 지속되지 않았다. 점점 더 많은 약물을 투여하게 되지만 효과는 점점 없어져 갔다.
이에 대해서 뇌에 L-도파를 지나치게 주입하는 것은 대도시에서 대중교통난을 개선한답시고 모든 사람에게 자가용 버스를 주는것과 같다. 즉시 간선도로는 차로 꽉 막혀서 자가용, 오토바이 등이 다니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과도하게 L-도파를 투여하는 것은 다른 신경전달물질을 방해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다른 문제들이 있다.
약의 효과는 흔히 가장 불편할 때에 사라져 버려서 환자를 문자 그대로 부동의 상태로 얼어버린 채 있게 만든다. L-도파는 또한 기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우울증이 생기거나 불가해한 의기양양감이 생겨서 수면과 정신적 안정을 취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약이 자연적인 도파민을 생산하는 뇌세포들의 파괴를 가속시킬 수 있다는 회의론도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과학자들은 도파민이 필요한 특정한 영역에 소량의 도파민만을 투입하는 방법을 탐색해 오고 있다.
스웨덴의 Lund 대학에서 뷰클룬트 (Anders Bjorklund) 는 도파민성 세포를 태아 쥐에서 성체인 쥐에게로 이식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도파민 생산세포를 함유하고 있는 중뇌의 한 부위를 외과적으로 적출하였다. 그리고는 그 세포들을 조밀하게 뭉쳐서 폭이 0.5mm인 영역 내에 30,000개 이상의 도파민함유 세포가 들어가게 한다.
요점은 이들 도파민함유 신경세포들을 성체인 동물의 손상된 부분과 대치하는 것이며, 이 방법으로 이들 동물의 운동기능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고 뷰클룬트는 본 저서를 영화화하는 동안 이야기했다.
도파민 분비세포를 수집한 후에, 뷰클룬트는 그것을 다른 쥐에 이식하였다. 여러 번 이식해 본 결과, 쥐의 운동이상은 성공적으로 역전되어서 인간에서 파킨슨씨 병과 유사한 쥐의 병에 대해 '완치' 에 상응하는 성과를 얻었다.
우리가 이 실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지식은 발달 초기에 채취한 태아세포는 손상된 뇌의 새로운 환경에서 그들의 발달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고 뷰클룬트는 말한다.
뷰클룬트나 세계의 어느 누구도 전체적인 '뇌이식' 을 수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서 지적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 대신에 신경화학물질인 도파민을 생산할 수 없는 손상된 뇌의 무능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뇌의 일부만이 한 동물에서 다른 동물로 이식되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에 철학적인 문제나 윤리적인 문제가 없지는 않다. 예를 들어서 뇌는 마음과 영혼을 위한 구조적 토대인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이미 뇌를 주무르는 것을 반대한다.
이런 논쟁에 대해 나는 오늘날 이미 신경계의 조작이 허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뇌의 기능에 작용하는 모든 약품은 신경계를 조작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본다면, 약물이 세포이식보다 우리의 마음을 조작하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형태인 것이다.
고 뷰클룬트는 말한다.
뷰클룬트는 이식이 반드시 파킨슨씨 병에 대한 '치료' 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통제 불가능한 변인들이 여전히 너무 많이 있다. 이식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파민 세포들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이식 '거부반응' 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 이미 두 명의 환자가 세포이식을 받았다. 버겐달 (Nil Bergendahl) 은 그러한 수술로 많은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의사가 그에게 묻는다면 그는 다시 한번 수술받고 싶다고 말할 것이라고 한다. 스코글로프 (Greta Skoglof) 는 그녀가 이제 보다 잘 움직일 수 있다고 느끼는데, 그녀는 수술이 대체적으로 성공이라고 느낀다. 이들 두 사람은 뇌이식수술을 받은 최초의 인간들인데, 뇌에서 운동이 중재되는 방법과 이 상당히 복잡한 시스템이 와해될 때에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자가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뇌기능의 붕괴나 신경과학자의 치료하려는 시도보다 더 비범한 것은 뇌가 제대로 작용할 때 나타나는 놀라운 수행능력인데, 물 한 컵을 집거나, 루가니스처럼 10m 위에 있는 발판에서 완벽한 다이빙을 하는 것 등이 바로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