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술베틀 : Robert Jastrow 저, 최광복 역, 범양사 출판부, 1986 (원서 : THE ENCHANTED LOOM: Mind in the Universe, Simon & Schuster, 1981)
"변하지 않는 것 (존재의 본질) 이 변하는 것 (존재의 현상, 양태) 보다 더 중요하다" 는 것이 서양의 전통적 철학과 신학의 밑바탕이었다. 그러나 만물의 원리를 "변하지 않는 존재" 에서 구하려는 고정 관념은 이제 유효 기간이 지난 세계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물은 유전한다"고 누가 말했던가. 동쪽 아시아에서는 옛부터 음양의 조화 (변화) 를 만물의 원리로 내세웠고, 인도의 신 시바 (창조와 파괴의 신) 는 우주적 춤을 춤으로써 삼라만상의 윤회를 주관한다고 하였다. 또한 현대의 양자물리학에서는 만물의 기본이 되는 소립자 물질 (소유주) 들이 예측 불가능한 변화 무쌍한 춤 (뜀뛰는 춤) 을 춘다고 한다.
춤이란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런데 우주 만물이 추는 춤은 댄스 교본에 따라 정해진 스텝을 밟는 "고정되어 있는 춤" 이 아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어깨와 발을 덩실덩실거리면서 추는 스스럼 없는 춤이요, 오묘한 우주의 신비에 놀라고 감복되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추는 자발적인 춤이며, 궁극적으로는 "춤추는 우주" 와 합일되어 추는 춤이다. 춤에 열중하다 보면 춤추는 자가 춤인지 춤이 춤추는 자인지 구분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변화시키는 주체와 변화되는 객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가 주체이며 동시에 객체가 되는 것이다.
변화가 만물의 속성이라면 우리는 "변화하는 것이 고정된 것보다 낫다" (Becoming is better than being) 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이 변화의 춤을 춘다면 생물계도 춤을 추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생물계가 추는 춤을 셰링턴 경은 신비의 직물을 짜는 "요술베틀" (Enchanted Loom) 이라고 하였고 우리는 이를 보통 "진화" 라고 말한다.
진화는 "보이지 않는 힘" 에 인도되는 우주의 멀고도 긴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금세기의 고생물학자이며 신학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진화의 원동력이 되는 창조적 에너지는 최근 인간의 정신 즉 뇌에 집중되었다" 고 말하였다. 이 말은 단순한 형태의 생물이 보다 복잡한 생물로 분산 다기화되었던 과거의 진화의 방향, 즉 "확산의 방향" 이 인간의 출현 이후로 "뇌" 에 집중되고 수렴된다는 뜻이다. 뇌가 진화의 핵심이고 "진화의 축" 이므로 진화의 과정은 곧 "우주의 뇌화" 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두뇌는 우주적 진화의 극치를 이루는 신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인간만이 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요, 동물에게도 뇌가 있고, 아주 작은 원시 동물에게도 학습 능력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있기 전에 동물들이 먼저 있었고, 또 동물들이 있기 전에 대자연을 포함한 우주가 거기 있었다. 따라서 뇌의 진화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생성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은 미국의 저명한 우주물리학자인 R. 자스트로 (Robert Jastrow) 박사가 『The Enchanted Loon : Mind in the Universe』라는 제목으로 1981 년 뉴욕의 'Simon and Schuster' 출판사에서 발간한 책이다.
이 책은 생물의 요체가 되는 뇌의 진화에 대하여 우주의 발생에서부터 현생 인류에까지 이르는 긴 과정을 알기 쉽게 풀이하였으며, 또한 인간 두뇌의 창조물인 컴퓨터의 진화와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뇌의 진화와 컴퓨터" 에 과학적 연구를 간단하게 요약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궁금해 하는 여러 가지 의문점을 시원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왜 3억 5천만 년 전에 물고기가 물을 떠나 뭍으로 올라와서 육지 동물이 되었는가. 공룡은 왜 갑자기 멸종하였는가. 어떻게 해서 새앙쥐만한 초기 포유류가 진화의 방향을 주도하게 되었는가. 포유동물의 후각 기능과 시각 기능의 발달은 뇌의 성장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나무 위에서 살았던 영장류와 다시 땅에 내려와 살게 된 유인원의 생활 습관이 어떻게 두뇌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는가. 과연 인간 두뇌의 진화는 이제 종착역에 도착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 것인가 등등에 대하여 재미난 과학적 사실들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책의 후반부는 컴퓨터에 관한 것이다. 자스트로 박사는 우선 컴퓨터의 기본 원리를 누구라도 알기 쉽게 설명한 다음, 뇌와 컴퓨터의 기능을 비교한다. 장기 두는 실력을 스스로 쌓아 가는 컴퓨터, 인간 두뇌의 특징적인 회로인 올모스트 (Almost) 논리에 대한 설명등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실리콘 칩으로 된 전자 뇌의 엄청난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시행 착오를 통하여 배워 나가는 컴퓨터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스스로 뜯어 고칠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컴퓨터의 진화인 것인다. 천문학적인 속도로 진화는 전자 뇌 - 인간 두뇌와 맞먹는 인공 두뇌의 출현 - 인간과 컴퓨터의 필연적인 공생관계. 여기서부터 진화의 축은 방향을 바꾸게 된다.
탄소화합물로 구성된 생물적 뇌의 진화는 막을 내리고 규소질의 실리콘 칩으로 된 전자 뇌의 시대가 막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실리콘 상자인 육체에다 인간의 마음을 담게 되면 인간의 창조적 직관력과 컴퓨터의 무서운 기억력을 함께 지닌 새로운 초지능적 존재가 탄생할 것이며 미래의 새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내다보고 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저자 자스트로 박사는 미 우주 항공국 (NASA) 산하의 고다드 우주 연구소 (The Goddard Institute of Space Studies) 의 설립자이며 미국 최초의 달 탐험 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한 저명한 과학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뇌의 진화와 컴퓨터에 대한 현대 과학자의 안목을 권위있게 대변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쓴 책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고 또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식으로 엮어져 있다.
이 책은 "우주와 뇌와 컴퓨터" 에 관한 책이므로 천문학, 고생물학, 전자공학에 관련된 이론들이 많이 나온다. 본인은 이러한 학문들을 전공으로 배운 적도 없을 뿐더러 과학에 대한 지식이 남들보다 많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본인이 이런 과학 서적을 번역한다는 자체가 월권 행위가 아닐까하는 죄스러움을 느낀다. 단지 몇 년전에 이 책을 읽고 너무 재미있어서 언젠가는 나와 같이 과학을 모르는 일반 독자에게도 이 책이 널리 읽혀졌으면 하고 생각했었다. 그 이후로 진화와 과학 일반에 관하여 이것 저것 읽을 기회가 많아졌고 그럴수록 점점 번역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외람된 일을 저질러 버렸다. 여러 과학인 선배들의 넓은 이해와 아량을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본인이 무지로 인한 잘못된 옮김이 더러 있을 것이므로 독자 제위의 지도 편달을 바라마지 않는다.
좋은 과학 서적을 많이 출간하는 출판사를 대라면 우선 '범양사 출판부' 를 손꼽지 않을 수가 없다.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The Tao of Physics) , 『춤추는 물리』 (The Dancing Wu Li Masters) 등 유명한 현대 과학 이론서들을 공들여 번역 출판하여 한국인의 과학적 소양을 일깨워 주고 있는 등 출판사의 사회적 기여에 대하여 우선 책을 사랑하는 한 독자로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끝으로 이 책의 번역 출간을 쾌히 승낙해 주신 '범양사 출판부' 의 이성범 회장님과 번역에 관련하여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신 이만근 출판부장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1986 년 10 월
최광복 씀
마치 은하수가 우주의 춤을 추듯이 갑자기 뇌는 요술베틀 (enchanted loom) 이 되어 수백만 개의 번쩍이는 북으로 시원스럽고 의미가 깊은 직물을 짠다. 그리고 그 직물의 무늬는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고 항상 조화롭게 변한다.
- 찰스 셰링톤 경 (Sir Charles Sherrington)
이 책은 내가 이전에 적은 두 권의 책 『붉은 큰별과 흰 작은별』 (Red Giants And White Dwarfs) 과 『태양의 종말』 (Until The Sun Dies) 에 연이은 것으로서 3부작의 제일 마지막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책은 인류가 나타나기 전의 우주의 역사에 관한 것이었고, 두 번째의 책은 생명의 역사, 특히 인간의 진화 과정을 다루었으며, 이번 세 번째의 책에서는 생물계의 요체가 되는 뇌의 활동과 진화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내가 처음으로 생명과 뇌의 진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몇 년 전 우주 과학에 관한 CBS-TV 시리즈를 준비하면서부터 였다. 우주 과학을 연구하다 보니 지구상에 생명체가 출현한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쏟게 된 것이다. 고고학을 연구한 사람이면 약 3억 5천만 년 전에 물고기가 최적 환경인 물을 떠나서 뭍으로 올라와 살게 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생명체가 전연 존재하지 않았던 이 지구상에 생명과 지능을 갖춘 존재가 출현한 사실에 접하게 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생물의 진화와 역사를 과학자의 입장에서 연구한 결과 고등 생물일수록 뇌가 크다는 것과, 이러한 뇌의 거대화는 수백 수천만 년동안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물의 출현은 오랜 기간을 거쳐 연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나중에 출현한 생물은 이전에 출현한 생물보다 뇌가 클 뿐만 아니라 지능이 더 뛰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연속적 진화 과정 중에서 가장 나중의 단계에 속하지만 그러나 아마도 최종의 단계는 아닐 것이다. 인간 다음으로 어떤 생명체가 나타날 것인가. 이에 대한 나의 해답은 일반적인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른다. 나는 미국 우주 항공국에서 연구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그 해답을 얻었다.
내가 아직 젊은 물리학자로서 처음으로 우주 항공 프로그램에 참가하였을 때 복잡한 수학과 엄청난 양의 수리 계산을 하기 위하여 컴퓨터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컴퓨터는 원시적인 것이어서 단순히 수치를 가산하거나 미분 방정식을 푸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물론 컴퓨터는 계산 능력에 있어서 어떤 인간보다도 속도가 빠른 이점이 있었다.
우리는 항성과 행성의 운동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라, 기상에 관한 연구도 하였다. 기상에 관한 연구는 은하계의 구조나 별의 생성에 관한 연구보다 훨씬 많은 계산 작업이 필요하다. 3일간의 기상 예보를 하기 위해서는 1조 개에 달하는 연산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근무하였던 미 우주 항공국 (NASA) 산하의 고다드 연구소 (Goddard Institute) 는 1975 년에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제4 세대의 최신 컴퓨터를 설치하였다. 보다 장기 기상 예보를 하기 위해서 였다. 그동안 우리 연구소에서는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제 2세대 컴퓨터를 사용하였었고 그 다음으로 제 3세대 컴퓨터인 그 유명한 IBM 360을 사용하였다. 1975 년에 설치한 제 4세대 컴퓨터는 기능에 있어서 IBM 360과 비슷하지만 크기가 100분이 1에 불과하다.
나는 컴퓨터실 안에 서서 그르릉 그르릉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는 거대한 제 3세대 기종과 한쪽 구성에 조그맣게 놓여 있는 제 4세대 기종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컴퓨터 내의 전자 회로이는 움직이는 거리가 짧을수록 시간이 적게 걸린다. 따라서 컴퓨터가 작을수록 속도가 빠르다. 컴퓨터의 크기가 이런 추세로 계속 작아진다면 어떻게 될까! 큰 사무실 한 층을 점령하던 거대한 컴퓨터가 이제 책상보다 작아졌다. 만일 컴퓨터 회로가 인간의 뇌 세로의 연결회로처럼 밀집되어 뇌의 크기만큼이나 작아진다면, 그래서 컴퓨터의 기능의 뇌의 기능에 가까이 접근한다면, 그때에는 인간과 비슷한, 생각하는 기계가 출현할 것이며 이는 새로운 형태의 지능적 존재가 될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생각이 나의 상상을 재촉하였다. 즉 인간이 산출한 비생명계의 지능 (즉 생각하는 기계)
이 그 창조주인 인간을 결국 능가할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었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뇌의 기능과 컴퓨터의 기능을, 뇌의 역사와 컴퓨터의 미래를 연구하였다. 이 책은 그 결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서 나는 많은 동료들로부터 귀중한 자료와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 우선 나와 함께 고다드 우주 연구소 (Goddard Institute for Space Studies) 에서 같이 일하였던 동료인 폴쉬네크 박사 (Dr. Paul Schneck) 는 지난 수년 동안 컴퓨터의 구조와 전자공학에 대하여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 책의 후반부는 이분의 도움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았다. 쉬네크 박사는 내가 11장에서 언급한 천재적 사람들, 즉 컴퓨터의 언어로 컴퓨터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 중의 한 분이다. 또한 다트머스 대학의 케네스 코리 박사 (Drs. Kenneth Korey) 와 시몬 셔스터 (Simon And Schuster) 출판사의 로버트 엑크하르트 (Robert Eck-hardt) 씨는 파충류, 포유류 및 인간의 진화에 관하여 귀중한 조언을 해주셨으며, 콜럼비아 대학의 마이클 람피노 박사 (Dr, Michael Rampino) 는 공룡의 멸종에 관련된 지질학·고생물학적 조언을 해 주셨다. 엑크하르트 박사는 원고를 세심히 읽고 많은 조언을 해주셔서 설명을 명쾌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고다드 연구소의 스티븐 웅가 박사 (Dr. Steven Ungar) 는 컴퓨터의 시각 기능에 대한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하여 주셨고, 하바드 의과 대학의 위젤 박사 (Dr. T.N. Wiesel) 는 뇌의 시각 기능에 관한 부분은 친히 감수하여 주셨다.
도리스 쿡 (Doris Cook) 양과는 뇌와 컴퓨터에 대한 토론을 많이 하였는데 그녀의 조언은 각 장마다 나올 만큼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나의 어머니이신 마리 자스트로 (Marie Jastrow) 여사도 원고를 세심히 읽으시고 일반 독자가 알기 쉽게 쓰도록 조언해 주셨으며 그림 설명을 준비하는 데에도 여러 가지 도움을 주셨다. 수잔 터프츠 (Susan Tufts) 양은 원고 교정에 큰 수고를 해 주었으며 책이 나올 때까지 모든 과정을 도와 주었다. 수잔 메서 (Susan Messer) 양은 책의 준비 과정에서 후반부에 합류하였는데 원고의 최종 교정과 그림 삽입 등의 일을 열심히 해주었다. 4명의 젊은 예술가들 - 제인 수보보다, 안드레아 칼라토, J.B. 머코이 3세, 마린 로빈스 - 이 이 책에 나오는 그림의 대부분을 그려 주었다. 2장과 10장의 그림들은 잭홀이 준비해 주었다.
끝으로 특별히 감사를 드릴 뿐은 시몬 셔스터 출판사의 편집인인 어윈 글라이크스 (Erwin Glikes) 씨인데 이분은 보통의 저자-편집인의 관계를 넘어서서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특히 글라이크스씨가 컴퓨터에 관한 부분을 읽기 쉽도록 고쳐 주신 것은 이 책의 가치를 드높여 준 공로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