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News : 2009 년 5 월
융합 학문 위한 인재양성 시급하다 : 중앙일보, 최양희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 2009/05/21: 융합에 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높다. 지난해 11월 국가융합기본계획을 발표했던 정부는 최근 국가 발전의 화두로 그린융합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융합이 신학문과 신지식을 창조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20세기 내내 높은 성장을 구가했으나 점차 둔화돼 가고 있다. 급증한 대학의 학과 수에서 보듯이 기존 학문을 세부적으로 분화함으로써 과학기술은 엄청난 진보를 해왔다. 그러나 세분된 전공 사이의 높은 장벽 때문에 더 이상의 발전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안은 학문 사이의 벽을 허물고 융합하는 것이다. 융합이란 두 가지 이상의 지식이 화학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창조를 하는 것을 말한다. 여러 가지 기술을 단순히 결합하거나, 한 틀 내로 통합하는 것만으로는 융합이라고 할 수 없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하나로 묶은 신형 세탁기는 두 기능을 통합만 한 것이므로 새로운 기능이 없다. 그러나 세탁기능과 인공지능, 나노기술을 융합한 신형 세탁기에서는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저비용·초정밀 세탁이 가능하다. 융합에는 기술의 진보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과, 의도적인 모험과 창의력으로 창조되는 것이 있다. 소프트웨어, 컴퓨터, 반도체로 대표되는 정보기술과의 융합은 자연스러운 진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더욱 획기적인 창조는 상상을 뛰어넘는 이종 기술 간의 융합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나노와 바이오의 만남, 에너지 기술과 생물학의 만남은 전혀 새로운 학문과 기술을 창조하며 신산업을 탄생시키고 있다. 융합은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마인드를 가진 연구자들에 의해 개발되며 상상력과 다학문적 지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제조 중심의 2차산업, 서비스 중심의 3차산업에 이어 창조와 융합 기반의 4차산업의 시대가 열리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인재 모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융합기술은 기존 학문 전문가가 단순히 다른 학문을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융합기술의 기본 속성인 실험정신, 다양성, 유연성, 창의성은 학문지식이 많다고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고등교육시스템이 낙후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 세계 대학 순위를 보면 한국의 주요 대학은 한국의 경제력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고급 인재를 외국으로 빼앗기는 대학원 교육은 더욱 심각하다. 특히 융합의 거점이 돼야 할 한국의 주요 대학원을 보면 수십 년 전의 교육모델을 답습하고 있다. 학부와 대학원의 학과가 일렬로 세워진 환경에서 융합교육과 연구는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무엇이 개선돼야 하는가. 신학문의 창조라는 대학교육의 기본 목표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대학원은 학부의 연장에 머물지 말고 다양한 전공으로 재편돼야 한다. 창의성, 리더십, 모험정신을 강조한 커리큘럼이 학부에서뿐 아니라 대학원에서도 채택돼야 새로운 학문을 창조할 융합형 인재가 쉽게 길러질 것이다. 교수도 변해야 한다. 교수 자신이 이러한 변화를 먼저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에 그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세계적으로 융합의 연구가 가장 활발한 곳으로는 MIT의 미디어 연구소나 카네기멜론대학의 로봇연구소를 꼽는다. 이들은 모두 연구소에 교육기능을 더한 새로운 인재양성 모델로 유명하다. 최근 많은 대학에서 융합 전문학과나 대학원을 신설하고 있으나 근본적인 교육정책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유능한 융합인재 양성은 요원하다. 새로운 조직, 새로운 문화, 새로운 커리큘럼으로 무장한 융합 교육 프로그램이 정부의 지원 아래 정착돼야 한다. 융합을 목표로 한 체계적인 고도의 교육훈련이 융합 인재 확보의 지름길일 것이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대한민국 '실버 로봇' 개발 이끄는 김문상 KIST 사업단장 : 조선일보, 문갑식 기자, 2009/05/09 :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국제협력동 5층 연구실에 들어서자 육중한 쇳덩어리가 서 있었다. 군데군데 들어있는 모터를 전선(電線)이 칭칭 감고 있다. 그 안에는 3대의 컴퓨터가 들어있다. 영화 '터미네이터'에 등장하는 피부 벗겨진 알몸 사이보그 같은 모습이다. 이 차가운 금속의 이름이 '시로스'다. 전원을 넣자 주전자를 든 시로스의 팔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김문상(金汶相·52) KIST 지능로봇기술개발사업단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컵을 들이댔다. 2005년 APEC정상들도 지금의 김 단장 같은 표정으로 시로스에게서 오렌지 주스를 대접받았다. 시로스 옆에는 펭귄을 닮은 우스꽝스런 로봇이 서있다. 그의 이름은 '실벗'이다. '노인(老人·Silver)의 벗'이라는 뜻이다. 보기에 장난감 같지만 실벗은 예사 로봇이 아니다. 주인에게 매일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고 쓰다듬어주면 "아우! 신나 신나" "따뜻한 손길이네요"라고 재롱 부린다. 한 대 툭 치면 금세 불쌍한 어조(語調)로 바뀌며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라고 한다. 말만 하는 게 아니다. 무료한 주인과 함께 고스톱을 치다 "헉, 쌌네?"라고 장단을 맞춰준다. 고스톱에 싫증을 느끼면 '급류타기' 같은 게임 상대도 돼주는 게 실벗의 임무다. 6~7세 아이 정도의 지능을 갖추게 될 2013년이면 '실벗'은 노인들에게 음식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해줄 수 있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찾아주기도 한다. 건강을 체크하다 이상이 생기면 의사나 119에 연락도 해준다. 웬만한 자식보다 훨씬 나은 효자(孝子)를 곁에 두는 셈이 되는 것이다. 김문상은 300명의 수재(秀才)들을 거느리고 2013년까지 각종 로봇을 개발할 예정이다. 만화의 단골 주인공인 전투형 로봇과 달리 그의 목표는 사람의 친구가 되는 로봇을 개발하는 것이다. "고령화 사회로 외롭게 될 노인에게 자식을 선사하는 것과 같다"는 게 그의 얘기다. '왜 보건복지부 장관이 해야 할 일을 과학자가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국의 로봇산업이 가야 할 길"이라고 했다. 10년 뒤면 세계 로봇산업시장 규모는 1조4000억달러로 자동차산업(1조 달러)을 능가한다. 그 블루오션을 향한 집념이 KIST의 푸른 잔디밭이 보이는 이곳에서 무르익고 있다.
―노인을 보살피는 로봇을 개발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혹시 집안의 불우한 노인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든가.
―실버 로봇을 인공지능형 로봇이라고 하지요. 인공지능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뭡니까.
"이른바 '말귀'를 알아듣는 거지요. 말귀를 알아들으려면 오감(五感)이 발달해야 합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려면 시각, 청각이 중요하고 촉각도 예민해야 합니다."
―시각이야 그렇다 쳐도 청각은 사정이 다를 텐데요. 말투도 다르고 음성의 높낮이도 다르고 사투리도 쓰지 않습니까.
―식사 수발이나 설거지를 한다지만 주택의 형태가 다 다르지 않습니까? 예컨대 아파트가 다르고 빌라가 다르고 단독주택이 다를 텐데.
―지금 개발된 실벗 제작비가 대당 4000만원 정도라는 데, 그걸 살만한 노인이 있을까요.
"단가는 대량생산을 하면 낮출 수 있습니다. 승용차도 초기 개발에는 몇십억원이 들지만 많이 만들면 천만원대로 팔 수 있잖아요."
―실벗이 실수로 노인을 밟거나 툭 쳐서 부상을 입히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면 큰일 나지요. 그런 유의 사고가 일어나면 절대 안됩니다. 저희가 로봇을 개발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게 바로 그 문제입니다."
―잘만 되면 어린아이처럼 귀엽겠지만 아무래도 노인들에게 로봇은 생소한 존재 아닐까요.
―실벗은 맨날 고스톱만 치나요? 바둑이나 장기도 둬야 할 텐데, 일설에는 바둑이나 장기처럼 창의력이 중요한 오락에서 기계는 인간을 당할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디자인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은 개발단계니까요."
―미래에 이런 로봇이 실제로 상용화되면 외모도 선택해서 구입할 수 있겠네요. 남자와 여자가 자기 취향에 맞춰서.
―요즘 노인들이 옛날과 체력이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설거지나 식사수발, 건강체크뿐 아니라 혼자 사는 노인들의 성적 욕구도 채워줄 수 있겠네요.
"일본에서는 이미 섹스파트너 로봇이 개발됐지요. 우리도 만들 수 있지만 윤리적인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하지요."
―처음 내놓은 작품이 1993년 대전엑스포에 전시된 '꿈돌이 3차원 조각 로봇'이지요. 뭘 하는 로봇이었나요?
"(맞은편 벽을 가리키며) 저기 제 얼굴을 조각(彫刻)한 것 보이지요? 꿈돌이가 조각한 겁니다. 조각도 하고 얼굴도 그려주는 로봇을 개발하는 데 2년이 걸렸습니다."
―그 다음이 앞서 말한 '센토'이고 위험작업 로봇 '롭헤즈'도 개발했지요. 롭헤즈는 언뜻 초소형 전차(戰車) 같은 모습입니다만.
"롭헤즈는 로보트와 위험을 뜻하는 '해저더스(hazardous)'를 합성한 말입니다. 말 그대로 전차 바퀴 같은 무한궤도를 달고 정찰하는 로봇입니다."
―미군이 이라크 전에서 다양한 로봇을 사용했습니다. 롭헤즈는 우리 군에 군납(軍納)이 안 되나요?
"일본의 한 대학과 뉴질랜드에 모두 3대를 수출했습니다. 대당 6만달러씩을 받았지요. 사우디아라비아와도 수출 상담(商談)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수요만 있다면 저격수 로봇 같은 것도 개발할 수 있습니까.
―뒤이어 안내로봇 '지니'와 최초의 지능로봇이라 할 '시로스'를 내놓았습니다.
―지금까지 만든 로봇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냥 쇳덩어리로 여겨집니까 아니면 다른 느낌이 드나요.
"전기가 흘러 움직일 때면 섬뜩한 느낌이 들지요. 제가 낳은 자식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정신으로 풀 수 없지요. 제가 테니스를 좋아해요."
―이야기는 공학인데 마치 예술가가 창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봇하면 대개 로보트 태권V나 마징가 제트를 떠올립니다. 우리 수준에서 그런 전투(戰鬪) 로봇을 만들 수는 있나요?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영향인데, 실제로 만들 필요가 없지요."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주연한 영화 '터미네이터 2'처럼 금속이 액체처럼 녹았다가 다시 고체가 되는 것도 다 픽션입니까.
―미국의 로봇산업을 100이라고 가정하면 다른 나라는 어느 정도입니까.
"과거에는 미국을 100으로 봤을 때 일본 50, 한국 10쯤으로 봤지요. 지금은 한국이 20~30정도는 될 겁니다. 게다가 한국은 로봇산업 측면에서 일본보다 앞설 수 있어요."
―로봇이라는 말이 1921년 체코의 희곡작가 카렐 카페크의 작품 '로섬의 인조인간'에 처음 등장했지요.
"체코어로 로봇은 '일한다(robota)'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산업현장에 처음 로봇이 등장한 것은 1962년입니다. 미국 유니메이션사가 만들었지요."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둘러싼 오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로봇의 지능이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지요.
"저는 로봇의 지능이 줄기세포를 이용한 인간 복제(複製)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몇십 년 후의 일이 되겠지만 로봇의 지능이 인간을 뛰어넘을 때가 올 겁니다."
―그 단계가 되면 로봇이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것 아닌가요? 더구나 로봇은 인간보다 우월한 부분도 있지 않습니까.
"가장 무서운 것은 로봇의 네트워킹 능력입니다. 로봇의 내부에는 컴퓨터가 여러대가 장착돼 있습니다."
―네트워킹이 왜 중요한가요.
"무선 통신을 이용하면 순식간에 수백만,
수천만대의 로봇이 행동을 통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복제가 되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설정하는 최후의 관건은 로봇의
전원(電源) 스위치를 인간이 마음대로 내릴 수 있느냐 없느냐가 됩니다."
"인간이 로봇의 전원을 원할 때 아무 문제없이 내릴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로봇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인간은 뭘 해야 할까요.
조현욱 교수의 장르문학 산책-『뉴로맨서』: 중앙일보, 조현욱, 2009/05/09 : “신선한 상상, 압도적인 디테일, 그 함축성에 한기를 느낀다.”(뉴욕 타임스) .. “다층적이고 통쾌하고 번쩍이고 퇴폐적이다. 예술의 영역에 들어선 작품.”(워싱턴 포스트) 1984년 윌리엄 깁슨이 발표한 『뉴로맨서』에 쏟아진 찬사다. 당시 3대 과학소설(SF) 문학상인 휴고상·네뷸러상·필립 K 딕 상을 석권했을 뿐 아니라 2005년 타임지가 선정한 ‘1923년 이래 영어로 쓰인 100대 소설’에도 올랐다. 이 소설은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첫째,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용어를 처음 등장시켰다. 사람의 두뇌와 컴퓨터 통신망의 연결로 형성되는 가상공간에 붙인 이름이다(오늘날 통용되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의 두뇌에 이식된 소켓에 전극을 꽂으면 사이버 스페이스에 들어갈 수 있다. 둘째, 사이버 스페이스를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좌표가 하나씩 배정되어 있는 끝없이 이어지는 격자, 표면이 완벽하게 매끈한 구체로 형상화된 인공지능의 모습 등이 그렇다. ‘론머맨’ ‘코드명 J’ ‘매트릭스’ 등의 SF 영화는 모두 뉴로맨서의 아이디어를 모태로 하고 있다. 특히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 사이버 공간 속을 침투해 들어가는 생생한 장면은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셋째, ‘사이버 펑크’ 장르의 선구이자 대표적인 작품이다. ‘사이버 펑크’란 ‘사이버네틱스(인공두뇌학·Cybernetics)’와 ‘펑크(1970~80년대의 반항적 패션 경향·Punk)’의 합성어다. 이 장르는 고도 정보기술 사회를 디스토피아로 그리면서 해커·인공지능, 그리고 거대 기업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주인공은 범죄자이거나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대체로 가진다. 『뉴로맨서』역시 그렇다. 주인공은 지하세계의 해킹 전문가이자 살인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지구는 핵 전쟁 후 대기업군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고도의 통제된 현실사회의 이면에는 두 개의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 한쪽 인공지능이 다른 쪽 인공지능의 실체를 찾고 그와 교류하기 위해 주인공을 이용한다는 스토리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재미있다. 인체를 부품처럼 교환하는 바이오 공학의 시대, 마약과 폭력과 섹스가 판치는 거대 도시에서 주인공이 펼치는 모험담은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상징적이다. 책의 한 대목. 신경 손상으로 사이버 스페이스에 접속할 수 없는 주인공의 상황이다. “엘리트답게 처신한다는 것은 육체를 은근히 무시할 줄 안다는 뜻이었다. 육체란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랬는데…. 케이스가 바로 그 육체라는 감옥에 처박힌 것이다.” 깁슨은 어두운 필름 누아르의 분위기를 신기술과 이국적인 문화를 섞어 다시 창조한 뒤 반영웅적인 주인공이 탐정소설식 여정을 걷게 함으로써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96년 열음사에서 처음 나왔던 번역본은 절판됐고 2005년 황금가지에서 나온 새 번역본은 시판 중이다.
뇌만 남은 인간“무슨 생각을 할까?”
: 월간중앙,
박미소 기자, 2009/05/01 : .... SF가 인기 장르일 정도로 영화에서는 과학이라는 소재가 당연시된다. 반면 연극에서는 아동과 청소년을 상대로 하는 일부 교육용 공연을 제외하면
과학을 다룬 작품이 매우 드물다. 두산아트센터는 ‘과학연극시리즈’를 기획해 과학을 소재로 한 4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장르의 폭을 넓히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 예술과 과학. 이 두 단어는 마치 양 극단에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두산아트센터에서 올린 ‘과학연극
시리즈’도 더욱 생경하게 느껴진다. 제목만 들어서는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교육용 연극이라고 넘겨짚게 되는데, 실제로 관계자들은 학부모들로부터
수많은 문의전화를 받았다고 털어놓는다. 그만큼 우리는 두 주제의 사이를 멀게 인식하며, 과학을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비밀스러운
지식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시리즈는 과학적 이슈를 지닌 작품을 한데 모은 것으로,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기획이다.
생물학·화학·물리학·지질학 등 4개 영역의 다양한 과학적 담론과 소재를 공연으로 올리는데, 3월24일부터 7월5일까지 4편의 연극이 준비돼
있다. 첫 번째 공연은 일본의 극작가 겸 연출가인 히라타 오리자가 만든 <과학하는 마음3-발칸동물원>으로,
3월24일부터 4월1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펼쳐졌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를 대체하는 날이
오면…
막이 오르면 관객들은 머지않은 미래 일본 국립대학의 생명과학연구소로 날아가 그들의 하루 일상을 지켜보게 된다. 이곳은
생물학·동물학·의학·물리학 등 다양한 전공의 연구원과 학생들이 생명공학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장소다. 어느 날 이곳에 식물인간이 된 세계적
뇌과학자 알렌 클래식의 뇌를 보관하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온다. 이 뇌는 알렌이 생전에 설계한 방식 그대로 4년간 ‘생명’을
유지하는 상태. 그의 약혼녀였던 일본계 과학자 나오코 셰킨즈가 연구소를 방문해 알렌의 뇌를 부탁하고 자신도 이곳의 연구원이 되기를 청하자
연구소는 결정을 놓고 고민에 빠진다. 연구소는 셰킨즈의 방문으로 평소보다 조금 들뜨고 부산하다. 연구원과 학생들 사이에 진행되는
과학적 담론과 토론을 통해 관객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첨단 과학의 숨겨진 화두를 이해하게 된다. 의족과 의수가 점점 더 정교해지듯, 멈춰버린
인간 뇌의 특정부분을 인공지능이 대체한다면 그것은 과연 사람으로 볼 수 있는지, 몇 %가 진짜 뇌여야 사람으로 취급할 수 있는지 되묻는다.
또 영장류와 인간 사이의 진화를 인정하면서도 뇌 연구를 위한 실험 수단으로 인간과 가장 흡사한 동물인 침팬지와 보노보를 마구
희생시켜도 되는 것인지 실험을 진행하는 연구원들은 고민하고 번민한다. 무대 위 대화에서 쏟아져 나오는 냉철하고 날카로운 질문은 관객들에게 새삼
일깨워 준다. 우리 삶을 둘러싼 과학과 문명의 이기가 사실 한 꺼풀만 벗겨내면 철학으로서의 속살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을. 그리고
가끔은 심각한 모순과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이 연구소에서는 원숭이의 유전자를 조작해 인위적으로 진화를 유도해 영리한 원숭이를 만들어
내는 한편 자폐증 연구를 위해 원숭이를 인위적으로 자폐 상태로 만들고는 한다.
이 연극이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은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가”이다. 인간의 뇌를 낱낱이 해부하고 모든 비밀을 알아낸다면 예술을 만들고 사랑하는 인간의 특성조차 하나의 과학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뇌만 살아있는 알렌은 과연 산 것일까, 죽은 것일까? 심각하고 복잡한 대화의 주제들과 달리 무대 위 풍경은 친근하기 그지없다.
마치 대학 강의가 끝난 후 수다가 이어지는 강의실이나 선후배가 삼삼오오 모여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아리방의 풍경과
같다. 관객들은 거부감 없이 편안하게 이들의 대화를 엿듣다 폐부를 찌르는 심오한 주제들과 돌연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과학적 충격이다.
무대 위 연구소 풍경에서 등장인물은 제멋대로 등장하고 퇴장하며 몇 개의 그룹이 동시다발적으로 대화를 나눈다.
관객들은 이 수많은 대화 중 자신이 우선시하는 것을 선택해 듣게 된다. 연극 특유의 문어체 대사 대신, 말을 흐리거나 ‘음…’ ‘어…’ 등이
수시로 등장하는 구어체의 친숙한 대사들이 범람한다. 문화적 충격이다. <발칸동물원>의 매력은 부드럽고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과학적 이슈로 접근해간다는 것에 있다. 거대담론이 등장하지만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는 감지되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농담을 던지며
인사하고, 때로는 이성에 호감을 표하기도 한다. 사랑싸움을 하거나 동료와 아슬아슬한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이처럼 무대 위에서는
인생의 소소한 장면이 이어지는 가운데 과학적·철학적 담론이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이것이 뚜렷한 대비를 이루며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그 사이
관객들은 과학의 객관적 대상, 철학적 인식의 주체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을 집필한
히라타 오리자는 대학 시절 연세대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해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연출가다. 그의 연극은 극사실적 화법을 구사한다.
배우가 객석을 향해 등을 돌리고 대사를 하고, 전체 흐름에서 기승전결의 맥도 잡히지 않는다. 일정 시간 특정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가감
없이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들은 수동적으로 극의 흐름에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작품의 이해에 동참하게
된다.
미지의 과학, 친근한 문화의 옷을 입다
1997년 쓰여진 <발칸동물원>은 히라타가 쓴
<진화하는 오후> <북방한계선의 원숭이>에 이은 마지막 작품으로, 이 세 연극은 <과학하는 마음> 3부작으로
불린다. 앞서 발표된 두 작품 역시 시간적 배경만 앞설 뿐 같은 연구실에 같은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두산아트센터는 이번 과학연극 시리즈를
기획하게 된 배경으로 ‘연극의 사회성’을 든다. 동시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천착하는 연극의 특성상 과학에 대한 접근 역시
당연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과학 역시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한 발자국씩 들어서 있어 양자간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과학연극 시리즈는
하나의 공연이 2~3주씩 무대에 올려져 총 4개의 공연이 7월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