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한국어 문법
한국어와 인공지능 : 고창수 편저, 태학사, 1999, Page 159~170
한성대 국문과, 고창수
1956년 여름, 미국의 다트머스 대학에 '생각하는
기계' 에 대해 토론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이 회의에서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 AI)' 이라는 말이 탄생되었는데, 인공지능이란 문자 그대로 인공적으로
구현된 인간의 지적 능력을 의미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기계가 지식을
획득하는 학습 능력, 외계의 유형을 파악하는 인식 능력,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추론 능력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들을 기계에 부여하기 위하여,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이러한 능력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때
인간의 마음이 과학적 연구의 주요한 목표가 될 수 있는데, 이러한 연구를 인지과학
(cognitive
science) 이라고 한다. 언어학은 인간이 지적 능력을 수행하는 근본과 과정을 살필
수 있는 도구적 개념을 제공할 수 있으므로, 당연히 이 과학의 중추적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언어학은 기계가 지적 능력을 획득하는 전제가 될 뿐 아니라, 지적 능력을 갖춘
기계가 활동하는 영역에서 사용자와 기계를 연결시키는 접촉면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한국어학은
일반 언어학의 한 분야이므로, 한국어 문법의 연구가 인공지능의 개발에 중요하다는
것은 단순한 관계와는 근본적으로 양상을 달리한다. 이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구현하는
한 부문으로서 언어학의 위상이 재정립 되어야 한다는 점과, 한국어가 언어의 한 변이체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의 구현은 결국 특정한 변이체의 문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 문제를 더 면밀히 검토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과학이나 언어 과학을
지배해 온 패러다임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해 보자.
이러한 의문은 인간의 마음과
기계를 관계 지울 때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17세기 과학혁명은 세계를 거대한 기계로
묘사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이후의 과학 연구는 하나님이 이룩해
놓은 기계 세계의 부품을 살피는 데 모든 정력을 쏟아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계와
인간의 기계 사이에 놓여져 있는 근본적 차이에 대해서는 눈여겨 볼 시간이 없었다.
우리의
언어학은 이러한 기계주의적 패러다임의 산물이다. 소쉬르 이후의 언어학은 특히
이 점에 충실했는데, 이로써 언어학은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의 한 부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과학은 기계론적 세계관 자체를 의심하고 있다. 기계론적 세계관의 특징은
관찰자와 관찰 대상을 완전히 분리하여 사고한다는 점과, 선형적 입출력 관계로 세계를
기술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문제점들은 주로 양자역학을 중심으로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러한 문제들을 의심할 수는 있으나 극복할
수는 없다.
이는 하이젠베르크가 지적하였듯이 우리 언어의 한계, 정확히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이제까지 제기되었던 많은
의문들을 해소하였던 것처럼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이러한 의문을 외면하지 않고, 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한 구체적 문제들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학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이 핵심적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이례로 촘스키의 언어학 혁명 (구체적으로는
보편문법 가설 이후) 은 언어학을 인간 생물학의 한 부문으로 간주하였다(촘스키,
1987). 이는 인간 인지능력의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인간 언어의 생성 절차를 명시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는 인간의 인지 능력을 특정한 기계적 절차에 의해서 기술한다는
점에서 문법의 설계와 표현이 다분히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최근
제안된 최소이론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이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인지 능력을 기술하는 것과 이를 기계에 모사하는 것을 구별해야만 한다. 즉 인간의
전반적인 지적 활동은 유심론적 측면에서 관찰될 수 있지만, 이를 곧바로 기계에
모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계에 모사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관찰된
대상과 그 활동을 계량적 요소로 순차화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처치의 정립).
인간 능력의 전 요소가 계량적 요소로 파악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우리는 영원히
인간과 꼭같은 기계를 실현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의 "특정한
일면을 합당한 방법" 으로 순차화할 수 있다면, 이러한 구현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을 위한 문법 (언어 이론) 은 인지과학이 안고 있는
이러한 두 측면을 조화롭게 내재해야 한다. 즉 문법은 인간 언어의 유심론적 측면과
기계론적 측면을 만족스럽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라는 복잡다기한
현상 자체는 인간의 전면적 지적 능력의 총화이지만, 그 작동 기제는 매우 단순할
수도 있는 연산체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위한 문법은 인간의 언어 능력을
기계에 모사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인간 언어의 작동 기제에 그 주된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작동기제가 근본적으로 인지의 유심론적 측면에 기초하고
있다면,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문법이 기술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서술에서
인간의 전면적 지능이 왜 유심론적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유심론적 세계관이 세계를 이해하는 한 방식으로 아직은 유물론적 세계관과
경쟁관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쟁관계에 있는 두 이론이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는
방법은, 이론 자체의 논증을 통하기보다는 이론의 전개에서 그
이론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실익을 보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에 관련된 복잡한 문제들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384~322 B.C.) 시대의 문법은 인간과
언어 자료, 정확히는 서사 자료 사이의 문제를 추궁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문법은
읽고 쓰는 기술 (ars grammatica) 을 의미하였다. 이때 분석된 언어자료는 특정한 술어에
의해 명시화될 수 있었는데, 이 술어들은 이후의 언어 기술에서 인간의 언어직관
자체로 간주되었다. 이 사실은 우리의 언어학이 직관과 직관에 대한 특정한 표현
사이에 존재할 수도 있을 괴리를 극복하기 어렵게 만든 한 요인이 되었다.
우리는
주어진 한국어의 자료에서 특정한 부분을 지시하여 '주어' 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부분을 주어로 지칭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명시화하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즉 주어에 어떠한 내포적 정의도 줄 수 없으면서도, 주어를 지시할 수 있다. 이는
주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다분히 본능적 직관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국어의 다중 주어 구문 (혹은 주격 중출 구문) 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직관을 주어라는
술어로 표현하는 것마저도 불충분한 진술이 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특정한 명사접미사
(명사를
직접 어기로 하는 접미사) 가 다소 이질적인 성분어 (즉 주어와 보어) 에 동시 분포한다는
사실에 당혹해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직관을 반영하는 것인가를 숙고해야만
한다. X' 이론에 대한 촘스키의 견해가 옳은 것이라면, 주격중출이 보이는 이질성과
동질성은 "비논항구절에 기저 생성된 지정어 자리" 라는 전문적인 용어로
이들을 포섭하는 설명이 가능하다(고창수, 1992ㄱ). 이에 대한 설명은 혹 다른 접근을
통해서도 옳게 파악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익숙해진 문법 술어를
우리의 문법 직관으로 간주하는 한, 우리의 문법 기술은 일정한 한계를 노정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종종 고대국어의 문법 연구에도 엿보인다. 고대국어가
기원적으로 명사문이었다는 진술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표기체계가 표기자 (정확히는 표기 창안자) 의 문법 의식을 반영한다고
할 때,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향찰체계를 정립한 옛
문법가들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아주 다른 방식으로 명사나 동사의 범주를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문제는 더 면밀한 검토를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구체적인 인공지능의 지식기반 (knowledge base) 을 구축하는 의미 그물 (sementic
network) 에서, 명사와 동사가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문제에 어느 정도의 시사점을 줄 수도 있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은 관찰자와
관찰 대상을 분리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반증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특정한 관찰을
기술하는 술어들이 관찰자의 직관을 직접 구성함으로써, 관찰 대상을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한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들의 연구를 왜곡시키지
않는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명백히 우리의 가시적 인지에 부응하는
외연만을 지시하도록 문법 술어들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고전적 언어관이 어느
정도 인간의 언어 직관을 명시화하려고 했다면, 구조주의 언어학은 고전주의의 주관적인
언어 직관을 객관적인 규칙의 집합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소쉬르는 자연과학의 기계론을
그대로 인문과학에 구현하려고 하였다. 그의 언어학은 이후 구조주의의 발흥으로
인간 및 세계 관찰의 금과옥조가 되어 왔다. 그러나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가 세계에
실재하는 객관물과 등가적으로 취급될 수 없다는 점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였다. 이에
촘스키는 인간의 인지능력이라는 생동적 관점을 언어학 내부에서 구현하도록 주력해
왔는데, 주관적 직관에서 탈피한 구조주의 언어학의 관찰 결과를 다시 인간의 직관에
의해 살피게 되었다.
그러나 보편문법으로 대표되는 생성문법 역시 여전히 기계론적
세계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촘스키는 언어에 대한 마음/뇌의 사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언어학을 언어를 구성하는 모든 형식물들의 집합, 혹은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인간들 사이에 약속된 기호체계로 간주하는 기계주의적 세계관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인간 언어 생물학적 특성에서 발현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몇몇의 형식적 절차로 단순화하려고
함으로써, 여전히 기계주의적 기술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문법이
조합적으로 운용된다는 점을 중시하면서도 (이는 오직 통사론 내부의 기술에 해당되는
것이다). 조합적 이론이 형태론 및 문법의 다른 부문에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문법의 각 부문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기계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각 부문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어휘음운론이나
생성형태론의 연구에서 숙고되고 있다).
우리의 언어학은 이제까지 문법의 각
부문이 계기적으로 혹은 연속적으로 구현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기계론적 세계관의 소산일 뿐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직렬적 선형 절차를
신봉하는 것으로, 마치 하나의 개인용 컴퓨터가 인간의 언어능력을 완벽히 구현해
낼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현재의 컴퓨터가 인간의 지적 능력을 흉내조차 내기
힘든 이유는 그 설계가 직렬적 절차형 추론방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컴퓨터는 인간의 병렬처리 체계를 잘 구현한 것만이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간도 단순히 기계적인 측면에서 관찰한다면 140억 개의 뇌세포에 작동하는 이진신호
(binary
code) 에 의해 사고활동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이진신호에 의한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컴퓨터도 똑같은 방식을 취한다. 그러나, 현재의 슈퍼 컴퓨터 (100만 개의 연결고리를
매초 1억 개씩 처리) 가 인간 (1경 개의 연결고리를 매초 1,000조 개씩 처리) 과 똑같은
용량을 가진다 하더라도 인간과 꼭같은 활동을 보장하는 기계적 절차를 구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활동을 보장하는 개개 이진신호의 상호작용을 모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단지 이론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문제를
다소 유심론적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어떤 절차의 진행에 시간의 간섭이 배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절차를 구성하는 각 부문이 서로 상대에 있어 입ㆍ출력 관계에 있지
않고 독립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문법이 병렬체계와
비선형적 절차를 허용하도록 기본 설계를 다시 구축해야 한다. 인공지능을 위한 문법기술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언어에 대한 우리
직관의 특정한 부분을 기계에 모사시키기 위한 것으로 제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지능의 유심론적 측면을 절차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이론적 모형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유심론적 세계관이 세계를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이라면 이러한 구현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인지의 특정한 부분 (구체적으로 언어 지식의 작동 기제) 에 대해서 라면 이러한
구현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는 비선형적 절차가 실시간을 최소화하는
범위에서 선형적 절차로 결정해야 하는데, 이는 개개의 프로그램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될지를 고려하는 실용적 선택이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한국어를 이해할 수
있는 기계를 생각해 보자. 이 기계는 한국어 자체를 이해한다기보다 상당히 제한된
범위를 갖고 있는 한국어의 한 변이체를 이해한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어에 대한 지식을 모두 개개의 변이체에 대한 문법이라고 간주한다면, 이러한
진술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현재의 문법 지식이나 구현 기술로는 일반적인
한국어 화자보다 상당 부분 제한된 지식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기계가
자신의 언어 지식을 구현하고 외부로부터 특정한 언어 지식을 학습한다면, 인간의
문법 기계를 원리적으로 모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기계가 가질
수 있는 표현의 집합을 결정해야 하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이 기계가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의 명확한 성격을 규정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이때 결정된 표현의
집합은 가능한 한국어 문장을 구성하는 유형 (type) 의 집합이지 표태 (token) 의 집합이
아니다. 즉, 제한된 지식 범위에서 무한 문장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바로 이
점이 인간 언어 능력의 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때 결정된 표현의 집합이 크면
클수록 기계의 범용성과 유연성이 제고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한국어 생활을 가능케
하는 표현의 집합과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습득하기 위한 단계적 표현의 집합에
대한 통계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어를 대상으로 하는 궁극적인 자연언어처리
기술은, 더 근본적으로 한국어 자료에 대한 우리의 충분한 이해가 바탕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한국어에 대한 어떤 지식을 어떻게
기계에 모사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보자.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의 컴퓨터로는
우리의 비선형적 인식을 모사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지식 가운데 비선형적
체계에 대한 지식을 부분적으로 선형적인 것으로 기술해야 한다. 우리의 비선형적
언어 지식 가운데에 대표적인 것으로 특정한 형태 규칙이 어휘부와 통사부에 동시에
작용한다는 통사적 접사에 대한 개념을 들 수 있다(고창수, 1992ㄴ). 그러나 이러한
지식을 곧바로 기계에 이식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는 김원경 (1993) 에서 논의된
대로 특정한 접사가 마치 단어와 등가의 자격으로 통사 구조에 입력될 수 있다는
식으로 이론적 기술에서조차 그 표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계는
제한된 지식의 구현을 목표로 하므로, 어떤 통사적 접사는 어휘부의 접사로 다른
종류의 통사적 접사는 통사부의 접사로 이해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기계가
배운 한국어가 우리의 유창한 한국어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한에서 문법적인 문장이라면, 이 기계는 한국어를 옳게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목적어 있는 피동문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지만, 기계는
"영희가 손을 잡혔다" 와 같은 문장 대신에 "영희가 손이 잡혔다"
만을
산출할지도 모른다. 혹은 핵이동과 같은 비선형적 절차를 구현할 수 없는 기계는
"공부하다" 와 "공부를 하다" 와 같은 언어 사실이 같은 실세계를
묘사하고 있는지 모를 수 있다(이들의 동의성은 연산체계의 특정한 전략으로 구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계는 한국어에 대한 우리의 부분적인 지식이 옳기만 하다면
우리가 산출할 수 있는 문법적인 문장의 부분집합을 충실히 산출할 것이다.
기계가
이러한 언어를 산출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사하는 언어의 특정한 집합을 분해하고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기계가 특정한 지식기반과 문법규칙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계가 가질 수 있는 지식기반은 보통 개념들의 의미 그물로
형식화된다. 특정하게 주어진 의미 그물을 기반으로 기계는 학습과 추론을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구현은 이제까지 자연언어가 아닌 특별히 고안된 인공언어를 중심으로
비교적 성공적인 모사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기계는 일반적인
전문가 시스템이 아니라, 범용성을 목표로 하는 자연언어처리 기계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계가 알고 있는 문법은 인공언어를 구축하는 문법과 충분히 구별될 수 있어야 한다.
기계가
자연언어를 이해하려면 흔히 파서 (parser) 라고 불리는 어구 분해기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이 어구분해기야말로 우리가 이제까지 논의해 온 인간의 언어 능력을 부분적으로
모사해 놓은 것이다. 이 어구분해기는 우리의 문법 지식이 옳을 때에만 정문만을
산출할 수 있기 때문에 '문법의 전문가 시스템' 이라고 할 수 있다. 어구분해기를
위한 문법으로는 이제까지 'GPSG, LFG, HPSG, 의존 문법' 등이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떤 문법도 자연언어처리에 가장 효율적이라고 말할 만한 것은 없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문법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우리의 언어적 지식을 부분적으로 모사하려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추구하는 문법은 부분적으로 모사된 지식을 기반으로 기계가
특정한 언어상태를 학습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미 구현된 형태소 분석기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오히려 더 기계적 개념에 기반을 둔 어구분해기라고 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분석만 할 뿐 자연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장치는 아니다. 따라서 자연언어의
한 특징인 의미의 이중성을 해소하기 어려우며, 분석된 대상이 통사적으로 어떠한
가치를 지닐 수 있는지 예측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은 어구분해기를 위한 효율적인
문법 이론을 계속 개발함으로써 점진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어구분해기를 위한
문법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앞서 언급하였듯이 인간 자신이 작동시키는 언어
기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언어 직관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문법 술어의 사용과 비선형적으로 작동하는 우리 문법의 특성을
잘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으로 기계에 모사하는 일을 통해 우리의
연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으며, 우리의 연구 방향이 제대로 제시되고 있는지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는 페이겔스가 지적한 대로 컴퓨터가 복잡계의 모델을 모의하는
유용한 도구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인공지능을 위한 문법 연구는 인공지능
개발 자체의 장래와 더불어 이 점에서도 한국어학, 나아가 언어과학 자체의 이론적
발전에 의미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