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 뇌 혁명

 

네번째 불연속 -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 : Bruce Mazlish 지음, 김희봉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01 (원서 : The Fourth Discontinuity - The Co-evolution of Humans and Machines, Yale Univ. Press, 1993), Page 291~321

 

이번에는 현대의 컴퓨터를 알아보자. 배비지를 다룰 때 보았던 컴퓨터에 대한 설명은, 산업혁명이라는 맥락 ――― 컴퓨터도 그 일부인 ―――을 강조한 것이었다. 배비지의 <엔진> 은 본질상 <기계적> 인 것이지만, 또한 원리적으로 기계를 뛰어넘는 것이기도 하다. 20 세기의 정보혁명은 산업혁명을 계승했고, 어쩌면 산업혁명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컴퓨터는 그 자신이 몰고 온 새로운 혁명, 즉 정보혁명의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새로운 맥락에서 주도적인 은유는, 기계가 아니라 마음이다.

현대의 컴퓨터를 다룸으로써 우리는 네 번째 불연속과 그 잠재적 종말의 끝에 도달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동물, 한편으로는 기계와 비교하면서 인간 자신을 정의하려는 노력의 마지막 국면에 와 있다. 나는 이 장을 몇 가지 경고로 시작해서, 컴퓨터의 등장을 개괄하고, 그 중요성에 대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인공지능과 마음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짧게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컴퓨터와 로봇, 또는 3 장에서 다룬 자동 인형과의 결합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내용에 대한 평가와 시사점은 마지막 장으로 미루겠다.

이 장을 쓰면서 나는 이 책에 가득해야 할 겸손의 말보다 더한 겸손의 말을 해야겠다. 컴퓨터는 내게 앞에서 다루었던 다른 존제들보다 더 전문적이고 지적으로 복잡한 주제일 뿐 아니라, 앞 장의 유전 공학처럼 말 그대로 하루하루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거의 역사에서 미래학으로 곧장 진행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또한 나는 이 책에서 내내 강조했던 환상과 현실의 구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해야겠다. 내가 보고자 하는 것 중 하나는, 과거에 다른 기계와 다른 동물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 같이, 인간은 컴퓨터를 어떻게 보는가 또는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또 하나의 현실이다. 이것은 실제의 현실과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가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는 <사실> 에 근거한 <실제> 적인 배경이 없다. 열망과 실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즉 열망은 유토피아적 희망을 반영하고, 실현은 가능한 성취를 반영한다.

또 하나 지적해 둘 것이 있다. 기계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고, 컴퓨터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예를 들어 셰리 터클 Sherry Turkle 은 『제 2 의 자아 The Second Self』에서 컴퓨터에 대한 어린이들의 반응을 연구했다. 어떤 아이들은 컴튜터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아이들은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아이들은 컴퓨터에게 위협당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아이들은 컴퓨터가 자기를 도와주고 향상시킨다고 생각한다. 어떤 아이들은 정확성을 환영하고, 어떤 아이들은 제한을 견딜 수 없어한다. 거기에다 터클은 시간에 따른 반응의 변화를 연구했다. 그녀는 자기의 연구를 이렇게 요약했다. <개성과 인식 스타일을 따라, 또한 인생의 단계에 따른 사람과 컴퓨터의 관계는 개별성을 보이며, 이러한 발견을 통해 컴퓨터에 대한 '양식적 반응 modal response' 이라는 단순한 개념은 버려진다.>

터클의 연구는 개인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물론 이러한 개인들의 반응은 문화적 반응의 일부이다. 한편 문화는 뛰어난 사상가와 예술가들에 의해 주도적인 주제가 고전적인 양식으로 표현되고 담론의 용어들이 구축된다는 의미에서, 그 자체의 형태와 생명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이런 측면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우리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문화의 일부를 구성하는 심리적 패턴이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 세기는 히스테리와 강박증이라는 고적적인 신경의 시대였고, 20 세기는 나르시시즘적인 혼란. 즉 <텅 빈 자아> 의 시대하고 할 수 있다. 기계를 보는 태도를 개인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갈망의 투명 (개인적인 수준에서, 터클은 감정의 개입을 억제하기 위해 자기를 컴퓨터로 생각하는 경우 등을 말하고 있다) 으로 본다면, 시대마다 주도적인 반응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터클의 연구는 매혹적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갈 방향은 아니다. 우리는 다시 전체적인 문화적 반응, 즉 네 번째 불연속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야기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동물에게 이름을 붙이는 행위로 상징되고, 도구를 사용하여 동물을 죽이고 정복함으로써 실현된다. 이러한 동물에 대한 지배는 인간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즉 본능 대신에 이성을 사용하여 동물을 정복할 뿐 아니라, 같은 이성을 사용하여 자기 속의 동물적 본성을 정복했다. 육체적 욕망은 <동물적> 인 것이므로 정복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주제는 인간의 사상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 특히 서구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일찍이 철학을 꽃피우고 이성을 고양시킨 고대 그리스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성과 기계의 관계는 우리의 주제에서 핵심적인 것이므로 여기에서 잠시 살펴보자.

플라톤은 『국가 The Republic』에서 격정과 욕망을 거부하고 <인간의 궁핍과 제한> 에서 벗어나서 <인간을 초월한 객관적인> 관점을 가진 철학자를 극찬했다. 버너드 녹스 Bernard Knox 가 요약했듯이 <플라톤은 …… 이성의 연마를 통해 격정과 욕구를 완전히 거부하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를 숙고하는 데 모든 삶을 바쳤고, 내적 가치의 충돌에 자유로웠고 우연에 좌우되지 않았다.

마사 너스봄 Martha Nussbaum 은 『미덕의 나약함 The Fragility of Goodness』에서 절대를 호소한 플라톤을 우연과 모순되는 열정, 가치, 의무를 논한 극작가와 비교했다. 예를 들어 『안티고네 Antigone』는 <technai, 즉 한 걸음 한 걸음 무력함에서 환경의 지배로 나아가게 하는 과학과 기술> 을 제시한다. <technë> 는 인간을 tuchë (운) 에서 해방시키는 도구이다. 결국 이것은 망상이라는 것이 알려진다. 너스봄의 결론은 <인간은 신과 동물 모두에게 불필요한 일종의 위험한 아름다움을 고집하기 때문에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지만, 이것을 제거하려 들면 결국 인간의 정체성까지 손상될 성이다> 였다.

너스봄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메시자가 아리스토텔레스에도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인정하지만,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로 본다. 플라톤은 우연을 부정하고 불변의 이성을 옹호한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의 극작가들은 이성과 tuchë (운) 의힘을 모두 인정했고, 필연적으로 애매한 인간 조건을 인정했다.

얄궂게도 플라톤이 주장한 절대성이 현대에 다시 살아나 technai ――― 모든 격정을 뛰어넘으려는 그의 이상적 열망의 물질적 구현 ―― 의 형태로 인간을 유혹하고 있다. 기계화의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 자동 인형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자동 인형은 자연을 흉내내는 것이지 자연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었다. 기술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부터 기술과 과학은 그 자신의 권위를 가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앞에서 타콜라, 다 빈치, 파레와 같은 사람들의 인공물 ――― 동물, 인간, 도구 ――― 의 기계적 본성을 <드러내는> 그림을 보았고, 따라서 이것들의 내부 작동이 인간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 것을 보았다. 전에는 신비였던 것이, 지금은 인간이 만든 단순한 기계 장치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창조는 인간에게 주위의 사물들 뿐 아니라 스스로를 통제하는 힘을 주었다. 라 메트리, 토머스 헉슬리, 파블로프 등에서 보았듯이, 인간은 창조자이면서 또한 인공물이다, 산업혁명 시대의 칼라일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극적으로 깨달았다. 칼라일은 토머스 헉슬리가 가장 좋아하는 저자였고, 그의 스승 이기도 했다. 헉슬리는 칼라일을 읽고, 너무 빠른 예언 ――― 인간은 기계가 됨으로써 윤리적 오류에서 해방되어 완전에 이른다 ――― 은 환영받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유물론자인 헉슬리는 수백 년을 건너뛰어 관념론자인 플라톤과 손을 잡는다. 이성은 기계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19 세기의 기계는 시계였지만, 현대의 기계는 컴퓨터이다. 컴퓨터는 인간 이성이 낳은 산물일 뿐 아니라, 이성을 생산함으로써 인간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존재일 수 있다. 현실에서는 (아직?) 그러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상상의 세계에서 인간은 기계 ――― 컴퓨터 ――― 일 뿐 아니라 컴퓨터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러한 두려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프랑켄슈타인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것은 컴퓨터 - 기계가 잠재적으로 <괴물 같은>, 즉 변이된 형태로, 인간의 동물적인 정욕뿐 아니라 인간의 이성까지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과정을 따라가기 전에, 잠시 다른 것을 살펴보자. 독자들이 보았듯이. 나는 토머스 헉슬리가 윤리적으로 완벽해지기 위해 기계가 되고 싶어한다는 말에 흥미를 느낀다. 이 비상한 문구는 인간 기계 관계의 한 부분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이 말의 함의를 조금 더 살펴보자.

앨런 튜링은 그의 고전적인 논문 「계산 기계와 지능 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에서 추상 기계를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추상 기계는 물리적 대상이라기보다 수학적 허구이다. 정의에 따라 이 기계는 오동작을 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기계는 절대 실수할 수 없다' 는 말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이런 종류의 기계가 됨으로써, 헉슬리는 그의 희망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튜링은 괴델의 정리 (모든 논리적 체계는 자기 자신의 논리적 일관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가 기계의 완전성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짧게 말하면, <완전한> 기계는 스스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오류는 우주 안에 내장되어 있다. 이것은 헉슬리의 인간성 부정이며, 또한 이것은 코스모스의 부정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딜레마가 있다. 헉슬리가 그렇게 되고 싶어했던 기계란 어떤 것인가? 현대의 인공지능 논의의 한 줄기는,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과 기계 ――― 이 경우에는 컴퓨터 ――― 는 완전히 똑같은 사고 기계이기 때문에, 둘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옳다면, 인간은 실수를 하기 때문에 기계도 실수를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완전을 향한 헉슬리의 열망은 기계가 되는 것으로도 이룰 수 없게 된다.

물론 가능한 대안으로, 기계가 인간보다 더 이성적이고 더 완전하지만 전적으로 완전하지 않을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괴텔 정리 때문에). 그렇다면 헉슬리의 열망이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지만, 점점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을 것이다.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이 <인간적, 너무나 인간적> 이라면, 컴퓨터도 또한 <컴퓨터적, 너무나 컴퓨터적> 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는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완전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자.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이러한 제한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존재인 신이 되고 싶어하고, 최소한 천사라도 되고 싶어한다. 플라톤은 철학자라는 형태로 이 열망을 실현하려고 했고, 근대의 사상가들은 기계의 형태로, 현대에는 컴퓨터의 형태로 이 열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다윈 이후로 이러한 희망은 점점 더 진화적인 겉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완전해지기 위하여 구원이 아니라 진화가 인간에게 제시된 것이다. 다윈 자신은 그의 발견과 완성을 향한 열망을 주의 깊게 구분하려고 했다 (때때로 잘못하기는 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좀더 과장이 심했는데, 예를 들어 헤켈의 말을 보자. <우리의 조상이 하등한 동물이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동물에서 유래했는 사실은 미래에도 인류가 빛나는 발전을 이루어 지금보가 휠씬 높은 정신적 완전성을 획득하리라는 것을 보장해 준다.>

다윈은 자연 선택이라는 말을 가축의 인위적인 번식을 지배하는 인간의 <선택의 힘> 에 대응되는 의미로 썼다고 주장했다. 인위적인 번식이라는 개념을 자연으로 확장하거나 기계로 확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버틀러가 했던 일이다. 말하자면 기계, 예를 들어 자동차나 비행기가 마치 경주마처럼 속도에 따라 <선택> 된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들이 사람 또는 동물의 개별적인 힘을 결합해서 범용 기계의 성질을 가지면, 컴퓨터가 보여주는 희망과 불안처럼 기계는 실제로 <슈퍼맨> 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능성은 완전을 향한 열망과 연결되고, 열망은 미래를 예측하려는 욕구와 연결되어 희망적인 예측을 낳는다. <우리는 기계적인 세계의 극한인 이 시대 (20 세기 초) 에 살고 있다. 지금은 전자공학과 사이버네틱스가 '도구' 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서 연속성이 완전히 깨져 버리는 지점에 와 있다> 라는 저자의 말처럼, 이런 과정은 처음에는 사실에 대한 건전한 평가를 바탕으로 시작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인간의 뇌가 실리콘으로 만든 컴퓨터의 지능으로 대치되는 날이 올 거라는 로버트 제스트로 Robert Jastro 의 과장 섞인 말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된다면 인간에게 완전은 아니라도 최소한 영원한 삶이 보장되기 때문에, 완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영원한 시간이 보장되는 것이다.

유명한 컴퓨터 과학자 에드워드 파이겐 바움 Edward Feigenbaum 과 파멜라 매코덕 Pamela McCorduck 도 제한적이긴 하지만 같은 의견을 보였다. <컴퓨터 혁명의 요체는, 앞으로 지식 생산의 주체가 사람의 머리에서 기계로 넘어간다는 데 있다.> 이런 언급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인공지능 연구자들 중 가장 뛰어난 사상가라고 할 만한 마빈 민스키 Marvin Minsky 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인간이 가진 지능의 양은 임의적인 것이다. 그 양은 진화의 현단계에서 더 나은 존재는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 민스키는 더 나아가서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컴퓨터는 이제 자기 복제를 하는 단계에 와 있다, 컴퓨터도 컴퓨터를 설계하고, 컴퓨터가 새 컴퓨터의 제로를 감독한다.>

버틀러의 세계가 도래한 것일까? 현재 우리 주위에는 여러 <세대> 의 컴퓨터가 존재하며, 그들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대뇌에서 변연계가 만들어지는 데는 장구한 세월이 걸렸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 그냥 가지고 나온다. 대뇌 피질은 비교적 새로운 부분으로, 오늘날의 문화적인 부분을 처리한다. 튜링 (그는 고전이 된 자기의 논문에서 배비지를 언급했고, 자서전에서 버틀러를 인용해서 우리의 주제와의 연관성을 명백히 했다) 이 말했듯이, <적자 생존은 장점을 가려내는 느린 방법이다. 실험가는 지능을 사용하여 이 과정을 빠르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지능을 사용하여, 또는 이른 바 인위적 번식을 통해 인간은 최소한 다섯 세대의 컴퓨터를 만들었다. 1944 년에 전기 기계식 계전기 (이것을 0 세대로) 에서 시작하여 1946 년에는 2 세대인 진공관 컴퓨터가 나왔고, 1959 년에 트랜지스터를 거쳐 1964 년에 집적 회로, 1964 년에 는 중밀도 및 고밀도 집적 회로, 1978 년에는 초고밀도 집적 회로를 사용한 컴퓨터가 등장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또 새로운 것이 나오고 있다.

과거가 미래의 서곡이라면, 우리는 왜 사람들이 과장 섞인 예측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이제 컴퓨터는 그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버틀러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발전하고 <진화> 하고 있다. 과거에 인간은 다른 동물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속의 동물적 본성과 대면했지만, 이제는 기계와 대면하고 있다.

이러한 대면이 이루어지는 환경도, 컴퓨터 자체와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창조된 것으로 점점 대치되고 있다. 나는 앞에서 인간의 진화 방향이 좋든 나쁘든 자기의 환경 ――― 도시이든 공장이든 ――― 을 창조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어서,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1924 년에 영국에서 출간된 디스토피아 소설『우리 We』의 저자인 러시아의 예프게니 자미아틴 Yevgeny Zamyatin 은 글 속의 주인공 D ― 503 으로 하여금 이러한 인간적인 열망을 표현하게 했다. <인간은 녹색 벽을 만들어서 우리의 완전한 기계 세계를 나무 · 새 · 짐승들의 비이성적인 세계와 격리시켜 놓고 나서야 야생의 상태를 벗어나게 되었다.>

8 장에서 우리는 종의 사멸에 대해 논했다. 아직은 상상 속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제는 인간이 생물들을 멸종시켜서 생태계에 인간과 기계만 남는 상황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19 세기의 작가 윌리엄 델리즐 헤이 William Delisle Hay 는『300 년 뒤 Three Hundred Years Hence』에서 지구상의 모든 야생 동물과 가축들이 멸종한 미래를 상상했다. <우리에게는 땅이 필요했고, 땅의 산물이 필요했다. 우리는 동물들을 남겨둘 수 없었다. 지구는 더 이상 동물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때 인간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동물에서 얻었지만, 이제는 그 대체물을 찾았다.> 20 세기에 와서는 프랭크 허버트 Frank Herbert 가 『녹색 두뇌 The Green Brain』에서 곤충만 완전히 멸종된 세계를 그렸다 (이 경우는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들어 있는 동물을 박멸하기 위해서, (최소한 상상 속에서) 전세계의 동물을 박멸할 의사가 있다.

이런 일은 이미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전세계에 있는 자동차의 수 ――― 3 억 대가 넘는다 ――― 는 미국이나 소련의 인구를 능가한다. 아직은 이러한 기계들이 그의 창조자들을 쫓아내지는 않지만, 그들은 마치 파리처럼 빠르게 증식하고 있다. 자동차는 많은 동물의 자리를 뺏고 있지만, 그들은 단지 한 종류의 기계일 뿐이다.

칼라일의 말투를 빌리면, 이것이 시대의 징후이다. 시대의 징후는 지구상에 인간과 기계만 남아 있고, 컴퓨터가 그들의 연결 고리 또는 <인터페이스>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상을 보여준다. 세계 자체가 점증하는 인간의 기계적인 이미지에 따라 창조된 것이다. 이것은 인위적인 세계이며, 아직은 가상의 세계이다. 여기에 현실적인 요소가 있을까? 우주 여행과 관련된 컴퓨터의 논의가 약간의 단서가 될 것이다.

땅 위로 날아오르려는 인간의 욕망, 그래서 마침내 지구를 벗어나려는 욕망은 긴 역사를 가지며, 다이달로스 Daedalus 의 신화로 상징된다. 이 염원은 1783 년 여름과 가을에 프랑스에서 기구 비행으로 실현되었다. 초기의 과학 소설 중 하나인『2400 년 L’ An 2400』(1770) 을 쓴 루이 ― 세바스티앙 메르시에 Louis ― Sebastien Mercier 는 필라트르 드 로지에 Platre de Rozier 와 마르키 달랑데 Marquis d’ Arlandes 가 몽골피에의 기구를 타고 날아오른 것을 증언했다. 그는 기구를 이렇게 묘사했다. <햇빛 속에 당당하게 떠서 행성처럼, 또는 날씨를 관장하는 어느 신의 전차처럼 두둥실 떠갔다. 다시 재현되지 못할 이 순간은 물리과학이 세계에 선사한 가장 놀라운 업적이다.>

메르시에는 용감한 기구 비행가의 계승자들이 훗날 행성에 닿을 것을 예견했다. 물론 정확하게 똑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비교될 만한 사건은 있었다. 최초의 시도는 상상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기구 비행은 멜서스가『인구론』(1798) 에서 식량 부족을 예견 ――― <인간은 필연적으로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 하기 몇 해 전에 이루어졌다. 알다시피 맬서스의 예측은 산업혁명 때문에 빗나갔다. 하지만 이론상 이 어두운 예측은 아직도 지구상을 떠돌고 있다. 이 예측을 영원히 피하는 한 가지 방법은, 지구를 떠나 우주에 나가 사는 것이다. 1862 년에 쥘 베른 Jules Veren 은 메르시에가 띄운 기구를 보고『5 주 간의 기구 비행 Five Weeks in a Balloon』을 출간했고, 연이어 1865 년에『달 여행 From the Eartb to the Moon』을 썼다. 최소한 그의 마음 속에서, 인간은 지구의 인력을 깨고 우주 공간으로 날아갔다.

다시 지구로 돌아와서, 공상을 실현하려면 조금 따분한 일들이 필요했다. 러시아의 과학자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Konstantin Tsiolkovsky 는 1883 년의 일기와 1903 년의 논문인「반동 장치를 사용한 우주 여행 Exploration of Cosmic Space with Reactive Devices」에서 다단계 로켓의 원리를 상상했다. 이제 미국인 로버트 고더드 Robert Goddard 와 독일인 베르너 폰 브라운 Werner von Braun 으로 통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이들의 노력에 깃들인 열망은 치올코프스키의 말에 잘 나타난다. <지금 우리가 인류의 무한한 잠재력을 말할 수 있다면, 수천 년 뒤 지식이 훨씬 진보했을 때 인간이 어떤 모습일지도 말할 수 있다. 인류의 삶과 교육의 개선에는 한이없다. 인간은 영원히 진보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옳다면, 인간은 불멸을 얻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분명히, 기술이 맬서스의 문제뿐 아니라 구원과 영생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과장이 나타난다.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기 전에, 여기에 관련된 생각을 두 가지만 소개하겠다. 첫 번째는 사람이 직접 우주를 여행하지 않고, 말하자면 우주선을 타고 달이나 화성으로 가는 대신에 간단히 원격 이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유명한 사이버네틱스 학자인 위너는 이것이 개념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했다. <모든 ‘생명’ 의 특징은 신체의 구조가 결정하므로, 인간을 분자 단위로 스캔하여 펄스화된 부호를 사용하여 적절한 화학 물질로 정확한 복제품을 조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으로 몸을 해체한 다음에, 그 정보를 화성에 보내서 사람을 재조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원격 이동에서 복제는 유전공학이 아니라 기계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다음으로 살펴볼 아이디어는 우주의 식민화를 뒤집어놓은 것이다. 즉 이것은 외계의 생물이 지구를 침입하는 것이다. 웰스의『우주전쟁 The War Between the Worlds』에서 영화「보디 스내처 The Body Snatchers」까지 두 가지 예만 들어보면, 우리 자신이 계획하고 발사한 것이 돌아와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이 만든 괴물이 인간과 함께 외계로 나갔다가 부메랑처럼 지구로 돌아온다.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 일반적인 우주 여행에 관해 조금 살펴보자. 첫째, 베른식의 허구와 치올코프스키식의 방법은 모두 컴퓨터의 도움으로만 비행이 가능하다. 컴퓨터는 로켓 이상으로 우주 여행에 공헌한다. 어떤 면에서 컴퓨터와 우주선은 하나이다. 둘째, 컴퓨터화된 우주선은 기계이며, 인간에게 완전히 인위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셋째, 달이나 화성에 도착한 뒤에도, 인간은 우주선이나 현지에서 만든 인위적인 환경 안에서 살아야 한다. 넷째,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행성에는 동물이 살고 있지 않다 (바이오스피어 Ⅱ Biosphere Ⅱ 처럼 우리가 동물을 데려가지 않는다면). 따라서 우주 식민지는 인간 외에 어떤 종도 살지 않으며, 과학 소설에 묘사되는 기계와 컴퓨터만 존재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우주 식민 계획의 옹호자 제럴드 오닐 Gerald O’ Neill 은 그의 희망을 실현할 계획을 만들었다. 우주에 인공 서식지를 만드는 계획에 관한 1974 년의 소논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서는 지구의 모든 쾌적함을 누릴 수 있다. 따사로운 햇빛, 조화로운 날씨, 상쾌한 공기, 지구와 똑같은 중력과  공해가 전혀 없는 환경을 누릴 것이다.> 위에 열거된 조건 중에서 현재 보통 상태의 지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햇빛과 공기뿐이다. 우주 식민지는 인공으로 만든 더 좋은 환경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주 식민지는 지금의 환경보다 훨씬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더 인공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햇빛 아래에는 여전히 인간 ― 기계 ― 컴퓨터가 만드는 미래라는 환상이 잠복해 있다.

이 책에서 영화든 소설이든, 공상 과학 장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시대 최상 (그리고 최악) 의 작품과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 이 장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장르의 소설과 영화에는 인간 기계 문제에 대한 오늘날의 강박관념이 여실히 드러난다.

나는 이 장르에서 두 가지만을 예로 들겠다. 첫째는 영화「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로, 이 작품은 필립 K. 딕 Philip K. Dick 의『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를 원작으로 만든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소설보다 영화가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둘 다를 인용하겠다. 영화는 21 세기를 배경으로, 차페크의『R.U.R』를 하이테크로 꾸몄고 넥서스 6 리플리컨트, 또는 안드로이드 (우연의 일치인지 수명이 4년이다) 가 차페크의 로봇 대신에 등장하는데, 기계에 대한 공포를 강조하고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블레이드 러너 (이 제목의 유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역은「스타 워즈 Star Wars」와「인디아나 존스 Indiana Jones」에 출연했던 해리슨 포드 Harrison Ford 가 맡았다 (이들 작품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시대는 2019 년경이고, 항상 안개가 끼고 비가 오는 로스앤젤레스에 잡종 인간들이 살고 (이런 말을 쓸 수 있다면) 있다. 영화는 음침한 도시와 새로운 세기의 계급 차이를 소설보다 잘 묘사하고 있다. 리플리컨트는 다른 행성에서 일하던 안드로이드로, 탈출하여 지구에 들어와서 살고 있다.

줄거리를 다 얘기하는 대신에 중심적인 것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겠다 (영화와 소설의 구별 없이). 하나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구별 문제이다. 보이트 ― 캠프 자비심 시험 Voigt ― Kampff Empathy Test ――― 튜링 시험 (이 장의 뒤를 보라) 의 영향! ――― 은 모호한 종교적 감각을 바탕으로 자비심을 시험한다. 튜링 시험과 다른 점은, 안드로이드는 윤리적인 충격에 얼굴을 <붉히지> 않으며 (다윈의 관점을 상기시킨다), 삶은 개고기 같은 것에 대해 인간이라면 <정상적인> 혐오스러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소설과 영화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차이를 탐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적인 장벽은 무너질 수 있어서, 사람이 <안드로이드 아내> 와 같이 살기도 한다. 주인공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진짜 살아 있는 사람과 안드로이드의 구별은 이제 그만두자.> 게다가 주인공은 때때로 안드로이드에 대해 자비심을 느끼기도 하고, 안드로이드들도 똑같이 자비심을 가진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더욱이 주인공은 직업상 리플리컨트를 냉혹하게 죽이는 것이 죄악은 아니겠지만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느낀다.

딕의 작품은 네 번째 불연속의 여러 가지 중요한 주제를 보여주지만, 미적으로 뛰어나지는 않다. 그러나 영화는 어둡고 음습한 미래를 묘사함으로써 밝고 무공해한 영화「스타 워즈」에 반대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스타 워즈」가 신화적 주제를 고전적으로 표현한 뛰어난 영화이며, 호머의 서사시에 비교할 만한 20 세기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연속되는 서사시로서 ――― 이 영화는 전부 아홉 편이다 ―――「제국의 역습 The Empire Strikes Back」과「돌아온 제다이 The Return of the Jedi」는 실망스럽다. 포르노와 마찬가지로, 과학물도 과장이 심하고 반복적이고 따분할 수 있다).

「스타 워즈」에서는 현실감 있는 전쟁을 동반한 우주 식민지를 볼 수 있다. 광대한 우주 속에서도, 인간의 범속한 본성은 도처에 드러난다. 한 솔로 Han Solo 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 별들을 돌아다니는 미국의 카우보이이다. 리아 Leia 공주는 그의 무성적 사랑이며, 루크 스카이워커 Luke Skywalker 는 알 수 없는 근친상간적인 영웅이다. 그리고 제다이와 다스 베이더 Darth Vader 는 선과 악의 힘이다. 그 결과는 영화의 기술적 과장에 의한 완전과 불멸의 실현이 아니라 (물론 주인공 솔로, 리아, 스카이워커는 죽음과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신화적인 무시간적인 배경 때문일 것이다) 우주를 배경으로 또 다른 보잘 것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외계 우주에서의 인간의 <진짜> 모습이다 (전략 방위 계획의 이름을 스타 워즈로 바꾼 것도 이런 사실을 반영한다). 또한 동물들은 없어진 게 아니라 눈부신 모습으로 둔갑한다. 인간 · 동물 · 기계가 뒤섞여 만들어진 잡종이 등장한다. 술집에서 반인반수가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은 누구나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릴라와 같은 추바카 C hewbacca 는 말을 할 줄 모르지만 사람 같다. 인간과 기계가 뒤섞인 것도 있다. 인간을 닮은 로봇인 R2D2 와 C - 3PO 가 그들이다 (동물과 기계의 혼합으로는「제국의 역습」에 나오는 스노 워커라는 공룡처럼 거대한 탑이 있다. 또 성적인 위협을 보여주는 것으로 거대한 개구리 모양의 자바 J abba 가 비키니 차림의 리아 공주를 손에 든 장면도 있다 ―――「킹콩」의 영향!).

특히 다스 베이더를 주목해 보자. 컴퓨터로 합성한 것 같은 음산한 목소리는 기계 같은 느낌을 준다. 저명한 신화학자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 은 이런 점을 간파했다. <「스타 워즈」는 현대의 존재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기계는 인간을 통제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봉사할 것인가? 다스 Darth (거의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 식의 말장난으로, 죽은 death 과 어둠 darkness 의 합성어이다) 베이더 Vader (침입자 [invader] 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는 새로운 기계에 굴복하여 그 자신이 기계가 된 사람이다.> 이 <새로운 기계> ――― 사실상 다스 베이더는 많은 부분이 기계로 되어 있지만 아직 사람이다 ――― 는 컴퓨터 마음을 가진 로봇이며, 베이더는 그 어두운 면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미 번지르르한 기술의 과장 (「스타 워즈」를 이런 범주에 넣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다) 을 들었고, 이번에는 인간의 <기계적> 도플갱어인 컴퓨터화된 로봇에 대한 음침한 묵시록을 들어야 한다.

이제 지구로 돌아올 차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개발 중인 컴퓨터와 로봇을 만난다. 로봇은 나중에 논하기로 하고, 이런 질문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창조한 컴퓨터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은 마음의 일종인가? 아니면 영리한 프로그램일 뿐인가? 기계를 사람처럼 생각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사람들이 기계처럼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는 새로운 인식론 속에 있으며, 이 질문은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부분 ――― 우리의 자아관 ――― 을 건드리는 것이다.

나는 감사의 글에서 말했던 내 컴퓨터 ――― 일련 번호는 OERGJ 이다 ――― 앞에 앉아 있다. 이 컴퓨터에는 이름이 없다 (물론 내 멋대로 붙일 수는 있지만). 이름을 물으면 여호와처럼 <나는 나이다> 라고 대답할 것 같다. 사실 이름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또한 이름이 없다는 것과 이름 대신에 번호를 쓴다는 것이 문제이다 (어떤 종류의 컴퓨터에 애플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의례적인 찬사일 뿐이다). 컴퓨터에는 타자기나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일련 번호가 찍혀 있다. 이것이 그들의 <이름> 이다. 번호는 비개성적이며, 번호 뒤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을 비인간화하려 할 때, 예를 들어 교도소에서 죄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번호를 사용하는데, 대개 죄수복의 등에 번호를 찍어 놓는다. 더 나쁜 경우에는 아우슈비츠처럼 손목에 번호를 찍는다. 누군가를 번호로 부르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질을 빼앗고 오로지 양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자미아틴은 그의 반유토피아 소설 『우리』에서 기본적으로 개인이 구별되지 않음을 가리키기 위해 주민들이 번호를 사용하게 했다.

또 다른 예를 보자. 내가 일하는 MIT 의 건물에는 이름이 없고 E51 (동부 캠버스 51 번 건물) 이라는 번호만 붙어 있다. 이것은 MIT 에 서는 상례를 벗어나는 일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싫어한다. 왜? 왜 후원자의 이름을 붙여서 우아하게 부르지 않고 건물 X 라고 하는가? 이렇게 하면 후원자는 벽돌과 유리창에 자기 이름을 새겨서 후세에 전할 수 있지만, 일반 대중은 이런 개인적인 만족을 거의 맛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달리 생각하면, 캠퍼스의 전체 배치를 고려하여 건물에 번호를 붙이면 (거리를 번호로 부르듯이) 찾기 쉽고 편리해진다. 이렇게 하면 특정 개인에게만 영광을 주는 일이 없어진다. 왜 이 건물이 <그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하나? 해답은, 우리가 비개성적인 번호보다 이름의 불평등성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면, 자동차와 건물과 기계 따위에도 이름을 붙여서 길들일 수 있다. 히로시마를 폭격한 B - 52 폭격기에도 <에놀라 게이 Enola Gay> 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사물을 인간화라는 것이다. 또한 최소한 그 사물을 인간의 통제 아래에 두어 <친숙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동물들에게 행한 일이다. 그러나 기계에게는 이러한 <길들이기> 에 저항이 있는 것 같다. 동물 조련사는 있지만 기계 조련사는 없다 (프로그래머나 검사원을 이렇게 부를 수도 있겠지만). 기계는 인간의 명명법에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에게 도전하고 위협하는 듯이 보인다. 기계는 이름이 없는 프랑케슈타인의 괴물이 되었다.

따라서 컴퓨터의 본성에 논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를 감싸고 있는 이름 없는 불안감을 갖는다는 것을 우리는 의식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것을 일종의 황당한 마법으로 생각한다. MIT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의 구조와 해석> 이라는 강좌를 성공적으로 마친 (또는 그렇게 우기는)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에 동의한다. 이 강좌는 <이름이나 값으로 정신을 불러내는 마법>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함수를 호출하는 방식 〔변수명에 의한 호출 call by name, 값에 의한 호출 call by value〕을 말함 ――― 옮긴이) 을 보여주었고, 나는 <람다 수학의 거대한 재귀적 질서> 의 회원이 되어 두 명의 대마법사와 그 제자 (전기공학과와 컴퓨터과학과의 교사들이었다) 의 서명이 든 스킴 해터 1 급 자격증을 받았다.

이런 것은 모두 재미로 하는 짓이지만, 컴퓨터의 중요한 측면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컴퓨터 설계에서는 더 복잡한 것을 만들기 위해 추상화를 통한 단순화를 지향한다. 우리는 이름으로 (컴퓨터의 이름이 아니라, 말하자면 메일 주소로) 사물을 다룰 수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LISP 가 1957 년에 존 매카시 John McCarth 에 의해 발명되었을 때는, 이것은 포트란 PORTRAN 과 달랐고 진화할 수 있었다. 이런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세계는 객체로 분해될 수 있고, 이것을  메시지로 만들어 주고받을 수 있다. 컴퓨터 강좌의 교사가 내게 말했듯이, 여기에 사용되는 것들은 마법사의 주문과도 흡사해서 주문을 바르게 외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 (글자가 틀리거나 구두점 하나라도 잘못되면 명령은 실행되지 않는다)> 이것은 <신비적> 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도 본질적으로 이와 같다. 예들 들어 컴퓨터에게 <의식> 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의 의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확신이 없다. 뇌과학과 인공지능 분야의 논문들은 묵은 질문을 새로운 형태로 제기한다.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유전학자와 컴퓨터공학자들과 함께 이런 문제들을 토론하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해 책도 많이 나오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종류가 아니고, 철학적 주제 주위를 맴돌면서 인간 (동물) 과 기계라는 우리의 일반적 주제와의 관련성을 암시할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는 문제 자체를 정의하는 것이다. 튜링은 고전이 된 그의 논문에서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 문제를 피해갔고, 대신에 스스로 <모방 게임> 이라고 부른 것에 몰두했다. 이것이 유명한 <튜링 시험> 이다. 튜링 시험이란, 사람의 질문에 커튼 뒤에 컴퓨터가 대답하는데, 질문자가 그 대답으로 사람인지 기계인지 구별할 수 없으면 이 기계는 튜링 시험에 합격한 것이고, 그 기계가 <생각> 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진짜 문제는 이 <모방 게임> 을 바르게 할 수 있는 디지털 컴퓨터를 설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기계가 시험에 합력하려면 사람처럼 실수도 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야 한다). 이런 기계를 만든다면, 이것은 <생각하는 기계> 라고 인정될 것이다.

철학자 존 설 John Searle 같은 사람은 여기에 반대한다. 그는 튜링 시험이 <중국의 방> 과 같다고 말한다. 커튼 뒤에 (실제로는 방 안에) 난쟁이가 있는데, 이 난쟁이는 방 밖에 있는 중국 사람의 말을 듣고 거기에 맞는 글자를 골라서 보여준다. 튜링 시험에 따르면, 중국 사람은 난쟁이가 (기계도 똑같이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뽑은 글자를 보고 그가 자기 말을 이해하고 대화를 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설의 지적은, 기계는 글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보기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설이 옳다면, 컴퓨터는 단순히 의미 없는 형식적 기호만을 다룰 수 있다. 설은 튜링 시험이 <단순한 행동주의> 의 표본이며, 우리는 컴퓨터를 있는 그대로 유용한 기계로 보아야지, 사고 따위를 가졌다고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른 바 정보 처리와 인공지능을 구별해 보자. 정보 처리는 순수 논리의 문제로, 숫자 대신에 기호를 다루는 불 대수를 사용하며, 기계가 프로그램대로 실행되게 하는 것이다. 초기의 컴퓨터가 이런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을 인간의 뇌에까지 확장할 수 있어서 뇌가 단순히 정보 처리 체계로 설명된다면, 이런 문제가 대두된다. 인간의 뇌를 위한 프로그램은 누가 작성했는가?

반면에 인공지능이 이 문제를 피해 갈 수 있다. 인공지능에서는 이러한 규칙 대신에, 독립적인 요소들의 네트워크가 컴퓨터 속에 들어가서, 각 요소들의 상호 작용이 지능을 일으킨다. 이런 기계는 가르침을 받는다기보다 배울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터클이 이러한 컴퓨터에 대해 언급했듯이, <그 이미지는 논리적 logical 이라기보다 생물학적 biological 인 것이다>.

이러한 생물학적 확장은 노벨상 수상자 제럴드 M. 에델먼 Geraid M. Edelman 의 연구에서도 볼 수 있다. 신경 다윈주의라고 부르는 그의 이론은 <두뇌의 동작은 컴퓨터보다 진화 자체와 가까운 선택적 체계> 라고 말한다. 에델먼에 따르면 뇌는 경험에 의한 선택으로 지각 · 학습 · 기억 등을 수행한다. 그의 이론은 아주 복잡하지만, 결론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우리는 태엽 장치가 아니며, 우리의 뇌는 디지털 컴퓨터와 다르다.>

그는 자기의 이론을 시험하고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종류의 자동 인형> 이라는 것에 의지했는데, 그 중 최신의 것을 다윈 Ⅲ 라고 불렀다. 그는 자기의 이론이 현재의 컴퓨터와 달리 동물처럼 학습하는 새로운 세대의 기계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정보 처리 컴퓨터를 적절히 프로그램하며, 기계를 조립하게 할 수 있다. 기계는 조립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스키가 말했듯이, <새의 둥지를 만들 수 있는 기계는 아직 아무도 만들지 못했다. 숲 속에 흩어져 있는 나무 부스러기들은 둥지를 조립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다>. 그의 결론처럼, 실제 생명의 복잡성은 컴퓨터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다.

하지만 다윈 Ⅲ 는 언제나 생명의 복잡성을 따라가지 못할까? 많은 문제가 컴퓨터의 일반화 능력 속에 숨어 있다. 이것은 기계가 절대로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고 데카르트가 생각한 장벽이었다 (데카르트판 튜링 시험?). 사실 에델먼의 최신 자동 인형은 여러 가지 조건에서 사물을 구별하는 능력, 예를 들어 여러 가지 서체와 크기 또는 사람이 손으로 쓴 글자를 구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의 구상에 따라, <경험적 선택> 에 의해 새 둥지를 만드는 방법을 <학습> 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없을까? (그렇다면 사람은 새의 둥지를 만드는 방법을 어떻게 배우는가?)

이제까의 발전으로 볼 때, 컴퓨터는 원리적으로 미래에도 이 정도까지 발전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무모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는 컴퓨터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을까? 명백히, 현대의 컴퓨터 프로세스에 관한 연구는 뇌의 연구에 영향을 주고, 반대로 뇌의 연구는 컴퓨터 연구에 영향을 준다. 알다시피 두뇌는 전기적인 시스템일 뿐 아니라 화학적인 시스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 시스템을 컴퓨터로 구현할 수 있을까? 실제의 시스템은 똑같지 않더라도 기능적으로 동등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두뇌와 컴퓨터의 사고 방식은 같은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먼저 풀어야 할 과제이다.

뇌와 동등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우리는 <사고란 무엇인가?>, <사고란 우리가 정신적 과정에 대해 말할 때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말하는가?> 등의 질문을 깊이 탐구해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 길버트 라일 Gilbert Ryle 이 말했듯이, 두뇌와 정신을 같다고 보는 것은 <범주 오류> 이다. 두뇌는 물리적 · 화학적 시스템이고, 생리적 · 전기적 시스템이며, 또한 생물학적 시스템이다. 하지만 정신은 의식· 의지 · 의미 등을 소유하는 존재이다. 기계가, 인공지능과 신경 다윈주의로 만들어진 자동 인형이 이런 성질들을 가질까? 그렇다면 감정도 가질까?

이런 것들이 컴퓨터에 대한 현재의 철학적 반응의 분위기이다. 이 논쟁은 우리 주위를 소용돌이치고 있다. 내가 여기에다 덧붙일 만한 것은 별로 없다 (결론 장에서 약간의 암시를 주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문제는 컴퓨터 <기계> 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지, 거대한 문제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일반적인 문제는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시뮬레이션 (흉내내기) 의 문제로, 이 문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튜링 시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기계는 단순히 인간의 반응을 흉내만 내는가? 예를 들어 기계는 실제로 목마르지 않으면서 목마른 흉내만 내는가? 명백히, 이 문제는 옛날의 질문을 반복할 뿐이며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다른 한 가지 기계의 흉내내는 능력은, 내 생각에는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천체물리학자들은 고속 디지털 컴퓨터를 사용하여 알려진 물리 법칙을 근거로 초신성 모델을 만들어 그 상황을 모사해 볼 수 있다. 우리는 폭발하는 별의 안쪽에 절대로 들어가볼 수 없지만, 그러한 폭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재현해 볼 수는 있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해체된 3 차원 도면 (2 장 참조) 의 새로운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좀더 넓게 생각하면, 이 경우는 동적 시뮬레이션을 통해 해체 도면을 <사고 실험> 과 결합해서 대상을 <살린다> 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제의> 발전은 컴퓨터가 인공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이러한 인공의 세계에서 우리는 경제적 행동, 정치적 행동을 모사할 수 있으며, 어떤 것이든 모사할 수 있다. 순수 수학이 이미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컴퓨터는 우리로 하여금 거보를 내딛게 했다. 개인 관계까지 포함시킬 수 있는 (과학 소설처럼) 이러한 세계의 건설로, 우리는 ――― 인간의 가장 강한 욕망이라고 앞에서 말했던 ――― 완전한 인조 환경 속의 삶에 위험할 정도로 근접하고 있다. 이러한 인조 세계에서 우리는 동물적 본성을 완전히 초월하거나, 초월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컴퓨터가 만든 세계 속에서는 누구나 자아를 잃기 쉽다. 팩맨 게임을 하는 어린이를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 세계 속에서는 환상과 실제의 경계가 사라져 버린다. 시뮬레이션은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며, 컴퓨터는 새로운 창조자가 될 것이다.

생각하는 기계로서 컴퓨터는 학습할 수 있고, 사람과 협동하여 인공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체스를 두는 컴퓨터는 곧바로 사람의 경쟁자가 된다. 인공지능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사람과 컴퓨터의 체스 시합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튜링의 <모방 게임> 의 위치를 차지한다. 반대자들은 사람 챔피언이 보여주는 미묘한 사고와 일반화 능력을 컴퓨터가 절대로 따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옹호자들은 컴퓨터가 이기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옹호자들은 체스 컴퓨터를 만드는 일이 토머스 모건이 했던 초파리 번식 실험 ――― 나중에 유전공학에의 길을 열었던 (8장 참조) ――― 과 비슷한 것이라고 여긴다.

사실 최초의 체스 기계는 이미 1770 년에 나타났다. 볼프강 폰 켐펠렌 Wolfgang von Kempelen 남작이라는 사람이 나무로 자동 인형을 만들고, 이것이 체스를 잘 둔다고 주장했다. 머리에 터번을 둘렀기 때문에 터키인으로 불렸던 이 인형은 정말로 체스를 잘 두어서, 벤저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여러 사람을 이겼다. 단지 문제는 인형 속에 사람이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계 마법의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에드거 앨런 포 Edgar Allan Poe 는 「메첼의 체스 가사 Maezel’ s Chess Player」라는 글에서 터키인의 정체를 폭로했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터키인은 가끔 실수를 하는데, 진짜 체스 기계라면 실수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앙브루아즈 비에스 Ambroise Bierce 가 쓴「몬손의 주인 Monxon’ s Master」이라는 단편 소설에는, 체스 두는 인형이 상대인 <주인> 을 죽이는 (페르시아 말로 장군을 부르는 것은 <왕이 죽었다> 라는 뜻이다) 비관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에서 미래의 체스 기계가 인간에게 이길 것이라는 예견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현실이 될까? 몇 년 전에 나의 동료 위너가 이론적인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심하던 것이 생각난다. 위너의 말처럼 체스를 잘 두는 컴퓨터를 만들려면 록펠러 광장만한 기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바로 소형화 기술과 컴퓨터 설계 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위너가 말한 실제적 한계는 금방 제거되었다. 크레이 블리츠 CRAY BLITZ 와 하이테크 HITECH 와 같은 체스 기계는 세계 챔피언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이기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정신은 한정된 수의 뉴런과 시냅스에 의존한다. 그러나 컴퓨터는 이론적으로 더 많은 수의 회로를 만들어 넣을 수 있고, 병렬 처리를 통해 더 일반적인 사고를 더 빨리 처리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체스 챔피언 컴퓨터는 가능하다. 하지만 시합 중에 게임의 규칙을 약간 바꾸면, 컴퓨터는 쩔쩔 매겠지만, 사람은 잘 적응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에 규칙의 변화에도 적응하는 컴퓨터가 나올지 누가 알랴?

체스를 두는 컴퓨터 게임에 이길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말을 움직일 수 없다. 따라서 체스 기계가 아무리 위협이 된다 해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살아 있다> 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정신> 이 로봇과 결합하면, 기대와 두려움이 함께 커진다. 신화와 현실 속의 자동 인형을 모두 다룬 앞 장 (3 장) 에서는 우리는 옛사람들의 반응을 알아보았다. 강력한 컴퓨터의 출현으로, 로봇은 옛사람들의 반응을 알아보았다. 강력한 컴퓨터의 출현으로, 로봇은 새로운 형태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컴퓨터가 우주 비행사를 달에 보내어 <인류를 위한 거보> 를 내딛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면, 컴퓨터는 로봇에게도 미래를 위한 거보를 딛게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인간은 어떻게 반응할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오늘날의 로봇은 인간을 대신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로봇은 생산 라인에서 단순 반복 작업을 인간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로봇은 용접 · 도장 등의 일을 쉬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다. 경제학적으로만 본다면, 로봇은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의 <노예 노동> 을 대신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일본과 미국, 그리고 여러 선진 산업 국가에서 생산용 로봇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고 있다.

로봇은 인간에게 너무 위험하거나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로봇은 방사능 오염 지역에 진입할 수 있고, 테러리스트의 폭탄을 제거할 수 있고,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바다 속에도 들어갈 수 있다. 로봇은 장애자들을 돕는 보철 장치로도 쓰일 수 있고, 궁극적으로 기계 <보모> 도 될 수 있다. 로봇은 음료를 나를 수 있고, 미래에는 집안 청소도 할 것이다. 인간을 위한 로봇의 봉사 가능성은 아직 연구 단계일 뿐이지만, 전망은 매우 밝다.

이미 여러 가지 로봇이 등장했다. <텔레오퍼레이터> 는 심해 잠수 등에서 원격 조종되는 로봇으로, 운전자가 로봇의 눈에 달린 폐쇠회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로봇 팔을 자기 팔처럼 사용한다. 이러한 원격 조종 로봇은 뜨거운 원자로나 우주 공간에서도 사용된다.

로봇 중에는 자기 충족적인 프로그램을 가진 것도 있어서, 그런 의미에서 < 자동> 으로 동작한다. 이런 로봇이 단순한 자동화 기계인 것이다. 시각과 손의 결합에 관한 연구는 로봇의 유연성을 향상시켰고, 피드백 구조의 개선은 이들의 활용 범위를 크게 확장했다.

여기에서 큰 관심거리 중 하나는 로봇이 사람과 닮은 모양이 될지에 관한 것이다. 로봇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데, 사람은 그런 일에 가장 적합하게 생기지 않았다. 자연은 다리를 만들었고, 인간은 바퀴 (자연에는 없는) 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움직임이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바퀴 사람이 연상된다). MIT 교수 에드워드 프레드킨 Edward Fredkin 이 설계한 로봇은 <T자를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으로 가운데에 한 개의 관절이 있는데, 이 관절이 로봇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다. T의 가로막대는 발 역할로 로봇이 넘어지지 않게 한다. 이 로봇은 다리 하나만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제자리에서 뛰거나 앞으로 뛰어가고, 공중제비를 넘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로봇은 사람과 닮지 않았고, 진지한 사람인 프레드킨의 말처럼 <두 다리를 가진 로봇은 불도저의 힘과 발레리나의 유연성과 고양이의 민첩성을 갖게 될 것이다>.

우아해진다고 해도 여전히 로봇은 차고 단단한 금속성을 띨 것이다. 로봇을 그런 모양으로 만들어서 인간과 명확히 구별되게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부드럽고 조용하고 따뜻한 모양으로 만드는 게 좋을까? 로봇 열광자들은 기술적인 문제는 없다고 말한다.『로봇 목록 Robot Catalogue』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로봇을 인간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로봇을 만드는 일을 자연에 위배되는 일로 보던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시각은, 로봇 공학의 빠른 발전으로 근본적으로 수정되었다. 산업용 로봇의 개선된 능력과 앞으로 등장할 인간을 닮은 로봇은 일상적인 과학이 신화를 대신하는 시대를 열 것이다.> 한 예로 그는 로봇에게 친하게 인사하는 일본인을 언급했다. 한 일본 심리학자가 말했듯이, <우리는 로봇에게 이름을 붙여줍니다. 우리는 로봇을 쓰다듬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로봇을 기계가 아니라 인간에 가까운 존재로 대합니다>.

그들은 겁먹지 않고 친해질 수 있을까? 산업용 로봇은 단순한 정보 처리 기계일 뿐이다. 인공지능과 신경 다윈주의는 배우는 기계와 일반화된 사고를 할 수 있는 기계를 약속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힘세고 민첩한 로봇에 <이식> 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등장하지 않을까? 게다가 이런 로봇들은 무인 공장에서 다른 로봇을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계의 <본성> 은 무엇이며 인간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이제 조금 위험한 논의를 해보자. 나는 기술 결정론을 믿지 않지만 ――― 과학과 기술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통제를 받을 것이다 ――― 경제와 기술, 그리고 인간의 열망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 방향 중 하나가 지능적인 컴퓨터의 개발이다. 망원경과 현미경이 인간보다 시력이 훨씬 뛰어나듯이, 여러 가지 근거로 나는 컴퓨터의 계산 능력과 추론 능력이 인간을 훨씬 앞지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컴퓨터의 일반화 능력이 얼마나 발전할지 알 수 없지만, 어떤 경계선을 그을 근거는 없다.

로봇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며,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컴퓨터화된 로봇의 가능성은 기술 맹신자들의 과장처럼 무제한적이다. 그렇다면 컴퓨터화된 로봇이 인간처럼 되거나, 인간이 그들에게 밀려날 수 있을까? 로봇은 인간을 지배할까, 아니면 인간처럼 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통제 아래 있을까? 마지막 장에서 다룰 것은 기술적 성과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문제이다. 컴퓨터 - 뇌 혁명과 유전공학 혁명의 지식을 가진 지금,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살펴볼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