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인형

 

네번째 불연속 -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 : Bruce Mazlish 지음, 김희봉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01 (원서 : The Fourth Discontinuity - The Co-evolution of Humans and Machines, Yale Univ. Press, 1993), Page 59~98

 

17 세기의 논쟁보다 휠씬 전부터ㅡ 동물 기계 문제는 자동 인형 automata 이라는 형태로 제기되어 왔다. 먼 옛날부터 오늘 날까지 이 <피와 살> 의 모조품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무엇인지 —— 그런 차이가 있다면 —— 묻고 있다. 철학이 학문적인 영역을 위해 남겨둔 질문을 자동 인형은 모든 인류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자동 인형은 단순한 형이상학적 사색이 아니라 물리적인 형태로 문제를 사람들에게 직접 보여주기 때문에, 심리적인 동일시 identification 의 느낌을 강하게 일으킨다. 이러한 동일시는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으며, 희망적일 수도 있고 위협적일 수도 있다.

자동 인형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과 그 피조물의 죽음과 파괴를 부르는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도 그렇게 여겨진다). 따라서 인간의 창조는 신에 대한 반항이고, 그 정벌로 인간은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이러한 창조력은 인간 자신이 신처럼 전능하고 완전하며 불멸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동 인형과의 동일시에서 오는 환상 또는 열망은, 최소한 지난 수천 년간 인간의 상상 속에 출몰해 왔다. 자동 인형은 마음 속에서 뿐 아니라 물리적으로 인간 자신의 이미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인간과 기계의 관계 탐구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이러한 기계적 <피조물> 은 이론과 실제를 융합한다.

옛날부터 뛰어난 창조자인 인간은 자신의 <쌍둥이>, 즉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계 인형과 꼭두각시를 만듦으로써 자기의 정체성 문제에 부딪쳤다. 기계가 자동 인형과 같은 모습을 하고, 인간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인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9 장에서 다룰 튜링 시험은 이 문제에 관한 최근의 시도이다.) 따라서 동물 기계 문제는 인조 인간의 문제가 된다.

옛날에 얼마나 많은 자동 인형이 전설 속에서나 실제로 만들어졌는지는 헤아리기 어렵다. 햇빛에 녹아 버린 신화 속 이카루스 Icarus 의 날개는, 역사적인 탐구의 빛 속에서도 녹아 버린다. 그러나 기원전 380 년경의 중국 과학자가 만든, 날아다니는 자동 인형도 허구일까? (타렌툼 Tarentum 의 아르키타스 Archytas 도 같은 일을 했다고 한다.) 사실과 허구의 혼합은 과학과 기술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반쯤 신화적인 발명가들의 열망도 우리에게는 레버와 기어로 이루어진 실제의 발명만큼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고대 중국과 그리스에는 자동 인형에 관한 이야기가 특히 풍부하며, 인도와 그 후의 아랍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 책은 서구 중심적이고 서구에 제한된 것이지만, 이 영역에서 중국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셉 니덤 Joseph Needham 은 기념비적인 저작 『중국의 과학과 문명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에서 이런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문헌에 언급된 고대 중국의 기계 장난감은 엄청나게 많다. 앞에서 나온 비행 기계 외에도 기계로 된 비둘기와 천사· 물고기·용 들이 있고, 자동 술잔 운반기와 술 따르는 장치도 많이 나온다. 수압으로 움직이는 배가 노래하는 여자 · 동물 · 남자들을 싣고 황제의 흥을 돋구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에는 기원전 4 세기의 과학자 묵자 (墨子) 가 만들었다는, 전설상의 스스로 움직이는 수레 (자동 - 차) 가 있다. 실제로 이런 수레가 있었을까? 그 밖에도 옥으로 만든 기계 인간, 나무로 만든 여러 종류의 인형, 황금 불상, 꼭두각시 악단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동 인형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가장 명백한 대답은 <인간은 기계공> 이다. 인간도 기계인가? 니덤의 책에는 중국의 자동 인형 개발과, 인간의 이중적인 본성을 잘 보여주는 글이 있다. 여기에 인용하는 글은 기원전 3 세기경의 『 열자 (烈子)』에 나온다.

<누구나 이 인형을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핵심적인 말이다. 로봇이 여자에게 다가가서 왕의 노여움을 산 것은, 자동 인형에 대한 공포로 흔히 느끼게 되는, 성적인 위협이다. <인간의 재주가 위대한 조화옹과 버금갈 수 있을까?> 라는 왕의 물음은 서구에서 말하는 프로메테스우의 테마처럼 들린다.

그리스인들도 여러 가지 자동 인형에 열중했다. 델파이의 신탁은 바람으로 작동하는 <목소리> 로 말해졌고, 헤파이스토스 신은 탈로스 Talos 라는 일종의 청동 로봇을 만들어서 크레테 신전을 지키게 했다고 한다. 조상 (彫傷) 들도 신과 같아서, 신의 목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서기 4 세기 칼리스트라투스 Callistratus 가 상아와 황금으로 만든 아스클레피우스 신의 성상에 대해 쓴 글에서 이런 느낌을 알 수 있다. <정념으로 더럽혀져도 인간의 몸에 성령이 내려오고, 악령의 방해가 없다고 믿을 수 있을까? …… 예술이 신의 모습을 그렸을 때, 그 모습이 신 자체가 되는 것을 보라! 물질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성스러운 지성이 나타나다.>

세심하고 체계적으로 이 논의의 기초를 다지려면, 자동 인형의 역사 전체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라나 여기에서는 단순히 이 주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고, 좀더 현대에 가까이 와서 다시 살펴 보겠다. 기계 장난감에 대한 중국과 유럽의 전통에 대해서 니덤은 이렇게 말한다. <13 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는 이만큼의 진보가 없었다. 유럽의 '기계 시대' 의 승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예를 들어 13 세기 유럽에는 빌라드 드 호네코드 Villard de Honnecourt 가 만든 기계 비둘기와 천사가 있었다고 한다. 15 세기에는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뮐러 Johannes MÜller 가 독수리와 파리를 만들어서 동시대인들을 놀라게 했다. 20 세기의 과학사가 피에르 뒤앙 Pierre Dugem  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가설적으로 설명했다. <파리는 몸 속에 숨겨진 스프링으로 날개를 쳤고, 손님에게는 보이지 않는줄에 매달려 식탁 위를 날아다녔고, 마지막으로 뮐러의 손으로 간 것은 그가 손에 자석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뮐러는 기계공일 뿐만 아니라 마술사인 것 같다. 이러한 연관은 프랜시스 예이츠 Frances Yates 와 몇몇 사람들이 지적한 르네상스 과학의 <비의적인 Hermetic 전통> 으로 보아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마술사는 17 세기 과학자의 직접적인 선조이다.> 또한 르네상스의 마술사는 <르네상스 시대의 신플라톤주의의 비의적인 핵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 말하고 있다.

비의적인 전통을 되살려 르네상스에 전달한 것은 피코 델라 미란돌라 Pico della Mirandola 와 함께 특히 마르실리오 피키노 Marsilio Ficino 의 기여가 크다. 피키노는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 투스 Hermes Trismegistus 가 썼다는 논문을 번역했는데, 피키노는 그가 진정한 이집트의 성직자이며 모세 Moses 처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설명을 한 것으로 믿었다. 창조에 관한 비의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은 신에게 모든 동물을 지배할 권리뿐 아니라 인공물 —— 나는 이것을 기계라고 부를 것이다 —— 에 생명을 불어 넣는 힘도 얻었다. 예이츠에 따르면, 비의적인 『아스클레피우스 Asclepius』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이 이집트의 성직자는 …… 별에서 솟는 힘을 잡을 수 있었고, 이러한 마법의 지식으로 신들의 조상 (彫像) 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연금술은 뛰어난 비의적인 과학이었다. 보통의 물질을 황금으로 바꿀 뿐만 아니라, 생명도 연금술사의 증류기에서 얻을 수 있었다. 생명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을 창조하는 다른 수단으로는 카발라의 주술이 있었다. 르네상스의 마술사들에게 드리운 신비와 마법의 분위기 때문에, 그들은 금방 협잡꾼이라는 오명도 얻게 되었다. 마술과 <화학>, 역학을 혼동한 가장 좋은 예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과학자 존 디 John Dee 이다. 천사를 부르는 마술로 <위대한 주술사> 로 불렸던 그도 기계적인 힘을 사용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는 헛되이 이렇게 항변했다. <자연적이건 수학적이건 기계적인 발명으로건, 놀라운 능력을 보인다면, 정직한 학자와 겸허한 기독교 철학자들도 주술사라고 해야 하지 않은가?>

르네상스의 비의적인 전통으로, 자동 인형에 대한 고대의 열중은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마술과 기계학이 뒤섞여서, 공포와 놀라움의 분위기가 땅 위에 만들어진 조상 (彫像) 과 천사에 덧씌워졌다. 이것들은 살아 있는 실제인가 아닌가? 기계공인 인간은 자기가 만든 것에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어서 창조주의 흉내를 내는가? 또는 그들 자신이 기계여서, 기계의 원리로 작동하는가? 르네상스의 비의적인 전통에 의해 이 의문들은 표면으로 끌려나왔으나, 신화와 마법의 색채에 둘러싸여 있었다.

한두 세기 후에, 자동 인형 문제는 베이컨과 데카르트 사상이 세례를 받아, 좀더 세속적이고 이성적인 형태로 다시 나타났다. 18 세기에는 뛰어난 기술자로 프랑스의 보캉송이 있었다. 그는 오리를 만들었는데, 이 오리는 <마시고, 먹고, 소화하고, 꽥꽥대며 울고, 헤엄을 칠 수 있었다고 한다. 내부의 소화 기관은 모두 노출되어 있어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가 만든 플루트 주자는 열두 가지 음을 연주 하는데, 음악에 따라 손가락, 입술, 혀를 움직였다. 그가 만든 탬 버린을 치는 소녀와 만돌린 주자는 머리를 까딱이며 숨을 쉬기도 했다.>

그림 보캉송, 소화하는 오리, 『자동 인형의 세계』에서 (1928).

이것보다 더한 것을 스위스인 피에르 자케 - 드로 Pierre Jaquer - Droz 가 만들었다. 그는 <1774 년에 …… 실물 크기의 살아 있는 듯한 소년을 만들었는데, 이 인형은 책상 앞에 앉아서 마흔 개의 글자를 쓸 수 있었다.> (이 인형은 노이케텔 Neuchatel  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아직도 움직인다.) 드로는 <화가> 인형도 만들었다. 소년의 모습을 한 이 인형은 네 가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인형이 그린 그림은 보통 사람 수준보다 조금 나은 정도이다.

이 기계 인형들은 계몽 시대의 이성의 순수한 빛의 세례를 받았고, 이들에 대한 논의는 명확한 <과학적> 용어로 행해졌다. 우리는 이미 데카르트에서 라 메트리에 이르는 논의를 보았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자동 인형에 따라다니는 공포, 즉 정체성의 문제, 성적인 질투 (창조의 기초?), 지배력의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비이성적> 위협 등을 밝혀보겠다.

자동 인형은 공포뿐 아니라 창조적인 프로메테우스의 힘에 대한 희망도 일으킨다. 자동 인형이 가진 두 측면의 긴장은 여러 장르에서 매우 흥미롭게 나타난다. 나는 몇 가지 문학 작품에서 자동 인형을 대하는 태도의 이중성을 분석해 보겠다. 분석 대상은 『안데르센 동화 Fairy Tales』 의 나이팅게일, 셸리가 쓴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 오즈 이야기의 틱톡 Tiktok,  차페크의 『R. U. R.』, 아시모프 소설의 로봇 등이다.

자동 인형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나는 고전 (아시모프의 소설도 고전이 되어가고 있다) 들을 선택해서 인간이 기계적 <타자 (他者)>를 만났을 때 보여주는 여러 가지 태도를 설명하겠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태엽 장치를 다룬다. 생물학과 기계의 공포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네 번째 불연속에 관한 가장 유명한 서구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중요성은 자명하므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생명> 에 관한 어린이다운 호기심을 반영하는 바움의 오즈 이야기는 겉보기처럼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차페크의 『R. U. R.』는 로봇이라는 어휘를 탄생시킨 작품으로, 오늘날의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위협적인 인조 인간의 공포를 보여주고 있다. 아시모프의 로봇들은 다가올 로봇 시대에 생길 수 있는 많은 지적인 문제를 보여준다.

먼저 19 세기의 유명한 동화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 의 「나이팅게일 Nightingale」을 보자. 이 이야기는 자동 인형에 관한 과학적인 생각과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의 기계적인 세계관에 대한 낭만적인 반동을 함께 보여준다. 뉴턴은 우주를 태엽장치로 생각했다. 이것은 정교하고 정확하며 거의 고장이 없는 장치로, 4 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과학적인 방법과 산업적인 신조의 새시대를 상징한다. 또한 이것은 인간과 시계의 내부 <작동> 의 연관성을 시사한다.

안데르센의 이야기에는 <진짜 나이팅게일> 과 <시계공> 이 만든 나이팅게일이 나온다.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다. 진짜 나이팅게일은 중국의 황제와 농부들을 즐겁게 한다. 사람들은 이 새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린다. 여기에 인조 나이팅게일이 나타나는데, 이 새는 보석으로 장식했기 때문에 진짜 새보다 더 아름답다. 인조 나이팅게일은 똑같이 노래를 잘하고, 되풀이해 불러도 지치지 않으며, 거의 진짜 새처럼 보인다. 쫓겨난 진짜 새는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1 년 뒤에 인조 새는 고장이 나서 완전하게 고칠 수 없게 된다. 몇 년뒤에 황제가 병들어 죽어가는데, 오로지 나이팅게일의 노래만이 그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인조 나이팅게일이 완전히 고장났다. 이 때 진짜 나이팅게일이 나타나서 노래를 부르고, 황제는 살아난다.

안데르센의 말에는, 위의 요약으로는 전달되지 않은 의미와 날카로움이 있다. 자세히 보면, 이 짧은 이야기에는 기대하지 않은 모호함도 들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인공물과 <자연> 물의 계속적인 대비이다. 처음에 궁정에 있는 사람들은 개구리 울음소리를 교회의 종소리와 혼동하고,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유리종 소리와 혼동한다. 인조 새와 진짜 새는 함께 노래하기 어렵다. <진짜 나이팅게일은 자기 마음대로 노래하는데 인조 새는 왈츠를 부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같은 노래를 서른세 번이나 부르고도 지치지 않는> 기계 장치에 승리가 돌아간다. 이것을 칭찬하여 기계공은 <진짜 나이팅게일은 다음에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지만, 인조 새는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 고 말한다.

사실 인조 새는 피로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결정된 것도 아니다. 인조 새는 고장나서 고칠 수 없게 된다. 반면에 진짜 나이팅게일은 영원히 사는 것처럼 보인다 (나이팅게일의 수명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나이팅게일은 새끼를 칠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기계도 다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생물의 성질이라고 알려진 것과 무생물의 성질이 역전된다. 오래 견디는 것은 생물이다. 이 생각이 마지막에 다시 나타나서, 생명의 힘을 상징하는 진짜 나이팅게일이 죽음을 물리친다. 황제는 이렇게 말한다. <짐은 나의 왕국에서 너를 쫓아냈지만, 너는 나의 침상에서 사악한 힘을 쫓아냈고, 나의 심장에서 죽음을 몰아냈다.>

안데르센은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자동 인형의 차이는 단순명료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생명을 대표하고, 자동 인형은 죽음과 차가운 기계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낭만적인 한탄이다. 마지막에 나이팅게일이 황제에게 한 말과 같이, <저는 즐거운 사람과 슬픈 사람을 노래할 것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남아 있는 선과 악을 노래 할 것입니다.>

인간과 자동 인형의 의문에 관한 안데르센의 대답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애매한 사고와 가정에 싸여 있다 (안데르센은 젊은 시절을 불행하게 보냈고, 인형 극장을 만들면서 외롭게 지냈다). 그의 이야기는 생명과 기계의 미스터리에 깊은 혼란과 의문을 느끼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다.

인조 나이팅게일은 태엽 장치인 반면에,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다른 근원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비의적 전통으로 돌아가고, 여기에 전설에 나오는 골렘 golem 의 공포를 덧붙인다. 과장이 심한 문제에다 통찰은 여기저기에서 긁어모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에게 괴기한 힘을 행사한다. 연금술사가 빛어낸 형태 없는 사상은 우리의 상상력으로 온갖 모양을 그속에 집어 넣을 수 있게 한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우리의 원시적인 공포와 욕망, 동물과 기계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감정에 흉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들 자신이 <생명> 을 얻는 방법을 상징하고 있다.

셸리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메리 울스톤크래프트 Mary Wollstonecraft 와 윌리엄 고드윈 Willim Godwin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그룹에 들어갔다. 계몽 시대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휴 세이무어 월폴 Hugh Seymour Walpole 과 루틀리지 Rutl edge 의 괴기 소설이나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Samuel Taylor Coleridge  의 시에 나타나는 신비주의와 낭만주의의 분위기를 맛보았다. 그녀의 독특한 천재성은 19 세기 초의 과학과 고대의 신화를 연결했다.

비의적인 전통은 인간도 생명의 창조력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조상 (彫像) 에 생명을 불어 넣는 노력을 호의적으로 본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이러한 노력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Cornelius Agrippa, 파라켈수스 Paracelsus,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Albertus Magnus 등의 비의적 전통의 <전통> 인물들은 모두 신이 통찰을 가졌다고 전해지지만, 파멸로 이끄는 메피 스토펠레스 Mephistopheles 와 같은 인물로 비치기도 한다. 여기에서 생명을 얻는 것은 트리스메기스투스의 조상 (彫像) 이 아니라 골렘이다.

골렘은 원래 죽은 자의 시종으로 무덤 주위에 세운 나무 또는 점토 모형이었다. 유럽에서는 특히 16 세기에 이것이 전설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모양이 없는 찰흙덩어리 골렘은 주문을 통해 형체를 얻는데, 여기에는 유대의 카발라 주술이 사용된다. 랍비가 성스러운 주문을 외고 골렘의 머리에 Emeth 라고 쓴다. 이 말은 헤브루어로 <진실> 을 뜻한다. 여기에서 E 를 지우면 <죽음> 을 뜻하는 Meth 가 되어서, 골렘은 다시 부서진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랍비가 쓰는 글자가 신의 이름인 Shem  이고, 나머지 과정은 같다).

골렘은 인간의 노예로 만들어져서 자기를 만든 사람을 보호한다. 그러나 전설 속의 골렘은 거의 항상 통제 불능이 되어 무섭게 달려들어 주인을 위협하고 결국은 파괴된다 (가장 유명한 골렘은 17 세기 프라하에서 랍비인 에로 Loew 가 만든 것이다).

셸리는 골렘의 이야기를 공공연히 인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골렘의 이야기는 비의적인 전통을 거쳐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의 배경에 닿는다. 사실은 더 큰 영향이 숨어 있다. 합리론자인 셸리의 아버지 고드윈의 『마법사들의 삶 Lives of Necromancers』은 1834 년에야 (셀리의 의해) 출판되었지만 아그리파, 파라켈수스, 마그누스, 장미십자회 등의 신비적이고 마법적인 자료에 대해 논의한 부녀 간의 대화가 반영되어 있다. 또 다른 사상이 조류, 즉 그 시대의 과학, 특히 화학과 전기가 그녀의 남편 퍼시 비셰 셸리 Percy Bysshe Shelley 를 통해 그녀에게 영향을 주었다.

퍼시 비셰 셸리는 시인이었지만 과학에 매료되었다. 고드윈과 마찬가지로 그도 파라켈수스 (우연히도 <난쟁이> 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으로 유명해졌다) 를 읽었다. 어린 시절부터 퍼시는 화학에 심취해서, 에턴에 있던 그의 방은 연금술사의 실험실과 비슷했다고 한다. 어떤학자에 따르면 그는 <안드로이드 또는 사람과 같이 움직이는 기계 장난감> —— 애덤 워커 Adam Walker 가 만든 것으로 그의 강의를 퍼시가 들었다 —— 도 접해 보았다고 한다.

또한 셸리는 옥스퍼드에서 전기역학, 공기 펌프, 갈바니 전지 등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기 시작했을 때 조지 고든 바이런 George Gordon Byron 경이 험프리 데이비 Humphry Davy 경의 『화학철학의 기초 Elements of Cbemical Pbilosopby』( 1812 ) 를 읽도록 권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사고에서 고대의 연금술과 현대의 과학적인 지니 (알라딘의 램프를 지키는 거인 —— 옮긴이) 를 연결시키는 피뢰침 역할을 한 것은 남편 퍼시였다. 실제로 퍼시는 그의 아내가 책을 쓰도록 재촉했고, 저작을 도왔으며, 서문을 썼고, 출판을 주선했다.

데이비의 『화학철학의 기초』는 생명의 힘 —— 미묘한 우주의 흐름 또는 생명의 자력 (磁力) —— 을 발견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전기에 관한 당시의 최신 연구를 다루고 있었다. 루이지 갈바니 Luigi Galvani 의 업적을 나는 <갈바니의 경련> (이것이 19 세기 사상에 미친 영향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것은 전기적인 힘과 화학적인 힘이 같으며, 상호 전환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갈바니 전기가 생물과 무생물의 간격을 메울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개구리 다리의 경련은 최근에 교수형을 당한 시체에 충격을 가해서 움직임을 관찰한 알디니 Aldini 의 실험으로 이어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가장 낙관적인 기대 이상으로, 생기 (生氣) 는 여러 가지 환경이 불가능하게 하지만 않는다면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퍼시는 자연의 철학 Naturphilosophie 으로 대표되는 견해의 영향도 받은 듯하다. 물론 이런 분위기는 과학사에서 일부 전문가들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허황된 것으로 남아 있다. 자연에 관한 신비적인 견해의 일종이라고 대개 비난조로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19 세기 초 중요한 사상의 조류 중 하나였다. 이 조류는 동시대 서구 과학에서 주도적인 유물론과 분석에 반대해서 생기론과 전체론을 강조하지만 (그래서 비난받는다), 두 철학은 모두 통일적이며 하나로 연결된 힘들의 지배를 받는 우주, 즉 법칙을 따르는 우주를 제시하려 했다. 어쨌든 자연의 철학은 생물과 무생물을 전기, 자기 (마술의 형태로 이것은 <동물 자기> 가 된다) 로 연결시키는 힘들의 상호 전환성이라는 개념을 전파했다. 따라서 생명을 주는 힘은 죽은 것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 갈바니의 경련. 개구리 다리를 경련시킨 갈바니의 실험은 알디니의 실험으로 이어졌고,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무생물에 가한 전거 충격을 통해 가상적인 생명 창조로 이어졌다 (Burndy Library, Dibner lnstitute, MIT Cambridge, Mass. 의 허락으로 실음).

과학상의 이러한 발전에 관한 셸리의 지식은 뒤죽박죽이어서 그녀는 그 의미를 단지 어렴풋이, 직관적으로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대의 연금술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예술의 황금을 만드는 시도를 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했고, 결국 성공해서 불명의 작품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했다. 1816 년 스위스 제네바의 레만 호숫가에서 과학이 파편들이 고대의 신화와 결합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이렇게 쓰여졌다. 바이런과 그의 친구 존 폴리도리 John Polidori 박사가 메리와 퍼시를 방문했다. 저택 바깥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고, 그들은 서로에게 유령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때 바이런은 각자가 괴기 소설을 한 편씩 쓰자고 제안했다. 이 날 밤 메리는 악몽을 꿨다. <무시무시한 한 남자의 환영이 나타났는데, 어떤 강력한 기계에 의해 그것이 깨어나서 괴롭게 꿈틀대는 것을 보았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악몽에서 탄생했다.

내가 셸리 작품의 배경을 설명한 이유는, 과학적 탐구와 전설의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생명 창조에 관한 인간의 호기심을 생동감있게 설명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이렇게 외친다. <더, 훨씬 더 많이, 나는 성취할 것이다. 이미 나 있는 발자국을 따라가서 새로운 길을 찾아, 미지의 힘을 탐구하여 창조의 비밀을 세상에 밝히겠다.> 이 책은 생명의 신비를 관통하면서, 자동 인형에 대한 깊은 염려들을 소생시켜 새옷을 입혀놓았다. 이것은 주인에게 반항하는 노예 - 기계,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기계의 공포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 peare 의 『템페스트 Tempest』에 나오는 칼리반 Caliban 처럼 기본적으로 성적인 공포로, 셸리의 책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그리고 인간 자신이 기계 괴물이라는 깨달음의 공포이다.

이런 것이 『프랑켄슈타인』의 그본적인 매력이자 의미이다. 그러나 이제 소설은 전설처럼 되어서 아무도 자세한 내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학자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내용을 여기에서 다루겠다.

첫째,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은 괴물을 일컫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괴물을 만든 과학자의 이름이다. 그의 실패작인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다. 둘째, 괴물은 기계가 아니라 <피와 살> 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다음 글을 보면 오스카 핸들린 Oskar Handlin 과 같은 유명한 역사가조차 괴물을 기계로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괴물은 금방 자기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싸움에서 이 기계가 이긴 것이다.> 셋째, 괴물이 살인을 한 것은 그의 창조자가 자기를 보고 무서워한 나머지 인간적인 사랑과 친절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임이 잊혀지거나 간과되고 있다. 이제 이야기의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자.

셸리는 1816 ~ 1817 년에 이 작품을 썼고,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라는 부제를 붙였다. 왜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 반항하여 인간에게 불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19 세기 초의 낭만적 관점에서 글을 쓴 셸리는 <지식의 획득에 따르는 위험>, 이 경우에는 특히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방법을 알았을 때의 위험을 프랑켄슈타인에서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서 프랑켄슈타인은 <해부실과 도살장에서 재료를 수집하고, 나의 발밑에 있는 생명 없는 물체에 전기 충격을 주어서> 그의 혐오스러운 과업을 성취한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해서 아름다운 꿈은 사라지고, 공포와 혐오가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프랑켄슈타인은 실험실에서 뛰쳐나와 침실로 갔고, 여기에서 그는 어머니의 시체에 관한 이상한 꿈을 꾸다가 (이 구절 뿐 아니라 책 전체가 정신 분석을 요구하고 있다) <내가 창조한 비참한 괴물> 때문에 깨어난다. 자신이 창조한 것의 끔찍한 모습에 혐오를 느낀 프랑켄슈타인은 실험실에서 도망을 간다. 나중에 친구와 함께 돌아오지만, 괴물이 가 버린 것을 보고 한숨을 돌린다.

신화를 이해하려면 이 섬뜩한 이야기를 좀더 읽어보아야 한다. 프랑켄슈터인의 괴물은 마침내 맹인과 아들과 딸이 사는 어느 오두막집의 헛간을 찾아냈다. 괴물은 이들에게 들키지 않은 채, 사회 생활의 요소들을 배워서 (이런 우연은, 독자들이 모든 것을 쉽게 믿기를 강요한다). 『실낙원 Paradise Lost』을 읽을 정도로 발전한다. 괴물은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가슴에 들어 있는 미덕이 이 사람들을 감동시키리라는 생각으로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낸다. 결과는 뻔했다. 그의 모습에 놀란 가족은 그의 창조자와 똑같이 달아나 버린다 .절망에 빠진 괴물은 다시 냉혹한 세계로 돌아간다. 그는 살인을 하는데, 첫 번째 희생자는 우연히 프랑켄슈타인의 동생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추적하고, 결국 둘은 마주선다. 괴물은 고뇌에 차서 자신이 살인을 하게 된 경위를 프랑켄슈타인에게 호소한다.

결국,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에게서 <이성> 의 짝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그렇게 해주면 남미의 광활한 황무지로 들어가서 인간 세계와 절연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의 <연면> 은 오래 가지 않는다. 다시 실험실을 찾은 프랑켄슈타인은 긴 독백을 한다.

창 밖으로 괴물을 보면서, 프랑켄슈타인은 만들고 있던 그의 짝을 파괴해 버린다.

이렇게 해서 소설은 가차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절망에 빠진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절친한 친구 클러벌 Clerval 과 신부 엘리자베스를 차례로 죽여서 복수한다. 괴물은 얼어붙은 북극으로 도망치고, 프랑켄슈타인은 그 뒤를 쫓는다. 그러나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이 추적해 오기 전에 먼저 죽는다. 괴물이 스스로 죽음을 원해서 화장터의 불 속에 몸을 던져 그렇게도 원했던 영혼의 안식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셸리가 직접 쓴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켄슈타인을 딱딱하고 기계처럼 위협적으로 움직이는 보리스 칼로프 Boris Karloff 의 연기로 기억한다 (나의 학생 중 하나는 이 이미지가 낡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젊은 프랑켄슈타인 Young FranRenstein」이라는 멜 브룩스 Mel Brooks 영화의 진 월더 Gene Wilder 로 기억한다고 한다.) 우리는 기계 겸 괴물이, 인간에게 버려졌기 때문에 사악해졌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 버리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이 암시하는 것은 네 번째  불연속이다. 인간이 기계 (그리고 다른 동물) 보다 우월하고 그들과 다른 존재라고 우긴다면, 그래서 그들을 우리의 피조물이 아니라 위협적인 새로운 <종족> 으로 본다면, 그들은 실제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소외 상태에 빠지게 될까? 인간과 기계의 차이 —— 나는 이것을 마지막 두 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 가 불연속을 더 깊게 할까?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괴물이었지만, 그 존재는 기계일 때와 똑같은 근본적인 <미스터리> 를 제기한다. 이런 것이 바로 신화의 형태 없는 연결의 힘이다.

물론 메리 셸리가 말한 창조는 다윈 이전의 것이었다. 그녀의 <미스터리> 는 다윈이 <미스터리 중의 미스터리> 라고 부른 위대한 저작의 덕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다윈 —— 찰스 다윈의 조부 에라스무스 다윈 Erasmus Darwin —— 이 셸리를 직접 도왔다고 한다. 퍼시가 쓴 『프랑켄슈타인』의 서문 첫머리에 이런 말이 나온다. <소설속의 사건은 다윈 박사와 몇몇 독일 생리학자들의 글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이며,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중에 나온 1831 년판의 서문에서 셸리는 자신과 남편과 바이런 경의 토론을 회상하고 있다. <생명의 원리에 관해 토론했고, 이제까지 발견되고 발표된 모든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에라스무스 다윈 박사의 실험에 관해서도 이야기 했는데 …… 그는 유리 상자에 국수 조각을 넣고 어떤 비상한 방법으로 그 조각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과학적인 의문에 관한 이중적인 태도가 자주 나타난다. 프랑켄슈타인은 <천지 창조 이후로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연구하고 갈망했던 것이 바로 내 손 안에 있다> 고 말했지만, 그는 이것을 위해 <시체 안치소> 를 돌아다니는 혐오스러운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죽은 물체에 생명을 줄 수 있다> 고 말하면서도, <나는 광인의 통찰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자기 방어를 해야 했다.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오만으로 인해 인간의 영역에서 쫓겨난 <미친 과학자> 의 전형이기도 하다. 인간이 신의 세계에서 창조되었다면, 괴물은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사악한 과학자인 인간은 신의 지위를 차지했다.

게다가 이 과학자는 여성의 지위까지 차지했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빼앗겼다. 남자인 프랑켄슈타인이 성을 통하지 않고 창조를 한 것이다. 소설에서 성은 위협이다 (셸리 자신의 삶에서 성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기를 낳다가 죽었고, 가장 친한 친구도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따라서 이러한 이력은 작품 이해에 중요한 실마리이다). 괴물에게 번식이 허락된다면, 괴물은 인간의 지위를 빼앗을 것이다. 프라엔슈타인이 괴물의 짝을 만들다가 없앤 것은 성에 대한 반동뿐 아니라 그의 종족주의적인 공포를 나타낸다. 그는 새로 생길 종족을 <악마의 종족> 이라고 표현했다.

셸리의 아버지 고드윈도 『정치적 정의에 관한 탐구 Enquiry Concerning Political Justice』에서 성의 종말을 논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모두가 어른일 것이며, 아이가 아닐 것이다. (즉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세대는 세대로 연속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세대의 종말은 세대를 낳는 행위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고드윈은 한 번 창조로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예견했다. 사실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 Thomas Robert Malthus 는 이러한 환상에 반대해서 『인구론 Population』을 썼고, 여기에서 그는 성, 즉 번식이 인간 존재의 필수 조건이며, 또 하나의 조건은 식량이라고 주장했다. 윤리적으로 억제하지 않는다면, 출산으로 인구 과잉이 일어날 것이다. 다윈을 다룰 때, 맬서스의 저작을 읽은 것이 어떻게 진화론 —— 창조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설명 —— 의 창안에 도움을 주었는지 알 게 될 것이다.

그러나 셸리는 아버지의 희망과 공포를 되풀이한다. 그녀는 『프랑켄슈타인』에서 성적인 행위를 시험관으로 대치했다. 게다가 부모없이 태어난 피조물은 양육도 없고 성장도 없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에게 이렇게 넋두리한다. <어린 시절에 나를 돌보는 아버지도 없었고, 미소와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대하는 어머니도 없었소.> 주피터의 머리에서 나온 미네르바 Minerva 처럼, 괴물은 완전히 성장한채 (보통 사람보다 크게) 태어났다. 성장하지 못하는 괴물은 비인간적으로 되었다. 과학적 창조자의 손에서 태어난 괴물은 여전히 자동인형과 같아서, 그에게 결여된 성질 때문에 인간과의 불연속은 메워지지 않는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인간이 공포로 인해 자기의 피조물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일부인 그의 <쌍둥이> (독자들이 무의식적으로 괴물을 <프랑켄슈타인> 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를 거부했고, 소설은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 모두 파멸하는 것으로 끝난다. 미친 과학자와 날뛰는 골렘 - 자동 인형의 모습 뒤에는 새롭고도 낡은 계명이 있다. <너 자신의 모습을 닮은 것을 창조하지 마라.>

『프랑켄슈타인』은 현대의 독자에게도 전율을 일으키지만, 그렇다고 기계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중단시키지는 못한다. 사실 자동 인형은 로봇의 형태로 인간에게 길들여진 친숙한 얼굴을 한 경우가 많다. 이런 예가 어린이를 위한 오즈 이야기에 나온다. 이것은 틱톡이라고 불리며, 『오즈의 마법사』(1907) 에 처음 등장한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 책에서는 인간 · 동물 · 기계를 둘러싼 수많은 근본적인 의문들이 천진스러운 형태로 제기된다.

저자 바움은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순진한 집착을 가진 듯하다. 미국의 안데르센이라고 불러야 할 그는, 옛날의 동화들을 현대화했다. 옛날 이야기에서 위협적인 인물은 대개 괴물이었지만 ——「재크와 콩나무」 의 거인처럼 —— 이제는 인간화되어 유머 넘치는 기계가 되었다. 오즈의 나라에서는 인간 · 동물 · 기계들이 조화롭게 지내며, 마녀조차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다.

바움의 오즈 시리즈가 모두 그렇지만, 특히 『오즈의 마법사』는 우리의 주제를 가장 재미있게 탐구한 것이다. 모든 소년 소녀에게 바쳐진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캔자스에 사는 도로시 게일 Dorothy Gale 이 배를 타다가 떠내려가서 닭장에 걸렸다. 닭장에는 도로시가 빌리나 Billina 라고 이름을 붙인 암탉이 한 마리 있을 뿐이다. 이 닭은 이상하게도 말을 한다. 도로시가 말했다. <닭은 꼬꼬댁 하고 올 수만 있을 텐데.> 닭이 대답한다. <나는 평생토록 꼬꼬댁 하며 울기만 했고, 오늘 아침까지 한 마디 말도 해본 적이 없어. 하지만 네가 좀 전에 나에게 무언가를 물었을 때, 내가 너에게 대답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나는 말을 했고, 앞으로도 계속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치 너희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참 이상하지?> 책의 시작부터 언어를 정의 (定義) 하는 성질 —— 사람은 말을 할 수 있고, 닭은 말을 할 수 없다 —— 에 관한 질문이 우리에게 던져진다.

물론 우리는 동화의 나라 (처음에 닭장이 에브 Ev 또는 오즈 나라에서 떠내려 왔지만) 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화의 나라는 비교에 의해 <실제의 나라> 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도로시가 암탉에게 <너는 나처럼 음식을 요리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으니까> 자신이 낳은 달걀을 먹으라고 하자, 닭은 화가 나서 이렇게 외친다. <나보고 동족을 잡아먹으라고?> 도로시가 닭들의 흉칙한 식습관을 나무라며 <왜, 너는 징그러운 벌레와 기어다니는 개미 따위의 살아 있는 것을 먹지? 부끄러운 줄 알라구> 라고 하자, 침착한 닭은 이렇게 대답한다. <맙소사! 살아 있는 것이야말로 훨씬 신선하고 몸에 좋다구, 너희 사람은 죽은 것이며 뭐든 먹지.> 도로시가 아니라고 했지만, 빌리 나는 사람들이 새끼 양은 물론 닭도 잡아먹는다고 말한다. 도로시는 다시 이렇게 대꾸한다. <하지만 우리는 요리를 해서 먹는다구.> 그런다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닭의 물음에 대한 도로시의 대답은, <큰 차이가 있지 ……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차이가 있어. 어쨌든 우리는 벌레처럼 흉칙한 것은 먹지 않아!> 다음과 같은 닭은 대답에 도로시는 생각에 빠진다. <하지만 너희들은 벌레를 먹는 닭을 먹지 …… 그러니까 너희들도 우리 닭과 마찬가지로 나빠.>

마치 유쾌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evi - Strauss 를 만나는 것 같다. 인간은 동족을 잡아먹으면서 요리를 해서 먹는다는 이유로 다른 동물을 얕보는 것이다. 그러나 말은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게 된다. 바움은 어린이들에게, 인간이 닭 또는 여느 동물과 어떻게 다른지 생각하게 한다.

오즈 이야기에는 휠러 Wheller 라는 동물과 기계의 중간적인 존재도 등장한다. <이것은 사람과 비슷하지만, 걸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굴러다닌다. 팔과 다리는 길이가 똑같아서 네 발로 걷는 짐승과 닮았다. 하지만 도로시는 이것이 짐승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데, 색색으로 수놓은 멋진 옷을 입은 데다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말쑥하게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과 다른 점은, 손발이 있어야 할 팔다리 끝부분에 둥근 바퀴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옷은 인간을 정의하는 성질로서, 인간은 기계나 동물과 구별한다.

그 다음에 나올 데카르트식의 우스운 논의의 주인공은 기계 인간 <틱톡> 이다. 도로시가 열쇠를 찾아서 바위에 나 있는 문을 열어보니, 거기에서 <사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주위가 어두웠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의 키는 도로시만큼 작았고, 몸은 공처럼 둥글고, 윤을 낸 구리로 되어 있었다. 머리와 사지도 구리로 되어 있었다. …… 놀라지 마. 이것은 ' 살아 있는 것이 아니야 ' . 빌리나가 말했다.>

그림 기계 인간 틱톡. 그림 John R . Neill. 『오즈의 마법사』(1997 , L . Frank Baum) 에서 발췌. 도로시는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눈으로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탐구한다.

도로시는 주석 나무꾼을 기억해 내고 이것과 비교해 보았다. <그러나 주석 나무꾼은 우리들처럼 살아 있었어. 그는 원래 사람으로 태어났고, 조금씩 조금씩 —— 처음에는 달리, 다음에는 손가락, 그 다음에는 귀 ——  몸을 주석으로 바꿨지. 자기가 휘두른 도끼에 자꾸 다쳤기 때문이야.> (바움은 보철 장치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나는 11 장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겠다.) 주석 나무꾼과 달리 구리로 만든 사람은 <전혀 살아 있지 않다> 고 도로시는 결론짓는다.

그는 로봇이다. 그의 목에 걸려 있는 카드에는 이것이 <(태엽을 감아주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계> 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는 <살아 있는 것 말고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즉 먹는 것, 슬픔이나 기쁨을 느끼는 것, 친절 (하거나 불친절) 한 것, 잠자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정도가 최소한 그 책에 암시된 차이들이다). 그러나 허수아비가 자기는 틱톡과 달리 두뇌를 가졌다고 말하자, 틱톡은 이렇게 대답한다. <저에게도 두뇌가 있지요. 대장장이와 땜장이가 합금 두뇌를 만들어 주었어요. 나는 이걸로 생각을 하지요.> 동물인 빌리나와 마찬가지로 기계인 틱톡도 언어와 두뇌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 (이것?) 는 인간과 어떻게 다른가? 그 해답은 어떤 성질에, 특히 감정 상태를 의식하는 능력 근처에서 맴돈다. 또한 바움에 따르면 틱톡은 반복해서 태엽을 감아주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사람은 먹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기술적인 차이일 뿐이다).

이 책에 나오는 또 하나의 기계는 망치를 든 거인으로, 이 거인은 태엽도 감을 필요가 없는 것 같다 (키를 돌려 끄기 전에는 계속 움직인다). 하지만 틱톡과 달리 이 기계는 생각하거나 말하는 장치가 없다. 무쇠로 만든 이 거대한 <사람> 은 놈 Nomes 왕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지키고 서서 망치로 땅을 두드리기 때문에, 겁이 나서 아무도 지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장점인 지치지 않는 기계적인 규칙성이 바로 그의 약점이다. 허수아비가 이것을 알아챘고, 도로시 일행은 망치가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자나갈 수 있었다.

틱톡은 전혀 위협적인 로봇이 아니다. 그는 오로지 도로시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림을 보면 이 로봇은 구리로 만든 땅딸보 인형을 닮았다. 사실 망치의 거인도 별로 무섭지 않은데, 그는 기계적인 특성 때문에 쉽게 속일 수 있다. 오즈에 나오는 자동 인형들은 가축처럼 길든 존재로, 닭 따위의 동물과 다르지만 사람 ——  사실은 어린이 —— 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상상 속의 로봇은 오즈의 양지바른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로봇은, 『프랑케슈타인』처럼 음침하고 위협적인 모습을 띠기도 한다. 좀더 현대에 와서 차페크의 『R. U. R』――― 로봇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작품 ――― 에 등장하는 로봇도 비슷한 공포를 반영한다.

셸리식의 작품들처럼, 차페크는 희곡 「R. U. R」(1922 념 미국에서 상연되었다) 도 부적절한 아이디어가 뒤범벅된 조잡한 글이다 (거친 피조물에는 거친 문제가 어울리거나, 원래 괴기 소설은 거칠어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체코 사람인 차페크는 1917 년의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편견을 이 작품에 명백히 드러낸다. 물론 그가  이 역사적인 사건을 당시에 어떤 태도로 대했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로봇의 생산을 다루는 1 막과 로봇의 반란을 다루는 2, 3 막 사이에는 이분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연극은 효과적이었고, 그는 로봇을 대하는 인간의 감정을 잘 상징화했다.

연극은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 헬레나 Helena 가 로섬 Rossum 의 만능 로봇 Universal Robot 공장이 있는 섬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공장은 도민 Domin 이라는 남자가 관리하고 있는데, 그는 첫눈에 헬레나에게 반했고,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다음에 로봇 발명의 숨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조 과정 자체가 비밀이고, 단 두 부만 보관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로섬은 위대한 생리학자로, 살아 있는 물질인 원형질과 비슷한 것을 화학적으로 합성하려고 노력하다가, 살아있는 물질과 똑같은 행동을 보이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 인공적인 생물질은 삶에의 집착을 강하게 나타냈다. 이 물질을 서로 섞어도 특성이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늙은 로섬은 자연을 흉내내는 시도를 했다. 처음에는 인조 개를 만들려고 했는데, 몇 년의 노력 끝에 <발육이 정지된 암소> 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 사람을 만들었다.

개는 파블로프 (6 장을 참조) 를 연상시키고, 사람은 『프랑케슈타인』의 괴물을 연상시킨다. 로섬은 명백히 프랑케슈타인의 이미지를 닮았다. 도민은 그를 <인간을 만들려고 하는 미친 괴짜 영감> 이라고 냉소적으로 묘사한다. 로섬은 서툰 솜씨로 10 년을 허비한 끝에 <인간을 만들기는 했지만, 사흘밖에 살지 못했다>. 그런데 <이 때 로섬의 아들이 섬에 왔다. 그는 기술자였는데 …… 늙은이가 해놓은 것을 보고 나서 말했다. '사람을 만드는 데 10 년이 걸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연이 하는 것보다 빨리 만들지 못한다면 공장 문을 닫는 게 낫다.'>

프랑케슈타인을 닮은 로섬과 그의 <괴물> 은 물러났다. 생리학자가 아니라 기술자인 젊은 로섬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즐거움 따위의 감정을 느끼고, 피아노를  치고, 산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일하는 기계는 즐거움을 느껴서도 안 되고, 피아노를 쳐서도 안된다.> 따라서 도민은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인조 노동자를 생산하는 것은 …… 모터를 생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중에는 <간과 두뇌를 만드는 통 …… 혈관과 신경을 짜기 위한 방적기가 있다> 고 해서, 기계의 비유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관성은 차페크의 장점이 아니다.)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하는 것뿐이고, 로봇 (일이라는 뜻의 체코어 robata 에서 온 말) 도 마찬가지이다. 필요한 것은 <최소의 소비만을 필요로 하는 값싼 …… 노동자> 를 재생산하는 일이다. 로섬은 고전경제학자들의 임금의 철칙 Iron Law of Wages (5 장 151 쪽 참조 ――― 옮긴이) 의 요구에 답하는 것으로 보인다. 로봇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도민은 이렇게 로봇의 정의를 내린다. <기계적으로는 로봇이 인간보다 더 완전하다. 로봇은 매우 발전된 지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 또한 로봇 하나를 만드는 비용이 15 년 사이에 1 만 달러에서 150 달러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도민은 계속 말한다. <젊은 로섬은 (비록 아버지의 방법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신이 되려 했다.> 그는 슈퍼로봇을 만들었다. <그들은 거인이었다. 그는 거인의 키를 365 센티미터 크기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실패작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프랑케슈타인이 더 잘했던 것 같다.

로봇에는 크기뿐 아니라 수명에도 한계가 있어서, 수명이 12 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로봇은 죽는 것이 아니라 ――― 여기에는 죽음을 의식한다는 과정이 개입된다 ――― 단지 <완전히 소진될> 뿐이다. 로봇은 사람과 매우 닮았지만 ――― 헬레나는 로봇을 살아 있는 사람과 혼동한다 ――― 해부를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다. 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데카르트의 견해인 동물 기계를 연상 시킨다). 그러므로 로봇을 <죽이는> 것은 기계를 부수는 것일 뿐이고, 닭의 목을 비트는 것이 살인이 아닌 것처럼 로봇을 죽이는 것도 살인이 아니다. 로섬의 공장은 모든 것이 평화롭게 잘 돌아간다.

이 기계 낙원에 문제가 생기는데, 1 막에서 헬렌나가 로봇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형제> 로 대하고 <약간의 사랑> 을 주려 한다 ――― 『프랑케슈타인』의 그림자! 1921 년에 상연된 작품에서는 롯의 <해방> 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물론 로봇은 노동자이다.

2 막에서는 헬레나와 도민이 결혼을 했고, 10 년이 지나서 로봇의 수는 수백만이 되었다. 이 공장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은 골 Gall 박사로, 헬레나의 영향으로 로봇 생산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다. 위험한 작업에서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도록 고통을 느끼게 했고, 자극 감수성을 주었기 때문에 반항을 하기도 했으며, 몇 가지 인간적인 속성을 보탰다.

차페크의 논의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인간은 <불완전한> 기계로 묘사된다. 어떤 기술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어 기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의 어린 시절은 완전히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며, 시간 낭비이다.> 또한 인간은 섹스로 시간을 허비한다. 지능도 그리 좋지 않다. 로봇은 지능도 더 우수하고 힘도 사람보다 세며, 섹스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명백히 로봇이 인간보다 뛰어나다. 그러나 차페크는 이렇게 말한 바로 다음에, 로봇이 사랑이나 공포 따위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보다 덜 완전하다는 견해를 드러낸다.

이런 모순은 연극의 마지막 두 막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골 박사와 헬레나의 관여로 새로운 로봇이 탄생했고, 이들은 <성이 나서> 마침내 인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로봇 지도자는 헬레나에게 외친다. <당신들은 로봇만큼 튼튼하지 않다. 당신들도 로봇만큼 재주가 뛰어나지도 않다.> 헬레나가 로봇과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지배자가 될 것이다.> 그는 동료 로봇에게 선언한다. <우리는 너희에게 명령한다. 모든 인간을 죽여라. 한 남자도 남기지 마라. 한 여자도 남기지 마라.>

로봇이 섬을 점령하고 모든 인간은 죽음을 당했으나, <마지막 인간> 알퀴스트 Alquist 만 살아남았다. 사실 전에 골 박사가 말했듯이, 인간은 <넘쳐서 남아돈다>. 그러나 문제는, 로봇들도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로봇은 스스로 재생산할 수 없다 (헬레나는 인간애적인 결정으로 비밀인 로봇 제조 설명서를 없애 버렸다. 이렇게 하면 더 이상 로봇이 태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따라서 착취도 없을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로봇들은 알퀴스트에게 로섬의 비밀을 다시 찾아낼 것을 명령한다. 알퀴스트로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능력이 없다.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 인간이 살아남지 못한다면, 최소한 로봇이라도 살 게 해주소서. 최소한 인간의 그림자라도 남게 해주소서!>

이 때 기적이 일어난다. 골 박사의 최신 로봇이 등장한다. 하나는 남자이고 하나는 여자로, 이들은 사랑, 성적인 동경과 같은 이상한 감정을 경험한다. 또한 <그들은 웃기도하고, 멍청할 때도 있고, 자기를 보호할 수 있다.> 알퀴스트는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 둘 중 하나를 해부실로 데려가려고 했다. 두 로봇이 상대방을 구하기 위해 서로 앞다투어 자원하는 것을 보고, 알퀴스트는 새로운 종이 탄생한 것을 알았다. 그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거라 아담, 가거라 이브. 세상은 너희들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연극은 전체적으로 뒤죽박죽이다. 마지박 막과 에필로그에서 차페크는 명백히 로섬의 공장에서 일어난 반란을 빌려서 러시아의 노동자 혁명을 말하고 있다. 한편, 연극은 기계를 만드는 인간의 오만에 반대하는 일종의 러다이트  - 프랑켄슈타인 저항을 보여준다. 헬레나의 하녀 나나 Nana 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신을 모독하는 짓이야. 신이 만든 것을 바꾸려 하다니, 사악한 짓이지.> 한편으로 이 연구는 일종의 이상주의를 설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즉 기계는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고, 따라서 기계는 인간을 완전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도민은 긍지에 차서 말한다. <인간은 기계가 되지 않을 것이며, 생산을 위한 장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창조주가 될 것이다.>

차페크가 로봇과 볼세비키가 이끄는 세계의 노동자를 동일시한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도 19 세기에는 반항하는 대중과 동일시 되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 Elizabeth Gaskell 은 소설 『메리 바턴 Mary Barton』(1848) 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의 행동이 프랑켄슈타인 ――― 여러 가지 인간적인 성질을 가진 괴물 ――― 의 행동에 의해 전형적으로 표현된다.> 또한 보수적인 과학자 존 러복 John Lubbock 경은 1870 년경에 하원에서 행한 연설에서, 진보적인 개혁을 반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창조한 프랑케슈타인을 통제 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서도 괴물을 그 창조자의 이름으로 부르는 경향이 나타난다.) 사회의 올바른 질서에 관한 감정이 로봇이라는 주제에 투사된 것이다.

『R. U. R』의 사회적인 메시지와 심리학적인 메시지는 부드럽게 조화되기 어렵다. 초점이 불명확하기는 하지만, 『R. U. R』는 자동 인형에 대한 희망과 불안이라는 우리의 원시적인 감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차페크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반어적이며, 당황스럽기 까지 한 것으로, 그는 미래의 <새로운 인간> 이 로봇 ――― 사람처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로봇! ――― 이라고 단정한다. 따라서 차페크는 로봇이 던지는 희망과 불안이라는 질문에 아무 응답도 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연극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마찬가지로 로봇을 먼저 파괴하거나 최소한 무력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들이 인간의 자리를 빼앗으리라는 생각이다.

『R. U. R』 는 산업에 로봇이 널리 사용되기 전에 씌어진 것이고, 저자는 로봇을 움직이게 하는 과학이나 기술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연극은 고전의 반열에 들어섰다. 아시모프가 쓴 『나, 로봇』은 로봇이 실현되기 시작한 시기에 학식 있는 작자가 쓴 상당히 사려 깊은 단편 연작이지만, 과학 소설 팬들에게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로봇에 대한 현대의 감정에 관심 있는 사람 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류 심리학자 수잔 캘빈 Susan Calvin 박사 (이 이름은 분명히 청교도적인 노동 윤리를 상징한다) 로, 한두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그녀는 소설에 등장하는 드문 여성 중 하나이고, 등장하는 다른 인관과 로봇은 모두 남성이다. 여기에도 엄청난 성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인 「로비 Robbie」는 낯익은 문제를 제기한다. 로비는 어린 글로리아 Gloria 를 돌보는, 말을 못 하는 <보모> 로봇이다. 아이는 <그> 를 사랑하고, 그를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 으로 대한다. 글로리아의 어머니는 로비를 질투하고, 이 기계를 두려워해서 ――― (로롯은 영혼이 없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 <조금만 고장나도 끔찍한 사고가 일어날 것> 이라고 생각한다. 글로리아의 어머니는 로봇 대신에 콜리 개 (스코틀랜드산으로서 양을 지키는 개 ――― 옮긴이) 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글로리아를 설득할 수 없다. 아버지는 미국 로봇 및 기계 인간 회사에 글로리아를 견학시켜서 로비는 기계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로비가 어셈블리 라인에 얹혀 있는 것을 보고, 글로리아는 로비를 껴안으려다 거대한 벌채용 트랙터 앞으로 뛰어든다.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재빨리 대처할 수 없었지만 ――― <관리자들은 모두 사람으로, 움직일 시간이 없었다> ――― 로비는 <즉시 정확하게> 행동하여 그의 어린 놀이 상대를 구한다. 모든 것이 용서되고, 글로리아는 그녀의 기계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 고안된 이 이야기는 매우 효과적이다. 이 이야기는 가정의 일상을 통해 우리 자신의 공포를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이 일은 1998 년에 일어났고, 2002 년에는 말하는 로봇이 발명되었으며, 2003 - 2007 년 사이에 전세계의 거의 모든 정부는 수많은 글로리아 엄마들의 압력에 떠밀려서 과학 탐사 이외의 모든 로봇 사용을 금지한다.

또한 좀 더 확고한 대책으로, 모든 로봇은 <로봇 3 원칙을 따라야 한다. 이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로봇은 인간에게 해로운 행동을 하거나,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2) 로봇은 첫 번째 원칙에 위배되는 경우가 아니면 인간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3) 로봇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위배되지 않은 범위에서 자신의 신체를 보호해야 한다.>

나머지 이야기는 이 원칙의 변종들, 즉 그 응용과 가능한 위반을 다루고 있다. 아시모프는 재미있는 논리학자로, 논리를 멋지게 변용한다. 「이성 Reason」에서는, 큐티 Cutie 라는 로봇이 이성적인 추론으로 데카르트의 결론을 찾아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오만에 찬 이 로봇은 <창조주> 종교로의 개종을 선언한다. 그는 자기를 담당하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창조주는 우선 가장 만들기 쉬운 낮은 등급으로 인간을 창조한 다음에, 한 단계 높은 등급인 로봇으로 바꿨다가, 마침내 마지막 인간을 대신하기 위해 나를 창조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창조주를 모실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항적인 망상은 해롭지 않은 것으로, 큐티는 그 때까지도 계기들을 잘 다루고 그래프를 바르게 그렸다. 하지만 큐티는 그렇게 하는 것이 창조주에 복종하고 로봇 제 2 원칙에 따라 인간을 해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를 옹호하는 사람 중 하나는 이렇게 말한다. <차이는 그가 믿는 것뿐이다.> 처음의 위험은 쉽게 누그러졌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에서 로봇이 엄격한 규정을 어김으로써 위험은 다시 불거진다. 이것을 알아차린 캘빈 박사는 영특한 논리로 로봇을 물리친다. 그러나 로봇의 어두운 그림자는 점점 더 위협적으로 되어간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로봇이, 인간이 겪는 것과 같은 모순되는 요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신경 쇠약에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시모프는 인간과 기계를 분명히 구분하려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계는 <바보 하인으로, 그가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할 뿐이다>.

「증거 Evidence」에서는 로봇의 <차이> 가 가장 날카롭게 제기된다. 선거에 출마한 변호사 스티븐 비얼리 Stephen Byerley 는 인간인가, 인간을 꼭 닮은 로봇인가? 그의 반대자는 그가 먹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고 고발한다. 비얼리는 혼자 식사하는 습관이 일종의 노이로제일 뿐이고, 자기는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다가 대중 토론장에서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나서 비얼리에게 자기를 때리라고 말한다. 로봇은 제 1 원칙 때문에 인간을 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얼리는 그를 때렸고, 자기가 인간임을 증명했다. 물론 그는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캘빈 박사만 알고 있었지만) 비얼리는 로봇이었다. 비얼리는 장애자가 자기를 대신하기 위해 만든 로봇으로, 이 로봇은 다른 로봇을 때렸을 뿐이고, 얻어맞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비얼리가 미리 청중 속에 심어두었다가 질문을 하도록 시킨 휴머노이드 로봇 humanoid (인간을 꼭 닮은 로봇) 이었다. 캘빈 박사가 동료에게 휴머노이드 로봇의 가능성에 대해 묻자, 그는 주저하다가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의 난자와 호르몬 조절을 사용하면, 다공질 실리콘 플라스틱 뼈대 위에 인간의 살과 피부를 입힐 수 있는데, 이것은 육안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문, 머리칼, 살갗이 완전히 인간의 것과 똑같다. 여기에 양전자 두뇌와 그밖에 필요한 장치를 넣으면 휴머노이드 로봇이 되는 것이다.> (2000 년 중국의 자동 인형을 연상 시킨다!)

그러나 로봇에 관한 글을 쓴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아시모프도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인간은 여전히 기계가 갖지 못하는 창조성을 가진다고 그는 말한다. <기계는 어쨌든 도구일 뿐이고, 계산과 해석 따위의 인간의 짐을 덜어줌으로써 인간의 발전을 도울 수 있다. 인간의 뇌가 해야 할 일은 항상 그대로 남는데, 그것은 분석해야 할 자료를 찾는 일과 시험해야 할 새로운 개념을 고안하는 일이다.> 그런데 『나, 로봇』의 마지막 페이지에 묘사되는 기계는 조심성이 많아서, 인간보다 뛰어나지만 인간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기 위해 우월함을 숨길 만큼 영특하다 (앞에서 우월성을 공언하는 큐티를 보았지만, 이것은 그 로봇이 미쳤다는 증거이다). 책은 다음과 같은 아시모프의 메시지로 끝난다.

이것이 뛰어난 재능으로 로봇에 대한 논리적인 면과 비논리적인 면을 탐구한 아시모프 단편들의 맥빠진 결론이다. 모든 기계를 파괴 하자는 <원리주의자> 에 대한 아시모프의 논의와, 21 세기 중반까지도 서로 무자비하게 경쟁하는 개인 기업들이 (이 책에서 로봇의 값은 3 만 달러이다) 로봇을 소유한다는 그의 가정 등에 대해서는 여기에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안데르센의 나이팅게일로부터 차페크의 로섬의 로봇까지 우리가 추구해 온 주제에 대해 아시모프는 주로 낙관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이 장에서 나는 자동 인형을 다룬 수많은 문헌 중 일부를 다루었을 뿐이다. 이 문제는 우리가 읽는 거의 모든 글에서 나타난다. 이렇게 도처에 이 문제가 다루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이상하고 어려운 논문 「괴기 The Uncanny」에서 약간의 암시를 얻을 수 있다. 프로이트는 에른스트 호프만 Ernst Hoffmann 의 『샌드맨 The Sandman』(아이들의 눈에 모래를 뿌려서 잠이 오게 한다는 전설속의 요정 ――― 옮긴이. 오펜 바흐 Offenbach 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Tales of Hoffman」의 뒷부분) 을 분석하면서, 겉보기에 살아 있는 것 ――― 자동 인형 ――― 이 실제로 살아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의심스러울 때 괴기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거세 공포를 통한 어떤 이야기의 비비꼬인 분석이나, 애니미즘적 정신 활동을 통한 괴기의 일반적인 분석 따위의 프로이트 이론을 우리가 따라갈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동 인형과 모든 종류의 기계가 인간에게 알 수 없는 두려워하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상징하는 것일까? 우리는 기계에게 우리의 비밀스럽고 금지된 욕망을 투사하는 것일까? 피그말리온 Pygmalion 과 같은 조상 (彫傷) 이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이것은 피와 살로 된 것이지만) 을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로봇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인 맥락과 함께, 이 장에서 든 예에서 일반적인 점들을 살펴보자. 자동 인형, 안드로이드, 로봇 등 다양하게 불리는 것들은 신이 만들었거나 (델파이의 신탁), 사람이 마법으로 만들었거나 (비의적 전통의 골렘), 사람이 과학을 사용하여 (태엽 장치인 나이팅게일,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차페크와 아시모프의 로봇) 만든 것이다 (연대 기적인 발전 순서로 생각해도 좋지만, 고대 중국의 과학자들이 태엽 장치를 사용했고, 트리스메기스투스의 후예들이 오래 전부터 마법을 사용한 것을 보면, 연대기적 정리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힘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창조된 자동 인형은 생물학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이고, 피와 살로 되어 있거나 태엽 장치이고, 전기 충격을 주거나 태엽을 감아서 움직이게 한다.

이런 방법으로 창조되었건, 어떤 물질로 만들어진, 이것은 항상 같은 질문 (이것들은 인간과 어떻게 다른가? 더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을 강요한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분석한 <괴기> 의 느낌이다. 또한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 이중적인 반응을 보인다. 우리가 열망하는 완전무결의 감정 ――― 인간 속의 천사 ――― 과 우리가 지닌 타락과 파괴의 감정 ――― 인간 속의 원숭이 ――― 이 그것이다.

여기에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산업 현장의 로봇으로, 여기에도 같은 감정이 끼여든다. 그래서 일본의 노동자가 운반 로봇의 통로에 잘못 들어가서 사고가 나면 (그에게는 생명을 구해줄 <로비> 가 없었다!), 신문들은 이 사고를 <로봇의 반란> 이라고 쓴다. 익숙해지면 지루해지듯이, 이런 감정도 변할까?

사실 로봇 - 자동 인형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새로운 버전인 컴퓨터에 대해 새롭게 나타나다. 이제 로봇은 컴퓨터 (두뇌) 의 통제로 <살아 움직이는> 도구 (몸) 가 되었다. 이제 자동 인형은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형태로, 이 장에서 제기된 문제를 뒤에서 더 깊이 다루겠다.